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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리문명 아카데미 원문보기 글쓴이: 유토피아
고구려국 본기
高句麗國本紀
고구려의 선조는 해모수로부터 나오나니 해모수의 어머니의 고향 역시 그 곳이다.《조대기》에선 이렇게 말한다.「해모수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웅심산에서 일찍이 살다가 부여의 옛 서울에서 군대를 일으켜 무리에게 추대되어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니 이를 부여의 시조라고 한다. 까마귀의 깃털로 만든 관을 쓰고 용광의 검을 차고 오룡의 수레를 탔다. 따르는 시종이 오백 여명이 있었는데 아침엔 정사를 듣고 저녁엔 하늘로 오르니 호령하지 않아도 절로 관경(管境)이 교화되었다. 산에는 도적이 없고 벼와 곡식이 들에 그득했다, 나라에 큰 일 없고 백성 또한 일없었다. 단군 해모수가 처음 하늘에서 내려오심은 임술(B.C.239) 4월 초 여드레로서 곧 진왕정(秦王政)1)
고리군(藁離郡)의 왕 고진(高辰)은 해모수(解慕漱)의 둘째 아들이며 옥저후 불리지(弗離支)2)
불리지가 죽으니 유화는 아들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熊心山)으로 돌아왔으니 지금의 서란이다. 주몽이 성장하여 사방을 주유하다가 가섭원(迦葉原)을 택하여 거기서 살다가 관가에 뽑혀 말지기로 임명되었다. 얼마 안되어 관가의 미움을 사서 오이와 마리외 협보와 함께 도망하여 졸본(卒本)으로 왔다. 때마침 부여 왕은 후사가 없었다. 주몽이 마침내 사위가 되어서 대통을 이으니 이를 고구려의 시조라 한다.
32년 갑오년(B.C.27) 10월 북옥저를 정벌하여 이를 멸망시켰다. 을미년(B.C.26)에 졸본으로부터 서울을 눌현으로 옮겼다. 눌현은 지금의 상춘 주가 성자이다.
유리명제(琉璃明帝, 2대, B.C.19~A.D.17)의 19년 또 눌현으로부터 국내성으로 옮겼으니 또한 황성이라고도 한다. 성안에 환도산이 있는데 산 위에 성을 쌓고 일이 있으면 여기에 머물렀다.
대무신(大武神) 열제(3대, A.D.18~43)의 20년, 제는 낙랑국을 습격하여 멸망시켰으니, 동압록 이남이 우리에게 속했는데 오직 해성의 남쪽, 바다근처의 여러 성들만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다.
산상제(山上帝 : 10대, A.D.197~226)의 원년 동생 계수를 파견하여 공손탁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현도와 낙랑을 정벌하여 이를 멸망시켰다.
<대변경>에서 말한다. 고주몽 성제는 조서를 내려 가로되,
「천신께서 만인을 만드실 때에 하나의 상으로서 균등하게 삼진을 주시었으니 이에 사람은 저 하늘을 대신하여 능히 세상에 서게 되었다」라고 하셨다. 하물며 우리 나라의 선조는 북부여에서 나와 천제의 아들이 되었다. 밝은 이의 마음이 비어 고요함은 계율에 뿌리를 두는 것이니 오래도록 사특한 기운을 눌러 그 마음이 안락하고 태평하다. 이에 뭇 사람과 함께 일하면 항상 잘되는 것이라. 병력을 쓰는 까닭은 침범을 느슨하게 하려함이요. 형을 행함은 죄악을 없앨 것을 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허가 지극하면 정이 생기며, 정이 지극하면 지혜가 가득하며, 지혜가 지극하면 덕이 융성하다. 때문에 마음을 비워 가르침을 듣고 고요한 가운데 헤아리며 지혜로써 사물을 이치대로 하고 덕으로써 사람을 다스린다. 이것이 곧 신시의 개물 교화이다. 천신을 위해서는 성품을 열고 중생을 위해서는 법을 세우고, 선왕을 위해서는 공을 다하고, 천하만세를 위해서는 지와 생을 나란히 닦는 교화를 이룸이라.」
을파소(乙巴素)3)
「신시(神市)이화(理化)의 세상은 백성들의 지혜가 열림에 따라서 날로 지극한 다스림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만세에 걸쳐서 바꿀 수 없는 표준이 되는 이유가 되다. 때문에 참전(參佺)의 계(戒)가 있으니, 신의 계시에 따라 무리를 교화하고, 한맹에 율이 있으니 하늘을 대신하여 공을 행한다. 모두가 스스로 마음을 써서 힘을 모아 뒤에 공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라고 했다.
을지문덕은 말한다.
「도(道)는 이로써 천신(天神)을 섬기고 덕(德)은 이로써 백성과 나라를 덮는다. 나는 이런 말이 천하에 있음을 안다. 삼신일체(三神一體)의 기(氣)를 받아 이를 나누어서 성(性)․명(命)․정(精)4)5)
《조대기》에 가로되,
「동천제도 역시 단군이라 한다. 한맹의 절기가 될 때마다 삼신을 평양에서 제사하여 맞이한다. 지금의 기림굴은 즉 그 제사지내던 곳이다」라고 했다. 크게 맞이하는 의식은 처음에는 수혈에서 행해졌다. 구제궁에 조천석이 있었으니 길을 가는 사람은 누구나 볼 수 있었다. 또 삼륜구덕의 노래가 있어 이를 권장하였다. 조의선인은 모두 선택되었으니 국인이 그 선출됨을 긍지로 여기는 바였다. 그렇지 않다면 영광으로써 왕의 사자와 동등하게 여겼겠는가?
광개토경호태왕(19대 광개토(廣開土), A.D.392~412)은 융공성덕하여 어느 왕보다 탁월했다. 사해안에서는 모두 열제(광개토대왕)라고 칭한다. 나이 18세에 광명전에서 등극하고 하늘의 음악을 예로써 연주했다. 군지에 나아갈 때마다 병사들로 하여금 어아의 노래6)
일단 스스로 바다를 건너서는 이르는 곳마다 왜국 사람들을 격파하였다. 왜인은 백제의 보좌였다. 백제가 먼저 왜와 밀통하여 왜로 하여금 신라의 경계를 계속해서 침범하게 하였다.
제는 몸소 수군을 이끌고 웅진 임천, 와산, 괴구, 복사매, 우슬산, 진을례, 노사지 등의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 아침 제천하고 돌아오셨다. 때에 곧 백제 신라 가락의 여러 나라가 모두 조공을 끊임없이 바쳤고 거란 평량도 모두 평정 굴복시켰다. 임나(任那)와 이왜의 무리는 모두 신하로써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해동의 번성함은 이때가 그 극성기이다.
이보다 앞서 협보는 남한으로 도망쳐 마한(馬韓)의 산중에 살았다. 그를 따라온 자도 수백 가였는데 몇 해 지나지 않아 큰 흉년에 시달려 유리하고 방황했다. 협보는 장혁을 알고 무리를 유혹하여 양곡을 도둑질하여 배에 싣고 패수(浿水)를 따라 내려와 해포로부터 몰래 항해하여 곧 바로 구야(九耶) 한국에 이르니 곧 가라(加羅)7)8)
3국은 바다에 있고 7국은 뭍에 있었다. 처음 변진 구야국의 사람들이 한때 모여 산적이 있었는데, 이를 구야 한국이라 한다. 다파라를 다라 한국이라고도 한다. 홀본(忽本)9)
왜는 회계군의 동쪽 동야현의 동쪽에 있으며 배로 9,000리를 건너 나패에 이르른다. 또다시 1,000리를 건너서 네시마에 이르른다. 네시마는 도시마라고도 한다. 때에 구노인은 여왕과 서로 싸워 길을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 구야 한국으로 가고자 하는 자는 쯔시마, 가라산, 지 가도로부터 비로소 말로호자의 경계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동쪽 경계는 곧 구야 한국의 땅이다. 회계산은 본래 신시의 중경이 간직된 곳이다.
사공(司空) 우(禹)가 재계하기 사흘 만에야 겨우 치수의 비결을 얻어 공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에 우는 돌을 벌채하여 부루 태자의 공을 산의 높은 곳에 새겼다고 한다. 즉 오월은 본래 구려의 옛 읍이며 산월 과 좌월은 모두 그 후예가 옮겨 산 땅이다. 항상 왜와 왕래하며 무역하여 이익을 얻는 자가 매우 많았다.
진(秦) 때 서불(徐巿)은 동야현의 해상으로부터 곧바로 나패에 이르러 다네시마를 거쳐 세도나이까이를 따라 처음으로 기이(紀伊)에 이르렀다. 이세에 옛날 서복(徐福)의 무덤이 있었다. 어떤 이는 말한다. '단주는 서복이 있던 곳'이라고도.
장수홍제호태열제(20대 장수(長壽), A.D.413~491)는 건흥(建興)이라고 연호를 바꿨다. 인의로써 나라를 다스려서 강역을 널리 넓혔다. 이에 웅진강 이북이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어 북연(北燕) 시위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족속의 서열에 들어오게 되었다. 또 신라 매금 백제 어하라와 남쪽 평양에서 만나 납공과 수비 군사의 수를 정했다.
문자호태열제(21대 문자명(文咨明), A.D.492~518)는 명치라고 개원하였다. 11년 제, 노, 오, 월의 땅은 고구려에 속했다. 이에 이르러 나라의 강토는 더욱 커졌다.
'평강상호태열제(25대 평원(平原, A.D.559~589)는 담력이 있고 말을 타고 활 쏘는 것을 잘 했으니, 곧 주몽의 풍이 있었다. 대덕으로 개원하더니 잘 다스려 밝게 교화했다. 대덕 18년 병신 제는 대장 온달을 보내 갈석산, 배찰산을 토벌하고 추격하여 유림관에 이르러 북주를 크게 격파하니, 유림진 동쪽은 모두 평정되었다. 유림은 지금 산서성의 경계이다.
영양무원호태열제(26대 영양, A.D.590~617)때 천하는 크게 다스려져 나라는 부하고 백성은 성했다. 수나라 왕 양광은 본래 선비의 유종족인 바, 남북의 땅을 통합하여 그 여세를 모아 우리 고구려를 모욕하고 업신여기더니, 상국을 업신여기고 자주 대병을 일으켰으나 고구려는 이미 대비가 있어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홍무 25년 양광은 또다시 동쪽으로 침략해와서 먼저 장병을 보내 비사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케 했다. 관병은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니 바야흐로 평양을 습격하려 했다. 제께서는 이를 듣고 완병술을 쓰려 했다. 계략을 꾸며 곡사정을 보냈다. 때마침 조의(皂衣) 가운데 일인이라는 자가 있어 자원하여 따라가기를 청한 끝에 함께 표를 양광에게 바쳤다. 양공이 배에서 표를 손에 들고 읽는데 절반도 채 읽기 전에 갑자기 소매 속에서 작은 활을 꺼내 쏘아 그의 뇌를 맞혔다. 양광은 놀라 자빠지고 실신했다. 우상 양명은 서둘러 양광을 업게 하여 작은 배로 갈아타고 후퇴하여 회원진에 명을 내려 병력을 철수시키도록 하였다. 양광은 좌우에 말하여 가로되「내가 천하의 주인이 되어 몸소 작은 나라를 쳐도 승리하지 못하니 이는 만세의 웃음거리가 아니겼는가?」라고 했다. 양명 등은 얼굴 색이 검게 변하여 대답 못하고 말았다. 후인들은 이를 노래로 불러 가로되,
오호 어리석은 한나라 어린애들아
요동은 향하지 마라. 개죽음이 부른다.
문무의 우리 선조 한웅이라 불렀느니
자손들은 이어져서 영웅호걸 많단다.
주몽 태조 광개토님 위세는
세상에 울려 더할 나위 없었고
유유 일인 양만춘은 나라 위해
못 바꿔 스스로 사라졌다.
세상문명은 우리가 가장 오래니
오랑캐 왜구 다 물리치고 평화를 지켰다.
유철 양광 이세민도 보기만 해도
무너져서 망아지처럼 도망갔다.
영락기공비는 천 척 만가지기가
한 색으로 태백은 높단다.
라고 하였다.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석다산 사람이다. 일찍이 입산하여 수도하고 꿈에 천신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3월 16일 마리산으로 달려가 공물하며 경배하고 돌아오고, 10월 3일이면 백두산에 올라가 제천했다. 제천은 곧 신시의 옛 풍속이다.
홍무 23년 수군 130여만이 바다와 산으로 나란히 공격해왔다. 을지문덕은 능히 기이한 계책으로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서 이를 초적하고 추격하여 살수에 이르러 마침내 이를 대파하였다. 수나라 군사는 수륙 양군이 무너져 살아서 요동성(遼東城)10)
여기에서 건안, 건창, 백암, 창려의 제진은 안시(安市)에 속하고 창평, 탁성, 신창, 용도의 제진은 여기에 속하고 고노, 평곡, 조양, 누성, 사구을은 상곡에 속하고 화룡, 분주, 환주, 풍성, 압록은 임황에 속했다. 무두 옘처럿 관리를 두고 다스렸다. 이에 이르러 강병백만으로 강토는 더욱 더 커졌다.
양광은 임신의 오랑캐라고 한다. 출사가 성대하기로는 예전에는 그 예가 없었다. 그런데 조의 20만인을 가지고 모조리 그 군을 멸망시켰는데 이는 을지문덕 장군 한 사람의 힘이 아니겠는가? 을지공과 같은 분은 곧 만고에 세상의 흐름을 만드는 한 성걸이다. 문충공 조준이 명나라 사신과 더불어 축배하고 함께 백상루에 올라 이렇게 시를 읊었다.
살수는 탕탕하게 흘러 푸르고 허하고나,
수나라 병사 백산은 물고기 밥이 되었지.
이제 가던 길 멈춰 어부에게 그 때 얘기 듣나니
정부이 한마디 웃음 남기기엔 오히려 모자라네.
옛 역사에서 말하기를,
「영양수원호태열제(26대 영양, A.D.590~617)의 홍무 9년 제는 서부대인 연태조를 보내 등주를 토벌하고 총관위충을 잡아 죽이게 하다」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백제(百濟)는 병력으로써 제(齊)나라, 노나라, 오(吳)나라, 월(越)나라 등지를 평정한 후 관서를 설치하여 호적을 정리하고, 왕작을 분봉하여 험난한 요새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정벌한 곳의 세금을 고르게 부과하여 모든 것을 내지(內地)에 준하게 하였다.
명치연간에 백제의 군정이 쇠퇴하고 진흥치 못하매 권익의 집행이 모두 성조로 돌아왔다. 성읍을 구획짓고 문무의 관리를 두었는데 수나라가 또 군대를 일으켜 말썽이 났다. 남북이 소요하여 사방이 온통 시끄러워지니 해독은 백성들에게 시치게 된지라. 제는 몹시 화를 내어 삼가 하늘의 뜻을 행하여 이들을 토벌하니, 사해에 그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수나라 왕 양견은 은밀하게 모반의 뜻을 품고 감히 복수의 군대를 내어 몰래 위충 총관을 파견하여 공명을 위해 관가를 부수고 읍락에 불지르고 노략질하게 하였다, 이에 제는 곧장 장병을 보내 적의 괴수를 사로잡아 죽이니, 산동 지방은 이에 다시 평정되고 해역은 조용해졌다.
이 해에 양견은 또 양량 왕세적 등 30만을 파견하여 싸우도록 했으나 겨우 정주를 출발하여 아직 요택에도 이르지 못하였을 때 물난리를 만나서 식량은 떨어져 배고픔은 심하고 전염병마저 크게 돌았다. 주라고는 병력을 모아 등주에 웅거하여 전함 수백 척을 징집시켜 동래로부터 배를 띄워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는데, 고구려가 이를 알아차리고는 후군으로써 이를 방어하도록 내보냈는데, 갑자기 큰바람이 일어나서 전군이 물에 떠다니는 판에 백제가 수나라에 청하여 군의 향도가 되려 하다가 고구려의 타이름을 받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좌장군 고성은 은밀하게 수나라와 친할 마음이 있어 은밀하게 막리지의 북벌계획을 막았다. 이에 여러 차례 청해서 출사하여 공격함으로써 공을 세웠다. 그러나 홀로 막리지는 대중의 의견을 물리치고 남수북벌의 정책에 집착하여 여러 차례 이해관계를 들어 말하므로 이 말에 따르게 되었다. 고성이 즉위하게 되자 전황제의 모든 정책은 폐기되었다.
사신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노자(老子)의 상을 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도덕경을 청강시켰다. 또 무리 수십만을 동원하여 장성을 쌓게 하였으니 부여현으로부터 남해부에 이르는 1000여 리이다. 때에 서부대인 연개소문은 청하여 도교(道敎)를 강(講)하는 것과 장성 쌓는 일을 중지시키고자 했으나 제는 기꺼워하지 않고 소문의 병사를 빼앗고는 장성을 쌓는 일의 감독을 시키더니, 은밀하게 뭇 대인과 더불어 의논하여 연개소문을 주살코자 하였다. 소문은 앞질러 이 말을 들을 수 있어 장탄식하며 말하기를,
'어찌 이 몸이 죽고 나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랴? 일은 급하다. 때를 잃지 말지라.'하고 모든 부장을 모아 마치 열병하는 것처럼 하고는 성대하게 술상을 벌려 뭇 대신을 초청하여 함께 이를 시찰하자고 하였다. 모두가 참석하자 소문이 소리를 크게 내며 격려하기를,
'대문에 호랑이 여우가 다가오는데 백성 구할 생각은 않고 되려 나를 죽이려 한다. 빨리 이를 제거하라'하니 제는 변고를 듣고 평복으로 몰래 도망쳐 송양으로 가서 조서를 내려 나라의 대신을 모으려 했으나 한 사람도 오는 사람 없고 보니 스스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저절로 숨이 떨어져 붕어하였다.
<조대기>에 가로대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이라고도 한다 성은 연씨. 그의 선조는 봉성 사람으로 아버지는 태조라 하고, 할아버지는 자유(子遊)라 하고, 증조부는 광(廣)이라 했으니, 나란히 막리지가 되었다. 홍무 14년 5월 10일 태어났다.
나이 9살에 조의선인에 뽑혔는데 의표웅위하고 의기호일하여 졸병들과 함께 장작개비를 나란히 베고 잠자며,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시며, 무리 속에서 스스로의 힘을 다하였으니, 혼란한 속에서도 작은 것을 다 구별해내고, 상을 베풀 때는 반드시 나누어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하며, 마음을 미루어 뱃속에 참아두는 아량이 있고, 땅을 위로 삼고, 하늘을 경으로 삼는 재량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감동하여 복종해 한 사람도 딴 마음을 갖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법을 쓰는데 있어서는 엄명으로 귀천이 없이 똑같았으니 만약에 법을 어기는 자 있으면 하나같이 용서함이 없었다.
큰 난국을 만난다 해도 조금도 마음에 동요가 없었으니 당나라 사신과 말을 나눔에 있어서도 역시 뜻을 굽히는 일이 없었고, 항상 자기 겨레를 해치는 자를 소인이라 하고, 능히 당나라 사람에게 적대하는 자를 영웅이라 하였다.
기쁘고 좋을 땐 낮고 천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으나 노하며 권세 있는 자나 귀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가 겁냈다. 참말로 일세의 쾌걸인저!'라고 했다. 스스로 '물 가운데 살아서 능히 잠행할 수 있고 온종일 더욱 건장하게 피로할 줄 모른다'고 말하였다. 무리들 모두 놀라 땅에 엎드려 절하며 가로대 '창해의 용신이 다시 몸을 나타내심이로다'라고 했다.
소문은 마침내 고성제(27대 영류(營留), A.D.618~641)를 내어쫓고 무리와 더불어 함께 고장을 맞아들여 이를 보장제(28대 보장(寶藏), A.D642~668)로 삼다. 소문은 드디어 뜻을 얻어 만법을 행하니, 대중을 위한 길은 정기 자유 개물 평등으로 하고, 삼홀을 전으로 하고, 조의에 율이 있게 하고, 힘을 국방에 쏟아 당나라에 대비함이 매우 완전하였다. 먼저 백제의 상좌평과 함께 의를 세웠다. 또 신라의 사신 김춘추에게 청하여 자기의 집에 머무르도록 하며 말하기를,
'당나라 사람들은 패역하기를 짐승에 가깝습니다. 청컨대 우리나 그대들은 반드시 사사로운 원수를 잊고 지금부터 삼국은 백성들의 뜻을 모으고 힘을 합쳐 곧바로 당나라 서울 장안을 쳐들어가 도륙한다면 당나라 괴수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전승의 뒤에 옛 영토에 따라서 연정(聯政)을 실시하고 인의로써 함께 다스려 약속하여 서로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영구준수의 계획으로 함이 어떻겠소?'라고 하며 이를 재삼 권하였으나, 춘추는 종래 듣지 않았으니 애처롭고 가석할 일이었다.
개화 4년 당나라 이세민이 군신에게 말하기를,
'요동은 본래 제하의 땅이다. 수나라가 네 번 출사하였어도 얻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이제 출병하여 제하를 위해 자제의 원수를 갚고자 한다.'고 하다. 세민은 친히 활과 화살을 차고 이세적 정명진 동 수십만 명을 이끌고 요택에 이르다 진흙길 200여 리 사람과 말이 다닐 수 없었다. 도위 마문거가 말에 채찍질하며 달려가 공격했지만 이미 싸움을 벌였던 행군총관 장군차는 대패했다. 이도종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였고 세민은 몸소 수백 기를 이끌고 세적과 합쳐 백암성의 서남쪽을 공격했다. 성주인 손대음은 속여서 항복을 청하게 하고 실은 틈을 엿보아 반격하고자 하였다. 세민은 안시성에 이르러 먼저 당산으로부터 병사들을 진격시켜 이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북부의 욕살 고연수와 남부의 욕살 고혜진은 관병 및 말갈병 15만 이끌고 똑바로 전진하여 안시에 연결되는 진지를 쌓고, 높은 산의 험악한 곳에 의거하여 진지를 쌓고 성의 곡식을 식량으로 삼고, 병력을 종휭무진으로 풀어놓아 당나라 군마를 약탈했다. 당나라군을 감히 접근하지도 못하고 돌아가려고 해도 진흙길이 가로막았으니 가만히 앉아서 패하는 길밖에 없었다. 고연수는 군대를 이끌고 똑바로 나아가서 안시성에서 약 40리 떨어진 곳에 나아가더니, 사람을 보내 대로 고정의에게 물었으니 그는 나이가 많아서 모든 일에 익숙했다. 정의노인은 대답하기를,
'이세민은 안으로 군웅들을 제거하고 집을 바꿔 나라를 이루었으니 역시 범상하진 않다. 지금 모든 당나라의 병력이 떨치어 나왔으니 업신여길 수가 없다. 우리들로서 바람직한 것은 군대를 움직이지 말고 싸우지 않으며,여러날을 두고 지구전을 펴며, 날랜 병사들을 보내 그 식량 보급의 길을 끊는 것보다 좋은 계책은 없다. 식량이 이미 끊겨 싸우고자 하나 싸워주지도 않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결국 이기기 마련이라'고 하였다.
고연수는 그 계략에 좇아 적이 오면 막고, 적이 도망가면 곧 추격을 멈추고, 또 날랜 병사들을 파견하여 식량의 길을 끊고, 불태우거나 빼앗게 하자 이세민은 백가지 계략으로 유혹하여 뇌물도 썼으나 겉으로는 따르는 체하고는 속으로는 거슬렸다. 수시로 습격을 감행하여 마구 무너뜨리니 적군의 사상자는 쌓여만 갔다. 고연수 등은 말갈과 병력을 합쳐 진지를 펴고 지구전을 벌이다가 어느 날 저녁 표변하여 작전을 개시하여 급히 습격하여 번개처럼 치니, 이세민은 거의 포위될 뻔하게 되자 비로소 두려운 빛을 보였다. 이세민은 또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재물과 보화를 보내면서 연수에게 말하기를,
'나는 귀국의 힘있는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였으므로 그 죄를 물으려온 것이다. 그대의 나라에 들어와서 싸움을 하게 됨에 말 먹이와 식량을 공급할 수가 없어서 얼마간 노략질을 몇 곳에서 했었을 뿐이니, 그대의 나라가 예를 갖추어 수교를 기다리면 반드시 회복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연수는 말했다.
'좋다, 그대의 군사가 30리를 후퇴하면 곧 나는 우리 황제를 알현코자한다. 그렇지만 막리지는 국가의 기둥이다. 군법을 스스로 갖고 있으니 많은 말도 필요가 없다. 그대의 임금 세민은 아비를 폐하고 형을 죽이고 동생의 아내를 음란하게도 받아들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죄를 물을 만하다. 이 뜻을 이세민에게 전하여라.'
이에 사방으로 감시관을 보내 더욱 더 방비를 굳혔다. 산에 의지하여 전지를 굳히고 허를 틈타 기습하니, 세민은 백가지 계략을 다 써도 어쩔수가 없어 요동 출병의 불리를 통한히 여길 뿐 후회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유공권의 소설에서,
'육군은 고구려의 조롱거리가 되고 거의 떨쳐 일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척후병이 영공의 군기는 흑색 깃발(고구려의 군기 색깔)로 에워싸였다고 보고 하니 세민은 크게 놀랐다. 종내 저 혼자 탈출했다해도 위험을 이와 같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신구당서>와 사마공의 <통감>이 이를 적지 않음은 어찌 나라를 위해 치욕스러운 일을 숨기려 함에서가 아닐까보냐? 이세적은 세민에게 말한다.
'건안은 남쪽에 있고 안시는 북에 있습니다. 우리 군대의 양곡은 벌써 요동으로 수송할 길을 잃었습니다. 지금 안시성을 넘어 건안을 습격하는데 만일 고구려가 수송로를 끊으면 군세는 궁하게 될 것입니다. 먼저 안시를 공격함만 같지 않을 안시가 함락되면 곧 북 치고 행진하여 건안을 취할 뿐입니다.'
안시성의 사람들은 세민의 깃발이 덮어오는 것을 멀리 바라보며 성 위에 올라 외치고 떠들며 침을 뱉으며 세민을 조롱했다. 그의 죄목을 열거하면서 무리에게 떠들어댔다. 세민은 몹시 화를 내면서 성을 함락시키는 날 성중의 남녀를 가릴 것 없이 모조리 흙구덩이에 생매장하겠다고 했다. 안시성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더욱 더 굳게 성을 지키니 성을 공격해도 함락되지 않았다.
때에 장량은 사비성에 있었는데 그를 불러오게 하였으나 채 이르지 못하였고. 이리저리 망설이는 사이 기회를 잃고 말았다. 이도종도 역시 험악한 곳에 떨어져 떨치지 못하니 당군의 여러 장수들은 의논한 끝에 갈라졌다.
세적만이 홀로 생각하기를 '천자의 친정은 제장의 정벌과는 달라 요행을 바라고 행동한다는 건 안될 일이다. 지금 건인 신성의 적은 무리가 수십만이요. 고연수가 이끄는 말갈의 군대도 역시 수십만이다. 국내성의 병력도 오골성을 돌아 낙랑의 여러 길을 차단할 것 같다. 그리 된다면 저들의 세력은 날로 성해지고 포위 당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적을 우롱하다가는 후회막급이 될 것이니,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고 다음에 건안을 취하고 그런 후에 천천히 진격하느니만 못하다. 이것이 만전책이다.'라고 했다.
이 문제가 채 결론도 나기 전에 안시성주 양만춘은 이를 듣고 밤 깊음을 틈타 수백의 정예를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내려오니 적진은 스스로 서로 밟고 찔러 살상된 자가 수없이 많았다.
세민은 이도종을 시켜 흙산을 성의 동남쪽에 쌓게 하였다. 관병(고구려 병사)은 성의 틈 사이로 출격하여 마침내 토산을 뺏고 참호를 파고 이를 지키니 군세는 더욱더 떨치더라.
당군의 여러 진은 거의 싸울 힘을 잃으니, 부복애는 패전으로 목잘려 죽고 도종 이하 모두가 맨발로 나와 죄를 청하였다. 막리지는 수 백기를 이끌고 난파를 순시하며 상세하게 정세를 듣더니 사람을 보내 총공격하여 사방을 칠 것을 명하였다. 연수등도 말갈병과 합쳐 협공하고 양만춘은 성 위에 올라가 싸움을 격려하니 사기는 더욱 떨쳐져서 일당백의 용맹이 없는 자가 없었다.
세민은 이기지 못함을 분하게 여겨서 감연히 나서서 싸우려 했다. 양만춘은 이에 한 마디 소리지르며 화살을 당겨 반공에 날렸다. 세민은 진에서 나섰다가 왼쪽 눈에 화살을 맞아 떨어져버렸다. 세민은 어쩔 줄을 모르고 군사들 틈에 끼어서 도망쳤다.
세적과 도종에게 명하여 보병 기병 수만을 이끌고 후군이 되도록 하였으나 요택의 진흙길은 군마의 행군을 어렵게 했다. 무기에게 명하여 모든 병사들에게 풀을 베게 하여 길에 깔고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니. 세민도 몸소 장작을 말고삐에 연결하여 매고 역사를 도왔다.
겨울 10월 포오거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길이 메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모든 군사가 발착수를 건너는데 심한 바람과 눈이 몰아쳐서 사졸들을 적시니 죽는 자가 많이 나왔다. 이에 불을 길에 지피고 기다렸다.
때에 막리지 연개소문은 승승장구 이들을 심히 급하게 이들을 추격했다. 추정국은 적봉에서부터 하간현으로 이르고, 양만춘은 곧바로 신성으로 나아가니, 군세는 크게 떨쳐졌다. 당나라 군사는 갑옷과 병기를 마구 버리면서 도망가, 드디어 역수를 건넜다.
때의 막리지는 연수에게 명하여 용도성을 개축케 하니 지금의 고려진이다. 또 제군을 나누어서 일군을 요동성을 지키게 하니 지금의 창려이다. 일군을 세만의 뒤를 바짝 쫓게 하고 또 일군을 상곡을 지키게 하니 지금의 대동부이다. 이에 세민은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침내 사람을 보내 항복을 구걸케 되니 막리지는 정국 만춘 등의 수만 기를 이끌고 성대하게 의용을 갖추어 진열한 뒤 선도하게 하여 장안에 입성하여 세민과 약속하였으니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강좌가 모조리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에 고구려는 백제와 더불어 백제와 경쟁하는 사이가 되어 함께 요서의 땅에 있게 되었으니, 백제가 영유하던 곳은 요서의 진평이라 했다.
강남에는 월주가 있었다. 그 속현은 산음 산월 좌월이 있었다. 문자제의 명치 11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군현을 고쳐 송강 회계 오월 좌월 산월 천주라 했다 12년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를 삼았다. 이해에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파견하여 공격하여 요서의 진평 등의 군을 취하고 백제군을 폐했다.
고려진은 북경의 안정문 밖 60리 되는 곳에 있고 안시성은 개평부의 동북 70리 되는 곳에 있다. 지금의 탕지보이다. 고려성은 하간현의 서북 12리에 있다. 모두 태조무열제가 쌓은 것이다. 당의 번한은 고려성 회고의 시 한 수로 세상에 전하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외진 땅 성문은 열렸는데 구름 끝 성벽은 길기도 해라.
물 맑은 곳에 저녁 빛 비치더니 강변이 어둡자 촛불 별빛 반짝이네
북소리 맞춰 구름이 보이니 새 꽃이 흙 털며 새단장하고
언제나처럼 아침의 거리는 밝아오건만 다시 들을 길 없는 관현의 소리여
가시밭 누런 먼지 속 옛 길 옆에는 잡초만 무성하네
먼지 따위에 묻힌 비취여 황량한 언덕엔 소와 양만 오르지
어쩔거나 옛날의 일을 가을 소리 고요하니 기러기만 나르네
내 비록 운율은 따를 바 없지만 뒤를 이어 보련다.
요서엔 아직도 옛 성터가 있다네 생각컨대 큰 나라에 왕조는 길었으리.
연나라 험한 산 싸움도 많고 요하는 도도히 하늘빛으로 흘러라.
바람 숲은 빈 골짜기에 흔들리는데 학은 높은 가지에 울어 단장하네
군기와 장수는 하룻밤에 변해도 장사꾼 방울소리 요란키도 해라
연도 양도 본디는 우리 땅이었나니 고구려 군사 진치고 말먹이던 곳이었지
영웅은 나지 않고 세상은 흘러가니 다시는 양떼처럼 적을 몰지 못하고
이제 와서 끝없이 옛 일을 슬퍼하며 핵랑의 만리붕정에 이별노래 부르네.
연타발(延佗勃)11)
고주몽은 재위할 때 일찍이 말하기를 '만약 적자(嫡子)인 유리(琉璃)가 오거든 마땅히 봉하여 태자로 삼을 것이다.'라고 했다. 소서노(召西努)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는데 기묘년 3월에 패(浿)․대(岱)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 번의 사이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년만에 밭을 사고 장원을 두고 부를 쌓아 몇 만금이러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북쪽은 대수에 이르고 서쪽은 큰 바다에 임했다. 반천리의 땅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사람을 보내 편지를 주몽제에게 올리며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주몽제는 몹시 기뻐하시며 이를 장려하여 소서노(召西努)를 '어하라'라고 책봉했다. 13년 임인년에 주몽제가 돌아가셨다.
태자 비류(沸流)가 즉위하였는데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마여 등은 온조(溫祚)에게 말하기를 '신(臣) 등이 듣기는 마한(馬韓)의 쇠퇴는 이미 드러난 일이요 가서 도읍을 세워야 할 때입니다'라고 했다. 온조(溫祚)가 '좋다'고 승락하니 곧 배를 짜서 바다를 건너 처음 마한의 미추골12)13)
'생각컨대 이 하남의 땅은 북쪽이 한수를 끼고 동쪽은 크고 높은 산이요 남쪽은 기름진 평야가 열려 있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으니 이곳은 천험의 지리를 갖추고 있어 얻기 어려운 지세이옵니다. 마땅히 도읍을 정할 만한 곳입니다. 여기보다 나은 곳을 찾지 마시옵소서.'
온조는 열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하남의 위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라고 칭하니 백제(百濟)14) 뒤에 비류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그의 땅을 가지고 귀순해 왔다. 서로의 시왕은 선도산의 성모의 아들이다.
옛날 부여제실의 딸 파소가 있었는데 남편 없이 아이를 배었으므로 사람들의 의심을 받아 눈수로부터 도망쳐 동옥저(東沃沮)에 이르렀다. 또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辰韓)의 나을촌에 와 닿았다. 때에 소벌도리(蘇伐都利)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가서 집에 데려다 거두어 길렀다. 나이 13세에 이르자 지혜는 빼어나고 숙성하고 성덕이 있는지라, 진한 6부의 사람들이 존경하여 거세간이 되니 도읍을 서라벌에 세우고 나라를 진한(辰韓)으로 하고, 또한 사로(斯盧)라고도 하였다.
임나(任那)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였다. 북은 바다로 막히고 치소가 있었는데 국미성이라 한다. 동서에 각각 마을이 있다. 어떤 자는 조공하고 어떤 자는 반한다. 뒤에 대마의 두 섬은 마침내 임나가 통제하는 바가 되었다. 때문에 임나는 이 때부터 대마도를 다 뜻하는 말이 되었다. 옛부터 구주(九州)와 대마도(對馬島)는 곧 삼한이 나누었던 땅으로 본래 왜인들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
임나는 또 갈려서 삼가라가 되었다. 소위 가라는 가장 중심이 되는 읍의 이름이다. 이 때부터 삼한은 서로 다투고 싸워왔고 세월이 오래 되도록 적대감을 풀지 못하였다. 좌호가라는 신라에 속하고, 계지가라는 백제에 속함은 바로 그것을 말한다. 영락 10년 3가라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인들은 모두 임나에 통제되었으니, 열나라가 나누어 통치하면서 연정(聯政)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 속하여 열제의 명하는 것이 아니면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는 못했다.
아유타(阿踰佗)는 <삼국유사>에서 서역(西域)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지금 옛날 여러 기록을 고찰해 보면 곧 아유타는 지금의 섬라를 말함인 듯 하다. 그렇다면 아유타의 사람들은 대식 사람들 때문에 쫓기어 이곳에 이르러 살았던 것인지?
또 말하기를, '평양에 을밀대(乙密臺)가 있는 바, 세상에선 말하기를 을밀선인(乙密仙人)이 세운 것이라 한다. 을밀은 안장제 때 뽑히어 조의가 되고 나라에 공이 있었는데 본래 을파소의 후손이다. 집에서 책을 읽고 활쏘기를 배우며 삼신을 노래하고 무리를 모아 수련하니, 그 옳음과 용기에 공으로 봉해졌다. 일세의 조의로서 그의 무리는 3,000이었으니 가는 곳마다 구름처럼 모여서 다물흥방의 노래를 제창했다. 이에 의하여 그 몸을 던져서 의를 다한다는 풍속을 고취한 사람이었다.'고 하였으니. 그 노래에서 말한다.
지나간 것은 법이 되고 뒤에 오는 것은 위가 되네
법이라는 것은 그래서 날 것도 사라질 것도 없으며
위라는 것은 그래서 귀할 것도 천할 것도 없지
사람 가운데 하늘도 땅도 하나일 뿐이고
마음은 신과 더불어 근본에 닿나니
하나이기 때문에 빈 것도 찬 것도 같은 것이며
근본에 닿기 때문에 신이라 함이나 사물이라 함이 둘이 아닐 뿐
참은 온갖 착함의 극치이고 신은 참나를 주관한다네
극치이기 때문에 세 가지 참은 하나로 돌아오고
참하나이기 때문에 일신은 곧 셋이라
하늘 위 하늘 아래 다만 내가 스스로 있음이여
다물은 나라를 일으킴이라
스스로 있기 때문에 티없이 일을 하고
나라를 일으켰기 때문에 말없이 가르침을 행하였지
참 천명의 큼이여, 성품을 낳아 공명에 통하네
집에서는 효도하고 나서면 충성함이라
광명은 그래서 모든 선을 행하지 않음이 없고
효와 충은 그래서 모든 악은 일체 짓지 않나니
백성의 옳은 바는 나라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니
나라 없이 나라는 건 어떻게 생겼을 것인가
나라가 소중하기 때문에 백성은 사물이 있어 복을 누리고
내가 있기 때문에 나라엔 혼이 있어 덕을 누린다네
혼의 생을 낳고 각을 낳고 영을 낳음이여
일신의 그윽한 거처는 천궁이 되네
삼혼은 그래서 지혜와 지혜와 생을 함께 닦을 수 있고
일신은 그래서 모습과 혼을 함께 이루는 것이라
우리들 자손 착하게 나라를 이룸이여
태백의 가르침은 우리의 스승일세
우리들 자손들은 그래서 다 평등하고
우리들의 스승은 그래서 가르침마다 새로워라
을밀선인은 일찍이 대에 살면서 하늘에 제사 올리고 수련함을 임무로 삼았다. 대개 선인의 수련법은 참전으로 계를 삼아 스스로를 굳세게 하고 영광되게 한다. 나를 비워 사물이 있게 하고 몸을 버려 옳음을 지켜서 나라 사람들의 사표가 됨이니, 천추에 우러러 감흥을 일으킬 만한 것이다. 역시 사람들의 존경하는 상징이 되었으니, 후세 사람들은 그 대를 칭하여 을밀이라 했으며, 바로 금수강산의 빼어난 곳의 하나이다.
1) 진왕정(秦王政) : 진시황을 말한다.
2) 불리지(弗離支) : 고주몽의 아버지 고모수(高慕漱)의 본명
3) 을파소(乙巴素) : 고구려 산상왕 때의 재상.
4) 성(性)․명(命)․정(精) : 삼진(三眞)
5) 심(心)․기(氣)․신(身): 삼망(三妄)
6) 어아의 노래 : 어아가(於阿歌)
7) 가야(加耶), 가라(加羅) : "加"는 변두리라는 뜻의 고대 말을 음을 따라 한자로 적은 것으로 변(邊)과 같은 뜻이고, "나(那)" "야(耶)" "라(羅)"는 땅이라는 뜻의 고대 말을 음을 따라 한자로 적은 것이다. 즉 "가야" 또는 "가라"는 가 쪽에 있는 땅이라는 뜻이다. 지금의 경상도 지방을 "가야" 또는 "가라"라 부른 시기는 B.C. 194년에 만주남부지방에 살던 기자조선 유민들 중 일부가 한반도로 이동하여 평양과 홍성 금마를 거쳐 지금의 경상도 지방으로 이주하여 수십 개의 소국(小國)을 세우고 살면서 그 곳을 이주 경로로 볼 때 가장 가 쪽에 있는 땅이라는 뜻으로 "가야" 또는 "가라"라 불렀을 때이다. 그 후 가야인들 중 일부가 다시 대마도나 일본열도로 이주하여 살면서 그 곳도 역시 가 쪽에 있는 땅 또는 가야 무리들이 건너가 사는 땅이라는 뜻으로 이주한 곳에 "가야" 또는 "가라"라는 지명을 많이 붙였다. 그 때문에 대마도나 일본열도에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무리들이 살았던 곳에 "가라(加羅, 韓)"라는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나라 이름을 "가야" 또는 "가라"라 부른 시기는 A.D. 42년에 지금의 경상도 지방에 6가야가 건국되었을 때이다. 일부 사학자들은 "가야" 또는 "가라"를 지금의 경상도 지방에 있는 나라로만 이해한 까닭에 사서 해석에 큰 오류를 범하였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8) 연정(聯政) : 임나연정(任那聯政)을 말한다. 광개토왕(廣開土王)은 A.D. 392년에 신라, 걸안, 온조백제를, A.D. 396년에 구태백제를 궤멸시키고 가야와 온조백제를, A.D. 400년에 대마도왜(任那), 구주왜(倭), 대화왜(伊)를 각 복속시켰다. 광개토왕(廣開土王)은 복속지를 군사적으로 통제하기 위하여 요지에 위치한 10개국으로 연립정부를 만들어 그 치소(治所)를 대마도에 두었는데, 이를 임나연정(任那聯政)이라 불렀다. 온조백제는 A.D. 392년과 396년에 광개토왕(廣開土王)에게 각 항복하였으나 곧 임나연정의 통제를 벗어났고, 신라는 A.D. 392년 정월부터 광개토왕(廣開土王)에게 복속하였으나 A.D. 418년에 고구려에 인질로 간 복호와 임나연정(任那聯政)에 인질로 간 미사흔을 돌려 받은 후부터 고구려와 임나연정의 통제를 벗어났다. 그러나 일본열도왜는 A.D. 479년까지 임나연정에 복속하였다. 임나연정은 찬(讚)부터 제(濟)까지는 고구려의 위성국이었으나, 흥(興)부터는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이탈하여 고구려와 적대관계에 있었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 고대사>
9) 홀본(忽本 : 골본) : 골(忽)은 고을이라는 뜻이고, 골본(忽本)은 고구려 때 수도(首都)라는 뜻으로 사용된 용어이다. 특정 지명이 아니다. 중국의 사서에는 골본(忽本)이 졸본(卒本)으로 적혀 있다. 이는 중국인들이 고구려 무리들에게 하도 당하여 고구려가 졸(卒)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고구려의 수도로 사용된 곳을 원래 용어대로 골본(忽本)으로 적지 않고 졸본(卒本)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사서를 인용한 삼국사기에도 골본(忽本)이 졸본(卒本)으로 적혀 있다. 골본(또는 졸본) 중 고구려 6세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가 수도로 사용한 골본(忽本)은 심양(沈陽)이고, 고주몽(高朱蒙)이 초기에 수도를 둔 졸본천(卒本川)은 혼하(渾河) 상류이며, 유리(琉璃)가 고주몽을 찾아온 졸본(卒本)은 당시 고구려의 수도인 북옥저(北沃沮)이다.
10) 요동성(遼東城) : 오늘의 창려성
11) 연타발(延佗勃) : 소서노(召西努)의 아버지.
12) 미추골(彌鄒忽) : "미(彌)"는 용(龍)을 가리키는 글자이다. 고대 우리민족은 용(龍)을 천제(天帝)의 아들이라 믿었고 "미르"라 부르며 한자로는 "龍" "辰" "彌" "未" "味" "密" 등으로 적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미추(彌鄒)"를 일명 "미조(味照)"라 부른다고 적혀 있고, <삼국유사>에는 "未祖" 혹은 "未古"라 부른다고 적혀 있다. 이로 보아 "추(鄒)"는 조(祖) 또는 고(古)와 같은 뜻이다. 그리고 "골(忽)"은 고을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미추골(彌鄒忽)은 천제(天帝)의 아들이 사는 고을 즉 수도(首都)라는 뜻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미추골(彌鄒忽)로 불린 곳은 비류백제(沸流百濟)의 수도인 패(浿) 대(帶) 지역과 비류백제가 궤멸된 후 비류가 한반도로 이동한 지금의 아산군 인주면이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13) 부아악(負兒岳) : 부아악(負兒岳)은 풍수지리에서 어린애를 업고 있는 모양의 산세(山勢)를 말한다. 부아악 산세 모양을 한 곳은 한반도에 여러 곳이 있었다.
14) 백제(百濟) : 백가제해(百家濟海)
15) 유기(留記) : 이명(李茗)의 진역유기(震域留記)를 말한다.
16) 태백일사 저자의 생각에 아유타는 인도의 아요다이가 아니라 미얀마의 아유타였을 것이라'하는 내용이다. 지리적으로 인도보다 가까우므로 그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으나 파사석탑이 인도 아요다이의 특산인 돌인 것이 판명되고 태양문장등 많은 수로왕의 유적과 북인도 옛 아유타국의 유적에 유사점이 입증되어 저자의 생각이 틀린 것으로 증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