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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조선글 | |
한글의 구조 | |
원래 이름 | 훈민정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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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음소 문자 중 자질 문자 |
표기 언어 | 한국어 |
사용 시기 | 1443년 ~ 현재 |
창제자 | 조선 세종 |
계통 | 인공 문자 한글, 조선글 |
ISO 15924 | Hang |
음소문자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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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로이트 문자 (기원전 3세기) |
오검 문자 (4세기) |
한글 1443년 |
캐나다 문자 1840년 |
주음부호 1913년 |
전체 분류 |
v • d • e • h |
한글 또는 조선글은 조선 제 4대 임금 세종이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이름으로 창제하여 1446년에 반포한 문자로,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1][2] 이후 한문을 고수하는 사대부들에게는 경시되기도 하였으나, 조선 왕실과 일부 양반층과 서민층을 중심으로 이어지다가 1894년 갑오개혁에서 한국의 공식적인 나라 글자가 되었고, 1910년대에 이르러 한글학자인 주시경이 '한글'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갈래는 표음 문자 가운데 음소 문자에 속한다. 한국에서는 한글전용법이 시행되고 있다.
‘한글’이라는 이름은 주시경(周時經)이 지은 것으로 ‘크다’, ‘바르다’, ‘하나’를 뜻하는 고유어 ‘한’에서 비롯되었다. 그 뜻은 큰 글 가운데 오직 하나뿐인 좋은 글, 온 겨레가 한결같이 써온 글, 글 가운데 바른 글(똑바른 가운데를 한가운데라 하듯이), 모난 데 없이 둥근 글(입 크기에 알맞게 찬 것을 한 입이라 하듯이)이란 여러 뜻을 한데 모은 것이라 하기도 한다.
한글 창제 당시에는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훈민정음’이라 하였고, 줄여서 ‘정음(正音)’이라는 이름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지식층으로부터 경시되며, 본래의 이름으로 쓰지 않고 막연히 ‘언문(諺文)’[3], ‘언서(諺書)’[4], ‘반절(反切)’ [5] 로 불리거나, 혹은 ‘암클(여성들이 배우는 글)’, ‘아햇글(어린이들이 배우는 글)’이라고 낮추어 불렀다고 알려져 있다. (단, 암클, 아햇글이라는 표현은 그 출처가 불분명하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국서(國書)’, ‘국문(國文)’이라고 불렀고 혹은 ‘조선글’로 부르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한국의 글이라는 보통 이름일 뿐이며, 고유명사로 한글이라는 이름이 널리 쓰이기 전에는 ‘가갸’, ‘정음’ 등으로 불렀다.
처음 한글이라는 이름이 사용된 것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1913년 3월 23일 주시경이 ‘배달말글몯음(조선어문회, 朝鮮言文會)[6]’를 ‘한글모’로 바꾼 바 있고[7], 같은 해 9월 최남선의 출판사 ‘신문관(新文館)’에서 창간한 어린이 잡지 《아이들 보이》의 끝에 가로글씨로 '한글풀이’라 한 것이 있고[8], 1914년 4월에 ‘조선어강습원(朝鮮語講習院)’이 ‘한글배곧’으로 이름을 바꾼 것 등으로 볼 때 1913년 무렵 주시경이 처음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1927년에는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한글》이라는 잡지를 매달 발간하였다. 한글이라는 명칭이 일반화된 것은 1928년 11월 11일 조선어연구회에서 가갸날을 한글날로 고쳐 부른 때부터라고 한다.
현재 한글의 명칭을 남한(대한민국)에서는 한글로,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선어자모’로 부르는데[9], 2001년 2월 중국 옌지에서 열린 ‘제5차 코리안 컴퓨터 처리 국제 학술 대회(ICCKL 2001)’에서는 남과 북, 해외 동포 학자들이 국제 표준화 기구(ISO)에 등록하기 위한 명칭으로 ‘정음(Jeongeum)’을 쓰기로 합의하였다.
다른 나라에서는 한글(Hangul/Hangeul)이라는 이름을 많이 쓰지만, 중국에서는 조선 자모(중국어: 朝鮮字母, 병음: Cháoxiǎn zìmǔ, 차오셴 쯔무[*])와 같은 이름을 쓴다. 일본에서는 한글은 물론 한국어를 ‘한구루(한글)(ハングル)’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NHK 방송에서 한국어 강좌를 설립시에 남한의 ‘한국어’와 북한의 ‘조선어’ 사이에서 중립적인 위치를 지키기 위해 한국어 강좌 명칭으로 '한글 강좌'를 사용하여 많은 일본인들이 이를 보고 한글의 뜻을 한국어로 오해한 것이다.
한글이라는 이름은 본디 문자의 이름이지만, 관용적으로는 ‘한국어를 한글로 적은 것’이라는 의미로 책이나 소프트웨어, 게임 등의 한국어 번역 작업을 ‘한글화’라 하고 번역본을 ‘한글판’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한글 이름’, ‘한글 지명’처럼 고유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두 의미 모두 등재되지 않았으며, ‘한국어화’, ‘한국어판’이 맞는 표현이다.
한국은 삼국시대부터 이두(吏讀)와 구결(口訣)을 써 왔는데, 구결은 본래 한문에 구두(句讀)를 떼는 데 쓰기 위한 일종의 보조적 편법에 지나지 않았고, 이두는 비록 한국어를 표시함에 틀림이 없었지만 한국어를 자유자재로 적을 수 없었으며, 그 표기법의 일원성(一元性)이 없어서 설사 이두로써 족하다 해도 한자교육이 선행되어야 했다. 이러한 문자생활의 불편은 한자를 쓰지 않고도,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새로운 글자의 출현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이러한 사조가 세종 때에 특히 두드러져 드디어 1443년 음력 12월에 문자혁명의 결실을 보게 되었다. 훈민정음 창제의 취지에 관하여는 세종이 손수 저술한 《훈민정음》 예의편(例義篇) 첫머리에 잘 나타나 있는데, 첫째 한국어는 중국말과 다르므로 한자를 가지고는 잘 표기할 수 없으며, 둘째 우리의 고유한 글자가 없어서 문자생활의 불편이 매우 심하고, 셋째 이런 뜻에서 새로 글자를 만들었으니 일상생활에 편하게 쓰라는 것이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10], 세종의 어제 서문과 정인지 서(序)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는바, 당시까지 한문 의존에 따른 어려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한국어의 고유 문자로서 창제되었다.
한편, 훈민정음 창제 후 5년 뒤에 《동국정운(東國正韻)》이 간행되는데, 당시 조선에서 통용되던 한자음을 중국어 원음으로 교정하기 위한 책으로서 이것의 발음 표기에 훈민정음이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가 한자 및 한문의 폐지를 목적한 것은 아니라고 보이며, 훈민정음의 활용 범위가 상당히 넓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훈민정음에 대하여 반대하는 신하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최만리는 상소를 올려 반대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경이 운서를 아는가? 사성칠음에 자모가 몇이나 있는가? 만일 짐이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처음 만들었을 때는 낱자 28글자와 성조를 나타내는 기호(방점)가 따로 있었으나, 지금은 ㅿ, ㆁ, ㆆ, ㆍ 네 글자와 성조 기호(방점)가 사라져서 24글자가 되었다. (제주도를 비롯한 몇 곳에서는 아직도 ㆍ의 발음이 남아 있다.)
그 뒤로 몇 백 년에 걸쳐, 식자층은 주로 한글보다는 한문 위주의 문자 생활을 했지만 한자를 배울 수 없었던 백성과 여자들은 서로 주고 받는 편지나 계약서 등에 한글을 썼고, 궁궐에서 여자끼리 주고 받는 문서에 한글을 쓰기도 하였다.
오늘날 한글이라 불리는 글이 창제되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세종대왕 25년인 1443년이다. 창제 당시에 한글은 '훈민정음'이라 불렸으며 1446년 음력 9월 초에는 《훈민정음》(통칭 '해례본')이 책으로 엮어졌다. 이 사실은 정인지(鄭麟趾)가 쓴 〈서(序)〉로 확인된다.[11]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세종대왕이 홀로 글을 창제했는지,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을 받았는지, 아니면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집현전 학자들이 글을 창제했는지가 문제이다. 세종실록(世宗實錄)은 훈민정음을 세종대왕이 친히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12], 누구의 도움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13]
다시 말하면 시월 상친제언문이십팔자(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세종 25년, 12월 30일)에서 ‘상친제(上親制)’란 세종이 직접 한글을 만들었다는 뜻인데 '세종실록' 안에는 다른 업적에 관해서는 "친제"라는 말이 없었지만, 훈민정음(한글)에 관해서는 이렇게 확실하게 적어 놓았다는 것이다. 또한, 집현전 학자였던 정인지가 집필한 훈민정음 해례본의 서문 중에도 세종대왕이 직접 한글을 창제했다는 내용이 있다.[14]
그러나 성현(成俔, 1439년~1504년)의 《용재총화(慵齋叢話)》 제7권에서 세종이 언문청을 세워 신숙주, 성삼문 등에게 글을 짓도록 명을 내렸다는 주장이 나왔다. 주시경은 《대한국어문법》(1906년)에서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한글을 창제했다고 썼다. 그리하여 한글 창제에 집현전 학자들이 관여했다는 설이 우세하게 되었으나, 이기문을 비롯한 학자들은 기록에 나타난 당시 정황을 볼 때 세종이 한글을 홀로 창제한 것이 아니라고 볼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글 창제 후 세종은 표음주의 표기가 일반적인 당대의 표기법과는 달리 형태주의 표기를 주로 활용하고 동국정운 같은 책을 편찬한 예에서 보듯이 국어와 중국어의 전반에 걸쳐 음운학 및 언어학에 깊은 조예와 지식을 보여 주었다. 집현전 학자들은 한글 창제 후 정음청에서 한글을 사용한 편찬 사업에만 관여했다는 것이다.[15]
처음에 ‘훈민정음’으로 반포된 한글은 조선시대에는 '언문'이라고 불렸다. 이것은 《세종실록》에서 '상친제언문이십팔자(上親製諺文二十八字)'라고 한 것에 연유하는데 한자를 제외한 문자는 ‘언문’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많이 한글을 썼기 때문에 ‘암클’ 등으로 낮추어 불리기도 하였으나, 궁중과 일부 양반층, 백성들 사이에서 사용되었다.
1445년(세종 27) 4월에 훈민정음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악장(樂章)인 《용비어천가》를 편찬하고, 1447년(세종 29) 5월에 간행하였다. 목판본 10권 5책 모두 125장에 달하는 서사시로서, 한글로 엮어진 책으로는 한국 최초의 것이 된다. 세종은 “어리석은 남녀노소 모두가 쉽게 깨달을 수 있도록” 《(세종실록》, 세종 26년) 《삼강행실도》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도록 했으며, 훈민정음이 반포된 뒤에는 일부 관리를 뽑을 때 훈민정음을 시험하도록 했다. 이후로 민간과 조정의 일부 문서에서 훈민정음을 써 왔다.
이러한 한글 보급 정책에 따라 한글은 빠르게 퍼져 반세기만인 1500년대 지방의 노비 수준의 신분인 도공에게 까지 쓰이게 되었다.[16]
연산군은 1504년(연산군 10년) 훈민정음을 쓰거나 가르치는 것을 금했지만, 조정 안에서 훈민정음을 쓰는 것을 금하지는 않았으며, 훈민정음을 아는 사람을 일부러 궁궐에 등용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율곡 이이가 《대학》에 구결을 달고 언해한 《대학율곡언해》는 1749년에 간행되었다.[17]
조선 중기 이후로 가사 문학, 한글 소설 등 한글로 창작된 문학이 유행하였고, 서간에서도 한글이 종종 사용되었다.
1894년(조선 고종 31년) 갑오개혁에서 마침내 한글을 ‘국문’(國文)이라고 하여, 1894년 11월 21일 칙령 제1호 공문식(公文式) 제14조[18] 및 1895년 5월 8일 칙령 제86호 공문식 제9조[19] 에서 법령을 모두 국문을 바탕으로 삼고 한문 번역을 붙이거나 국한문을 섞어 쓰도록 하였다. 1905년 지석영이 상소한 6개 항목의 〈신정국문(新訂國文)〉이 광무황제의 재가를 얻어 한글 맞춤법으로서 공포되었으나, 그 내용의 결점이 지적되면서 1906년 5월에 이능화(李能和)가 〈국문일정의견(國文一定意見)〉을 제출하는 등 논란이 되자, 당시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崑)의 건의로 1907년 7월 8일 대한제국 학부에 통일된 문자 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국어 연구 기관으로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가 설치되었는데, 국문연구소의 연구 성과는 1909년 12월 28일 학부에 제출한 보고서로서 〈국문연구의정안(國文硏究議定案)〉 및 어윤적, 이종일(李鍾一), 이억(李億), 윤돈구(尹敦求), 송기용(宋綺用), 유필근(柳苾根), 지석영, 이민응(李敏應)의 8위원 연구안으로 완결되었다.
한편, 민간에서는 1906년 주시경이 《대한국어문법(大韓國語文法)》을 저술하여 1908년에 《국어문전음학(國語文典音學)》으로 출판하였으며, 1908년 최광옥(崔光玉)의 《대한문전(大韓文典)》, 1909년 유길준(兪吉濬)의 《대한문전(大韓文典)》, 김희상(金熙祥)의 《초등국어어전(初等國語語典)》, 1910년 주시경의 《국어문법(國語文法)》등이 출간되고, 이후에도 1911년 김희상의 《조선어전(朝鮮語典)》, 1913년 남궁억(南宮檍)의 〈조선문법(朝鮮文法)〉, 이규영(李奎榮)의 〈말듬〉, 1925년 이상춘(李常春)의 《조선어문법(朝鮮語文法)》 등으로 이어지면서, 1937년 최현배의 《우리말본》으로 집대성된다.
이와 함께 조선어학회와 같은 모임에서 꾸준히 애쓴 덕에 조금씩 한국어의 표준 문자로 힘을 얻게 되어 누구나 쓸 수 있게끔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한글'이라는 이름은 주시경이 지은 것이며 조선어학회가 이 이름을 널리 알리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광복을 맞이한 다음에는 남북한 모두 공문서와 법전에 한글을 쓰게 되었고, 끝내 한국어를 받아 적는 큰 글자로 자리 잡게 되었다. 식민지 시대 일본은 한글의 이용을 촉진하고 한국의 문맹률을 향상시켰다. 다만,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한글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조선글'이라 한다.
한국에서는 한글전용법이 시행되어 한자의 사용이 줄어들면서 1990년대 그 사용이 절정을 이루었다.[20] 이후 정부차원에서의 영어우대정책으로 인해 한글의 사용이 점차 줄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21]
2009년에는 문자가 없어 의사 소통에 곤란을 겪었던 인도네시아의 소수 민족인 찌아찌아족이 자신들의 언어 찌아찌아어의 표기 문자로 시범적으로 한글을 채택, 도입하였다. 그러나 반대와 소수의 배움 등으로 인해서 이 방법은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2012년에 솔로몬 제도에 있는 일부 주가 모어 표기문자로 한글을 도입했다.[22]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을 바탕으로 한글과 음양오행의 관계를 기록하였다.
'ㆍ'(아래 아)의 속성은 양이다. 양의 특성은 위로의 상승, 바깥으로의 확장이다. 따라서 점을 위, 바깥 쪽에다 찍은 것.
(소리=방위=계절, 소리=계절) 계절은 봄, 여름, 늦여름, 가을 ,겨울 순이므로, 소리 역시 어금닛소리(ㄱ, 봄), 혓소리(ㄴ, 여름), 입술소리(ㅁ, 늦여름), 잇소리(ㅅ, 가을), 목소리(ㅇ,겨울) 순으로 배열한다.
속성 | 계절 | 방위 | 음성 | 음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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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木, 나무) | 춘(春, 봄) | 동(東, 동녘) | 어금닛소리(ㄱ,ㅋ,ㄲ) | 각(角) |
화(火, 불) | 하(夏, 여름) | 남, (南, 남녘) | 혓소리(ㄴ,ㄷ,ㅌ,ㄸ) | 치(徵) |
토(土, 흙) | 계하 (季夏, 늦여름) | 중앙(中, 無定) | 입술소리(ㅁ,ㅂ,ㅍ,ㅃ,) | 궁(宮) |
금(金, 쇠) | 추(秋, 가을) | 서(西, 서녘) | 잇소리(ㅅ,ㅆ,ㅈ,ㅊ,ㅉ) | 상(商) |
수(水, 물) | 동(冬, 겨울) | 북(北, 북녘) | 목소리(ㅇ, ㅎ) | 우(羽) |
한글은 낱소리 문자에 속하며, 낱자 하나는 낱소리 하나를 나타낸다. 낱소리는 닿소리(자음)와 홀소리(모음)로 이루어진다.
한 소리마디는 첫소리(초성), 가운뎃소리(중성), 끝소리(종성)의 낱소리 세 벌로 이루어지는데, 첫소리와 끝소리에는 닿소리를 쓰고 가운뎃소리에는 홀소리를 쓴다. 한글은 낱자를 하나씩 풀어쓰지 않고 하나의 글자 마디로 모아쓰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처음 한글 낱자는 닿소리 17자와 홀소리 11자로 총 28가지였다. 오늘날 한글 낱자에 쓰이지 않는 없어진 글자를 소실자(消失字)라 하는데, 닿소리 ㅿ(반시옷), ㆁ(옛이응), ㆆ(여린히읗)과 홀소리 ㆍ(아래아)의 네 글자이다. 이로써 현대 한글은 모두 24자로서 닿소리 14자와 홀소리 10자로 되었다. 낱자의 이름과 순서는 다음과 같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는 낱자 자체의 칭호법(稱號法)은 표시되어 있지 않았고, 중종 때 최세진의 《훈몽자회》에 이르러 각 낱자의 명칭이 붙게 되었다. 하지만 기역, 디귿, 시옷은 이두식 한자어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여 일제시대의 언문 철자법을 거쳐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다.[24]
각 자모에 대한 소릿값을 살펴보면, 첫소리 아·설·순·치·후(牙舌脣齒喉)와 반설·반치(反舌半齒)의 7음으로 구별하였고, 모음은 따로 구별하지 않았다. 이러한 7음과 각 자모의 독특한 배열 순서는 중국 운서(韻書)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실제로 쓸 적에는 각 낱자를 독립시켜 소리 나는 차례대로 적지 않고, 반드시 닿소리와 홀소리를 어울려 쓰기로 하였으니, 곧 <· ㅡ ㅗ ㅜ ㅛ ㅠ >는 자음 아래에 쓰고, <ㅏ ㅓ ㅑ ㅕ>는 자음 오른쪽에 붙여 쓰기로 하였다. 즉 음절문자(音節文字)로 하되, 그 모양이 네모꼴이 되도록 하였으니, 이는 한자의 꼴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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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스물네 가지를 바탕으로 하는데 모두 홑소리(단음)이고, 홑소리로 나타낼 수 없는 겹소리(복음)는 두세 홑소리를 어울러서 적되, 그 이름과 순서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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ㅿ | ㆁ | ㆆ |
반시옷 | 옛이응 | 여린히읗 |
유성 치경 마찰음 | 연구개 비음 | 성문 파열음 |
반시옷은 알파벳의 z에 해당하는 음가를 가진 것으로 추정되며 여린히읗은 1을 강하게 발음 시 혀로 목구멍을 막으며 발음된다.
현대 한글에서는 끝소리가 없으면 받침을 쓰지 않고 끝소리가 있을 때에만 홑받침 또는 겹받침을 쓰는데, 홑받침에는 모든 닿소리가 쓰이며, 겹받침에는 홑홀소리 아래에만 놓이는 겹닿소리 ㄲ(쌍기역)과 ㅆ(쌍시옷)과 따로 이름이 없지만 모든 홀소리 아래에 놓일 수 있는 겹받침으로만 쓰이는 겹닿소리가 있다. 모든 받침의 소릿값은 끝소리 규칙에 따라 8갈래로 모인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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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에 올릴 때에는 첫소리 > 가운뎃소리 > 끝소리의 순으로 정렬하되, 그 정렬 순서는 다음과 같다.
첫소리 | ㄱ ㄲ ㄴ ㄷ ㄸ ㄹ ㅁ ㅂ ㅃ ㅅ ㅆ ㅇ ㅈ ㅉ ㅊ ㅋ ㅌ ㅍ ㅎ |
가운뎃소리 | ㅏ ㅐ ㅑ ㅒ ㅓ ㅔ ㅕ ㅖ ㅗ ㅘ ㅙ ㅚ ㅛ ㅜ ㅝ ㅞ ㅟ ㅠ ㅡ ㅢ ㅣ |
끝소리 | ( ) ㄱ ㄲ ㄳ ㄴ ㄵ ㄶ ㄷ ㄹ ㄺ ㄻ ㄼ ㄽ ㄾ ㄿ ㅀ ㅁ ㅂ ㅄ ㅅ ㅆ ㅇ ㅈ ㅊ ㅋ ㅌ ㅍ ㅎ |
한글의 모든 낱자는 한데 모아쓰도록 하고 있으며, 닿소리를 가장 먼저 쓰고 그 오른쪽이나 아래에 홀소리를 적으며, 모든 받침은 닿소리와 홀소리 밑에 놓인다. 따라서, 글자 마디로 모아쓸 때는 다음과 같은 틀에 맞추어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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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글은 낱자를 엮어 11,172(첫소리 19 × 가운뎃소리 21 × (끝소리 27 + 끝소리 없음 1))글자 마디를 쓸 수 있다. 11,172자 중 399자는 무받침 글자이며 10,773자는 받침 글자이다. 사용 빈도는 KS X 1001 완성형 한글 코드에 선별된 2,350글자가 상위 99.9%로 알려져 있다.[출처 필요]
어문 규정에 의하여, 현대 한국어 표준어에서 실제 사용하는 음절은 이보다 적다. 한국어의 소리는 첫소리+가운뎃소리(+끝소리)로 이루어지는데, 표준어에서 첫소리에는 19가지 닿소리가 모두 쓰이되 첫소리에 놓인 ㅇ은 소리 나지 않는다. 끝소리는 7종성법에 따라 7갈래로 모이며 끝소리가 없는 것까지 더하여 모두 8갈래이므로 현대 한국어의 발음은 첫소리 19 × 가운뎃소리 21 × 끝소리 8 = 3,192가지 소리가 된다.
그런데, 표준 발음법을 따르면 구개음 ㅈ, ㅉ, ㅊ 뒤의 이중 모음 ㅑ, ㅒ, ㅕ, ㅖ, ㅛ, ㅠ는 단모음 ㅏ, ㅐ, ㅓ, ㅔ, ㅗ, ㅜ로 소리나므로 첫소리 3 × 가운뎃소리 6 × 끝소리 8 = 144소리가 빠지고, 아울러 소리나는 첫소리 (ㅇ이 아닌 첫소리 뒤에 오는)를 얹은 가운뎃소리 [ㅢ]는 ㄴ을 제외하면(ㄴ의 경우는 구개음화에 따른 다른 음소로 인정하고 있다.) [ㅣ]로 소리나므로(한글 맞춤법 제9항 및 표준 발음법 제5항 단서 3) 첫소리 17 × 가운뎃소리 1 × 끝소리 8 = 136 소리가 다시 빠진다. 따라서, 현재 한국어 표준어에서 실제 사용하는 소리마디는 3192 − 144 − 136 = 2,912가지가 된다.
옛한글의 경우, 2009년 여름 발표 예정인 유니코드 5.2에 포함되어 있는 옛한글 자모의 총 갯수는 초성 124개, 중성 95개, 종성 137개와 채움 문자 2개(초성, 중성)이다. 방점 2개는 현재 유니코드에 등록돼 있다. 방점을 제외하고, 총 조합 가능한 글자 마디 개수를 구한다면 다음과 같다.
《세종실록》에 최만리가 훈민정음이 “고전(古篆)을 본땄다(倣)”라고 말한 기록이 있는데,[26][27] 이 말이 모호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고전’의 해석에는 한자의 전자체(篆字體)라는 설과 당시에 ‘몽고전자’(蒙古篆字)로도 불렸던 파스파 문자를 말하는 것이라는 설이 있다. 《환단고기》를 인정하는 사람은 이것이 가림토를 일컫는 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본땄다’(倣)에 대해서도 그 생김새만이 닮았을 뿐이라는 풀이와 만드는 데에 참고를 했다, 또는 모두 본땄다 등의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1940년 《훈민정음》(해례본)이 발견되기 이전에는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를 설명한 문헌이 존재하지 않아 그 유래에 대한 여러 이론이 제기되었다. 그 이전에 제기되었던 주요 학설은 다음과 같다.
《훈민정음》(해례본)에는 자음과 모음 각각에 대한 창제 원리가 상세히 설명되어 기본 자음 5자는 발음 기관의 모양을 추상화하고, 기본 모음 3자는 천지인 3재를 상징하여 창제되었고 다른 글자들이 획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고 분명히 밝힘으로써, 여러 이설들을 잠재우고 정설이 되었다.
1966년 컬럼비아 대학의 게리 레드야드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훈민정음에서 언급한 고전(古篆)을 몽고전자(蒙古篆字)로 해석하며 한글이 파스파 문자에서 그 기하학적 모양을 차용했다고 주장했다.[30] 레드야드는 그 근거로 당시 조선의 궁에는 파스파 문자가 쓰이고 있었고, 집현전 학자 일부는 파스파 문자를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을 들며, 한글의 기본 자음은 ㄱ, ㄷ, ㅂ, ㅈ, ㄹ라고 제시했다.
레드야드에 따르면 이 다섯개의 글자는 그 모양이 단순화되어 파열음을 위한 가획을 할 수 있는 여지(ㅋ, ㅌ, ㅍ, ㅊ)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 그는 전통적인 설명과는 다르게 비파열음 ㄴ, ㅁ, ㅅ은 기본자 ㄷ, ㅂ, ㅈ의 윗부분이 지워진 형태라 주장했다. 그는 ㅁ이 ㅂ의 윗부분을 지워서 파생되기는 쉽지만, ㅁ에서 ㅂ의 모양을 이끌어 내는 것은 불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즉 다른 파열음과 같은 방법으로 파생되었다면 ㅂ의 모양은 ㅁ위에 한 획이 더해진 형태(ㄱ-ㅋ, ㄷ-ㅌ, ㅈ-ㅊ의 관계처럼)여야 한다는 것이다.
ㆁ자의 유래에 대한 설명도 기존과 다르다. 많은 중국 단어는 ng으로 시작하는데 세종대왕 집권 시기 즈음의 중국에서는 앞에 나오는 ng는 [ŋ]으로 발음하거나 발음하지 않았으며, 이런 단어가 한국어로 차용되었을 경우에도 이는 묵음이었다. 또한 논리적으로 추론 가능한 ng음의 모양은 ㄱ에서 가로 획을 제한 모양인데, 이는 모음 ㅣ과 구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세종대왕은 가로 획을 제한 ㄱ에 묵음이라는 뜻의 ㅇ을 더해 ㆁ을 만들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이는 단어 중간 혹은 끝에서의 [ŋ]의 발음과 단어 처음 부분에서의 묵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었다.
중국어를 표기하기 위한 다른 글자는 ㅱ이었는데 훈민정음은 이를 微(미)의 초성이라 설명했다. 이는 중국 방언에 따라 m 혹은 w로 발음되는데 한글에서는 ㅁ([m])과 ㅇ의 조합(이에 대응되는 파스파 문자에서는 [w]로 발음한다)으로 만들어졌다. 파스파 문자에서 글자 밑에 환형의 모양을 그리는 것은 모음 뒤의 w를 의미했다. 레드야드는 ㅱ자의 'ㅇ'모양이 이 과정을 통해 만들어 졌다고 주장했다.
마지막 증거로 레드야드는 ㄷ의 좌측 상단에 작게 삐져나온 형상(입술 모양으로)은 파스파 문자의 d와 유사하다는 점을 들었다. 이러한 입술 모양은 티베트 문자의 d인 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만약 레드야드의 이러한 기원설이 사실이라면 한글은 파스파 문자→티베트 문자→브라미 문자→아람 문자를 거쳐 결국 중동 페니키아 문자의 일족에 속하게 된다. 하지만 파스파문자는 세계의 다른 고대문자들처럼 상형문자일 뿐만 아니라 각 글자가 한가지의 음을 나타내지 않고, 그 문자를 사용하던 언어권에 따라 각기 다른 음을 가졌을 것이기 때문에 한글과 같이 소리를 표기하는 문자와의 상관관계는 레드야드 혼자만이 인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2009년 국어학자 정광(鄭光)은 훈민정음이 36개 중국어 초성을 기본으로 하는 등 파스파 문자로부터 일부 영향을 받았지만 글자를 만든 원리가 서로 다르며, 자음과 모음을 분리하여 독창적으로 만든 문자라고 반론하였다.[31]
생김새가 한글과 비슷한 문자가 있어서 한글 이전의 고대문자에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는데, 우연히 닮은 경우이거나 신뢰할 수 없는 출처를 근거로 하고 있다고 설명된다.
송호수는 1984년 《광장(廣場)》 1월호 기고문에서 〈천부경〉과 《환단고기》〈태백일사〉를 참조하여 한글이 단군 시대부터 있었고, 단군조선의 가림다문(加臨多文)에서 한글과 일본의 아히루 문자가 기원했다고 주장하였다.[32] 이에 대하여 국어학자 이근수는 《광장(廣場)》 2월호의 기고문을 통하여 과학적 논증이 없는 이상 추론일 뿐이며, 참조한 고서의 대부분이 야사임을 지적하였다.[33] 또한 가림토 문자는 《환단고기》의 저자로 의심되고 있는 이유립이 한글의 모(母)문자로 창작한 가공의 문자일 가능성이 높아[34] 이러한 주장은 역사학계 및 언어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신대 문자 중에서도 모습이 한글과 비슷한 것이 있어 이를 가림토와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신대 문자가 새겨져 있는 비석마다 문자의 모습이 달라 일관성이 없고 언어학자들이 추정하는 고대 일본어의 음운 구조와도 맞지 않으며,[35] 신대 문자가 기록되었다고 하는 유물 거의 전부가 18~19세기의 것이고 에도 시대 전의 것을 찾을 수 없는바, 신대 문자라는 것은 고대 일본에 문자가 있었다고 주장하기 위한 에도 시대의 위작이며, 특히 그 중에 한글과 비슷한 것들은 오히려 한글을 모방한 것임이 밝혀졌다.[36]
1983년 9월 KBS가 방영한 8부작 다큐멘터리 《신왕오천축국전》은[37] 구자라트 문자를 소개하면서 '자음은 ㄱ, ㄴ, ㄷ, ㄹ, ㅁ, ㅅ, ㅇ 등이고, 모음은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의 열 자가 꼭 같았으며, 받침까지도 비슷하게 쓰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개천학회 회장 송호수[38] 는 1984년 이를 인용하면서 '자음에서는 상당수가 같고, 모음은 10자가 꼭 같다는 것이다'라고 썼다. 그는 구자라트 문자가 가림토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39][40]
그러나 구자라트 문자는 문자 구성상 자모로 완전히 분리되는 한글과는 달리 모든 자음이 딸림 모음을 수반하는 아부기다이며, 데바나가리 문자에서 수직선을 제거한 데바나가리 파생문자로서 다른 인도계 여러문자와 친족 관계가 명확하게 밝혀져 있기 때문에 이는 구자라트 문자의 특정 글자체와 한글 사이의 표면적 유사성에 대한 착오일 뿐이다.[41]
한글은 2009년에 처음으로 인도네시아의 소수 민족인 찌아찌아족의 언어인 찌아찌아어를 표기하는데 사용되었다.
이밖에도 한국에서는 한글을 표기 문자로 보급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으며 2012년 솔로몬제도의 토착어를 한글로 표기하여 교육하는 활동이 시작됐다. 2012년 10월부터 시행된 것은 2개 언어이며 결과에 따라 솔로몬제도 전역으로 확대할 예정이다.[42]
간혹, 영어 발음을 정확하게 표기하기 위해 옛한글 등을 부활시킨 표기법을 연구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 역시 개인 연구자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이 아닌 사람이 만든 인공어618-Vuro[깨진 링크]나 인공 문자 井卜文(Jingbu Script) 등에서 일부 한글 또는 한글을 모티브로 한 문자를 개인 수준에서 사용한 예를 볼 수 있다.
ㄱㄲㄳㄴㄵㄶㄷㄸㄹㄺㄻㄼㄽㄾㄿ
ㅀㅁㅂㅃㅄㅅㅆㅇㅈㅉㅊㅋㅌㅍㅎㅏ
ㅐㅑㅒㅓㅔㅕㅖㅗㅘㅙㅚㅛㅜㅝㅞㅟ
ㅠㅡㅢㅣㅤㅥㅦㅧㅨㅩㅪㅫㅬㅭㅮㅯ
ㅰㅱㅲㅳㅴㅵㅶㅷㅸㅹㅺㅻㅼㅽㅾㅿ
ㆀㆁㆂㆃㆄㆅㆆㆇㆈㆉㆊㆋㆌㆍㆎ
ᄀᄁᄂᄃᄄᄅᄆᄇᄈᄉᄊᄋᄌᄍᄎᄏ
ᄐᄑᄒᄓᄔᄕᄖᄗᄘᄙᄚᄛᄜᄝᄞᄟ
ᄠᄡᄢᄣᄤᄥᄦᄧᄨᄩᄪᄫᄬᄭᄮᄯ
ᄰᄱᄲᄳᄴᄵᄶᄷᄸᄹᄺᄻᄼᄽᄾᄿ
ᅐᅑᅒᅓᅔᅕᅖᅗᅘᅙᅚᅛᅜᅝᅞᅟ
ᅠᅡᅢᅣᅤᅥᅦᅧᅨᅩᅪᅫᅬᅭᅮᅯ
ᅰᅱᅲᅳᅴᅵᅶᅷᅸᅹᅺᅻᅼᅽᅾ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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ᆰᆱᆲᆳᆴᆵᆶᆷᆸᆹᆺᆻᆼᆽᆾ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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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1=
이(가) 있지만 |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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