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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 “다산, 한강[冽水]가의 삶과 꿈”>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한강을 이루는 ‘두미’․‘두물머리’, 여기에서 다산은 태어났습니다. 두 물이 큰물로 아우러지는 이곳은 향후 실학의 회합이라는 그의 운명과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30여년 넘는 서울과 강진 등의 타지 생활에서도 그의 마음은 항상 고향에 남아 있었습니다. 특히 기약 없는 해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강진에서의 18년, 연구와 저술에 열정을 태우면서도 그는 아득하게 먼 한강만을 그리워했습니다. 그곳은 부모형제와 처자식이, 님이 계신 곳이었습니다. 다산은 한강을 열수洌水로 불렀습니다. 1818년 강진에서 돌아온 한강에 사는 사람임을 자처했습니다. 그리고 18년을 고향에서 살다가 한강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산은 유유히 흐르는 강물 위로 무수히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한강을 통해 사람과 세상을 발견하였습니다. 평생의 고민이자 꿈은 민생을 위한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의 종합을 통한 부국강병이었습니다. 그가 태어난 지 25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한강을 바라보며 또다시 다산을 떠올려봅니다. 한강에서 품었던 다산의 삶과 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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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부(1872년 지방지도) Map of Gwangju |
소내(정선의 《경교명승첩》중에서) 牛川 U-Cheon |
우천은 “갈대가 무성한 개울, 강”이라는 ‘쇠내’를 말하는데, ‘소내’․‘소천’․‘초천’ 등으로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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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내苕川에서의 생활 Dasan's life at Sonae
다산에게 소내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그곳에서의 그물치기와 낚시는 그의 일상이었고, 집 뒤의 철마산, 운길산과 수종사, 강 너머의 천진암 등은 부친을 모시고, 형제들과 함께, 어느 때는 벗들과, 때론 홀로 즐겨 찾았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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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외증조부, 윤두서 자화상 Yun Du-seo's Portrait
복제 고산 윤선도기념관 Nokudang |
다산 정약용(1935년 동아일보 삽화) Jeong Yagyong's Portrait(Illustration) |
다산은 평소 “나의 정신이나 외모 대부분은 외가에서 받았다”고 밝혔다. 그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말 한대로 외탁을 한 그 모습은 외증조부인 윤두서(1668∼1715)에서 조금은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라네. 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다산이 7살 때 지은 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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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건강을 걱정하는 아들의 편지, 부주전상서 父主前上書 Jeong Yagyong's Letter
감기로 고생하는 아버지의 안부와 좋은 녹용을 구하려고 하는데 어렵다는 사정을 전하며, 가능한 한 빨리 가서 뵙겠다는 다산의 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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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들과의 만남과 서학西學 Meeting with Friends and Western Stu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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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에게 올린 이가환의 정책 방안 錦帶殿策 Yi Ga-hwan's Policy Measures 복제 국립중앙도서관 THE NATIONAL LIBRARY OF KOREA
이가환李家煥(1742∼1801)이 정조에게 올린 정책안이다. 땅은 계란 노른자와 같고 하늘은 계란 껍질과 같아 360도가 상응하기 때문에 하늘과 땅에 남북극이 있고, 밤 낮의 길고 짧은 이유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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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전이 매부 이승훈에게 보낸 편지 丁若銓簡札 Jeong Yakjeon's Letter
1778년(정조 2) 수원화성박물관 Suwon Hwaseong Museum
이승훈은 다산 형제가 맡겨둔 돈으로 여러 자료를 구입하여 그들에게 제공하곤 하였다. 이 편지에서는 이번에 보내는 돈과 지난번 맡긴 것을 합하면 6냥 50전이 니, 활자본으로 된 《근사록 近思錄》을 구해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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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에서 그리운 한강 Longing for the Han River in Exile at Gangjin
강진에 온 지 6년, 결혼 30년을 맞은 부인 홍씨에게서 온 치맛자락, 다산은 거기에 자신의 마음을 다시 담는다. 그리고 몇 년 후 이를 자식들에게 전한다. ‘하피첩霞帔帖’이다. 두 아들에게는 사대부로서의 행동과 마음가짐을 훈계했고, 시집가는 딸에게는 집안의 화락을 기원했으며, 막내딸에게는 위로의 마음을 매화가지에 앉은 새로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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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이 그린 매화 그림, 매화병제도 梅花幷題圖 Ume Flowers
고려대학교박물관 KOREA UNIVERSITY MUSEUM |
매화나무에 앉은 한 마리 새, 매조도 梅鳥圖 Ume Flowers
복제 개인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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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과 부인 홍씨가 함께 보내는 세상 살아가는 길, 하피첩 霞帔帖 Hapi-cheop 1810년(순조 10) 복제 개인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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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천의 사계 與聖華苕川四時帖 Dasan's poems for four seasons of Socheon |
한강에 돌아와, 후세의 기약 Return to the Han River, Promises to future generations
18년 강진에서 다산의 저술은 경세학의 체계화라는데 특징이 있다. 조선후기의 사회현실을 변혁하기 위한 변법적 개혁론의 전개였다. 그중에서도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심서》의 ‘일표이서一表二書’는 다산 사상의 핵심이다. 그는 “나는 조선 사람이다. 기꺼이 조선의 시를 쓰겠다”고 선언하였다. 또 조선은 중화문화에 부속되어 있는 나라가 아니고,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을 체득하였다. ‘조선인’에 대한 주체적 인식이 바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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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지원록》과 《매씨서평》의 마무리, 다산의 고민 茶山簡札 Jeong Yagyong's Letter 19세기 개인소장
1834년 송애松厓에 사는 친척에게 보낸 편지이다. 병중에 《지원록知遠錄》의 미흡한 점을 교정을 하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 다산은 1834년 봄에 《상서고훈수략尙書古訓蒐略》과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을 합편하여 《상서고훈尙書古訓》으로 정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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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변법적 개혁론의 핵심, 경세유표 經世遺表 Gyeongse-yupyeo |
지방관의 행정 지침서, 목민심서 牧民心書 Mokmin-simse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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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벌 규정의 기본 원리를 설명한 흠흠신서 欽欽新書 Humhum-sinseo |
우리나라의 역사지리에 대한 저술, 我邦疆域考 Abang-gangyeok-go A study on Jeseon's Historical Geography
고려대도서관 KOREA UNIVERSITY LIBRARY |
다산학의 구성과 성격 茶山學的構成與性格 The Composition and Character of Dasan's Studies
18년 강진에서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이후 자연 다산을 중심으로 제자들이 모여들게 했다. 양반 자제뿐만 아니라 강진의 아전과 승려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 시기 다산의 방대한 저작 과정은 제자들과 분업화된 공정을 거쳤다. 이를 ‘다산학茶山學’으로 규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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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마다 농가의 모습을 읊은 농가월령가 農家月令歌 Nongga-woelreong-ga 19세기 19th 정학유 丁學游 Jeong Hagyu 연세대도서관 YONSEI UNIVERSITY LIBRARY |
《아방강역고》를 계승한 《동환록》 東寰錄 Donghwan-rok 1859년(철종 10) 윤정기 尹廷琦 Yun Jeonggi 규장각한국학연구원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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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과 이인행이 벌인 학술 논쟁, 송이익위논남북학술설 送李翊衛論南北學術說 Academic debate between Dasan and Yi Inhaeng 19세기 복제 개인소장
1822년 10월 회갑을 지낸 다산이 퇴계의 후손인 이인행李仁行(1758~1833) 사이에 있었던 학문 논쟁이다. 두 사람은 근기 학인들의 고증적 경향과 분석적 경학연구 태도, 영남 학인들의 창의적 주장없이 배운 것에 안주하는 태도를 문제 삼아 벌인 토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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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과 문산 이재의李載毅가 주고받은 시 二山唱酬帖 Exchanged Poems between Dasan and Munsan 19세기 복제 개인소장 |
다산의 큰 아들 정학연의 시 酉山詩帖 Jeong Hagyon's Poems 19세기 복제 개인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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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종사 가는 길 水鍾詩遊帖 The Road to Sujong Temple 19세기 복제 개인소장
다산의 아들 정학유가 초의선사와 수종사에서 나눈 시들과 홍현주의 그림이다. 말에 탄 사람에게 수종사는 높기만 하다. |
근대의 길에 대한 모색, 조선학의 발전 Groping along the modern Path, the Development of Korean Studies
다산의 거대한 담론은 한강에서 출발하여 거기서 완성되었다. 평생 자신의 학문성과에 대해 “알아주는 사람이 적고 꾸짖는 사람만 많다면, 천명이 허락해주지 않는 것으로 여겨 한 무더기 불속에 처넣어 태워버려도 괜찮다”고 했던 그였다. 하지만 다산은 현실과 이상의 간극에서 그 꿈을 제대로 펴지 못했다. 회갑을 넘어 스스로를 ‘사암俟菴’이라 불렀듯이 그는 후세를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서거한 지 100년 후, 우리는 국권을 상실한 질곡의 역사를 겪고 있었지만, 그의 학문은 조선학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이후 또 80여년이 흘러 탄신 250년을 맞았다. 그가 염원했던 민생과 부국강병은 현재진행형이다. 두 물이 합쳐져 큰물이 되었듯 다산의 거대한 사유를 마음에 담아내야할 때이다.
다산의 생애 Dasan's Life
본관 나주羅州, 자는 미용美鏞·송보頌甫, 시호는 문도文度
1762년(영조38) |
광주 초부면 마현리(남양주 조안면 능내리)에서 정재원과 해남윤씨의 3남으로 출생 |
1765년(4세) |
천자문을 배움. 2세 때 앓은 천연두로 오른쪽 눈썹이 셋으로 갈라져 흔적이 남게 되어 삼미자三眉子로 불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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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15세) |
관례를 치르고 약용若鏞이라는 관명冠名을 얻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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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좌랑 홍화보의 딸 혜완惠婉과 혼인. 서울 남촌으로 이사. |
1777년(정조1) |
이가환李家煥과 매형 이승훈李承薰을 쫒아 이익李瀷의 유고를 읽고 사숙. |
1779년 |
형 약전과 성균관 승보시陞補試에 합격. |
1783년(22세) |
초시와 회시에 합격, 진사가 되어 선정전宣政殿에서 정조를 처음 만남 |
1784년 |
두물머리의 배에서 이벽에게 서교西敎에 대한 이야기를 들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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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정조13) |
주교사舟橋司에 배속되어 주교 설치 공사의 규제를 만듬. |
1791년 |
호남에서 천주교도 박해로 진산珍山 사건이 일어나 천주교와 절교. |
1792년(31세) |
화성의 설계를 명령받고 거중기를 설계하여 공사비 4만냥 절약. |
1794년(정조18) |
경기도암행어사로 나가 연천, 파주, 장단 등을 감찰 |
1800년(39세) |
정조 승하로 고향으로 돌아와 초천에서 강학, 여유당與猶堂의 편액을 달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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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순조1) |
신유사옥으로 투옥되었다가 강진으로 유배. |
1805년(44세) |
백련사에서 혜장惠藏과 교유. 고성사의 보은산방寶恩山房으로 이사. |
1806년 |
강진 읍내 이학래李學來 집으로 이사. |
1808년(47세) |
만덕사 서쪽의 다산茶山으로 이사. |
1809년 |
초의선사와 교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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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년(순조18) |
유배지에서 풀려나 고향 마현으로 귀향. 호를 ‘열수洌水’라고 함. |
1822년(61세) |
회갑을 맞아 스스로 묘지명墓誌銘을 지음. 호를 ‘사암俟菴’이라고 함. |
1836년(순조36) |
부인 홍씨와 회혼일에 고향 마현에서 별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