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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봄 창원
최춘해
먼저 가슴이 따뜻해진다.
내가 자란 산과 들이 떠오른다.
어머니 얼굴이 떠오른다.
소꿉동무들이 생각난다.
이원수 선생 얼굴이 떠오른다.
덥석 손을 잡고 반갑게 맞이하던
엄마 품처럼 따뜻하던 선생님
무엇이나 닮고 싶었던 선생님
멀리 떨어져 있어도 기댈 수 있었던
나를 키워 주시고 아껴 주신 선생님
시의 길에 길잡이가 되었던 말씀이
내 첫 시집 머리말로 타일러 준다.
고향의 봄이 태어난 창원이 있어
이원수 선생을 다시 만난다.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꽃 속에서 피어나는 선생님 얼굴
창원이 있어 고향의 봄이 태어났고
고향의 봄이 있어 고향이 살아난다.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절로 생긴다.
우리 겨레가 영원히 부를 노래
고향
먼저 가슴이 따뜨해진다.
내가 자란 산과 들이 떠오른다.
어머니 얼굴이 떠오른다.
소꿉동무들이 생각난다.
창원의 꽃 피는 산골은
저마다 품고 있는 나의 산골이 되고
창원의 꽃동네 새동네는
저마다 살았던 내 동네가 된다.
창원이 있어 고향의 봄이 태어났고
고향의 봄이 있어 고향이 살아난다.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절로 생긴다.
고향의 봄은 영원히 부를 민족의 노래
열리는 문 외 1편
최춘해
나한테 엄마 젖을 빼앗긴
언니 입처럼
앙
다문 문
참 밉다.
엄마가 뽀뽀해 주었을 때
언니 입처럼
배시시
열리는 문
참 예쁘다.
따돌림을 당한 아이 외 4편
최춘해
동희는 외톨이다.
잘났다고 뽐낸 탓이다
외톨이가 된 게
동희만의 잘못일까?
우리 반 아이들 중 누가
화해를 끌어낼 수는 없었을까
누가, 내가 될 수는 없었을까
나를 노리는 건 없다
길을 가다 보면
큰 나무가 길을 안내한다.
산에 들어서면
꽃들이 웃음으로 맞이하고
새들이 노래를 불러준다.
가끔 딸기나 으름도
먹어보라고 내민다.
아무도 나를 해치지 않는다.
올챙이나 작은 물고기는
늘 불안하다.
산토끼는 저보다 힘센 것에
잡힐까봐 늘 귀를 쫑긋 세워
둘레를 살펴야 한다.
고라니, 노루도 둘레가 무서워
마음 편할 날이 없다.
힘센 코끼리도 사자도
마음 편할 날이 없다.
나를 노리는 건 없다.
다람쥐와 나
내 곁에 있어 주기만 한다면
뭐든지 다 해 주고 싶다.
알밤도 도토리도 주었다.
먹지도 않고 자꾸 달아나려 한다.
심장이 몹시 할딱거린다.
오들오들 떤다.
내가 무척 무서운가보다.
텔레비전에서 보니
뱀, 지렁이, 하늘소, 두꺼비들과
한 집에서 서로 몸을 맞대고
즐거워하는 아가씨도 있던데…….
하느님! 다람쥐에게
사랑하는 내 마음을 전해 주소서.
다 까닭이 있지(1)
- 추운 날
왜 날씨가 추울까?
봄날처럼 따뜻하면
할머니와 사는 내 친구
연탄 걱정 안 해도 될 텐데.
하늘이 자욱하게 눈이 내리고
눈이 하얗게 덮인 세상,
먹이를 찾아다니는 산짐승과 새들.
그들을 위해 먹이를 뿌리는 사람.
날씨가 춥지 않으면
볼 수가 없잖아.
다 까닭이 있지(3)
-팔을 다친 날
축구를 하다가 팔을 다쳤다.
여러 날 병원에 다녀도
좀처럼 낫지 않는다.
다른 사람은 괜찮은데
왜 나만 다쳤을까?
팔이 없는 아이를
병신이라고 놀린 적 있지.
팔 없는 아이가
얼마나 불편한지
겪어보라고
나한테 내린 벌이다.
1억천만 원 수표
-신문을 보고
최춘해
천 원짜리처럼 얇게
봉투 속에 숨겨서
구세군 냄비에 넣은
1억천만 원짜리 수표
돈도 가리고
이름도 가리고
몰래 넣은 천사
못 배운 한이 있거나
어릴 때 헐벗고 배곯았던
아픈 사연이 있는 분일 게다.
덜 먹고 덜 쓰고
아껴 모은 돈일 게다.
돈 있다고 거들먹거리며
얼굴 내밀기 좋아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일 게다.
오른손으로 좋은 일 한 걸
왼손도 모르게 해 온 분일 게다.
추위가 매서운 날 길거리에서
얼굴을 가리고 손 내민 걸 보고도
지갑에 손이 오그라드는
나같이 못난 사람들
가슴을 철렁하게 했을 게다.
할머니와 동생이 눈에 밟혀
-T.V를 보고
학교에서 주는 급식을 받아 놓고
먹지 않고 있는 어린이.
아침도 못 먹고 배가 고파도
할머니와 동생이 눈에 밟혀
혼자 먹을 수가 없다.
아버지는 전쟁에 나가 죽고
어머니는 동생을 낳다 죽었다.
할머니는 늙어서 일을 못 한다.
어린 손자를 굶기는 것이
할머니의 죄인 양
‘’누가 내 대신 저 아이들 데리고 가서
배불리 먹여 키워주세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지만
헤어지는 아픔은 참겠단다.
영혼이 있다면
-신문 기사를 읽고
죽은 어머니 영혼이 있다면
칼로 찌른 아들 곁을 몰래
쫓아다니겠지.
죽은 시체를 골방에 숨겨 놓고
가출을 했다고 속이고
별일이 없었다는 듯
평소처럼 학교에 다니고
애인을 만나 시시덕거리고…….
얘야, 네가 내 아들이 맞냐?
고분고분 따르던 아들이었는데,
첫째 가는 대학교에 가서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서
가장 좋은 자리에 취직할 아들이었는데…….
얘야, 야구 방망이 한 대 칠 때마다
의지가 굳어지리라 믿었다.
성적이 계속 오르리라 믿었다.
엄마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점점 쌓여지리라는 건 미처 몰랐다.
얘야, 너는 내 아들이다.
너를 용서해주고
네가 잘 되는 길이 있다면
너를 도와주고 싶다.
어서 얼굴을 드러내고 용서를 빌어라.
내 말을 너한테 전할 수가 없으니
답답하구나.
겨울 풀
최춘해
내가 잠잘 때
내가 이불을 차 던지고
감기나 걸리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 내 곁을 못 떠나는
우리 엄마처럼,
묵은 풀은 제 허리를 꺾어서
온몸으로 새싹을 덮어 주고 있다.
바람막이가 되고 싶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늘
-초겨울에
최춘해
철 그르게 꽃을 피우는
보랏빛 메꽃,
연보랏빛 구절초.
빨갛게 단풍 든 붉나무 잎사귀
노랗게 물 든 은행잎
시퍼렇게 떨고 있는 무 잎사귀
삼동추가 목이 마르다고
물을 주고 있는 할아버지
저마다 오늘이 소중하다.
弔詩
조금씩 나아진다는 말만 믿고
언젠가는 일어나리라 생각했습니다.
1월 26일 오후 1시에 돌아가셨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을 가까운 자리에서 만난 것은
45년 전 대구아동문학회 월례회 자리
고 이응창 선생 자택이었습니다.
훤출한 키에 순수한 얼굴이었습니다.
운이 따랐는지 대구아동문학회 모임 외에
산절로 등산 모임이며
선주문학회 모임에서 자주 만나게 되었습니다.
첫 인상 고결한 성품은 한결 같았습니다.
여 선생님이 없는 산절로 등산은
빈 자리가 너무 허전했습니다.
‘어렵거든 기라’는 당신 말씀을
등산이나 일상생활 신조로 삼았습니다.
산이 좋아 매주 오르던
가야산, 금오산, 팔공산, 지리산, 삼도봉
칠갑산, 소백산, 속리산, 신선골
이 산들이 눈에 밟혀 어찌 떠나시렵니까?
선산에서 선주문인협회를 창립하시고
대구문인협회 회장도 되어
형제처럼 아끼고 보살피던 회원들,
그들이 눈에 밟혀 어찌 떠나시렵니까?
존경하는 여영택 선생님,
선생님은 깨끗하신 선비셨습니다.
적은 것이라도 폐를 안 끼치려 하셨습니다.
고결하신 성품을 본받고 싶었습니다.
선생님은 참 부지런하신 분이십니다.
또 유능하신 분이십니다.
1956년 동아일보에 시로 등단하고
시집, 동시집, 동화집, 수필집, 최면학 등
수많은 책과 눈문을 냈습니다.
선생님은 외유내강하신 분이십니다.
작품집 내용을 살펴보면
작품 저변에는 불의에 대한 항거
애국애족심이 깔려 있습니다.
문집 아닌 저서에는 ‘걱정거리 풀이’
‘예문, 축문, 고유문’, ‘울릉도 전설, 민요’
이 저서들은 서민의 고충을
들어주려는 이웃 사랑 마음입니다.
이 귀한 분을 놓치고 싶지 않지만
하느님의 뜻인 걸 어찌하오리까?
이제 남은 일들은 후학들에게 맡기시고
편히 쉬십시오. 명복을 빕니다.
2012년 1월 29일
최춘해 삼가 올립니다.
어머니
최춘해
보고 싶어도 눌러 참으며
기다리던 어머니
온몸으로 맞이하던 어머니
미리 대문에 나와서
기다리던 어머니
애태우며 기다릴 어머니가
지금은 어디에도 안 계신다.
어머니가 앉아 있던 빈자리
여름 가는 소리 외 1편
최춘해
한여름 미루나무 숲에서
장마철 강물 같은
힘찬 매미 소리는 들리지 않고
이사 간 집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쓰레기같이 지저분한 풀벌레 소리.
아직도 새 주인은 들어오지 않고
여름이 떠나가느라
어수선한 숲 속의 소리
봄
- 금호강을 걸으며-
명주 수건을
목에 감은 듯,
엄마 비둘기가
아기 비둘기를 부르는 듯
부드러운 물결.
할머니가 불러주는
자장가 같은 바람
엄마 품속 같은
햇살.
물위에 짝 지어 다니는
오리들,
엄마 아빠 손잡고
강둑을 걷는 아이들.
눈썹까지도 하나되어서
최춘해
지방마다 색 다른 모습으로
강물처럼 자유롭게 모여서
손과 손을 잡은 하나의 바다.
출렁거리는 선수들 물결
잘한 선수에겐 박수쳐 주고
꼴찌에게도 박수를 보내주는
사랑 넘치는 전국체육대회
불끈불끈 용솟음치는 힘을 보면
나한테도 없던 힘이 절로 솟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절로 터져 나오는 응원 소리
팔공산도 우쭐우쭐
비슬산도 우쭐우쭐
날아가는 새들도 응원을 한다.
손이 잘해서 1등을 했지만
팔다리와 눈과 귀, 입과 코
눈썹까지도 하나가 된 열매다,
대표 선수가 상을 받았지만
이웃 사람 모두가 하나되어
마음 모아 힘을 보태 준 열매다.
오늘의 영광은 우리 모두의 것.
우리나라 구석구석
어린이, 젊은이, 늙은이
하나가 되어 즐기는 잔치다.
상을 받은 사람은 받아서 즐겁고
축하해 주는 사람은
박수를 치면서 즐겁다.
손에 손잡고 사랑 노래 부르자.
흙 85
최춘해
물이 바다로 갈 수 있는 것은
흙이 물 앞에서
낮게 엎드려 따라오라고
안내를 해 주기 때문이다.
흙은 늘 낮은 데로
안내를 한다
겸손하라고
가르친다.
물은 흙의 말을
참 잘 듣는다.
흙 86
최춘해
흙이
“이제 그만 자고
밖에 나가라.” 하면,
순순히 잘도 나가는 뱀, 개구리
“따뜻하고 환한 세상에
나가 보라.”고 하면
궁금해서 얼른
고개를 쏙 내미는 새싹.
뱀도 개구리도 새싹도
흙 말을 참 잘 듣는다.
흙 87
-흙은 나무의 엄마-
최춘해 cmchoi18@hanmail.net
흙은 나무 엄마.
흙이 나무보고
이제 그만 일어나거라 하면,
얼른 눈을 떠 본다.
잎눈, 꽃눈.
웃는 모습이 보고 싶어
발을 간질이면
온몸으로 깔깔깔 웃는다.
활짝 핀 벚꽃.
흙은 나무가 기특하다고
젖을 꿀컥꿀컥 먹여 주고
바람은 귀엽다고
살랑살랑 가지를 흔들어 준다.
흙 89
-차리고 있다.
바람 타고 오는
민들레 씨, 솔씨, 풀씨…….
언제 어디에 내려앉을지 몰라
흙은 늘 차리고 있다.
품에 안으려고
두 손 모아 기다린다.
낭떠러지 바위 틈 소나무
보도블럭 틈새 민들레
엄마 곁에서 힘이 나는 나처럼
흙의 힘을 믿고
씩씩하게 자란다.
입추 다음날 아침
8/23
아침 일찍 금호강 둑을 걷는다.
어제까지도
더위에 지쳐 있던
나무와 새들
나뭇가지에
참새들이 나란히 앉아서
“이제 살았다. 살았어.”
짹짹짹짹
참새 말을 듣고
나무들도 좋아서 우쭐우쭐
경천대
기암괴석
바위 틈새로 뚫려진 구멍
명주실꾸리가 다 풀려도 모자랄 만큼
깊은 소
발 딛기가 아슬아슬
신비스럽게 공구어 놓은 바위
바위 틈새에 뿌리 박은
낙락 장송
강물 건너편엔
금빛 모래
이 소에서 난 용마를 타고
저 사장에서
정기룡 장군이 훈련을 했단다.
낙동강 1300리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하느님이 만들었다는
자천대.
우복 정경세
정국진을 교육장으로 모시면서
정경세를 만났다.
우복집만큼 저서가 많지는 않지만
소설책, 수필집도 냈다.
경상감사, 부제학 벼슬은 못 되지만
교육장을 지냈다.
존애원을 만들어
무료로 백성들 치료해 주지는 않았지만
교원들에게 추앙을 받았다.
정경세가 있어
도남서원이 생기고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 류성룡
대학자들을 만난다.
1196년 고려 이규보로부터 시작한
낙강시회
끊길 듯 이어져서
올해 60회를 맞는다.
상주 선비 정신이 대대로 이어진다.
영원히 살아있는 우복 정경세 선생.
사벌국
상주시 사벌면 화달리에 있는
사벌국 왕릉
초등학교 소풍 때 보고
산 만하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사는 곳에
왕릉이 있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1500년쯤 전에
우리 조상들은
사벌국 백성이었다.
나는 사벌국 후손이다.
우리 고장에
사벌국이 있었다는 게 자랑스럽다.
장보고
-국립부산해양박물관에서
장보고가 있어
이곳 부산 해운대에
부산해양박물관이 생겼다.
장보고를 만나서 반가웠다.
중국에서 무령군소장이었다가
우리나라 청해진 대사가 되어
해적을 소탕하고 있었다.
신라 사람들과 함께
배에 물건을 가득 싣고
중국을 지나 서양으로 가고 있다.
백성을 끔찍이 사랑하는 마음도
읽을 수 있었다.
오륙도 풍경을
덤으로 구경하고 있다.
탈곡 연장들
-울산박물관에서
나락을 손으로 훑다가
나무 두 토막으로 만든
훌치기(벼훑이)로 흝으며
편리하다고 생각했지.
챗돌에 태질을 하면서
편리하다고 생각했지.
왜롱왜롱왜롱 탈곡기
풍구가 나와서
세상 참 편리하다고 생각했지.
내가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겪었던 가을 마당 풍경
할아버지, 할머니, 작은아버지, 숙모
아버지, 어머니 돌아가신
조상들을 한자리에서 만났다.
조상들은
기계로 나락을 베면서
포대기에 나락을 담아 오는
지금의 편리한 세상은 모른다.
나도
앞으로 다가올 더 편리한 세상은
못 볼 것이다.
양산 통도사
-벽화를 보면서
2012. 9/19
가마에 타고 저승 가는 사람
용이 이끌고 하늘을 난다.
뒤에는 조문객과 가족이 따라간다.
벽화를 보면서
다가올 내 모습이 보인다.
내가 탄 가마 뒤에는
아들딸 손자손녀들이 따르고
제자들 얼굴도 보인다.
마지막 가는 길인데도
이승에서 잠깐 여행 떠나듯
그저 그런 느낌이다.
나는 살 만큼 살았고
후회 없이 살았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울거나 슬퍼하지 마라
여행을 떠나듯이
배웅해 달라,
내가 평소에 가족들에게
늘 하던 말이다.
코란
-터키 문화전을 보며 (1)
2012. 9.19.
나는 아직 성경을
금박 글자로 적은 것을 보지 못했다.
코란처럼 맨 윗자리에 모셔 놓은
성경을 보지 못했다.
아랍 사람들은
알라는 유일신이다.
복종해야 할 절대 신이다.
코란에 쓰인 말과 어긋나면
목숨 받쳐 대항하는 걸
영광으로 생각한다.
성경을 금박 글자로
책을 만들지 않아서,
성경을 코란처럼
받들지 않아서 그럴까?
하느님을 위해
이슬람 신자만큼
목숨 바칠 수 있을까?
-믿음이 부족한 자의 반성
향로
-터키 문화전을 보며 (2)
축제나 기도 뒤에
반드시 향을 피우는 향로
그 중심에는 알라가 있다.
향로 뚜껑 모양이
사이프러스 나무다.
사이프러스 나무가
알라를 상징하는 나무다.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나무다.
은과 금으로 만든 향로
알라를 받드는 마음이다.
2012.10/2
모스크 장식
-터키문화전을 보며 (3)
깃대 장식 안에도
알라가 들어 있다.
마디가 있는 긴 몸체 위
등근 거울 안에 쓰인 글자
‘신은 한 분이 시다.’
그 한 분이 누구일까?
알라이다.
이 큰 모스크 안에
손, 튤립, 손도끼, 양귀비 등
수많은 장식마다
알라는 다 들어 있을 것이다.
※ 모스크: 이슬람교의 예배하는 건물
2012.10/2
천장 장식
-터키문화전을 보며 (4)
오스만. 17세기
무덤에서 발견된 구형 장식품
금속에 보석을 박아 만들었다.
나는 이만큼 권위가 있는
술탄이란 걸 보이기 위해
값비싼 보석을 박았다.
추장, 술탄, 왕
약한 자를 억누르는 이름들
권위의 그늘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들이 보인다.
2012. 10/2
인연 (1)
2012. 10/3
눈이 다 감기고
목젖이 다 보이도록
깔깔깔깔 웃고 있다.
활짝 펴진 얼굴
돌에 그려진
세 살배기 아이
아무데나 버려져 있을 돌이
귀여운 아이가 되어
내 책상 앞에서
웃음을 전염시키고 있다.
아이를 선물한
소중애님의 환한 웃음도 보인다.
인연 (2)
2012.10/3
카네이션 꽃이 웃고 있다.
지난 스승의 날
책상 위에 와서
사뭇 환하게 웃고 있다.
책상 앞에 앉을 때마다
반갑게 맞이한다.
어떤 아이의 옷감이 될 수도 있을 천이
붉은 것은 꽃잎이 되고
녹색은 잎사귀가 되었다.
카네이션 꽃을 갖다 준 아이의 향기가
카네이션 향기보다 더 진하다.
우리 집 마당의 향나무
2012./10/3
해님이 주는 햇살
돌아오는 몫만큼만 받고
비 오면 비 맞고
가물면 가문 대로
그렇게 40년을 살았다.
아무 생각이 없었는 줄 았았는데
개미가 먹을 양식도 마련하고
진디물이 먹을 양식도 마련했다.
참새가 쉬어 갈 자리도 마련하고
어치 아기가 놀 자리도 마련했다.
곤충들의 양식 터
새들의 놀이터가 된 향나무는
마음이 흐뭇하다.
<여영택 선생의 인간과 작품 세계>
관조적이고 서민적이며 순수한 인간 본성의 세계
최춘해
내가 여영택님을 만난 것은 1965년도쯤일 것으로 짐작된다. 글짓기 교사로 어린이들을 인솔해 와서 백일장에 참석했었다. 달성공원 앞 원화여자중고등학교에서 유양 백일장이 있었고, 대륜고등학교에서도 백일장이 있었다. 그때 여영택님은 심사위원으로 소개가 되었다. 얼굴 모습이나 태도가 아주 부드러운 서민형으로 보였다. 키가 크고 풍골이 풍만한 데도 위압적이거나 관료적이지 않고, 오래 전부터 정답게 사귀던 분처럼 느껴졌다. 인솔 교사로서 멀리서 우러러 봤습니다. 그러다가 1967년에 대구아동문학회에 회원이 되어서 자리에 함께하게 되었다. 청구주택에 사시는 이응창 회장님의 댁에서 모임을 가졌었다. 이응창 회장님을 비롯하여 여영택, 박인술, 윤운강, 신송민, 윤혜승, 이민영, 김성도, 김진태, 정휘창 등 연세도 높으시고 고결하신 분들이라서 무척 조심이 되었다. 술이라도 대접하고 싶었지만 후배한테 폐을 끼칠까봐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자녀들 결혼식도 있었을 텐데, 한 번도 청첩장을 받은 적이 없었다. 여영택님과 가까워진 것은 산절로 등산회와 여행을 통해서였다. 등산을 할 때는 매실이나 포도, 또는 돌배나 대추 등 집에서 담근 과일주를 한 병씩 가져왔었다. 여 선생님은 과할 걸 하면서도 권하는 술을 물리치지는 않았다. 그래서 요두출수(搖頭出手-머리는 흔들면서 손은 내서 술을 받는다)라는 말이 나왔다. 그만큼 술을 좋아하셨다. 술을 좋아하는 것만큼 유머도 있었고, 거나하면 춤도 곧잘 추셨다. 그 춤이 경박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애환이 담긴 여 선생님만의 독특한 춤이었다. 공국진의 춤과 비슷하다고 할까. 절 근처에 가면 기왓장을 주웠다. 기와에 새겨진 우리 조상들의 아름다운 무늬를 수집하기 위해서다. 심지어 중국을 여행하면서도 몰래 기왓장을 주워 왔다. 한방 치료를 좋아하셨고, 자연의 식물을 이용한 민간요법을 즐기셨다. 단식을 즐기셨는데, 아침을 거르셨다. 나도 여 선생님을 따라 6개월간 아침을 먹지 않은 적이 있었다. 여 선생님은 우리 조상들의 문화와 전통, 슬기를 이어받으려고 했다.
여간 급한 사정이 아니면 택시를 안 타려고 했고, 배낭끈이 떨어진 것을 손수 꿰매서 오래 메고 다녔다. 남에게 신세지는 것을 꺼렸다. 자신에게는 이렇게 인색하면서 명절 끝에는 이웃 사람들을 청해서 대접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음력 명절을 하는데 여 선생님은 양력 명절을 할 때가 있었다. 또 경북문화상 상금을 받아서 봉투째로 선주문학회에 기증을 하기도 했다. 전통을 소중히 여기고 자연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은 작품 세계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인연이란 참 묘한 것이어서 89년에 여 선생님을 선산에서 만났다. 그때 선산에는 고인이 된 윤종철씨가 시집을 냈을 뿐 등단한 사람이 없었다. 선주문학회는 결성돼 있었으나 등단한 사람이 3인 이상이 되지 않아 한국문인협회 지부를 결성할 수 없었다. 필자가 들어가서 3인 이상이 충족되어 한국문협선주지부가 결성되었다. 회장을 맡았던 여영택 선생이 대구광역시 대구지회장으로 뽑히자 그 후임으로 필자가 1년을 맡았다가 구미문협회장이 되면서 선주지부 회장을 후임에게 물려주었다. 여영택 선생이 회장으로 있을 동안 회원들을 격려 하고 문학하는 자세와 작품합평을 통해서 회원의 자질을 향상시켰기 때문에 회원들의 작품 수준도 많이 향상되었다. 여영택님의 순수한 문학 열정은 그 뒤에도 이어져서 선주문학이 꽃을 피우고 있다. 사심 없는 순수한 마음은 만인을 감동시킨다는 걸 느꼈다.
‘여영택님은 글자 한 자나 낱말 한 개도 신중히 닦고 갈아, 정성과 진실로써 짜임새 있는 유머와 위트, 그리고 은은히 풍겨 오는 신비성과 아름다운 정이 넘치는 작가이십니다. 때로는 비둘기 가슴처럼 부드럽지만, 때론 폭포같이 쏟아지는 격정을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위의 글은 동시 동화집 ‘이름난 차돌이’에 이응창 회장의 머리말이다.
여영태 선생의 인성과 작품 세계를 짧은 말로 잘 나타냈다고 생각된다.
영영택님은 동시, 동화, 시, 시조, 수필, 평론 등 여러 장르에 걸쳐서 작품을 썼다.
가. 동시
먼저 동시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동시 동화집으로 ‘이름난 차돌이’ 1966년 발행, 동시집 ‘웃음꽃’ 1994년 발행 등이 있는데, 이 중에서 여영택 선생이 가장 먼저 발표한 동시 1편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작품집 <‘74 한국아동문학 연간집>과 <’94 한국문화예술진흥원 한국문학 작품선>에 발표한 동시 2편, 그리고 <‘97 대구아동문학 창립 40주년 기념호>에 여영택 자신이 선택한 대표작 4편을 대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1. 관조적이고 서민적인 소박한 시의 세계
새싹 뽀얀 새싹
용감한 새싹
땅 가죽 뚫고 솟는
난초 난초가 있지.
새싹 빨간 새싹
어여쁜 새싹
바위 틈 스며 돋는
작약 작약이 있지.
새싹 다팔다팔
새싹 까끌까끌
새 나라 떠받치는
우리 우리가 있지.
(‘새싹’ 전문-1949. 3. 20. <새싹>에 발표)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딱딱한 땅을 뚫고 솟아나는 난초가 참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난초가 나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참 대견하고 용감하다는 생각이 든다. 난초뿐만 아니라 작약 새싹도 솟는다. 그뿐이겠는가, 땅을 뚫고 솟는 것은 난초 작약 외에도 많다. 새싹들을 보고 있으면 나도 들판을 달리고 싶고 뭔가 해 보고 싶다. 그냥은 못 있고 해 보고 싶다는 마음을 다팔다팔 까끌까끌이라고 나타냈다. 해 보고 싶은 게 나라를 떠받치는 일이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 난초, 작약 새싹을 물활론의 눈으로 보았다. 물활론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동심이요, 인간의 본성이다. 순수한 인간의 본성이 있었기에 이런 동시가 태어난 것이다. 1949년에 쓴 것이라서 아직 동요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2,3연이 모두 4줄로 돼 있고, 끝줄은 난초 난초가 있지, 작약 작약이 있지. 우리 우리가 있지. 똑같은 말이 되풀이 되었다.
사물탕 한 사발 먹으면
앞집 아이 이기고
사물탕 한 사발 더 먹으면
뒷집 아이 이기고
사물탕 한 사발 또 더 먹으면
옆집 아이 이기고
사물탕 자꾸 먹으면
강감찬이 된다지.
사물탕 자꾸 더 먹으면
김유신이 된다지.
사물탕 또 자꾸 더 먹으면
이순신이 된다지.
사물탕 한 제 더 먹어야
외갓집에 간단다.
(‘사물탕’ 전문-1976. 6. 20. <‘74 한국아동문학 연간집> 발표)
약한 아이는 앞집 아이한테도 지고 뒷집 아이한테도 지고, 옆집 아이한테도 진다. 그래서 이 아이의 소원은 앞집, 뒷집, 옆집 아이를 이기는 것이다. 이 아이들을 이기려면 사물탕을 먹어야 한단다. 사물탕을 많이 먹으면 전쟁에서 이긴 강감창 장군도 될 수 있고, 김유신 장군도, 이순신 장군도 될 수 있다고 한다. 이 시의 시적 화자는 강감찬, 김유신, 이순신 같은 장군이 된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런 거창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내가 제대로 걸어서 외갓집에 가는 소박한 꿈이다. 여영택 선생은 남의 눈에 번쩍 띄는 위대한 사람보다는 서민적인 소박한 꿈을 그렸다.
2. 가족애
할머니 말씀은 못 알아듣겠어
뜨거운 그릇 쥐고 차다고 하고
얼음을 만지며 뜨겁다 뜨겁대.
귀여워하시면서 밉다고 하고
엄마를 부르며 아기라 하고
할아버지한테는 임자라 하고
살려고 일하는데
죽자고 일한다며
내일은 서쪽에서 해 뜬다기에
서쪽을 보다가 지각할 뻔해.
(‘할머니·3’ 전문-1994. 12. <한국문화예술진흥원 한국문학 작품선> 발표)
반어법으로 가족애를 그린 시다. 할머니는 뜨거운 그릇을 쥐고도 차다고 하고, 얼음을 만지며 뜨겁다고 한다. 할머니는 가족을 위해서라면 뜨거워도 참고, 찬 것도 참는 습관이 되어 있다. 내가 참아서 가족을 안심시키고 싶다. 할머니가 나를 귀여워하는 것을 다 알고 있는데, 밉다고 한다. 귀여워한다는 말이 밉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다. 죽자고 일한다는 말, 서쪽에서 해가 뜬다는 말들도 모두 가정의 화목을 위한 말이다. 죽자고 일한다는 말은 온 정성을 다 바쳐서 일한다는 뜻이다. 가족을 위해 죽자고 일하는 것이 행복한 것이다. 서쪽에서 해가 뜬다는 것은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했을 때 쓰는 말이다. 손자가 아주 기특한 짓을 하는 것을 보고 한 말일 것이다. 여기 쓰인 말들이 모두 가정의 화목을 위해 쓰인 반어들이다. 할머니가 엄마를 부를 때 아기라고 한 것도 귀여운 아기처럼 며느리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이 시를 읽으면 웃음이 나오면서 화목한 가정이 연상된다. 여 선생은 평소 이야기 속에도 이런 반어법을 많이 쓴다. 평소 풍부한 유머가 시에도 나타난 작품이다.
3. 생물사랑
부끄럼 잘 타는
암놈 십자매
둥지에서 사부작 보일동 말동
홰를 잘 타는
수놈 십자매
둥지를 지킨다고 눈알이 반짝반짝
몇 마릴까 비비비
새끼 십자매
귀가 간지럽다 들릴동 말동
놀랄라 조용조용
십자매 식구
TV만화도 오늘은 참자.
(‘십자매’ 전문- <대구아동문학 창립 40주년 기념호> 발표)
십자매를 잘 관찰한 내용이다. 암놈 십자매가 알을 까고 수놈 십자매가 둥지를 지키고 있는 모습, 갓 태어난 아기 십자매가 울부짖는 소리 등을 자세히 관찰했다. 자세히 관찰한다는 것은 관심이 많다는 뜻이고 더 나아가 사랑한다는 뜻이다. 관심이 없으면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십자매 새를 사랑하는 마음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다.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평등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작고 그늘진 곳에 있는 생명들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여영택 선생은 평소에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았고, 부당한 걸 보면 그대로 두고 보지 못한다. 불의에 대해서는 태풍처럼 거세지만 작고 여린 것에 대해서는 솜털처럼 부드럽다. 십자매 몇 마리가 들릴동 말동 비비비 소리를 듣고는 십자매 식구가 놀랄까봐 ‘TV만화도 오늘은 참자.’고 한다.
4. 어린이 사랑
자면 울리고 싶다.
울면 재우고 싶다.
야무지게 쥔 주먹
또박또박 새긴 글자들.
왼손 손 안엔 복 복 자지.
오른손 손 안엔 목숨 수 자지.
살며시 펼라치면
싫어하는 모습이 싫지 않구나.
(‘아기’ 전문- <대구아동문학 창립 40주년 기념호> 발표)
자면 울리고 싶고 울면 재우고 싶다는 어린이를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이다. 어린이가 사랑스럽기 때문에 자는 아이도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다. 마주 보며 마음을 나누고 싶다. 우는 모습도 사랑스럽고 손가락 발가락도 사랑스럽다. 살며시 펼라치면 싫어하는 모습도 사랑스럽다. 왼손을 펴서 손금을 보면 복 복 자가 보이고, 오른손을 펴 보면 목숨 수 자가 보인다. 아기를 사랑의 눈으로 보니까 목숨 수자가 보이고, 복 복자가 보인다. 여영택 선생은 이렇게 어린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시 시조 수필 평론 등 일반 문학을 하면서도 아동문학을 버릴 수가 없다. 아니 아동문학에 더 관심을 가졌었는지도 모르겠다.
5. 꿈이 있는 어린이
착 잠잔 봄옷을
일깨워 입힌다 가칠한 손이.
개나리 내가 풍긴다
좀약 냄새가 난다.
짧은 소매 잡아당기면
봄 서늘음이 간지러운 양 어깨.
다리어 접친 금을 손으로 다려 보는
엄마 입가는 웃음살
구멍 났던 오지랖에 나비가 앉고
거울 속 내 얼굴에 보조개 핀다.
(‘봄옷’ 전문- <대구아동문학 창립 40주년 기념호> 발표)
새봄을 맞이하는 마음이다. 농 속에서 잠자고 있던 봄옷을 아이한테 입힌다. 봄옷을 일깨워 입힌다고 했다. 살아 있는 봄옷이다. 새로운 희망과 꿈을 입히는 것이다. 봄옷을 입으면 옷에서 개나리 내가 나고 새 세상을 향해서 하늘을 날 듯 부푼 꿈이 생긴다. 그런 내 마음을 읽고 엄마는 입가에 웃음살이 생긴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내 얼굴에 보조개가 핀다. 여영택 선생은 아이들에게 꿈을 키우고 싶었다.
나. 동화
다음은 동화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불의에 항거하는 마음
동시 동화집 ‘이름난 차돌이’의 표제 작품과 유여촌 선생의 회갑 기념 작품집 ‘바람을 그리는 어린이’에 실린 ‘등대지기의 딸’ 두 편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름난 차돌이’는 생활 동화이다. 이제 막 1학년에 입학한 차돌이의 순진한 행동과 어른들의 잘못된 점을 나타냈다. 입학하고 며칠 뒤에 일어난 일이다. 차돌이는 이웃에 있는 정남이와 일찍 학교에 갔다. 복도에서 달리다가 정남이가 넘어졌다. 복도는 초칠을 하고, 석필로 닦고, 걸레질하고, 쌀겨로 닦고 해서 여간 미끄럽지 않다. 차돌이와 정남이는 고무신으로 운동장 모래를 담아 와서 복도에다 뿌렸다. 자빠진 데뿐만 아니라 여러 군데 뿌리고 고무신으로 모래를 문질렀다. 그러고 나니 덜 미끄러웠다. 그걸 보고 선생님이 차돌이와 정남이를 교무실에 데리고 갔다. 교감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께 꾸중을 들었다. 교실에 와서 담임 선생님께도 꾸중을 듣고 벌로 교실 앞에 불려 나와 꿇어앉았다. 아이들이 편리하게 다녀야 할 복도를 윗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반질반질하게 닦아서 윤기가 나게 만들었다. 미끄러워서 불편하기 때문에 모래를 뿌린 차돌이가 교장 선생님보다 더 낫다는 걸 꼬집은 것이다.
차돌이가 목이 말라서 물을 찾았으나 아무 데도 물이 없다. 그때 마침 물을 들고 교장실로 들어가는 사환 아이를 보았다. 차돌이는 사환 아이를 따라 교장실에 들어가서 물을 달라고 했다. 그때 미국에서 교육사절이라고 하는 귀한 손님이 와 있었다. 교장 선생님은 난처하지만 하는 수 없이 물을 따라 주게 했다. 교장 선생님은 나중에 아이를 꾸짖으려고 차돌이를 붙잡고 명찰을 보며 반 이름과 아이 이름을 적었다. 사절단은 차돌이가 물 먹는 모습을 찍었다. 물이 먹고 싶어서 교장실에 와서 물을 달라고 하는 순진한 마음을 귀엽게 보지 않고 버릇없다고 꾸짖으려는 교장 선생님의 잘못된 생각을 꼬집은 것이다. 사절단이 미국에 가서 차돌이가 물을 먹는 순진한 모습을 책에 싣고 교장 선생님이 아이들을 이렇게 사랑하고 있다고 칭찬하는 말을 적어 놓았다. 그걸 보고 교장 선생님은 반성을 했을 것이다.
그밖에 사친회비를 독촉하는 이야기, 가정방문 이야기, 교실 환경구성 이야기 등 당시의 학교에서 어느 학교에나 있었던 어른들의 잘못을 꼬집어 놓았다. 학교의 주인은 어린이들인데, 어린이들이 편리하게 이용하도록 학교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데도 어린이 편에서 생각하지 않고 상부 관청에 보이기 위해서 환경을 만들려고 하는 잘못을 지적한 여영택 선생의 정신을 읽을 수 있다.
2. 약자를 귀하게 보는 정신
‘등대지기의 딸’도 생활 동화이다. 끝분이는 어둡기 전에 등대에 불을 켜는 일을 하는 등대지기 아빠와 엄마 셋이 살고 있다. 둘레에는 집이 없다. 다만 사철 꽃이 곱게 피고 동백, 후박, 감탕나무, 향나무, 소나무, 횃솔나무, 섬잣나무들이 어울려 멋진 경치를 이루고 있다. 울릉국화, 섬뿌리향, 만년초들의 꽃 향기가 사철 끊이지 않는다. 끝분이는 외롭게 지낸다. 아빠 엄마가 해 주는 이야기도 이제는 다 아는 이야기가 돼서 새 이야기가 듣고 싶다. 한 달에 한두 번 오는 우체부가 새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래서 끝분이는 우체부를 기다린다. 오랜만에 우체부가 왔다. 왜 나한테는 편지가 안 오느냐고 묻는다. 네가 편지를 보내야 편지가 온다고 가르친다. 끝분이는 빨간 단풍잎과 푸른 동백잎을 하얀 봉투에 넣고 봉투에 주소를 그려 넣었다. 밤마다 창문에 제일 높이, 크게 비치는 별나라였다. 우체부는 끝분이 편지를 받아 가방에 넣고 다음에 올 때는 편지를 가져 오겠다고 했다. 내 편지가 오기를 무척 기다리고 있을 때, 편지가 왔다. 봉투 한쪽에는 별이 그려져 있고, 한쪽에는 끝분이의 동그랗고 반짝이는 두 눈이 그려져 있다. 안에는 하얀 종이에 여러 가지 색깔의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끝분이가 편지를 읽는다. 아빠 엄마 우체부들이 웃으며 듣고 있고, 비둘기들도 듣고 있었다. “끝분아! 네가 보내 준 편지 잘 받았어.……” 별에서 보내 온 편지는 한없이 길었다. 또 읽고 또 읽었다. 같은 편지이지만 읽을 때마다 쓰인 이야기는 다르다. 끝분이가 읽는 한없이 긴 편지를 듣다가 날이 저물었다. 너무 늦으면 도깨비 나온다고 하니까, 끝분이는 도깨비가 보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도깨비가 보고 싶다고 했다. 바람 소리가 날 때마다 끝분이는 도깨비가 오는가 문을 열어 본다.
외딴 섬 가운데서도 마을에서 십 리나 떨어진 곳에서 등대지기 일을 하는 가족의 이야기다. 내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갈 끝분이가 주인공이다. 마을에서도 십 리나 떨어진 산꼭대기에 살고 있으니 사람을 만날 수 없다. 한 달에 한두 번 오는 우체부를 만나는 것이 낙이다. 그래서 우체부 오는 날만 기다리고 있다. 우체부와 이야기가 나누고 싶어서 날이 저물어도 우체부를 보내 주지 않는다. 날이 저물면 도깨비가 나온다고 하니, 도깨비라도 보고 싶다고 했다. 뿔이 난 무서운 도깨비라고 해도 이야기만 재미있게 해 주면 좋다고 했다. 끝분이 엄마도 도깨비라도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외로운 사람의 마음이 잘 드러난 내용이다.
끝분이가 별나라에 보낸 편지는 글씨로 쓴 편지가 아니고, 단풍잎과 동백잎 편지이다. 주소도 그림으로 그린 별나라이다. 별나라에 보낸 편지 답장을 우체부가 여러 가지 색깔의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 한 장이다. 우체부가 답장을 받고 싶어하는 끝분이 마음을 채워 주기 위해 봉투 한쪽에는 별이 그려져 있고 한쪽에는 끝분이의 동그랗고 반짝이는 두 눈을 그렸다. 봉투 안에는 여러 가지 색깔의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을 그려 넣었다. 끝분이가 그 그림 편지를 자기 생각대로 만들어서 읽는다. 끝분이는 별한테 듣고 싶은 말이 많아서 끝이 없다. 그래서 편지가 한 없이 길다. 듣고 싶은 이야기를 만들어 읽기 때문에 읽을 때마다 다르다. 그렇게 만들어 읽는 것을 엄마와 우체부 그리고 비둘기들도 귀 기울여 들어 준다. 얼마나 티 없이 아름다운 모습인가.
다. 시
1. 순수한 서정성
⓵자정 가까운
지하철 종점
막차 선반의 핸드백 하나
곤히 혼자서 한잠을 자네
잠 못 잘 주인을 꿈에 만났나
수잠 잔 나는야 바삐 내려야
별이 총총
발길 드문드문
자정 가까운
지하철 종점 (‘종점’ 전문)
⓶파편 쌓인 거리
피 묻은 기와 쪽을 밟고도
만지대는 꽃포기
아름다움
한 포기 이끼를 자랑삼는
매화 늙은 가지가지.
조 가지 기르는 심사가 이 땅 다스린다면,
아!
난초 앞에서 난초 잎과 가벼이 소스라치는 찰나.
국화에 사로잡혀 도도는 맴.
나를 잊은 나.
이 높은 고요 행여나 상하리
눈을 사르르 감아 깃을 여미는 마음. (‘담향’ 전문)
⓷칡뿌리밥 먹는 이를 위하여
뻐꾸기 울어 보리가 익고,
오월 길 바쁜 나그네
뻐꾹뻐꾹 걸음 재촉한다.
오막살이 샘가에선 농주가 익고,
삼밭 옆 사래 긴 감자가 자꾸만 굵어진다.
뻐꾸기 소리 듣다가
배가 고파서
식은 밥 상치 싸 먹고,
뻐꾸기 소리 들으니
낮잠이 온다. (‘뻐꾸기’ 전문)
⓸내 방 가까이에
내 하숙방 가까이에
분홍 고무신 한 켤레 놓여 있다.
그 옆에 나란히
내 신을 벗어 놓아 본다.
하얀 눈을 맞으며 뜰에서는
동백이 빨갛게 웃고 섰다. (‘생각’ 전문)
⓹맑은 물에 거위나 치며
시간을 달래고 싶다.
비알진 산기슭에 대추나무나 가꾸며
시간을 달래고 싶다.
울도 없이 사슴을 기르다가 녹각이 떨어지면 녹각이나 찾으며
시간을 달래고 싶다.
벗이 멀리서 오면 숯불로 구기자잎 차나 다리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달래고 싶다.
별들이 들어다보는 들창 밑에 탁자를 놓고 동화나 다듬으며
시간을 달래고 싶다.
언제나 어디서나 근사한 싯귀가 우러나면 싯귀나 적으며
시간을 달래고 싶다.
싱숭한 밤이면 퉁소로 도깨비를 불러 모아 일장 연설을 하며
시간을 달래고 싶다. (‘멋’ 전문)
위의 시 ‘종점’에서는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에 막차를 타고 종점을 향해 가면서 선반위에 놓인 핸드백을 본다. 핸드백을 의인화해서 핸드백이 꿈에 주인을 만났을 걸 생각했다.
아무도 찾지 않는 핸드백 임자에 대해서 관심이 커졌다. 수잠을 자면서 핸드백을 지켜보고 있다. 종점에서 내릴 때도 핸드백은 그대로 있다. 지하철 종점에서 내려 자정 가까운 시간에 발길이 드문 길을 총총한 별을 보며 걸으면서도 사뭇 선반 위에 얹힌 핸드백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남을 배려하는 순수한 서정을 그렸다.
‘담향’에서는 파편 쌓인 거리에 핀 꽃포기, 가까이에 서 있는 매화나무, 그리고 난초와 국화 등을 물활론의 눈으로 보고 서로가 정을 나누는 그윽한 향기로 다가왔다. 이고요가 행여나 상할까봐 눈을 사르르 감아 깃을 여민다고 했다.
‘뻐꾸기’에서는 보릿고개 시절에 우리 농촌의 모습을 그렸다. 칡뿌리 밥을 먹고 배는 고팠지만 뻐꾸기가 울고 농주가 익고, 뻐꾸기가 감자가 굵어라고 울어 주는 농촌의 서정을 그렸다. ⓸‘생각’에서는 내 하숙방 가까이에 분홍 신 한 켤레 놓인 것을 보고, 그 옆에 내 신을 나란히 벗어 놓아 보는 생각을 해 본다. 그 모습을 동백꽃이 하얀 눈을 맞으며 보고 웃고 있다고 했다. 참 아름다운 서정이다.
⓹ ‘멋’에서는 순수한 마음을 그대로 나타냈다. 맑은 물에 거위나 치고 비알진 산기슭에 대추나무나 가꾸고, 울도 없이 사슴을 기른다고 했다. 별들이 보이는 들창 밑에서 동화를 쓰고 시를 쓰면서 지내겠다고 했다. 얼마나 순수한 마음인가.
2. 불교 정신을 담은 시
석가가 그리워서
찾은
청암사.
목련을
못 잊어서
못 떠나겠네.
다문 채웃어 뵈는
눈언저리가,
범어로
얼버무려
사랑한다고.
이슬비
들거들랑
하속하라네. (‘목련’ 전문)
여영택 시인은 불교 정신이 바탕에 깔려 있다. 그 중에서 ‘목련’ 은 불교 정신이 진한 시이다. 석가모니가 그리워서 정암사에 가서 목련을 만났다. 범어로 얼버무려 하는 말을 들었다. 사랑한다고, 또 이슬비 들거들랑 하속하라는 말을. 목련의 말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귀가 밝다.
3. 우리의 역사가 담긴 시
다가서 보니 아무것도 안 보인다.
물러서 보니 실마리가 보인다.
톺아서는 삼고 삼아서는 사려 담는 모시 광주리.
톺아서는 삼고 삼아서는 사려 담는 역사.
밤에 삼은 모시가 도리어 많다.
밤에 삼은 역사가 얼이 더 많다.
천 년을 사려 담은 모시 광주리.
천 년을 사려 담은 역사 광주리;
넘쳐도 사려 담는 실이 실실실
보아도 안 보이는 얼이 얼얼얼
다가서 보니 아무것도 안 보이겠지.
물러서 보니 실마리가 보인다. (‘역사 옆에서’ 전문)
이 시에는 우리 조상들의 생활이 담겨 있다. 우리 조상들은 질삼을 해서 식구들의 옷을 만들어 입었다. 이 시에는 모시 삼는 것만 나왔지만 서민들은 주로 무명 옷, 삼베옷을 해 입었다. 낮 시간만으로는 시간이 모자라서 밤을 새워서 질삼을 했다. 밤에 삼은 모시가 도리어 많다. 밤에 삼은 역사가 얼이 더 많다. 고 했다. 그 일을 천 년이나 계속했다. 그것이 생활이자 역사였다.
4. 자연 친화 사상
가슴에 갈무린 가장 높은 산.
가슴에 가꾸는 가장 아름다운 산.
오밤중에 찾아도
여깄다
앞에 와 서는 산.
오리만 나들이려도
제가
지레 감발하는 산.
내가 노다니자
저도 노다니다가도
마당에만 들어서면
먼저 와 웃으며 맞아 주는 산.
책을 사 오다가
너를 잃어 걱정이더니
마을에 들자
땀을
닦아 주던 산.
지금 멀리서 걸어 볼라치면
저도 나다녀 계면쩍은 상
아직도 열두 살이냐
묻기도 하는 산.
매죽산. (‘매죽산’ 전문)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여 시인은 몸져눕기 전까지 평생 산에 다녔다. 그만큼 자연과 친했다. 이 시에서는 매죽산을 가장 아름다운 산이라고 했지만 모든 산, 아니 자연을 다 사랑한다. 오밤중에 찾아도 여깄다고 하고 오리만 나들이하려고 해도 먼저 감발한다고 했다. ‘감발’ ‘노다니다’ 는 토속적인 말이다. 여 시인은 다른 시에서도 토속적인 말을 많이 쓴다. 감발이란 짚신을 신을 때 벗겨지지 않도록 신을 묶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나갈 준비를 한다는 뜻이다. 자연을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이 순수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산과 대화를 한다.
5.풍자적 해학적인 시
⓵어릿광대다.
너도 어릿광대
지구도
우주도 어릿광대
신도 조작된 어릿광대다.
어릿광대가 손뼉을 치란다.
어릿광대가 웃어대란다.
어릿광대가 슬퍼하란다.
진실로 손뼉을 치고 싶을 때 한밤중 혼자라도 손뼉을 치마.
진실로 웃고 싶을 때 이불 속 혼자라도 웃어 주마.
진실로 슬플 때 웃다간들 혼자 슬퍼 못 하랴!
어릿광대야!
모두가 어릿광대야! (‘어릿광대 1’ 전문)
⓶들창을 열어 놓았더니
방에
별들이 들어와
팔을 베고 누웠다가
벌떡 일어선다.
거기 사정을 물으니
시끄럽기는 매일반이나
여기처럼 물고 뜯지는 않는다.
지구촌쯤 잿더미로 만들기는 오뉴월 식은 죽 먹기나
만유인력 계산 관계도 있어
두고 본단다.
한 만 년쯤 참으면
힘세고 날뛰는 놈은 염라대왕이 다 잡아가니
나를 봐서라도 참자고 우주에서 수의가 됐단다.
별들의 생각이 하도 기특해
짚신장이별이랑 몇몇 더 불러
엽차 한 잔씩 돌리는 참이다. (‘어릿광대 13’ 전문)
⓵ ‘어릿광대 1’에서는 정작 광대인 얼럭광대가 아닌 어릿광대는 얼럭광대 행세를 하는 가짜인 것이다. 너도 지구도 우주도 신도 가짜 광대라고 했다. 진짜 광대가 아닌 가짜가 손뼉을 치라고 하고, 웃어라고 하고 슬퍼하라고 하니 하기 싫다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걸 어릿광대로 본 것이 특이하다. 이 세상을 모두 못 믿겠다는 것이다. 가짜가 많기 때문에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⓶ ‘어릿광대 13’에서는 진짜 아닌 것으로 가정을 하면 별들이 들창으로 들어와서 팔을 베고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서 하는 이야기도 있을 수 있겠다. 어릿광대는 해학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여영택님은 어릿광대 연작시를 많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