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는 누구인가 ?
1. 김홍도의 삶
단원 김홍도는 조선후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로 영조 21년(1745)에 태어나
순조6년(1806)경까지 약 60년간을 살았으며.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사능(士能),
호는 서호(西湖), 단원(檀園), 단구(丹邱,丘 ) 등을 사용했다.
단원 김홍도는 풍속화의 대가로 알려져 있지만, 풍속화는 물론이고 산수화,
영모화, 초상화, 인물화, 기록화 등 모든 그림을 잘 그렸으며,
나라에서 으뜸가는 화가였다.
일곱 살부터 안산에서 표암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웠고, 19세때에 안산에서 모여 그린
균와아집도에서 보면 강세황,심사정,최북,허필 등이 함께 그린 합작도에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함께 모여있는 작품속에 화가의 일원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도화서 화원 시절인21세 때 1765년 10월 11일 영조가 경현당(景賢堂)에서
수작(受爵) 행사를 그린 경현당 수작도(景賢堂 受爵圖) 병풍의 제작 사실이 첫 기록으로 확인된다.
김홍도는 도화서 화원 집안의 출신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는 유력한 화원 집안들이 대대로 도화서 화원직을 세습하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화원집안 출신이 아닌 사람이 도화서에 들어가 최고의 화가가 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자기 능력만으로 최고의 화가로 성장했으며, 정조가 가장 아끼고 신임했던 화가가 된 것이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벼슬아치인 도화서 화원으로서, 임금을 지척에서 모시면서
어명에 따른 그림과 궁중 행사와 관련된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는 화원의 최대영광인 어진도사(御眞圖寫) 작업에 세 차례나 참여 했으며,
그 공로로 40세에는 경상도 안기찰방을 역임하였고,
세 번째 어용화사가 되어 정조의 어진 제작을 마치고 그 공로로 47세에 충청도 연풍현감에 제수되었다.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가계(家系)
중인 집안의 가계(家系)를 집대성한 성원록(姓源錄)에 의하면,
김홍도의 5대조(五代祖)는 수문장(守門將)을 지낸 김득남(金得男)이고,
오대조비(五代祖妣)는 전주이씨(全州李氏)이며, 고조(高祖)는 별제(別提)를 지낸 중현(重鉉),
증조(曾祖)는 만호(萬戶)를 지낸 진창(震昌)이며,
조부(祖父)는 수성(壽星), 부친(父親)은 석무(錫武)로 벼슬이 없다.
(성원록,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2. 김홍도는 어떤 사람인가
○ 빼어난 용모 (포의풍류도)
이용휴(1708~ 1782) 는 김홍도의 초상화를 보고 “오늘 김홍도군의 초상화를 대하니 옥같은 모습,
난초같은 향기가 들은 것보다 훨씬 낫구나 마치 온화한 군자의 모습 이로다”
○ 다재다능했던 예술가
스승 강세황이 김홍도에게 써주었던 단원기에는 “용모가 아름답고 속에 품은 뜻이 맑으니
성품이 또 음악을 좋아하며 매번 꽃 피고 달 밝은 저녁이면 때론 한두곡을 연주하여 스스로 즐겼다.
○ 풍류를 즐긴 호탕한 성품
조희룡의 매화흠 고사 “ 벼슬이 연풍 현감에 이르렀으나 집이 가난하여 끼니를 잊지 못하였다.
어떤 이가 매화화분 하나를 파는데 매우 기이한 것이었으니 매화와 바꿀 돈이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 돈 삼천을 예물로 보낸 이가 있었으니 이는 그림을 그려 달라는 사례였다.
곧 이천을 던져 매화와 바꾸고 팔백으로는 술 몇 말을 사서 친구들을 모아 매화 술자리를 열었으니
남은 이백냥으로 쌀과 땔감 밑천을 삼았으니 하루 생계도 되지 않았다
3. 안산에서 배출한 천재화가 김홍도
○ 스승 강세황과의 만남
조선시대 신분으로는 양반, 중인,평민,노비로 이루어졌으며 김홍도의 집안의 중인으로
1745년 태어난 김홍도는 일곱 살 전후의 어린 나이에 표암 강세황에게 그림을 익혔다.
스승 강세황은 시,서,화 삼절로 예원의 총수로 불리웠으며 강세황이 처가인 안산에 거주하였으니 단원은 유년기를 스승과 함께 안산에서 보냈으며
서호라는 안산 앞 바다의 지명이 있는 호를 처음 사용한 것과 안산의 지명이었던 단원, 단구의 호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안산에서 출생하였다고 추론 할 수가 있다
김홍도의 삶
1.궁중화가가 된 김홍도- 뛰어난 솜씨로 임금의 총애를 받다
임금도 인정했던 뛰어난 화가
홍재전서에 의하면 정조대왕이 자신의 초상을 그릴 화가로 김홍도를 지칭하면서
“김홍도는 그림에 교묘한 자로 그 이름을 안지 오래다 삼십년 전에 나의 초상화를 그리는데 이로부터 무릇 그림 일에 속한 일은 모두 그에게 맡겼다고” 하였다
2. 박달나무가 있는 뜰
타고난 솜씨로 탄생한 화가
김홍도의 조상은 무관출신으로써 그가 중인 출신이라는 것이
성원록에 기록된 가계도에 의하여 밝혀진다. 김홍도는 도화서 화원 집안의 출신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는 유력한 화원 집안들이 대대로 도화서 화원직을 세습하는 것이 관례였으므로,화원집안 출신이 아닌 사람이 도화서에 들어가 최고의 화가가 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자기 능력과 재능, 그의 타고난 그림 재질이 남 달랐음을 주는 사실로 이후 정조가 가장 아끼고 신임했던 화가가 된 것이다.
학식이 높은 문인화가
그가 쓴 여러 가지 호 가운데 대표적인 단원은 박달나무가 있는 정원으로
단원이 40세 이후 만년까지 가장 많이 썼던 호다. 강세황의 [단원기]. [단원기우일본] 에 의하면 단원이란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의 호에서 따온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그 이전 즉 안산에서 1754-1755년경 [단원아집]이라는 시회모임에
단원이란 두 글자가 김홍도 10세경부터 먼저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보면
사인의식이 배어 있는 영향이 있을 것이다.
특히 김홍도는 30대 후반에 이용휴로부터 [대우암기]를 받음으로써
이용휴의 그림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과 철학적 해석이 젊은 김홍도에게는
상당한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준 결과였다.
이때에는 이미 김홍도 역시 안산사단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김홍도 10대 때부터
안산에서 이루어진 [단원아집]이라는 시회의 명칭에서도 [단원]을
자기 호로 택하는데 영향이 컸을 것이다.
3. 국민들이 사랑했던 화가
김홍도의 그림은 조선사람 들이 갖고 싶었던 그림
김홍도는 궁중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로써 그 생활 또한 넉넉하였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남공철 같은 명문가의 자제조차 그로부터 그의 그림을 받아내기가 쉽지 않았다는 기록에서 짐작할 수 있으니 이는 김홍도가 다름 아닌 국왕의 어명에 따른 그림 제작만으로도 바빴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 된다.
국왕의 그림을 도맡아 그렸던 김홍도의 작품을 조선사람 들이 얼마나 가지고
싶어 했는지는 짐작 할 수 있는 일이다
4. 가장 조선적인 화가 김홍도
첫댓글 그런게 있어요 ? 어멍 어멍 . 나 없는줄 알았는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