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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1)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태복음 6:5~13)
기독교가 보배처럼 귀중하게 여기고 있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 무엇, 무엇일까요?
아마 이 힌트를 들으면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힌트, 이것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교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아야 할 것이기 때문에, 성경 책 앞과 뒤에 인쇄해 놓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주기도문과 사도신경과 십계명입니다.
제가 올해와 내년에는 이 셋을 가지고 설교하려고 합니다.
올해 1월에서 6월까지는 주기도문, 7월에서 12월까지는 십계명, 내년에는 사도신경을 가지고 설교하려고 합니다.
올해 1월에서 6월까지는 설교제목과 본문이 같습니다.
제목은 “이렇게 기도하라”인데, 1, 2, 3, 4, 5, 6, 번호가 붙습니다.
본문은 언제나 마태복음 6장 9절에서 13절까지입니다.
담임목사님께서 새해 첫 주일에는 “야베스의 기도”를 가지고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역대상 4장 9절과 10절,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그리고 두 주일 전에는 “아굴의 기도”를 가지고 설교를 하셨습니다.
잠언서 30장 7절에서 9절까지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기도가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이고, 제일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고, 작년과 올해 용산교회 목회의 실천목표 가운데 두 번째가 기도로서, 교회를 위한 기도, 중보기도, 특별기도에 힘쓰는 교회가 되는 것이어서 그렇게 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은혜를 참 많이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더 그랬을 것입니다.
오늘부터 매월 마지막 주일에 부족한 종이 주기도문,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을 가지고 말씀을 전하는 일도 기도에 힘쓰는 교회를 이루는데 도움이 되기 바랍니다.
주기도문을 가지고 설교하는데 체계적으로 설교하지 않을 것입니다.
느낀 대로, 떠오르는대로, 좋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로 하는 설교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필적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학에는 소설, 시, 희곡, 평론, 아동문학, 그리고 수필이 있는데. 수필을 보통 ‘붓 가는대로 쓰는 글’이라고 하지요.
수필(隨筆)의 ‘수(隨)’자는 ‘따를 수’자입니다.
여러분, 편한 마음으로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주기도문을 주제로 설교를 준비하면서 ‘아, 나는 이걸 감당하기가 참 힘이 든다’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주기도문을 깊이 묵상하면서 교훈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주기도문,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은 오늘 본문이 들어 있는 마태복음 6장에 있습니다.
누가복음 11장에도 나오는데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짧습니다.
11장 2절에서 4절까지 석 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것을 두고 ‘누가복음 11장에 있는 주기도문이 원형이고,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주기도문은 거기에 교회가 필요한 것이 더 해진 것이다.‘라고 말하는 성경학자가 있습니다.
또 ’예수님이 주기도문을 여러 번 가르쳐 주셨는데, 마태는 그 가운데 하나를 기록했고, 누가도 그 가운데 하나를 기록했다.‘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제 생각은 간단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성경에 한 번 이상 기록되어 있는 것은 무조건 중요한 것으로 아세요.‘ 하셨는데요, 저는 그 목사님의 말씀이 주기도문에도 해당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을 ‘산상수훈’이라고도 하고, ‘산상 설교’라고도 하는 데요, 우리에게 제일 익숙한 이름은 ‘산상보훈’입니다.
‘산에서 가르쳐주신 보배로운 교훈’이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귀중한 것입니다.
성경학자들 가운데는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예수님의 교훈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마태복음 5장, 6장, 7장에 모아놓았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네 제자 가운데 마태는 그렇게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기록했고, 마가는 압축해서 간결하게 기록했고, 누가는 따뜻한 마음으로 기록했고, 요한은 신학적으로 해석하며 기록을 했지요.
1960년의 일이니까 60년 전의 일입니다.
서울대학교 입학시험 일반사회 과목에 산상보훈이 무엇인지 쓰라는 문제가 출제된 일이 있었습니다.
1961년까지는 각 대학 별로 입시 문제를 출제했습니다.
그리고 정답을 지금처럼 넷이나 다섯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니고 주관식이었습니다.
1961년에 5.16이 일어나더니 국가고시 제도가 실시되고, 그것이 예비고사, 수능고사로 이름을 바꿔가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야, 저 유 목사님, 기억력 참 좋다. 어떻게 1960년에 나온 문제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단 말인가?’ 하실지 모르겠는데요, 기억력이 좋은 것이 아니고, 그때 고등학교 3학년이어서 입시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을 때인데, ‘어, 서울대학교 입학시험 문제에 성경에 대한 것이 나왔네!’ 신가하게 여겨져서, 또 반가워서 그거 하나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정답이 뭐라고 되어 있나?’ 보았더니 ‘예수가 산에서 가르쳤다고 하는 기독교 교훈의 황금률’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산상보훈은 서울대학교 입시 문제에도 나올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산상보훈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살기 위해 힘썼다고 합니다.
그의 명작 「부활」같은 것들이 모두 그런 삶의 태도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산상보훈, 그렇게 보배와 같이 중요한 교훈들 가운데 주기도문이 들어 있습니다.
대한성서공회에서 20여 년 전에 「독일성서공회판 해설·관주 성경전서」를 펴냈습니다.
이 성경이 많이 보급되었고 지금도 참고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 「독일성서공회판 해설·관주 성경전서」의 주기도문 해설 부분을 그대로 읽어 드겠습니다.
주기도문은 이미 외적으로 그리고 바로 내적으로 산상설교의 중심이며 핵심이다. 산상설교의 요구를 최종적으로
어떻게 이해할 수 있고 실행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이 기도의 정신에 마음을 열고 이 기도의 정신에서 살기
시작하는 그 정도에 따라서만 가능하다
반복해서 말씀 드리는데, 주기도문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은 아주 불쌍하다’라고 말한 분들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한 말이라고 기억되는데요, 왜 그럴까요?
‘저 구석에 있다가 아무런 영눔도 모르고 끌려나와 중얼, 중얼, 사람들의 입술에 올려졌다가 다시 구석으로 돌아가 박혀 있곤 하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들은 주기도문의 뜻을 모르고 사용하는 일이 많습니다.
주기도문은 그저 예배를 끝낸다는 것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되는 일이 많습니다.
예배를 끝낼 때 목사님이 안 계신 교회에서는 축도를 할 수 없으니까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끝내겠습니다” 하지요.
교회학교나 속회나 선교회 모임도 그렇게 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뜻을 알고 주기도문을 사용해야 합니다.
뜻도 모르고 중얼중얼, 주기도문을 불쌍하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한국교회는 얼마 전까지 90% 이상이 주기도문의 앞부분을 틀리게 외웠습니다.
장로님들도 그랬고, 목사님들도 그랬습니다.
‘그게 무슨 이야기야?’ 하시겠는데요, 제 말을 들어보면 ‘어, 정말 그랬네!’ ‘나도 그랬네!’ 하실 것입니다.
오랫동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했는데요, 맞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틀립니다.
“나라에 임하옵시며”가 아니고 “나라이 임하옵시며”입니다.
“나라이”는 ‘나라가’의 옛날 말니다.
문법적으로는 ‘주격조사’라고 합니다.
성경에 오랫동안 “나라이”로 되어 있었습니다.
1998년에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개역개정 성경을 낼 때 비로소 “나라가”로 바꿨습니다.
‘나라이’가 낯선 옛날 말이니까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나라에’로 하게 되었습니다.
‘나라이’와 ‘나라에’ 음은 비슷해도 뜻은 다릅니다.
아주 다릅니다.
‘나라이’는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나라가‘입니다.
‘나라에’는 장소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말고 다음에 말씀 드리려고 하는데, 이것은 주기도문의 아주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이고, 예수님의 핵심 교훈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첫 설교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4장 1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내용이 담긴 부분을 틀리게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라에 임하시면 그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니까 뭐 괜찮아요.’ 할 지도 모르겠는데요, 그건 좀 억지입니다.
용산교회 성도들은 특별히 주기도문의 뜻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용산 교회에서는 예배드릴 때 대표기도가 끝나면 성도들이 다같이 찬송가 635장, 주기도문으로 화답을 합니다.
모든 교회들이 다 그렇게 하지는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뜻도 모르고 부르는 찬양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주기도문은 중요하다, 주기도문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힘써 말씀 드렸습니다.
이제부터는 주기도문이 제게 미친 영향을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할 때 ‘하나님. 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많이 합니다.
‘복을 주십시오’ 하는 기도를 많이 합니다.
산상보훈이 시작되는 마태복음 5장에는 팔복이라고 해서 ‘복’이라는 말이 특별히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마태복음 5장을 특별히 좋아하고, 성경 암송대회 할 때 이 말씀을 암송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 복도 주시고 저 복도 주세요. 복을 주세요, 복을 주세요. 복을, 복을…’, 이런 기도를 ‘된장찌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된장찌개가 끓을 때 ‘보글보글’ 소리를 내지 않습니까?
된장찌개 기도를 너무 좋아하니까 ‘한국 기독교는 기복주의에 빠져있다. 샤머니즘을 닮아간다’라는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에는 무엇을 달라는 기도는 단 한 줄만 들어가 있습니다.
11절,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개신교와 천주교가 공동으로 번역한 「공동번역성서」에는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양식‘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양식‘은 먹을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를 가지고 전체를 말하는 것을 수사법에서 ’제유(提喩)‘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본문 옆에 어깨 번호를 달아 놓고, 본문 아래에 해석을 덧붙여 놓은 곳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닌외주(欄外註)라고 하는 데요, 주기도문에는 난외주가 네 개나 들어 있습니다.
11절을 보면 “일용할 양식” 앞에 ‘1)’이라는 숫자가 붙어 있고, 밑을 보면 ‘또는 내일 양식을’ 이렇게 풀이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는 지금, 그리고 앞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달라고 하는 기도가 한 줄만 들어 있네‘ 이 사실은 저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에서 시작해서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까지가 151글자인데, 나의 필요를 요청하는 기도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6자 밖에 되지 않습니다.
주기도문을 보면 하나님을 위한 내용이 훨씬 많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바랍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바랍니다‘
’아, 이것이, 나의 필요보다 하나님을 위한 기도를 더 많이 하는 것이 성숙한 기도로구나!‘, 주기도문을 통해 이것을 깨닫고, 기도를 할 때 나를 위한 기도보다 이웃을 위한 기도. 하나님을 위한 기도를 위한 기도를 더 많이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렇게 애는 쓰는데 본능적으로 자기를 위한 기도를 많이 하게 되지요.
아까 드린 말씀을 인용하면 지금도 된장찌개를 열심히 끓이고 있습니다.
그래도요, 주기도문을 생각하면서 ’나를 위한 기도보다 하나님을 위한 기도, 이웃을 위한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으니까 앞으로 점점 더 그렇게 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아니 저 목사님이 나이가 몇인데 앞으로 점점 더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하는 거야?‘ 하실지 모르겠는데요,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그 순간까지 성장하고 성숙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마 하늘나라에 가서도 그래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기도가 많이 나오는 데요, 예수님은 자신을 위한 기도를 거의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을 위한 기도,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하실 때에도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주기도문에는 나의 필요를 아뢰는 기도보다 하나님을 위한 기도가 더 많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저는 기도할 때 사무엘상 3장의 말씀을 먼저 묵상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사무엘이 기도할 때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9)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내게 어떤 말씀을 하시려는가?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명하시려는가?
이것을 알기 위해 힘쓰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기도에 이름을 붙였습니다.
경청기도(敬聽祈禱), ‘경청’은 공경할 경, 들을 청, 경청기도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기에 힘쓰는 기도’라는 뜻인데요, 이 말은 제가 만든 말은 아닙니다.
서양의 잰 존슨이라는 경건운동가가 쓴 책의 제목인데 십여 년 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출판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 하옵소서, 제가 듣겠습니다.’ 하는 기도에는 반드시 따라야 할 기도가 있습니다.
‘들은 다음에는 순종하게 하옵소서’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이 내게 명하신 길이다’ 깨달았으면 어렵더라도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이 네가 걸아야 할 길이다’ 하시면서 꽃길을 깔아주시지 않으십니다.
가시밭길을 깔아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러다가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통해 유럽쪽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유럽쪽으로 방향을 돌려 제일 먼저 빌립보성을 찾았는데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여기 왔으면 환영을 받고 꽃다발이 목에 걸리고 했어야 할 것 같은데 반대였습니다.
맞고, 갇히고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도 바울은 그 길을 갔습니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은 찬송가 158장 “서쪽 하늘 붉은 노을”이라는 찬송에서 그 길을 두고 ”눈물 없이 못 가는 길, 피 없이는 못 가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온갖 고통 다하여도 제 십자가 바로 지고 골고다의 높은 고개 나도 가게 하옵소서”하셨습니다.
요즘은 텔레비전 뉴스 보기가 참 겁이 납니다.
실제로 잘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코로나와 관련해서 교회를 비난하는 뉴스가 너무 자주 나와서입니다.
‘아, 한국교회가 지금 가시밭길을 걷고 있구나!’, 가슴이 아픕니다.
‘이 가시밭길을 걸으면서 교회가 순수해지고, 겸손해지고, 곁가지로 돋은 가시들인 이단들, 건전하지 못한 일들 정리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이런 일들을 생각하면서 ‘이길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 하나님이 명하시는 길이라면 고통스러워도 포기하지 않고 이 길을 가게 하옵소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경청기도 이야기를 한 김에 제 기도습관 하나를 더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주일 아침에 교회에 좀 일찍 오는 편입니다.
와서 자리에 앉아서 하는 일이 몇 가지 있습니다.
먼저 주보를 보고 그 날 설교의 본문이 어디인가를 확인하고 찾아 읽습니다.
될 수 있으면 여러분도 그렇게 하기를 바라는 데요, 본문을 미리 읽으면 설교를 통해 받는 은혜가 훨씬 더 큽니다.
운동을 할 때 준비운동을 하고 운동을 하면 그 운동을 훨씬 더 잘 할 수 있고 운동효과도 크지 않습니까?
본문을 찾아 읽고 그 날 교독할 교독문도 미리 읽어보고 찬송도 어떤 찬송인지 확인합니다.
그거 순서에 따라 파워포인트로 다 띄어주는데 유별나게 그렇게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너무 편한 것을 따르다 보면 수동적이 되고 경건이 약해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습니다.
초등학생들, 계산기를 너무 쓰다보면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본문, 교독문, 찬송을 확인했므면 이어 ‘교회소식’에서 교회와 교인들을 위한 기도제목들을 찾습니다.
그리고 예배 시작 전까지 기도를 합니다.
‘저 목사님, 왜 저렇게 일찍 오나?’ 오셔서 무엇하나?‘ 하시는 분이 있을지 몰라서 이렇게 해명을 합니다.
주기도문은 기도의 영원한 모범답안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하시며 가르쳐주신 기도문 아닙니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의 헬라어 원어는 ‘프로슈케스데(προσευχεσθε)’인데, ’계속해서 이렇게 기도하라‘, ’지금 그렇게 기도하라‘ ’모두 그렇게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문법적으로는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이라고 합니다.
때때로 ‘내가 기도를 바르게 드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면 주기도문을 다시 한 번 보아야합니다.
어느 야구심판이 한 말입니다.
“나는 야구 심판을 수십 년 했습니다. 야구 규칙, 훤하게 압니다. 그런데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는, 예를 들어 코리안시리즈 결승전 경기 같은 것의 심판을 맡으면 그 전 날 밤에 야구규칙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다시 봅니다.”
우리는 때때로 그런 마음으로 주기도문을 보아야 합니다.
그 심판이 한 말 가운데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홈에 뛰어 들어오는 주자를 캐처가 터치했는데, 이것이 세이프인지 아웃인지 판정하기 어려울 때가 있답니다.
그럴 때는 슬쩍 주자의 얼굴을 본답니다.
아웃인지, 세이프인지 주자는 누구보다 잘 알잖아요?
주자의 얼굴을 보면 판정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얼굴에는 예수 믿는 사람의 신실함이 나타나 있어야 합니다.
마스크 벗는 날 그런 얼굴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여러분, 지금 예수 잘 믿는 사람 얼굴 만들기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주기도문은 예수님게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선물은 받아서 잘 써야 제 값을 발휘합니다.
오래 전에 어느 권사님이 조그만 선물을 하나 주셨습니다.
약을 넣는 갑(匣)인데요, 칸을 일곱 개 만들어서 먹어야 할 약을 요일별로 넣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가 매일 혈압약을 비롯해서 몇 가지 약을 매일 먹어야 하는데 이 약갑이 퍽 도움이 됩니다.
매주 주일 아침에 그 주일에 먹어야 할 약을 주일 칸에서 토요일 칸까지 넣어둡니다.
때로는 ‘가만, 내가 오늘 약을 먹었나, 먹지 않았나?’ 자기도 모를 때가 있지요.
그럴 때 얼른 약곽을 봅니다.
비어 있으면 먹은 것이지요.
그 권사님께 “권사님 좋은 선물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를 했더니 그 권사님이 “아닙니다. 목사님이 잘 써주셔서 제가 오히려 감사합니다.” 하시더군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귀한 선물인 주기도문을 잘 활용해서 모범적인 기도, 성숙한 기도를 드리기에 힘쓰면 주님이 좋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칭찬하실 것입니다.
기도에 빨리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우리의 경건생활, 기도생활에 잘 활용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며 주기도문을 일러 주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산에서 귀중한 교훈을 가르쳐주신 주님, 제가 그 때 산에 있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어 예수님의 말씀을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 들일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일을 먼저 구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저희가 자주 기도하게 하시고, 많이 기도하게 하시고, 무엇보다 바르게 기도하게 하여 주옵소서.
매주 주기도문 찬송을 부르는 용산교회, 기도의 모범을 보이는 교회로 소문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