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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청해진(靑海鎭) 장보고유적지
장도 장보고 <청해진유적지> 초등학교 때 교과서에서나 배우고서,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너무나 아득하여 인연이 도저히 닿을 것 같지 않던 딴 세상으로 생각했던 그 청해진이 오늘 이 세상이 되었다. 아주 오래 전에 인연이 닿아 중국 산동성 위해 근처의 적산법화원에 어렵게 가볼 기회가 있었다. 재당신라인을 위한 사찰을 그 옛날에 이역만리 중국의 오지에 그런 어마어마한 규모로 갖추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래도 한국의 청해진은 여전히 더 먼 곳으로 생각되었다. 다행히 그 사이 장도 구석구석을 정비하여 당대의 시설물을 살려내고, 목교까지 설치하여 간만 때와 관계없이 언제나 걸어서 들어가 이곳저곳 돌아볼 만하고,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청해진이 되었다. 아마도 한국의 청해진은 개발되지 못하고 묻혀 있던 탓에 그렇게 더 아득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몇 개의 성문을 지나 올라가 보니 정상에서는 사방이 막히지 않고 멀리까지 다 내려다 보인다. 평화롭고 아름답기만 한 이 섬이 그 옛날 군사기지로 무역항으로 대단한 기능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귀를 기울여 보면 1,200년 전의 그 숨결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그때도 오늘날과 같이 국제적으로 다툼과 갈등이 치열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용기와 지혜가 절실했다고 말한다. 한중을 오가며 호쾌하게 활동했던 그날의 기상도 보인다. 걸출한 영웅인 장보고라는 인물에 의해 그 대책으로 마련된 청해진이 이제 깔끔하게 단장하고, 아름다운 풍광으로 휴식을 선사한다. 묻혀 있는 함성과 성취가 역사적 무게가 되어 휴식에 의미를 더한다. 교과서에서 던져준, 잊혀진 실마리를 오늘에야 실패에 묶어 제자리에 묶어 두는 것은 덤으로 얻는 성과다. 그러나 그 사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오히려 마을에서는 장보고보다 송징(宋徵)을 더 기억하며 제를 올려왔다. 송징은 삼별초 시대 선정을 베푼 인물로 추측된다. 이곳에서 발굴되는 유물도 당시의 유물이 더 많다고 한다. 송징은 1982년 장보고에 의해 갑자기 조연으로 격하되었다. 당제의 주신이 인위적으로 바뀐 것이다. 장보고가 중앙 정계의 권력 다툼에 끼어들었다가 피살된 후, 청해진 사람들은 모조리 김제 벽골 땅으로 소개되었고, 이후 벽골제 노역에 투입된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의 청해진이 신기루처럼 사라진 것이다. 그 후에는 장보고 대신 송징을 숭상하는 사람들이 정착한 것이다. 중국은 구비문학 전승이 매우 빈약하다. 구비전승의 주체인 민중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싸그리 도륙을 당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장보고보다 송징 전승이 우세한 것은 김제로의 백성 소개 때문일 것이다. 구비의 주체가 달라져 단절된 장보고 전승과 숭상을 이제라도 살려내는 것은 긴요한 일이다. 그렇다고 그 사이 이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전승과 풍속을 허술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장보고는 이미 전국구가 되어 국민 모두의 영웅이 되었다. 그래도 고향이 필요하다. 연고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사이 새로 천 년을 살아온 주민들의 문화는 그것대로 존중되어야 한다. 주신을 2인으로 하는 방법은 없나. 무속에 그런 풍속은 없는 것인가. 갑자가 600년 이상 모셔온 주신도 바꾸는데, 둘을 모시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고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다시 들어볼까, 송징 장군의 목소리가 들려오는지를. 이 섬 장도는 장군섬이라고도 불리지만, 이 고장 사람들은 진섬이라고 부른다. '진'은 '징(徵)'이 아닐까. 1991년부터 발굴을 시작해서 이처럼 아름다운 섬으로 가꾸어 놓았다. 장보고 성취의 현장을 발굴하여 확실한 연고지를 찾아주었다. 이 일로 송징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덕분에 더욱 두터워지는 역사, 더욱 깊어지는 문화의 힘으로 존숭을 더하기를 바란다. 문화와 역사는 그럴 수 있는 품을 갖고 있다. 위치 :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809 1. 둘러보기 1) 청해진 소개 중국·일본과 신라를 잇는 해상교통로의 요지에 위치하여 851년(문성왕 13)에 철폐될 때까지 해군기지·무역거점이었다. 당에서 귀국한 장보고가 서남해안에 출몰하던 당의 해적활동을 근절시킬 목적으로 흥덕왕에게 청해에 군사를 주둔시킬 것을 주청하여 허락을 받아 설치했다. 군사는 1만명이 배치되었다. 그는 청해진을 근거지로 서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중국에는 견당매물사, 일본에는 회역사(廻易使)를 보내는 등 활발한 해상무역을 전개했다. 일본의 승려 엔닌[円仁:794~864]의 〈입당구법순례행기 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최훈(崔薰)이라는 인물이 청해진 병마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청해진은 신라 지배체제의 외곽에 위치한 일종의 해상왕국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축적된 부와 군사력을 배경으로 장보고는 중앙정부의 권력전에도 관여하여 왕위계승전에 패한 김우징(金祐徵)과 김양을 받아들인 뒤 지원군을 보내어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즉위시켰다. 그러나 딸을 문성왕의 차비(次妃)로 들이려고 한 시도가 진골귀족의 반대로 무산되자 그는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가, 846년(신무왕 8) 중앙정부에서 보낸 자객 염장(閻長)에게 살해당했다. 그뒤 이창진(李昌珍) 등의 잔여세력에 의해 일본에 무역선을 보내는 등 활동을 계속했으나 851년에 청해진을 파하고 그 주민을 벽골군(碧骨郡:지금의 김제)으로 이주시키면서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청해진이 설치된 곳은 완도 본도에서 170m 정도 떨어진 장도(將島)인데 섬 둘레를 외성과 내성으로 축성한 흔적과 경사가 완만한 섬의 남서쪽에는 목책(木冊)을 설치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현재 사적 제308호 '장도청해진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다음백과) 2) 장좌리 앞 바다에 전복을 엎어놓은 듯 둥글넓적한 섬 장도(일명 장군섬)가 있다. 마을에서 장도까지의 거리는 약 180m 쯤 되고 하루 두 차례씩 썰물 때는 바닥이 드러나 걸어갈 수 있다. 이곳은 통일신라시대의 유명한 무장 장보고 장군과 그가 이룩한 청해진의 유적지이다. 장보고 장군은 이곳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여 삼해의 해상권을 장악, 신라, 일본, 당나라 3국의 해상교역에서 신라가 주도권을 장악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당시의 유적으로 장도에 외성과 내성이 있었다고 전하며 현재 유적 성역화사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당시 화려했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기와, 토기 등 여러 유적과 유물이 장도를 중심으로 완도의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물이 빠졌을 때는 장도 남쪽 갯벌에서, 원래 청해진을 방비하기 위해 굵은 통나무를 섬 둘레에 박아놓았던 목책의 흔적이 드러난다. 유적으로는 청해진성, 와당편 다수, 토기편, 사당, 법화사지터 등이 있다. 출처:(완도군청 홈피) *외성문 |
*우물과 판축 유구 우물을 보호하고 외성문을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 우물은 깊이 5.8m로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내성문
고대, 멀리서 바라본 모습.
마침 동백의 계절이어서 화려하게 피어난 꽃들이 단조로운 잔디를 장식한다.
3) 장좌리 신당
당제를 모시는 굿당이다. 금줄이 그대로 쳐져 있어 현재형 신당임을 보여준다. 정월 보름에 장보고를 비롯하여 송징, 정년, 혜일대사 네 분에게 제를 올린다. '완도 장좌리 당제 및 당굿'은 1995년 12월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었다. 완도 장좌리 당제와 당굿(전남도 무형문화재 제28호)은 매년 정월대보름에 행해지는 고유제이다. 당굿, 샘굿, 선상굿, 갯제로 이어지며 열두 군고 진법놀이가 대표적이다. 전라남도는고인이 된 정은순과 김봉도(당초 지정시 보유자)를 이어 전승활동을 하고 있는 전수조교 강양대(67)를 2013년 새 기능보유자로 인정했다. 기능보유자 강양대(71)는 2017년까지 활동이 확인된다. 2019년 당제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되었다. "당제는 집안 제사와 같은 순서로 지냈으며, 먼저 마을 주민들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소지를 올렸다. 당집에서 제 모시기가 끝난 후에는 참석한 사람들이 모여 김밥과 나물 등을 먹고, 이후 풍물패는 배를 타고 풍물을 치면서 마을로 돌아온다. 마을에 도착한 후에는 공동 샘에서 샘굿을 치고, 당산나무 앞에서 풍물 굿을 치면서 한바탕 놀이마당을 펼쳤다. 오후에는 각 가정을 방문해 지신밟기를 하고, 4시 무렵이 되면 갯가 제장에서 바다에서의 무사고와 풍어를 기원하는 갯제를 지낸다."(중도일보 2019-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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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관련 부분 인용이다.
당집은 동향으로 앉아 마을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다. 본래는 초가였으나 1940년에 기와로 지붕을 바꾸고 크게 수리하였다. 당집 안에는 판자로 짠 상이 세 개 놓여 있는데, 가운데는 주신(主神)인 송징장군(宋徵將軍), 우측은 정년장군(鄭年將軍), 좌측은 혜일대사(慧日大師)를 모시는 제상이다. 그런데 1982년부터 이곳에 새로 장보고(張保皐)를 모시게 되었다. 당시 남도문화제에 이곳 당제가 출연하면서 이곳과 관련이 있는 인물로 그를 추배(趨拜:허리를 굽히고 나아가 절을 함)하게 되었는데, 그후 계속해서 장보고까지 4위의 당신을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당제의 주신인 송징 장군은 삼별초에 속한 역사적 인물이라고 구전되고 있으나 그대로 믿기 어렵기 때문에, 송징이 장보고의 우의적(寓意的) 명칭일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부신인 정년은 장보고의 부장이었던 역사적 인물이고, 혜일 대사는 마을 근처에 절을 짓고 포교를 했던 고려조의 승려이다. 장좌리 당제의 전체적인 절차는 ‘제관 선출-당집 제례-샘굿-당수 제례-음복-갯제’의 순서로 진행된다. 제관으로는 당주(堂主)와 집사(執事)를 선정하는데, 마을회의 격인 대동공회(大同公會)에서 까다롭고 엄격한 기준을 거쳐 선정된다.
당주는 1주일 전쯤부터 엄격한 금기를 지키며, 당샘 청소, 제수 장만, 당집 청소 등의 준비를 한다. 보름날 새벽 마을회관에서 풍물패가 굿을 알리면 당굿이 시작된다. 제관이 앞장서고 풍물패가 길굿을 치면서 당집에 오른다. 당집에서의 제사는 유교식 제차에 의해 이루어진다. 당집 제례가 끝나고 아침식사를 마치면 풍물패가 당 주위를 왼쪽으로 세 바퀴를 달음질쳐 돌고 나서 옆 보리밭에서 날당산굿을 친다. 갈 之(지)자로 열을 지어 하산을 해 바닷가에 내려와서는 배를 타고 흥겹게 뱃굿을 치며 마을로 돌아온다. 이어 마을 앞 바닷가에 접해 있는 공동 우물에서 샘굿을 치고 부근의 귀목나무에서 사장굿을 친다. 이렇게 한 다음 당주 집으로 가서 음복을 하며 흥겹게 논다. 당제와는 별도로 보름날 밤에는 갯제를 모신다. 장도 입구의 바닷가에 각 가정에서 상을 하나씩 차려 내와서 길게 늘어놓고 개인별로 소원을 빈다. 이것은 주로 부녀자들에 의해서 진행되며 김·미역 등이 잘 되게 해달라고 빈다. 장좌리 당제·당굿의 특징은 역사적 인물을 당신(堂神)으로 모신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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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징 송장군은 한시에서도 등장한다.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의 장시 <송대장군가>(宋大將軍歌)가 그것이다. 송징은 민간에서는 송대장군으로 추앙되는 민중적 영웅이다. 조동일 교수의 한국문학통사(2권)에서는 이 시를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전라남도 완도군 장좌리(長佐里)의 민간전승에 근거를 둔 민중적 영웅을 노래했다. 고려말쯤 있었던 송징(宋徵)이라는 장군은 산을 뽑고 호랑이를 산 채로 묶는 용력이 있으며 천하명궁이었다. 나라에서 거둔 곡식을 실은 배를 끌어다가 백성을 살리고 관군을 물리쳤다. 요망한 계집아이가 활시위를 끊자 거기서 피가 나더니 죽고 말았다고 했다.
壯骨雖與草木腐 장사의 뼈는 초목과 더불어 썩었어도,
毅魄尙含風雷怒 의연한 혼백 아직도 바람과 우뢰, 노여움 머금었다.
爲鬼雄兮食此土 귀신이 영웅다워 이 땅에서 받들어지며,
揷雉于兮木爲塑 꿩 털을 꽂고, 나무로 모습을 만들었도다.
彼何人兮怪而笑 저 어떤 사람인가? 괴이하다고 비웃으며
毁而斥之江之滸 신의 모습을 망가뜨려 강가에 던지다니,
百年蕭條一間廟 백년 세월에 한 칸 당집이 쓸쓸하고
歲時伏臘鳴村鼓 철 따라 복날이고, 섣달이면 마을의 북소리.
마을에서 송대장군을 신으로 받들고 해마다 굿을 하게 된 내력을 노래한 대목이다.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태어난 영웅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는 전승은 전국 도처에 있다. 무속에서 섬기고 설화에나 올라 있어 조롱의 대상이 된 하층문화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한시를 써서 울분을 토로하는 데 동참한 것은 전에 없던 일이다.
*고대
▲근처 장보고 동상
<장보고기념관>
장도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다.
*장보고
본명은 궁복(弓福)·궁파(弓巴). 일본 승려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 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장보고(長寶高)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서남해안 지방의 토호 출신일 가능성이 크며, 장씨 성은 당나라에 있을 때 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무예에 자질이 있어 당나라로 건너가 서주(徐州)의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이 되었다. 당에서 귀국한 뒤 828년(흥덕왕 3) 왕에게 청해(淸海)를 진수(鎭守)할 것을 청했다. 당시 서남해안에서는 당의 해적들이 신라인을 노략질하여 노비로 팔거나 무역선을 약탈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는 왕의 허락을 받아 군사 1만 명을 모아 청해진(淸海鎭 : 지금의 완도)을 건설했다. 청해진은 7세기말에서 8세기초에 걸쳐 설치된 군진(軍鎭)의 하나이지만 건설 당초부터 독자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에게 내려진 대사(大使)라는 직명도 다른 군진의 진두(鎭頭)·두상(頭上) 등 신라의 정규 관직과는 다른 것이었다는 점도 이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청해진이 건설된 뒤 그는 해적을 소탕하여 서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했고, 당·신라·일본을 잇는 해상무역로를 통한 무역활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신라 지배체제의 외곽적 존재로서 해상무역을 통해 일종의 해상왕국을 형성한 그는 당나라에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와 함께 교관선(交關船)이라는 무역선을 보내 교역활동을 했다. 840년(문성왕 2)에는 일본에 회역사(廻易使)를 파견하여 서신과 물건을 보냈다. 일본측은 이를 사교(私交)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무역은 허용했고, 그 사자와 이충(李忠)·양원(楊圓) 등에게 식량을 지급하기도 했다.
그의 세력은 국제적으로 극히 번성하여 중국에 유학한 일본 승려 엔닌은 그에게 정중한 편지를 써서 귀국할 때의 뱃길을 부탁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무역활동을 통해 확보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중국의 산둥 성[山東省] 원덩 현[文登縣] 츠산춘[赤山村]에 법화원(法華院)이라는 절을 세웠다. 이곳에는 500석을 수확하는 장전(莊田)이 속해 있었는데, 많은 승려가 머물며 정기적으로 법회를 열었고, 청해진과의 연락기관 구실도 했다. 그는 경제력과 무력을 배경으로 중앙의 권력쟁탈전에도 개입하게 되었다. 836년(흥덕왕 11) 왕위계승분쟁에서 패한 김우징(金祐徵)이 청해진으로 와 그에게 의탁했다. 838년(희강왕 3)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하자 김양(金陽)은 군사를 모집하여 청해진으로 와서 먼저 와 있던 김우징을 만나 장보고에게 도움을 청했다. 장보고는 정년(鄭年)으로 하여금 군사 5,000명을 이끌고 김양과 함께 경주로 진격하게 했다. 이들은 중앙군을 물리치고 경주에 침입하여 민애왕을 살해하고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즉위시켰다. 신무왕은 장보고를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고 식읍(食邑) 2,000호를 봉해주었다. 신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성왕은 즉위와 함께 그를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삼고 장복(章腹)을 내렸다. 그러나 진골귀족들은 그가 중앙정부에서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845년(문성왕 7)에 왕이 장보고의 딸을 차비(次妃)로 들이려 했으나 진골귀족들은 그가 '해도인'(海島人)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이듬해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중앙정부는 무력으로 그를 토벌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한때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閻長)을 자객으로 보내 그를 살해하게 했다. 청해진의 세력은 그뒤에도 얼마 간 유지되었으며, 851년에야 청해진을 없애고 주민을 벽골군(碧骨郡 : 지금의 김제)으로 옮길 수 있었다. 출처:(다음백과)
▲장보고 기념관 안에 전시된 여러 유물과 관련 자료
2022-02-11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