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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National University Hospital,]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에 있는 병원.내용
1885년에 설립된 왕립병원 광혜원(廣惠院)을 시작으로 제중원(濟衆院)·광제원(廣濟院)·대한의원(大韓醫院)·조선총독부의원 및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으로 그 맥을 이어오다가, 8·15광복과 함께 1946년 국립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및 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개칭하고, 1978년 7월 특수법인 서울대학교병원으로 개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병원의 기본 조직은 최고의결기구로 이사회를 두고 있고, 집행기구로 원장 산하에 환자 진료를 담당하는 내과 등 진료과와 진단방사선과·임상병리과·간호부·약제부 등 진료지원부서를 총괄하는 진료부, 구강진단과 등 치과진료를 담당하는 치과진료부, 소아과를 비롯 어린이를 전문 진료하는 소아외과 등 분과를 둔 소아진료부, 원무부 총무부 등 행정관리업무를 담당하는 행정처가 있으며, 참모부서로서 기획조정실, 교육연구부, 홍보실, 의료정보실이 있다. 하루 약 5,500명의 외래환자 진료능력을 갖춘 이 병원은 1,546개의 병실과 34개의 수술실, 각종 의료장비 6천여 점을 보유하고 있으며, 매년 의학계 학생 및 전공의, 개원의 등 6천여 명을 교육하고 있다. 진료실적으로는 매년 수술 약 4만 건, 방사선검사 80만건, 각종 검사 약 1200만 건, 외래환자 약 150만 명, 입원환자 50만여 명을 진료하고 있다.
병원 본관은 지하 1층 지상 13층의 쌍Y자형의 연건평 4만5천여 평의 건물로 전면 채광이 잘되어 있음은 물론 의학교육 및 연구, 진료기능을 조화 있게 수행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국내 의학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이 병원은 매년 의과계 400편, 치과계 100여 편의 새로운 연구 논문을 발표하고 있으며, 시대적인 흐름에 부응, 인접학문과 공동으로 연구하는 대형공동연구도 매년 10건 이상 실시하고 있다. 또 이런 연구를 뒷받침하기 위해 1998년 최신 연구시설을 갖춘 초대형 임상의학연구소를 완공해 국내 임상의학 연구와 임상시험 수준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으며, 급변하는 세계 의학추세에 대처하기 위해 매년 70여 명의 교직원을 해외 연수시키고 있다. 한편, 국민보건향상을 위해 진력하여 1985년 어린이병원을 비롯하여 치과병원, 안·이비인후과센터, 소아암병동, 소아심장병동, 간질집중치료센터 등 전문 의료센터를 개설했으며, 정보화사회에서 병원으로서의 기능 수행에 만전을 기하기 위하여 종합의료정보시스템을 가동, 교육 연구 및 진료분야에서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2003년 노인성 특수질환을 전문 진료를 수행하기 위한 분당 서울대병원이 개원하였고, 성인 및 어린이, 노인, 치과 전문진료시설과 연구능력을 갖춘 통합 의료센터의 위상을 갖추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지석영(池錫永)
조선 말기~근대기의 의사 · 문신 · 국어학자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공윤(公胤), 호는 송촌(松村) · 태원(太原), 본관은 충주(忠州)이다. 부친은 지익룡(池翼龍)으로 시문 · 의술에 능하였으며, 형 지운영(池雲英)은 시서화 삼절로 유명하였다. 개화사상가이자 시인인 강위(姜瑋)의 밑에서 유길준(兪吉濬)과 함께 공부했다. 일찍이 중국의 서양의학 번역서들을 많이 읽었는데, 특히 E. 제너가 발견한 우두접종법(牛痘接種法)에 큰 관심을 가졌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이 일본과 체결되면서 수신사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파견된 한의(漢醫)인 스승 박영선(朴永善)을 통해 종두법을 배웠다. 1879년 천연두가 만연하여 많은 어린이들이 목숨을 잃자, 일본해군이 세운 부산의 제생의원(濟生醫院)에 가서 종두법을 배우고, 충주 덕산면에서 어린이 40여 명에게 접종했다.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에 의한 공개적인 종두법 실시의 시초였다. 이듬해 서울로 돌아와 종두를 실시하여 호평을 받았으나 두묘의 공급이 잘 안 되었으므로 제2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으로 일본 도쿄(東京)에 건너가 종두법을 배우고 두묘 50병(柄)을 얻어 귀국했다. 귀국 후 일본 공사관 소속의 의사와 접촉하면서 서울에서 두묘를 만들어 종두를 보급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난 뒤 일본인으로부터 의술을 습득한 죄로 체포령이 내려져 피신했으며, 설치한 종두장은 난민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정국이 바뀌면서 서울로 돌아와 종두장을 재건하였다.
1883년 3월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 · 사헌부지평 · 장령을 역임하고, 여름 전라도암행어사로 내려갔던 박영교(朴泳敎)의 요청으로 전주에 우두국을 설치하고 종두를 실시하면서 종두법을 가르쳤으며, 충청우도암행어사 이용호(李容鎬)의 요청으로 공주에도 우두국을 설치했다. 1885년에는 그동안 축적한 경험을 토대로 우리나라 최초의 우두 관련 서적이자 서양의학서인 『우두신설 (牛痘新說)』을 저술했다. 같은 해 우두교수관으로서 전라도지방을 순회, 시종(施種)을 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고, 1887년 개화당 인사들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전라남도 강진 신지도(薪智島)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중맥설(重麥說)』과 『신학신설』을 저술했다.
1892년 유배에서 풀려나 서울로 올라와 이듬해 우두보영당(牛痘保嬰堂)을 설립하고 접종을 실시했다. 1894년에는 갑오개혁으로 내무아문 내에 위생국이 설치되어 종두를 관장하게 되었다. 그 뒤 형조참의 · 우부승지 · 대구판관 · 동래부사 · 동래부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1897년 중추원 2등 의관에 임명되었으나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한 까닭에 이듬해 황해도 풍천으로 유배되었다. 1899년 학부대신에게 의학교의 설립을 제의하였고, 의학교가 설치되자 초대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일본인 교사들을 초빙하고 일본 의학책을 번역하여 가르치게 하는 등 교육에 힘쓰는 한편, 종두 및 전염병 예방과 관련된 각종 관제 · 규칙을 공포하도록 했다. 1890년대 후반에는 독립협회의 주요회원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1902년 훈동(勳洞)에 의학교의 부속병원을 세울 것을 제창하여 설립되었고, 이듬해 첫 졸업생 19명을 배출하였다. 「황성신보(皇城新報)」에 '양매창론(楊梅 論)'을 발표하여 매독의 해독을 대중에게 알렸고, 온역(瘟疫) · 전염병 · 양매창의 예방법을 만들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개화가 늦어지는 이유가 어려운 한문을 쓰기 때문이라 보고 1905년 널리 교육을 펴기 위하여 알기 쉬운 한글을 쓸 것을 주장하였다. 더욱이 주시경(周時經)과 더불어 한글의 가로쓰기를 주장한 선구자였다. 1907년 의학교가 폐지되어 대한의원의육부(大韓醫院醫育部)로 개편되자 교장직에서 물러나 학감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글에 조예가 깊던 강위의 영향으로 일찍이 국문에 관심을 가졌다. 국문학교(國文學校)의 설립에 크게 기여했으며, 의학교 학생 모집 때도 국문을 시험과목으로 채택했다. 「신정국문(新訂國文)」 6개조를 상소, 1908년 학부 안에 국문연구소를 설치하게 하고 그 연구위원이 되었으며, 1909년에는 한글로 한자를 해석한 『자전석요(字典釋要)』를 저술하여 간행했다. 그해 4월 통감부가 의학교육을 일본어로 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자 즉각 의견서를 제출하여 반대했다. 한편 국채보상연합회(國債報償聯合會) 부소장 ·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평의원 ·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부회장 등으로 사회활동도 활발히 펼쳤다. 고종은 공을 인정하여 태극장(太極章) · 팔괘장(八卦章) 등을 수여했다. 1910년 한일합병이 되자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독서로 여생을 보냈다. 저서로는 『우두신설(牛痘新說)』 · 『자전석요(字典釋要)』, 『중맥설(重麥說)』, 『신학신설』 등이 있다. 글씨에 능하였으며, 행서에서 강한 골기와 더불어 비수와 농담의 변화가 뚜렷한 문기있는 글씨를 썼다.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2011. 11. 28.)
양의사를 가르친 한의사 지석영
종두법(種痘法)을 한국에 최초로 도입한 지석영(池錫永, 1855~1935)은 일제가 조선을 점령한 이후 한의사로만 활동한 인물이다. 1876년에는 김기수를 따라 일본에 갔던 박영선(朴永善)으로부터 『종두귀감(種痘龜鑑)』을 전수받아서 종두연구에 착수했다. 1879년 부산에 가서 제생의원(濟生醫院)에서 두 달 동안 종두법을 실습했고 오는 길에 처가인 충주 덕산면에서 40여 명에게 종두를 시술했다. 이어 1880년에는 김홍집의 수행원으로 일본 동경에 가서 우두종계소장(牛痘種繼所長)인 국지강암(菊池康庵)으로부터 종두묘(種痘苗)의 제조 및 축장법을 습득하여 귀국 후에 전주, 공주 등지에 우두국(牛痘局)을 설립하여 우두법(牛痘法)을 교육했다. 1885년에는 『우두신설(牛痘新說)』을 저술했는데, 여기에는 우두의 원리, 접종법, 두묘제조(痘苗製造) 및 보관법, 종두기기(種痘器具)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1887년에는 개화당의 일원이라는 혐의를 받아 체포되어 전라도 신지도에 유배되었고, 1891년에 풀려나 서울로 돌아와 서울 교동에 우두보영당(牛痘保嬰堂)을 설립하고 많은 소아에게 우두를 실시했다. 1899년에는 관립(官立) 대한의학교(大韓醫學校)의 교장이 되어 서양의학을 교육했다. 일제가 한국을 점령한 이후로 일체의 공직 활동을 하지 않았다. 1914년에 의생규칙이 반포되자 의생으로 등록했다. 1915년 전국의생대회가 열릴 때에는 '조선의학의 유래와 발전'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고, 이때 조직된 전선의회의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24년에는 동서의학연구회라는 한의사 단체의 회장을 하면서 한의학 발전에 힘썼다. 만년에는 화평당대약방(和平堂大藥房) 주인 이응선(李應善)이 세운 조선병원(朝鮮病院)의 원장을 지냈다. 1935년 2월 11일 81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출처:(근현대 한의학 인물실록)
지석영(池錫永)의 유배지(流配地)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공윤(公胤), 호는 송촌(松村)이며, 조선 말기인 1855년(철종 6) 서울에서 태어났다. 1876년(고종13) 수신사(修信使) 김기수(金綺秀)의 통역관으로 일본에 갔던 스승 박영선(朴永善)으로부터 구가 가쓰아키[久我克明]의 《종두귀감(種痘龜鑑)》을 전해 받고 종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879년 부산에 있던 일본 해군병원 제생의원(濟生醫院)에서 종두법을 배우고 그해 겨울 처가가 있는 충주 덕산면(德山面)에서 40여 명에게 종두를 시술했는데, 이것이 한국에서 공개적으로 실시된 최초의 종두로 알려져 있다. 이듬해 서울에서도 부산제생의원에서 보내온 두묘(痘苗)로 종두를 실시했다.
1880년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일본 위생국에서 두묘의 제조법과 독우(犢牛)의 채장법(採漿法) 등을 배우고 귀국한 뒤 서울에서 적극적으로 우두를 실시하는 한편 일본 공사관 의관(醫官) 마에다 기요노리[前田淸則]로부터 서양의학을 배우기도 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일본에서 종두법을 배워왔다는 죄목으로 체포령이 내려 일시 피해 있다가 정국이 수습된 후 불타버린 종두장(種痘場)을 다시 열어 종두를 보급했다. 그 해 9월 전라도 어사(御使) 박영교(朴泳敎)의 요청에 따라 전주(全州)에서, 이듬해에는 공주(公州)에서 각각 우두국(牛痘局)을 설치하여 종두를 실시하고 그 방법을 가르쳤다.
1883년(고종 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지평(持平) 등을 역임하고 1885년 《우두신설(牛痘新說)》을 저술했다. 1887년 장령(掌令)으로 시폐(時弊)를 논하다가 우두의 기술을 미끼로 일본과 결탁한 개화당과 도당을 이룬다는 이유로 현 전라 남도 완도군 명사십리가 있는 신지면(薪智面) 송곡리(松谷里)에 유배되었는데 현재까지도 그가 살던 집이 유적지로 남아있다고 하고 6년간의 유배 생활 동안 농학서인 《중맥설》과 의학서인 《신학신설》을 저술했다.
1892년 유배에서 풀려나 승지(承旨)를 거쳐 1896년(고종33) 동래부사를 지냈다. 1899년 경성의학교(京城醫學校) 교장에 취임하여 이후 10년 간 의학교육사업에 종사하는 한편, 한글 보급에 힘써 <신정국문(新訂國文)>(1905) 6개조를 상소하였다. 이 제안은 그대로 받아들여져 공포되었으며, 지속적인 연구를 위해 1908년 국문연구소 위원이 되었다. 또한 1909년 옥편의 효시인 《자전석요(字典釋要)》를 간행하는 등 국문연구에도 공적을 남겼다.
지석영 묘(池錫永墓)
경기도 구리시 망우 공원 묘지에 있는 의학자·국어학자인 지석영의 묘.
개설
지석영(池錫永)[1855~1935]은 1855년 한성부 중서훈동(漢城府中署勳洞)[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에서 지익룡(池翼龍)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의학자로 우두 보급에 힘썼으며, 한글 전용을 제창한 국어학자이기도 하다. 1908년 국문 연구소 위원에 임명되어, 이듬해 한글로 한자를 해석한 『자전석요(字典釋要)』를 지었다. 위치망우 공원 관리 사무소에서 왼쪽 순환로를 따라 구리시 방향으로 오르면 형제 약수터 표지판이 나온다. 동락천 방향으로 잠시 오르면 길가 오른쪽에 지석영 연보비가 있고 나무에 작은 안내판이 붙어 있다. 연보비 뒷편
샛길을 따라 올라가면 넓은 평탄지에 지석영의 묘가 있다.[묘지 번호-202541]
변천
지석영 묘는 1939년 12월 19일 조성되었고, 비석은 1962년 8월12일에 새로 세워졌는데 글을 지은이는 백낙운(白樂雲)이고 글씨를 쓴 이는 윤희화(尹禧禾)다.
형태
지석영 묘는 사성(莎城)[무덤 뒤에 반달 모양으로 두둑하게 둘러싼 토성(土城)]이 있는 원형분이다. 묘 2기가 있는데 왼쪽이 지석영 묘, 오른쪽이 장남 지성주(池盛周)의 묘이다. 지석영 묘 앞에는 지석영 비석만 있고 장남 지성주 묘 앞에는 상석만 있다.
금석문
비석 전면에는 "송촌거사지공석영지묘(松村居士池公錫永之墓)"라고 적혀 있고, 후면에는 "공휘석영자공백호송촌□□□장사종해지후조휘응원고휘익룡백련운영지□야, 신사도일인우두종□소두묘제조급종두실시법연구□국익년전북전주우두□개, □시행 □종갑신등과급□부사과력전적사헌부지□무자사헌부장□좌어모□, 류배강진신지도당시자전석요저술을미형조□의승정원부승□한성부윤대구□. 관갑신동래관□사정유부산재□소□사중□원의관기□대한의□교□□□초대, 교장무신이국민□구소부위원장태극훈장수□경술정삼품통정대부훈사등팔괘, 장승진을□이월일일졸향년팔십일초배□□진씨재배김해김씨유오남(公諱錫永字公伯號松村□□□章事宗海之后祖諱應源考諱翼龍白蓮雲英之□也, 辛巳渡日人牛痘種□所痘苗製造及種痘實施法硏究□國翌年全北全州牛痘□開, □施行 □宗甲申登科及□副司果歷典籍司憲府持□戊子司憲府掌□坐於謀□, 流配康津新智島當時字典釋要著述乙未刑曹□議承政院副承□漢城府尹大邱□. 官甲申東萊觀□使丁酉釜山裁□所□事中□院議官己□大韓醫□校□□□初代, 校長戊申以國民□究所副委員長太極勳章授□庚戌正三品通政大夫勳四等八卦, 章陞進乙□二月一日卒享年八十一初配□□陳氏再配金海金氏有五男)"이라고 적혀 있다.
참고문헌
『지석영 전집』1~3(아세아 문화사, 1985)
대한 의사학회, 『송촌 지석영』(도서출판 아카데미아, 1994)
『구리시지』(구리시, 1996)
『구리의 역사와 문화』(구리시, 1996)
김영식, 『그와 나 사이를 걷다-망우리 비명으로 읽는 근현대 인물사』(골든 에이지, 2009)
『망우 묘역에서 만난 근현대 역사 인물』(구리 문화원, 2015)
「망우리 묘지 유명 인사 현황」(망우 추모 공원 관리소, 2012)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022-03-03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