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 ③
* 헌의 6조(1898.10)
아관 파천(1896.2)으로 국가의 자주성은 손상되었고, 광산, 삼림 등에 대한 열강의 이권 침탈도 심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재필 등은 ‘독립신문’을 창간하여(1896.4) 서구의 자유 민권 사상을 소개하였으며, 독립협회를 창립하였다(1896.7). 특히 러시아의 간섭과 이권 침탈이 심해지자 독립협회는 자주국권 확립을 촉구하는 구국 선언 상소문(1898.2)을 올리고, 종로에서 만민공동회(1차: 1898.3)를 열어 자주국권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군사 고문과 재정 고문을 철수시키고, 부산의 절영도 조차 요구를 철회하였으며 한·러 은행을 폐쇄하였다.
독립협회는 강연회와 토론회 등을 통하여 민중에게 근대적 지식과 국권·민권 사상을 고취시켜, 광범한 사회 계층의 지지를 받는 단체로 발전하며 자주국권, 자유민권 등을 달성하려는 정치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만민공동회와 관민공동회를 개최하여 헌의 6조(1898.10)를 결의하고 고종은 건의문을 받아들여 시행할 것을 약속하고 중추원을 의회식으로 개편하는 관제를 반포하였다(1898.11). 이로써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의회가 설립될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독립 협회의 활동은 의회의 설립과 서구식 입헌군주제 실현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보수 세력과 대립하였다(공화제 모함). 독립협회는 보수 세력이 동원한 황국협회의 방해를 받았고, 결국 3년 만에 해산되고 말았다(189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