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만남
신 형 호
조촐하고 깔밋한 모임이었다. 어둠이 슬슬 세상을 물들일 무렵, 별이 하나 둘 뜨는 언덕길을 천천히 올랐다.‘들메꽃’이라, 이름도 참 곱다. 삐걱, 정겨운 소리 내는 찻집의 문을 밀었다. 하얀 이가 조팝꽃처럼 예쁜 글벗이 빙긋 웃으면서 맞아준다. 환한 마음이 부딪혀 찻집 안이 더욱 밝아진다.
만남이란 새로운 인연의 줄을 잡는 것이리라. 가뭄 끝에 단비 같은 인연도 있고, 생각만 해도 거부감이 앞서는 인연도 생긴다. 삶이란 럭비공 같아 어디로 튈지 아무도 모른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많은 모임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몸을 싣는다. 야박한 이해관계가 얽힌 불편한 모임에도 갈 수 있고, 마음씨 좋은 재래시장 아주머니 얼굴 같은 푸근한 모임에도 간다.
오늘 만남은 글쓰기로 맺어진 모임이다. 삶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사람들이다. 성장과정과 문화적 환경이 달랐지만, 오직 삶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풀어보자는 순수한 심정만은 같았다. 엄마의 품에 잠든 어린아이 마음으로 삶의 보퉁이를 펼친다. 진지한 눈빛, 한마디 한마디 사랑과 애증이 깃든 인생철학에 환하게 웃고 즐겁다. 아무런 사심이 없다. 지그시 눈을 감고 귀만 열어도 부자가 되는 시간이었다.
글쓰기란 무엇일까? 서로 의견이 다양했다. 강의실에서 배운 주제, 구성, 문체도 중요하지만, 더 소중한 인생의 바탕을 우리는 함께 공부한다. 소박하고 꾸밈이 없는 삶,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최고의 글쓰기라는 사실을. 물론 어떻게 표현하느냐의 방법상 어려움은 있지만, 따뜻한 사랑과 꾸밈없는 마음만 있으면 반은 도달한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웃음 소리도 커지고 얘기도 맑아진다. 은은하고 고풍스런 찻집 분위기는 심성을 향긋하고 탱탱하게 살찌워준다. 송홧가루 빛깔 닮은 보이차 향기가 벽 한쪽에 쳐 놓은 반야심경 여섯 폭 병풍 속에 녹았다가 방안을 감돈다.‘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눈길 닿는 글귀 따라 속으로 읊조리니 한결 마음이 온화하다.
끊임없는 사회 부조리가 환을 치는 세상에, 이렇게 순수하고 아름다운 모임이 있겠는가 하는 유치원 원장님의 마음속엔 꽃불이 환하다. 학부모와의 면담시간, 두 시간 넘게 같은 말을 되풀이해도 웃으면서 받아주는 분이다. 질서와 예의가 실종된 교육현장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시선이 따스하다. 물질의 풍요도 중요하지만 정신적 성숙이 뒤따르지 못하는 현실이 답답하다. 너무 빨리 무너져버린 교육현장을 진정으로 걱정하는 선생님이 계시기에, 내일의 아이들에게는 희망을 품을 수도 있었다. 말보다 몸으로 사회봉사를 실천하시는 웃음치료사님의 배려심도, 모두의 가슴에 곱게 새겨지는 아름다움이었다. 글쓰기 공부라는 인연으로 만났지만, 글보다 더 멋진 삶을 배우는 시간에 모두가 첫 시간 ‘처음처럼’의 순수함에 빠졌다.
밤이 무르익는 시간, 열정어린 회원 한 분이 살짝 문을 밀고 들어온다. 저녁 9시가 지난 늦은 시간이지만, 잊지 않고 찾아온 마음이 매우 아름답다. 그만큼 뜻이 깊고 정겨운 모임이었기 때문이리라. 가게를 하시는 분이라 마지막 정리까지 하고 허겁지겁 온 모양이다. 살며시 잡은 손은 차가왔지만, 배려하고 베풀려는 따스한 이야기로 방을 훈훈하게 만들었다. 이런 따뜻함이 동심원으로 퍼져 사회의 어렵고 힘든 사람에게도 골고루 전해졌으면 좋으련만.
삶에는 여러 종류의 만남으로 연결된다. 부모 자식 간 핏줄에 인한 만남이 첫 단추이고, 소꿉친구에서 이어져 학교에서 맺은 동기생으로서의 만남이 다음이다. 평생 직장동료로서 끈끈한 정으로 뭉쳐진 만남도 있고, 배움의 갈망에 취해 모인 동호인으로서의 만남도 있다. 만나지 말아야 할 부정적인 만남도 생기고, 꼭 만나야 할 필연적인 만남도 생긴다. 나름대로 명분과 인연이 깃든 소중한 만남이 수없이 많을 것이다.
오늘의 만남을 다시 천천히 되새겨본다. 글쓰기라는 명분으로 한 사람씩 인연의 고리를 걸었다.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었다. 나이도, 지위도, 성별도, 지역도 문제 되지 않았다. 모두가 삶의 고개 중턱을 넘어갈 무렵이다. 바쁘게 앞만 보고 살아온 자신을 한번쯤 돌아보고 싶어 시작했으리라.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는, 또 다른 자신의 본모습을 찾고자 모인 것이리라. 켜켜이 숨겨 놓았던, 억눌러 있었던 응어리를 이제는 털어내고 다독이려고 참석한 만남이리라.
구수한 얘기가 익어갈수록 마음도 붉게 물들어간다. 살아온 소박하고 정겨운 얘기가 밝은 웃음 따라 방안을 맴돈다. 노란 보이차 맛에 취하고, 그립고 아름다운 사람들의 마음에 서로 잠긴다. 고전에서만 읽고 그리워했던 옛사람의 모임도 이러했으리라. 단출했지만 살가운 오늘 만남처럼.
약력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사대 국어교육과 졸업
*<문학바탕> 시부문 신인상
*<대구문학> 수필부문 신인상
*전 국민 잡지읽기 수기 공모전 은상
*정지용문학관 탐방 문예공모 최우수상(시)
*계성중학교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