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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껍데기는 버리고
알맹이를 찾아서
“수코 뿐냣사 웃짜요”
“선업의 모음은 행복의 확실한 원인이다.”
- 붓다
1. 선업
윤회(상사라saṁsāra)를 도는 동안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편안하고 행복하게 넘어가게 해주는 원인은 ‘선업’입니다.
“수코- 뿐냣사 웃짜요-”1)
“뿐냣사 : 선업의
웃짜요- : 모음은
수코- : 행복의 확실한 원인이다.” - 붓다
우리가 하나의 생을 사는 목적은 선업을 모으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행복을 원한다면 선업을 지을 궁리를 해야 합니다.
선업을 원인으로 얻은 행복은 매우 크고 튼튼한 행복입니다. 재물을 원인으로 얻은 행복은 그에 비하면 아주 유약한 행복입니다. 그 규모로 봐서도 작고 지속되는 시간도 짧습니다.
돈으로 인한 행복은 ‘있을 때뿐인 행복’입니다. 돈이 있다는 생각을 할 때 마음에서만 행복합니다. 그렇다면 ‘있을 때뿐인 행복’이 있는 동안 내내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닙니다. 있어서 고통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있어서 행복하다는 것은 있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의미입니다. 있는데도 행복하지 않은 경우는 어떤 때인가요? 재물이 많은 사람은 재물로 인해 신경 쓰고 근심합니다. 소유한 재산을 잃을까 봐 근심 걱정할 때, 재물로 행복한 사람들은 자신의 재물로 인하여 행복만이 아니라 불행도 데려옵니다. 근심도 따라옵니다. 재산이 있기 때문에 근심도 일어납니다.
이 ‘앗티수카atthisukha’라고 하는 ‘있을 때뿐인 행복’은 한 면만 행복하다고 말해야 합니다. 완전한 행복은 아닙니다. 그래서 붓다Buddha께서 “재물이 있으면 행복해지리라. 재물을 많이 모으라”라고 하지 않습니다. 반면 “선업을 모으도록 하라. 좋은 일을 해야 행복하다”라고 설하십니다. 아주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돈이 있는 것과 선업이 있는 것은 다릅니다. 돈이 있으면 ‘나에게 있다, 내가 쓸 수 있다’는 상상을 하고 있을 때에나 행복합니다. ‘내 소유의 건물이 안전한가?’ 하고 근심이 들면 고통스러워지기 시작합니다. 한편에선 행복하지만 한편에선 행복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선업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지은 선업이 있다는 것은 그 존재에게 의지처가 생긴 겁니다. 내가 지은 선업을 반추해 볼 때 행복합니다. 이미 지은 선업이 사라져 버릴까 봐 불안해하다가 근심에 빠질 일은 없습니다. 붓다께서 설하신 다섯 가지 적인 ‘물, 불, 왕, 도적들, 속 태우는 자식들’ 같은 위험 요소들로 인해 나의 선업들이 사라져 버릴 것 같아 노심초사할 일도 없습니다. 선업은 편안한 행복만 줍니다. 그래서 ‘수코 뿐냣사 웃짜요’(선업의 모음은 행복의 확실한 원천)입니다.
선업은 이렇게 의지처가 됩니다. 윤회라는 기나긴 여행을 해야 할 때도 고통을 최대한 줄여서 편안히 가게 해 줍니다. 지은 선업이 많으면 사람으로 태어나서도 편안한 생을 살아갑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게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이는 부유한 집안에 태어났지만 병약하여 항상 건강이 염려스럽습니다. 먹은 밥 한 숟가락 소화시키기 위해 매우 애를 써야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누구나 행복하다고 볼 순 없습니다. 많은 선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인간 생에서 몸의 고통과 마음의 괴로움이 상당히 덜합니다.
이렇게 생이 두 가지로 나뉘는 것은 선업 때문입니다. 선업이 많았던 생은 풍족한 생으로 이어집니다. 선업이 적었던 생은 부족한 생으로 이어집니다. 차이점은 과거에 내가 지은 선업의 힘입니다. 힘의 차이에 따라 이번 생에서 받는 결과가 달라집니다. 윤회의 굴레를 도는 중생의 선업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보시·지계·수행입니다.
보시라는 것은 ‘주는 일’입니다. 내게 있는 물건에서 조금 떼어서 주는 일이 보시 선업입니다. 보시를 할 때는 나의 보시를 받는 존재가 이로움이 있기를 먼저 염두에 두고 하는 겁니다. 예를 들자면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잔을 줄 때 ‘이 사람의 갈증이 사라지기를…’ 이런 순수한 마음으로 내가 아닌 상대방의 이로움을 위해서 할 때 매우 귀한 보시가 됩니다.
보디삿따bodhisatta(보살)들은 세 종류의 보시를 합니다. 첫 번째, 자신이 가진 물건을 다른 존재에게 나누어 줍니다. 재물을 나누어 주는 것은 귀한 일로서 ‘다나 빠라미dāna-pāramī’라고 부릅니다. ‘빠라미pāramī(바라밀)’란 ‘고귀한 자의 일’이라는 뜻입니다. 상대의 이로움과 번영을 위해서 자신의 물건을 주는 일이 ‘다나 빠라미’입니다.
‘다나 빠라미’가 무르익으면 한 단계 발전합니다. 자신 소유의 물건을 보시하는 정도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주느냐 하면 자신의 신체 일부까지 줍니다. 예를 들면 피, 신장, 안구 등을 줍니다. 빠라미를 채우던 기간의 고따마 붓다의 전신 시위왕은 자신의 눈을 보시했습니다
(J499). 이처럼 자신의 신체 일부를 주는 보시를 ‘다나 우빠빠라미dāna-upapāramī(보다 높은 빠라미)’라고 부릅니다. 자기 몸의 일부를 타인의 이로움을 위해 보시하는 겁니다.
이보다 한 단계 더 올라가면, 자신의 목숨도 타인을 위해 줄 수 있습니다. 이런 보시를 ‘다나 빠라맛타 빠라미dāna-paramattha-pāramī(가장 높은 빠라미)’라고 부릅니다.
보디삿따들은 이렇게 세 종류로 한 단계씩 올려서 보시했습니다. 유정물이든 무정물이든 보시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자기의 목숨까지 보시했습니다.
2. 알맹이와 껍데기
이쯤에서 우리 생에서의 ‘알맹이와 껍데기’를 구분해서 볼 만합니다. 무엇이 알맹이인가? 무엇이 버려야 할 껍데기인가?
내가 얻은 몸은 어머니 자궁 안에 있을 때부터 하루하루 자라서 점점 늙어갑니다. 마지막엔 아주 쇠약해집니다. 몸이라는 것은 어느 날 기능을 멈춰 버립니다. 그때 사람의 몸에서 찾을 수 있는 핵심 가치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보존해 둘 만한 것이 몸에는 없습니다.
10년 사는 존재의 경우, 10년 살다가 죽으면 몸과 목숨이 분리됨과 동시에 몸은 쓸모없는 물건이 되어 버립니다. 그 사람의 수명이 60이건, 70이건, 80이건 목숨과 몸이 분리되는 즉시 그 몸에서 가져가 보존해 둘 만한 것은 전혀 남지 않습니다. 모두 버려야 할 것들뿐입니다. 죽은 사람의 몸에서 버리지 않고 모셔 둘 만한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모두 내다 버려야 할 것들뿐입니다. 생명이 있을 때는 가치 있어 보이고 아름다워 보이는데, 목숨과 몸이 분리되는 그 즉시 그 가치는 완전히 상실됩니다. 죽기 전에는 사랑하고 아껴주던 가족들조차도 시체가 되어 버리면 집안에 오래 두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건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이 몸 안에 보존해 둘 만한 가치 있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정신에서 찾을 수 있는가? 정신이란 금세 생겼다가 금세 사라지므로 거기서 가치를 찾아내기도 매우 어렵습니다. 알맹이, 핵심이란 몸 안 어디에도 없습니다. 정신 역시도 생멸이 너무도 빨라서 잡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정신에 의지해서 생겨나는 핵심가치를 얻을 수 있다면 몸 안에서 가치 있는 것을 찾아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알맹이와 껍데기를 구분해서 알게 되면 껍데기에 많은 시간을 쓰지 않습니다. 알맹이를 많이 얻도록 시간을 배분할 겁니다. 진정 가치 있는 것은 자신이 지키는 계율과 이로운 습관들입니다. 대부분의 중생들은 이런 알맹이들은 안중에도 없고, 버려야 하는 껍데기를 수집하느라 용쓰며 삽니다. 또한 껍데기에 신경 쓰느라 많은 불선업을 짓기도 합니다. 알맹이를 채우느라 불선업을 짓게 되는 경우는 적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껍데기인가? 무엇이 핵심인가? 이 답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답을 찾았으면 껍데기에는 신경 쓰지 말고 알맹이를 얻을 수 있도록 매진해야 합니다. 알맹이를 모으지 못한다면 마지막 순간에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껍데기를 주워 담다 보면 알맹이를 챙길 시간은 사라집니다. 다음 생으로 갈 때는 버리고 가야 할 것들입니다. 가진 것 하나 없이 떠나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왓디 경vaḍḍhi-sutta(A10.74)」에서 삿다saddhā(신심), 실라sīla(계율), 수따suta(붓다의 법을 들음), 짜가cāga(보시), 빤냐paññā(지혜)가 알맹이라고 설하셨습니다.2) 정신에서 이 알맹이를 만들며 사는 겁니다. 알맹이를 챙길 줄 모르면 안 됩니다. 핵심을 챙기지 못하면 껍데기만 남습니다.
보십시다. 나무의 알맹이는 나무둥치를 감싼 껍데기 안에 있습니다. 잎에도 없고 가지에도 없습니다. 그 둥치 안에만 있습니다. 핵심이 있는 자리를 알고 이 핵심을 가질 줄 아는 게 관건입니다. 내 몸 안에도 핵심은 없습니다. 너무나 빠른 정신 그 자체에도 없습니다. 정신을 갈고 닦아서 만들어 내는 부산물에만 핵심이 있습니다. 이 부산물을 만들 줄 알면 핵심을 얻을 겁니다. 만들 줄 모르면 핵심을 얻을 리 없습니다. 놓쳐 버릴 겁니다.
3. 신심(삿다)
정신에서 생겨나는 ‘삿다(신심)’라는 믿음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믿는 것인가 하면, ‘좋은 일을 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 좋지 않은 일을 하면 좋지 않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라는 ‘업(의도)과 업의 결과’를 믿는 것이라고 경전에 나와 있습니다.
업이란 자신 안에 있는 의도의 파장, 의도의 힘을 말합니다. 이 의도의 능력(힘)을 믿는 겁니다. 이 의도가 만들어 내는 결과를 인정합니다. 좋은 일을 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안 좋은 일을 하면 안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업과 업의 결과를 믿는 것. 이것을 볼 줄 아는 것을 ‘깜맛사까따 삼마딧티kammassakata-sammādiṭṭhi’라고 합니다.
자신이 짓는 업, 자신이 하는 일에 믿음이 없는 사람이 스스로 찾아서 좋은 일을 할 리 없습니다. 하고 싶은 짓을 맘대로 하며 살 겁니다. 그가 하는 일의 옳고 그름도 구분할 리 없습니다.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가늠하지 못한 채 하고 싶은 것만 찾아 다닐 겁니다.
세상의 일은
1) 하고 싶은 일
2) 하기에 마땅한 일
3) 반드시 해야 하는 일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가운데서
1) 하고 싶은 일을 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좋은 것을 얻을 수도 있고 안 좋은 것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서원(찬다chanda)이 바른지 바르지 않은지에 달렸습니다.
2) 하기에 마땅한 일은 좋은 일입니다.
신심의 힘, 지혜의 힘이 있습니다. 하기에 마땅한 일은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 줍니다.3) 나아진 환경으로 인해 좋은 결과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안 좋은 결과도 생겨날 수 있습니다. 좋은 결과만 골라서 생겨나게 할 순 없습니다.4)
3) 반드시 해야 할 일만 하는 게 좋습니다.5) 해야 마땅한 일은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어떤 일을 해야 마땅한가’라고 판단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때 이 판단을 내리는 것 역시 ‘삿다(신심)’뿐입니다. 이런 종류의 신심을 ‘아디목카adhimokkha’라고 부릅니다. 좋은 것이라고 결단 내리고 받아들일 수 있는 신심이 생기면 그 사람의 능력과 마음이 맑아집니다. 좋은 일을 하고자 일부러 궁리합니다. 선업을 짓는 일에 흥미가 갑니다. 신심의 위력으로 좋은 일에 마음을 기울입니다. 쉬운 말로 하자면, 선업을 자발적으로 짓고 싶어 합니다.
제대로 된 신심이 있으면 남이 알게든 모르게든 타인에게 이로움을 주는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 자신도 지계와 좋은 습관을 들이고 싶어 합니다. 법문이 듣고 싶어집니다. 유용한 기술과 학문들을 배우고 싶어 합니다. 이런 쪽으로 마음이 기울게 됩니다. 이것을 ‘삿다’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신심이 한 단계 더 날카로지워지면 가벼운 즐거움을 주는 놀이는 재미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노는 이들을 보며 불만스러워하지도 않습니다. 마음이 들뜨거나 무겁거나 뜻대로 되지 않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할 만한가? 할 만하지 않은가?’라는 갈등과 의심으로 결정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지도 않습니다. 경전에 나오는 말로 하자면, ‘니와라나nivāraṇa’라고 부르는 ‘집중의 장애요소’들이 사라집니다. 대상들을 볼 때 자애로 보고 흥미로워합니다. 어떤 대상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미워하지 않습니다. 선업을 짓는 일에 마음이 움츠러들거나 물러서지 않습니다. 활력이 넘칩니다. 마음이 무거워서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없게 됩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서, 해서 마땅한지 아닌지 고민하지 않고 단호하게 합니다.
‘니와라나(집중의 장애요소)’들을 이 신심의 힘으로 제거해 버렸습니다. 신심의 힘이 강해지면 좋은 일들을 스스로 찾아서 합니다. ‘다나(보시)’ 선업을 짓는 데 있어서 손이 느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대중과 나누어 써야 한다는 마음을 언제나 지니고 있습니다. ‘실라(계율)’를 지킴에 있어서 주춤거리지 않습니다. 받은 계율을 귀하게 지켜 나갑니다. 상식을 갖추기 위한 법문을 듣는 일에도 민첩하고 흥미로워합니다.
일상의 24시간을 어떻게 배분해서 써야 할지 지혜롭게 생각해서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습니다. 이익이 되게 시간을 씁니다. 지혜도 매우 날카로워집니다. 날카로워져서 매사에 생각하게 됩니다. 적절한가, 적절치 않은가도 숙고하게 됩니다.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할 때, 하는 행태와 방법을 궁리합니다. 효율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와 같이 정신에서 파생되는 핵심가치를 두루 갖추어서 열반까지 이끌고 갈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해지면, 이런 존재는 죽음으로 끝나는 흔한 생을 넘어서 모든 고통이 소멸한 열반에 이르게 됩니다. 무엇이 핵심인지 앎과 동시에 몸이라는 물질을 위해서 신심이 손상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몸이라는 물질을 위해 지혜를 허비하는 것을 간과하지 않습니다. 알맹이와 껍데기 중에서 알맹이에 우선을 둡니다. 껍데기야 어떠하든 핵심을 얻어야 한다는 단호함이 생깁니다.
4. 현인들의 예
1) 부리닷따 용왕
보디삿따이신 ‘부리닷따bhūridatta’ 용왕을 보십시오. 그는 용왕으로 태어나 금은보화로 가득한 용궁에서 매우 부유하고 호사스럽게 향락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향락을 만끽하며 사는 삶에 점점 흥미를 잃어 갑니다. 가치 있는 핵심이 무엇인가 고민하면서, ‘실라(지계)’라는 알맹이를 반드시 얻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리곤 용궁에서 나와 인간계로 와 계를 받습니다. 용궁에서는 8계를 완벽하게 지키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홀로 나와서 숲에서 8계를 지키며 삽니다. 계를 지킬 때 외부의 재물과 물건의 손해를 감수하며 지키는 것을 ‘실라 빠라미’라고 부릅니다. 몸이나 신체의 일부가 훼손되는 것을 감수하며 지키는 계를 ‘실라 우빠빠라미’라고 부릅니다. 목숨과 바꾸어서 지키는 계를 ‘실라 빠라맛타빠라미’라고 합니다.
땅꾼이 용왕을 잡아서 괴롭힐 때, 다들 알다시피 용왕이 그 땅꾼을 죽이기는 쉬운 일입니다. 용왕의 독은 매우 강력하지 않습니까? ‘흥’ 하고 콧방귀만 뀌어도 그 사람을 재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습니다. 용왕에게는 그럴 만한 힘이 있었지만 자신이 결심한 지계에 흠이 생길까 봐 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감수하겠다고 결심하고 계를 어기지 않고 엄수했습니다.
용왕이 왜 이렇게 할 수 있느냐 하면 알맹이와 껍데기를 정확히 알기 때문입니다. ‘몸은 껍데기일 뿐. 때가 오면 마땅히 쇠락해 갈 뿐. 그때가 되면 누구도 손쓸 수 없다.’ 이것을 알아서, 몸에 의지해 생겨나는 정신의 부산물인 지계와 수행만이 가치 있음을 알기에 이 핵심을 흠내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지키는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가치 있는 것들도 지켜나가야 하는 겁니다.
다시 요약하자면, 자신의 생에서 무엇이 껍데기인지 무엇이 알맹이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껍데기를 줍느라고 알맹이를 지나치면 안 됩니다. 알맹이의 특성은 희귀합니다. 오래갑니다. 결과가 훌륭합니다. 이런 특성을 가진 것들이 바로 알맹이(핵심)입니다.
몸이라는 것은 단명합니다. 그런 만큼 가치도 적습니다. 중생은 자신의 수명만큼만 이 몸을 가지고 삽니다. 그 뒤에는 버려야 합니다. 평균수명이 다하지 않아도 큰 병이 생기면 몸이 점점 아파집니다. 고통스럽습니다. 이 몸은 항상 불편함을 수반합니다. 이 몸에서 알맹이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현인들은 ‘핵심이란 무엇인가?’라고 숙고해서 이 핵심을 반드시 찾아내고 얻어냅니다. 빠라미를 닦는 이들은 생을 살면서 이런 알맹이들을 반드시 챙겨서 다음 생으로 건너갑니다.
2) 고따마 붓다
고따마 붓다는 수메다 존자의 생부터 해서 이런 알맹이들을 찾아 나서서 4번의 아상케야asaṅkheyya와 10만 번의 세상6)을 거쳤습니다. 아상케야라는 셀 수 없는 세상이 4번, 셀 수 있는 세상이 10만 번. 이렇게 장구하게 찾고 쌓아야 했습니다. 쉽게 이룰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고따마 붓다는 이런 알맹이들이 모두 모아졌을 때 아주 탁월한 능력인 ‘삽반뉴딴냐나sabbaññutāñ-ñāṇa(모든 것을 아는 지혜)’를 갖추고 붓다가 되셨습니다.
모든 붓다의 깨달음은 이런 핵심 되는 가치들이 다 모였을 때 성취되는 겁니다. 이런 핵심을 조금 모으면 조금 행복합니다. 이런 값진 것들을 많이 모으면 많이 행복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포장지만 집착해 수집하고 있습니다.
3) 꾸마라깟사빠 존자
꾸마라깟사빠kumāra-kassapa 존자가 드신 예7)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친구인 두 사람이 재물을 찾아서 길을 나섭니다. 길을 가다가 폐허가 된 마을에서 실 꾸러미를 발견합니다. 그걸 보자마자 두 사람은 ‘잘 됐다. 이 실로 천을 짜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실 꾸러미를 지고 길을 떠납니다. 다음 마을에 이르자 그런 실로 짜 놓은 천 두루마리를 발견합니다.
그 천 두루마리를 보자 한 명은 빨리 결정 내립니다. ‘아! 이 실 뭉치를 여기까지 지고 온 건 이런 천을 짜려고 함인데, 여기서 이미 짜놓은 천을 발견했으니 이 실 꾸러미는 버려야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실은 버리고 천 두루마리만 들쳐 업고 나섭니다. 다른 한 명은 멀리서 힘들여 지고 온 것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 실 꾸러미를 다시 들쳐 업고 길을 나섭니다.
다음 마을에 이르자 황금이 가득 든 자루를 발견합니다. 지혜로운 이는 황금이 든 자루를 보자 ‘황금이 든 자루를 찾았는데 이 천 두루마리를 어디다 쓰겠는가’라고 생각하며 천 두루마리는 버리고 황금이 든 자루만 이고 나옵니다. 다른 한 명은 멀리서부터 지고 온 실 뭉치가 아까워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다시 지고 나섭니다. 고향에 돌아왔을 때 한 명은 황금이 든 자루를, 한 명은 실이 가득 든 자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리석은 이는 실 꾸러미만 가득 가져왔습니다. 지혜 있는 이는 황금이 든 자루를 가져와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5. 훼손(뱌사나) 5가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포장지에 신경 쓰며, 보여주기에만 시간을 허비합니다. 가치 있는 것을 챙겨가지 않습니다. ‘세상의 핵심(알맹이)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과거의 노장들께서 설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양 낀찌 바-히양 왓투,
야타-까-망 빠빗자뚜.’8)
바-히양
(내부의 알맹이가 아닌 외부에 존재하는)
양 낀찌 왓투
(어떤 물질이건)
야타-까-망 빠빗자뚜
(때가 되어 갈 때가 되면 가기를)
자신의 몸, 몸의 주변에 있는 방, 건물, 보석, 자가용, 금, 은, 옷, 몸과 그에 속한 것들, 이것들을 밖의 물건이라고 부릅니다. 외부에 존재하는 물건은 그것이 무엇이건 손상되더라도 염두에 두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가치 없는 포장지들은 버려질 때가 되면 버려지기를...’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내부에 존재하는 삿다(신심), 실라(계율), 수따(견문), 빤냐(지혜)라고 하는 정말 가치 있는 것들이 훼손되지 않는다면 손해 본 게 아닙니다. 포장지가 아무리 손상되더라도 내용물이 다치지 않으면 손해 본 게 아닌 겁니다. 그러니 내용물에 더 신경을 써야 합니다.
사람들이 값을 매기는 기준은 포장지입니다. 세간 사람들의 대부분이 무엇을 보고 평가합니까? 그 사람이 가진 재산을 보고 평가합니다. 그 사람의 직위를 보고 평가합니다. 권력을 보고 평가 내립니다. 직위는 잠시입니다. 휘두르는 권력도 한때뿐입니다. 가진 부귀도 잠시 손 안에 있다가 갑니다. 모두 한시적입니다. 모든 것에 유효기간이 있습니다. 그 무엇도 견고하지 않습니다. 이런 유한한 것들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은 바쁘게 찾고 또한 집착해서 놓지 못합니다. 이것이 일상입니다. 신심을 잃었다고, 지계를 잃었다고, 근심하고 걱정할 줄 모릅니다. 정말 걱정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지계와 수행이 훼손되는 것, 견해가 일그러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우려해야 하는 일입니다.
‘뱌사나 담마’(훼손)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1. 냐띠 뱌사나ñāti-byasana – 가족 친지들을 잃음
2. 보가 뱌사나bhoga-byasana – 재물, 재산을 잃음
3. 로가 뱌사나roga-byasana – 병과 통증으로 파괴됨
4. 실라 뱌사나sīla-byasana – 지계의 훼손
5. 딧티 뱌사나diṭṭhi-byasana – 견해의 훼손
이 훼손 5가지 중에서 사람들이 중히 여기는 것, 다칠까 봐 겁내는 것이 냐띠 뱌사나, 보가 뱌사나, 로가 뱌사나입니다. 가족, 친지를 잃을까 봐 무서워합니다. 재물과 재산을 잃을까 봐 겁냅니다. 몸이 아플까 봐 두려워합니다. 이 세 가지를 잃지 않으려고 심혈을 기울입니다. 자신의 계율이 무너질까 봐, 견해가 어긋날까 봐 겁내거나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정말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실라 뱌사나와 딧티 뱌사나입니다. 나머지 뱌사나(훼손)는 겁낼 필요 없는 것들입니다. 세간에서 사람들이 근심 걱정에 빠지는 것은 앞의 세 가지 때문입니다. 뒤의 두 가지 때문에 근심하지 않습니다. 가족, 친지를 잃어서 통곡합니다. 재물을 잃었다고 웁니다. 병들어서 웁니다. 실라를 잃었다고 우는 사람은 들어본 적이 없을 만큼 희귀합니다. 붓다께서는 냐띠 뱌사나, 보가 뱌사나, 로가 뱌사나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지는 않는다 하십니다. 윤회라는 상사라에서 고통에 빠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실라 뱌사나, 딧티 뱌사나는 다릅니다. 계를 잃고 견해가 훼손되면 윤회에서 고통의 늪에 빠져 버립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두 가지를 놓칠까 봐 사람들이 염려하진 않습니다. 걱정하지 않으므로 가치 있는 지계를 돈과 바꾸어 버립니다. ‘주지 않는 물건을 가지지 않는 계를 지키겠습니다(아딘나다나 웨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미9))’고 하면서도 많은 이들이 기회가 되면 계율에 흠집을 내면서 횡령해 버립니다.
‘여우의 지계’가 있습니다. 여우는 근처에 사냥감이 없을 때는 8계를 지키겠다며 얌전히 있습니다. 사냥감이 없어 굶거나 계를 지켜 허기지거나 매한가지일 때는 8계를 지킵니다. 그러나 그 근처에 토끼가 지나가면, ‘8계는 나중에 지켜야지. 있을 때 먹어야지’ 하며 사냥해서 배를 채웁니다. 이런 지계를 ‘여우의 지계’라고 부릅니다. 기회가 오지 않았을 때, 먹을거리가 없을 때만 ‘정오 이후에는 곡기를 피하겠습니다(위깔라 보자나 웨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미10))’라고 합니다. 먹을 걸 보면 ‘나중에 지켜야지’ 하면서 먹습니다. 이런 일들은 포장지와 내용물을 구분하지 못해서 생기는 겁니다.
6. 윤회에 이익되는 알맹이 챙김
인간계에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정말 중요한 알맹이를 챙겨야 합니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생을 살았습니다. 그 많은 생을 살면서 지위와 권력과 부귀를 누려보지 못한 중생이 없다고 붓다께서 「아나마딱가 숫따anamatagga-sutta」11)에서 설하셨습니다. 이 역시도 매우 생각해볼 만합니다.
정말 좋은 대상들, 매우 매혹적인 것들을 만났을 때 어떻게 생각해야 하느냐 하면, ‘너무나 장구한 윤회에서 나 역시 저런 것들을 누리며 살았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것에 심하게 끌리지 않습니다. 마음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이번엔 고통에 처한 이를 봅니다. 너무나 비참해서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길가의 불쌍한 이를 보게 되면 ‘오, 나도 이런 곤경에 수없이 빠졌겠지’라고 생각합니다. 짐승들을 봤을 때도 ‘아, 나 역시 이전 생에서 이렇게 고통 받았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아나마딱가 숫따」에서 설하신 겁니다.
윤회는 너무나도 깁니다. 얼마나 긴가 하면 말로 해서 끝이 나지 않을 만큼 깁니다. 그래서 붓다께서 ‘길고 긴 윤회에서 나의 부모가 되어보지 못한 존재가 없다’라 하셨습니다. 형제, 자매로 만나지 못한 이가 없습니다. 사람끼리 만나면 ‘언젠가는 나의 어머니였을 거야. 나의 아들이었겠지. 나의 딸이었겠지. 나의 숙모였을 거야’ 등으로 친척으로 여기고 보면 사람이든 짐승이든 연민과 애정을 두기가 쉬워집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미워할 만한 일도 잊어질 겁니다. 9계12)의 계율에서 중하게 여기며 지키는 것이 ‘멧따 사하가떼나 쩨따사 삽바빠나부떼수13) (모든 존재들에게 자애의 마음을 두라)’입니다. 미워할 만한 사람을 만나도 ‘나의 어머니 또는 나의 아버지, 나의 친척이었으리라, 우리가 잊어서 모를 뿐’이라고 마음을 다스리면 미움도 사라져 버립니다.
중요한 것은 내 안의 미움이 사라지는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든 내 안에서 미움이 사라지면 온 세상이 평온해지는 건 분명합니다.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바로 서늘하고 고요해집니다. 작열감이 식어 버립니다. 붓다의 말씀을 실천한다는 것은 이런 것을 말합니다. 윤회에서 이런 가치 있는 것을 얻는다면, 나고 죽음의 쳇바퀴를 그나마 편안히 밟을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도 편안하고 천인으로 태어나도 편안합니다. 범천으로 태어나면 더욱 행복할 겁니다. 윤회를 도는 동안에 이런 선업만이 행복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윤회라는 큰 감옥에서 나가고 싶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런 선업을 지을 때 그 목적을 바꾸기만 하면 됩니다. 선업을 두 가지로 나누어야 합니다. 윤회에서 행복하게 살게 해주는 것도 선업입니다. 윤회의 굴레에서 나가게 해주는 것도 선업(= 빠라미)입니다.
윤회를 돌게 하는 선업은 ‘딴하taṇhā(집착)’의 지배를 받는 선업입니다.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짓는 ‘꾸살라kusala(선업)’는 윤회에서 벗어나게 해주지 못합니다. 그 선업 안의 집착이 윤회를 돌게 합니다. 그렇다면 ‘딴하’라고 부르는 집착은 왜 생기는가? 이는 바르게 알지 못하는 ‘아윗자avijjā(무명)’가 만들어냅니다.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다고 착각하게 합니다. 안 좋은 것을 좋게 보도록 덮어 줍니다. ‘아윗자(어리석음)’가 좋게 보도록 이끌고 가는 대로 ‘딴하(집착)’도 따라갑니다. 어리석음과 집착, 이 두 가지로 인해서 ‘상사라(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사는 겁니다.
이 두 가지가 윤회의 뿌리 두 가닥입니다. 이 두 줄기 뿌리를 뽑아 버리면 선업이 윤회의 바퀴를 부수고 열반까지 데려갑니다. 이 뿌리 두 가지를 제거하지 못하면 상사라를 돌며 무명과 집착의 결과를 받아야 합니다.
이 뿌리 두 가닥을 잘라버림과 동시에 윤회의 바퀴를 깨부수고 열반에 이릅니다. 이 핵심(알맹이)들이 우리를 열반까지 이끕니다.
7. 마하나마 왕과 붓다의 대화
석가족이며 싯닷타siddhattha 왕자보다 연장자인 ‘마하나마mahānāma’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이 왕은 사다함까지 이르렀습니다. 사다함(사까다가미sakadāgāmī)이란 수다원(소따빤나sotāpanna)에서 한 단계 더 오른 성인입니다. 아나함(아나가미anāgāmī)과 수다원 사이에 있습니다. 사다함 과(사까다가미 팔라sakadāgāmi-phala)를 얻으면 남은 7가지 번뇌가 한층 엷어집니다.14) 하지만 완전히 제거되지는 않습니다. 아나함 과(아나가미 팔라anāgāmi-phala)를 얻었을 때에야 성냄과 감각적 욕망이 완전히 제거됩니다. 이 사다함 과를 얻은 마하나마 왕이 붓다를 친견했을 때 여쭙습니다.
“붓다시여, 제게 걱정이 생겼습니다. 저녁에 까삘라왓투kapila-vatthu 도시에 들어갈 때 마차, 말, 코끼리들과 뒤섞여 길을 가니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그 시대에는 대부분의 길이 좁았습니다. 좁은 길에 코끼리, 말, 마차가 뒤섞여 다녔습니다. 그 시대의 자동차들입니다). 어떨 때는 마차에서 풀려난 말이 내달리기도 합니다. 가끔은 거친 코끼리가 도망치기도 합니다. 붓다시여, 이런 풀려난 코끼리를 볼 때, 풀려난 말을 볼 때, 술주정뱅이가 난동 부리는 걸 볼 때, 이런 순간에 저는 붓다를 떠올릴 수 없습니다. 담마도 떠올릴 수 없습니다. 이런 때 제 마음은 달아나 버립니다. 그 순간에 저의 마음이 고요하지 않습니다.”
풀려난 사나운 코끼리가 달려 오면 그 코끼리가 두렵지 않습니까? 거친 말이 날뛰고 폭력배들과 마주치는 이런 상황에서 담마를 상기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의 마음이 달아나 버립니다. 마하나마 왕이 사다함이라서 성냄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순간에 제가 죽을까 봐 두려웠습니다. 만약 제가 그때 죽는다면 제가 좋은 생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라고 계속해서 여쭙습니다.
붓다께서 대답하십니다. “마하나마여,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신심의 힘이 왕의 마음에서 자주자주 솟구칩니다(삿다빠리바위따saddhā-paribhāvita). 지계의 힘이 흠씬 젖어 들어 있습니다(실라빠리바위따sīla-paribhāvita). 지혜의 힘 역시 날이 서 있습니다(빤냐빠리바위따paññā-paribhāvita). 그래서 그런 두려움의 순간에 방일하더라도 왕은 절대로 낮은 세계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 흠뻑 훈연된 마음의 흐름이 왕을 위로만 이끌고 갈 겁니다. 절대 밑으로 데려가지 않습니다.”
붓다께서 예를 들어 다시 설명해주십니다.
“내가 설명해 보이겠습니다. 버터가 든 단지를 물 안에 넣어서 깨뜨리면 단지의 조각들은 밑으로 가라앉을 겁니다. 버터는 물 위로 떠오를 겁니다. 버터 단지가 물 안에서 깨지면 단지 조각들은 밑으로 가라앉고 버터의 기름들은 물 위에 뜨는 게 당연합니다. 몸이라는 물질은 무덤에 버려지거나 화장될 겁니다. 벌레들의 먹이가 될 겁니다. 하지만 신심의 힘으로 단련된 마음, 지계의 힘으로 훈련된 마음, 지혜의 힘으로 날이 선 마음은 왕을 위로만 이끌고 가는 게 당연합니다. 특별한 법의 뿌리가 마지막 종착지인 번뇌의 소멸까지 보내 줄 겁니다.” 마하나마 왕에게 생의 핵심 가치들이 많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생에서 가치 있는 핵심을 많이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포장지에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가치 있는 것들을 많이 모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마음에 이렇게 새겨야 합니다. 신심이라는 핵심, 지계라는 핵심, 견문이라는 핵심, 버림이라는 핵심, 보시라는 핵심, 지혜라는 핵심들을 반드시 얻어야 합니다. 이러한 정말 고귀한 빠라미를 위해 열심히 애써야 한다고 이 자리에서 결심하고, 핵심 가치를 반드시 얻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sādhu sādhu sādhu
(훌륭합니다, 훌륭합니다, 훌륭합니다)
[주해]
1) “sukho puññassa uccayo.”(『법구경』 118번 게송)
2) 「왓디 경」에는 삿다, 실라, 수따, 짜가, 빤냐로 5가지가 나오고 다나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때 짜가(버림)는 다나(보시)와 같은 의미이다.
3) 여기서 ‘하기에 마땅한 일’은 열반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세속적인 선업(보시, 지계 등)을 뜻한다. ‘환경을 만들어준다’는 뜻은 본서 II. 마하다나의 ‘5계 지킴의 이익’ 부분을 참고할 것. “5계를 지키는 것이 행복과 즐거움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 지계 선업은 또한 ‘좋은 환경을 조성(소왁기까sovaggika)’해 줍니다. 좋은 환경이란 ‘눈에 보여지는 것이 모두 좋은 것뿐’이란 뜻입니다.”
4) 이와 관련해서는 본서 V. 찾음과 얻음의 ‘자기 자신을 찾음’ 부분을 참고할 것. “보시(다나)에 관하여 설하시면서 보시를 하면 태어나는 생에서 부유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부족함을 모르고 재물이 채워진다고 보시에 대해 설하십니다. 하지만 보시의 결과로 재물은 풍족할지라도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돈이 있어도 건강하지 못하면 그 부유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계도 완전하면 좋습니다. 지계가 완벽하면 천상에 가기는 매우 쉽다고 5계에 대하여 설하십니다. 천상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설해주십니다. 천상의 달콤한 행복을 설하신 뒤에 “이 모든 행복이 헛되다. 아무리 큰 부자가 누리는 감각적 향락도 일장춘몽일 뿐, 꿈에서 깨기 전까지만 즐거울 뿐 꿈에서 깨어나면 모든 것이 물거품같이 사라진다”라고 설하십니다.”
5) 열반을 목적으로 하는 선업(=빠라미)과 수행을 말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본서 I. 껍데기는 버리고 알맹이를 찾아서의 ‘윤회에 이익되는 알맹이 챙김’ 부분을 참고할 것. “이 윤회라는 큰 감옥에서 나가고 싶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런 선업을 지을 때 그 목적을 바꾸기만 하면 됩니다. 선업을 두 가지로 나누어야 합니다. 윤회에서 행복하게 살게 해주는 것도 선업입니다. 윤회의 굴레에서 나가게 해주는 것도 선업입니다.”
6) ‘1대겁’(mahā-kappa)은 우주가 한 번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기간이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10만 번의 세상’(=10만 대겁)이라고 번역했다. 1대겁은 다시 우주가 (1) 파괴되어가는 겁(상왓따깝빠saṁvaṭṭa-kappa), (2) 파괴된 채 머무는 겁(상왓땃타이깝빠saṁvaṭṭaṭṭhāyī-kappa), (3) 생성되어가는 겁(위왓따깝빠vivaṭṭa-kappa), (4) 생성된 채 머무는 겁(위왓땃타이깝빠vivaṭṭaṭṭhāyī-kappa)으로 나뉜다. 이 각각의 기간을 ‘아승기겁(아상케야깝빠asaṅkheyya-kappa)’라고도 하며, (1)+(2)+(3)+(4)=‘1대겁’이 된다. 현재 우리는 (4)의 기간에 있다.
각각의 아승기겁은 그 안에 64사이겁(안따라깝빠antara-kappa)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의 수명이 10살에서 아승기("헤아릴 수 없이")까지 늘어났다가 다시 10살까지 줄어드는 기간이 ‘1사이겁’이다. ‘1사이겁’은 다시 ‘수명이 늘어나는 기간’과 ‘수명이 줄어드는 기간’으로 나뉜다. 모든 붓다는 ‘수명이 줄어드는 기간’(계를 지키지 않으면서 수명이 점점 주는데 100년에 1살씩 준다)에만 출현하는데, 그 중에서도 ‘인간 수명이 10만 살일 때부터 100살일 때까지’만 출현한다. 고따마 붓다는 인간 수명이 100살일 때 출현하셨다. 다음 붓다인 ‘멧떼야 붓다’는 인간 수명이 다시 아승기까지 늘어났다가 8만 살까지 줄어든 시기에 출현한다.
그러나 본문의 ‘4아상케야’(아승기)는 위에서 말한 ‘아승기겁’과는 다른 뜻이다. 삼장법사 밍군 사야도는 ‘헤아릴 수 없다’(=asaṅkheyya)는 의미를 들어 ‘한 붓다의 출현과 그다음 붓다의 출현 사이가 헤아릴 수 없이 긴 시기’로 보고 있다. 이를 ‘불간(佛間) 아승기’(buddhantara-asaṅkheyya)라고 부른다. 이런 의미로 보면 ‘붓다가 출현하지 않는 네 번의 헤아릴 수 없는 기간’과 ‘10만 대겁’ 동안 바라밀을 닦았다는 뜻이 된다. (밍군 사야도의 《마하붓다왕사》. 최봉수 역, 《대불전경》 4권 161쪽 참고.)
7) 「빠야시 경」(D23) 참조.
8) “Yaṁ kiñci bāhiyaṁ vatthu, yathākāmaṁ pabhijjatu.”.
9) “Adinnādānā veramaṇī sikkhāpadaṁ samādiyāmi.” (『쿳다까빠타Khuddakapāṭha』)
10) “Vikālabhojanā veramaṇī sikkhāpadaṁ samādiyāmi.” (『쿳다까빠타』)
11) 『상윳따 니까야saṁyutta-nikāya』의 「아나마딱가(시작을 알지 못함) 상윳따anamatagga-saṁyutta」(S15)를 말한다.
12) 우뽀사타uposatha(포살) 날에 지키는 8계에 자애의 마음을 더해 9계를 지키기도 한다(「자애 경」(A9:18) 참고).
13) “Mettā-sahagatena cetasā sabba-pāṇa-bhūtesu pharitvā vihārānaṃ samādiyāmi.”
14) 수다원과를 얻으면 10가지 족쇄(S45:179, S45:180 참고) 중 ‘자아가 있다는 잘못된 견해’와 '위빳사나가 아닌 실천을 반복하여 해탈할 수 있다는 잘못된 견해', ‘바른 길(8정도)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제거된다. 또한 4악처에 떨어질 정도의 심한 탐욕과 화냄이 사라진다.
사다함과를 얻었을 때 추가로 제거되는 불선 마음은 없지만, 탐욕과 화냄, 어리석음이 현저히 약해진다.
아나함과를 얻으면 ‘감각적 욕망’과 ‘화냄’이 완전히 제거된다.
마침내 아라한과를 얻었을 때, ‘색계 생을 원하는 탐욕’, ‘무색계 생을 원하는 탐욕’, ‘자만’, ‘들뜸’, ‘무명’이 완전히 제거된다. [역자 주]
- <난다말라비왐사 큰스님 가르침> 中,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 옮김
(2023년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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