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군 동면 월운리 무후제 답사기
채록일: 2006년 12월 15일
채록내용: 필자는 동면 월운리에서 무후제를 지낸다는 제보를 접하고, 아침에 일찍 춘천에서 출발하여 홍천군 동면 월운리에 도착했다. 이장 댁을 찾아서 커피를 한잔 마시면서 월운리 무후제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었다.
오전 10시경에 지낸다고 하여 일찍 찾아 제수 마련하는 과정을 채록하고자 했는데, 제수는 무후자의 논을 부치는 분이 이미 다 해놓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일 때만 기다린다고 하여 제수 준비 과정은 채록할 수 없었다.
시간이 가까워지자 무후제에 참가할 사람들이 몇몇 모였다. 오전 10시가 조금 넘자 모두 자동차를 몰고 무후자의 묘가 있다는 월운리 뒷산인 오음산으로 향했다. 마을에서 오음산으로 오르는 길은 군인들이 훈련을 하기 위해서 도로를 닦아놓은 군사용 비포장 도로였다. 어제 온 눈이 아직 녹지 않아서 살짝 도로를 덮고 있었으나 차를 운행하는 데는 별로 지장이 없었다. 가끔 나무 위에 쌓였던 눈이 바람을 타고 흩뿌리기도 하였다.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한참을 오르니 월운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마을 이장이 차를 세웠다. 필자도 그곳에 차를 세우고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그야말로 오음산 중턱에서 내려다보는 월운리는 한적한 농촌 그 자체였다. 우리들이 잠시 서있던 곳 옆에는 군인들이 훈련을 할 때 사용하는 갖가지 구조물들이 있었다.
이장은 이곳 어디에 무후자의 묘가 있다고 하면서 본인도 올해 처음 오기 때문에 찾아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우리가 걷고 있는 이곳은 원래 공동묘지 터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공동묘지는 대부분 일제강점기 때와 6.25한국전쟁 때 죽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했다. 너무 오래돼서 묘의 주인들을 알 수가 없는데, 얼마 전 군인들이 이곳을 훈련장으로 쓰기 위해서 훈련장 옆 지금 무후자묘가 있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파서 옮겼다고 하였다. 옮길 때 보니 간혹 몇 개의 아주 작은 뼈 조각이 있기도 했는데, 대부분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어서 그곳에 있는 흙을 조금 파 옮겼다고 하였다.
처음 그곳에 도착한 우리 몇 사람은 그곳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곳에 가서 비석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이장이 말한 “황금실”이라는 묘비명은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윗부분으로 다시 올라가서 묘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았으나 묘는 찾을 수 없었다. 다시 내려와서 묘비의 뒤를 훑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거친 대리석으로 만든 묘비의 뒷부분에 “관리인 동면장 월운이장(管理人 東面長 月雲里長)”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묘비 앞으로 갔더니 흐릿하게 “유인청주한씨금석지묘(孺人淸州韓氏金錫之墓)”라고 한자로 새겨 있었다. 여기 쇠 금(金)자는 온전 전(全)자 같이 보였는데, 같이 왔던 분이 쇠금자라고 거듭 말씀하였다. 이장이 황금실이라고 했던 것은 “한금석”을 잘못알고 말한 것 같다. 이장도 계면쩍은 듯 “한금석 씨네요.”하면서 웃었다.
묘의 좌측 옆에는 “서기1954년1월7일 망(西紀一九五四年十一月七日 亡)”이라고 한자로 새겨져 있었다. 묘비에 새겨진 사망 날짜가 확실하다면, 무후제 연구에 있어 획기적인 자료를 얻은 것이다. 그동안 필자가 조사해 온 모든 무후제에 있어 제보자 모두가 무후자의 사망 시기를 모르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해왔다는 막연한 이야기뿐이었다. 그리고 제보자들이 추측하는 한계의 날짜 일제시대이전부터겠지요. 또는 몇 백 년 됐을 것이라는 대답뿐이었다. 그런데 여기 그 날짜가 확실히 적혀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최근까지 무후제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도 무후제가 존속될 수 있다는 희망을 엿본 것이다. 우리의 아름다운 미풍양속이 끊이지 않고 지속될 수 있다는 생각에 필자는 가슴이 뛰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녹음을 하면서 상당히 흥분된 목소리로 그것도 거듭해 가면서 “좌측에는 서기 일천구백오십사년 십일월 칠일 망이라고 써 있습니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묘비의 오른쪽 면에는 비석을 세운 날짜를 적어놓았다. “서기1977년11월10일 입(西紀一九七七年十一月十日 立)”이라고 새겨놓았다. 비석을 세운지는 30년도 안 되었다. 그러면 이때의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동면사무소에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었다. 아니면 찾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만, 필자가 요구한 자료와 제보자들의 대답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날 참석했던 사람 중에 혹시 무후자를 알고 있는 사람이나 이 묘비를 세울 때 본 사람이 있는가 하고 물었으나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혹시 연세가 아주 많은 분들은 알 수 있을 지도 모르지요.”라고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좀 더 조사를 하면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날은 답사를 이어갈 수 없었다. 중요한 약속이 춘천에서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훗날을 기약하였다.
묘비 뒷면에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관리인 동면장 월운이장(管理人 東面長 月雲里長)”이라고 한자로 새겨져 있었다. 일반 사람의 묘비 뒷면에는 그 자손들의 이름이 새겨있다. 그런데 이 무덤의 묘비 뒷면에는 자손의 이름이 아니라 관리인을 기록해 두었다. 이것은 결국 묘의 관리인, 곧 묘 주인공의 후손이 그들이라는 것이다. 같이 무후제에 참석한 사람들도 이구동성으로 “관리인이 아니라 아들이지요.”라고 하였다. 이렇게 누군가 묘를 관리해 주고, 매년 제사를 올려주고, 벌초를 해 준다는 것은 우리의 아름다운 풍속임에 틀림없다. 그것도 대표 관리인을 묘비에 새겨 두었다는 것은 영원히 무후제가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징표이다. 후손이 없다고 해서 게으르지 않고 막 살지 않고 열심히 살다가 남은 재산을 마을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희사한 사람이 아니면 누릴 수 없는 복이다. 무후자 묘지 앞에 간신히 묘의 형태만 유지하고 그 위에 커다란 소나무와 잡목이 울창하게 난 초라한 무덤과는 가히 대조되는 상황이었다. “관리인 동면장 월운이장” 이 몇 글자가 주는 의미는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다.
무후자의 묘는 무후자의 논을 짓는 분이 가을에 와서 깨끗이 벌초를 해놓았다고 하였다. 봉분 주변까지 깨끗이 벌초를 하였다. 봉분은 상당히 컸다. 형체만 유지하고 있는 앞뒤의 이름 모를 묘하고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무후자의 논을 부치는 분은 이 무덤의 주인공에 대해서 어른들로부터 몇 마디 듣기는 하였지만, 지금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날도 마을 이장은 이 무덤 주변에 있는 티끌을 치웠다. 그러면서 봉분 앞을 더 넓히고 싶은데 남의 무덤이 있어서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아무리 이름 모를 무덤이지만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무후자 묘를 찾아서 그 주변을 치운 후에는 묘 옆에다가 나뭇가지를 모아서 불을 지폈다. 이 불은 향을 태우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불을 지피자 희뿌연 연기가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어제 눈이 왔기에 산불을 낼 위험은 없었다. 하늘로 치솟는 연기를 보면서 뭔가 야릇한 마음이 들었다. 저승에 있는 무후자의 영혼에게 무후제를 지내고 있음을 알리는 행위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희뿌연 연기가 곧장 위로 치솟았고, 무후제가 끝날 때까지 그 불을 계속해서 지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지핀 불 알갱이는 나중에 향을 사르는데 사용되었다.
먼저 온 사람들이 무후자 묘를 찾아서 불을 지피고 있을 때 트럭 한 대와 승합차 한 대가 묘 주변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네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 차에는 무후제를 지낼 제구와 제물과 제상 등이 실려 있었다. 하나씩 들고 묘로 옮겼다. 먼저 와 있던 사람들도 트럭으로 다가가서 힘을 보탰다. 제상 1개, 돗자리 1개, 제기상자 1개, 제물상자 2개, 취사도구 1상자가 전부였다. 상당히 많은 제사물품이라 여겨졌다. 묘 옆으로 옮겨 온 제사물품은 하나씩 풀어지고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제상을 진설하는 중에 산신제가 치러졌다. 산신제는 가져 온 모든 제물을 진설하는 것이 아니라, 간단히 밤과 대추와 명태포를 진설하고 향을 사르고 술을 한잔 올리고 재배를 하였다. 이것은 일반적인 성묘나 시제와 같은 절차였다. 지내기 전에 누가 지내야 하는가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 이장이 해야 한다느니, 새마을 지도자가 해야 한다느니, 반장이 해야 한다느니 하면서 얘기가 오갔다. 결국 이장은 무후제의에 초헌을 해야 한다고 해서 새마을 지도자가 산신제를 행했다. 산신제를 하는 위치는 산소 뒤 왼쪽 조금 위였다. 가져 온 돗자리를 펴고 그 위에 제물을 진설하고 잔을 올리고 재배를 하고 끝났다. 산신제는 산을 주관하는 신에게 성묘를 하든가 벌초를 하든가 분토를 하든가 묘를 쓰든가 할 때 미리 고하면서 예를 표하는 것이다.
무후자의 토지를 짓는 사람은 월운리 무후제의 내력을 이렇게 이야기 하였다. 여기 계신 분은 홀로 살던 할머니였다. 혼자 살면서 땅을 갖고 있었는데 돌아가시면서 본인의 땅을 마을에 희사하였다. 그래서 땅을 마을에서 관리하였다. 그런데 제사는 동면에서 합동으로 모든 무후자를 지냈다. 이에 마을에서 토지를 관리하므로 매년 얼마의 금액을 동면에 제사비용으로 줬다. 두 집이 땅을 부치면서 한 집은 밥하고 한 집은 술을 해서 동면에 가져 주었다. 밥이 마흔 몇 그릇이나 했다. 그 이후에는 벼를 두 집이 모아서 동면사무소에 갖다 주었다. 그러면 면사무소에서 무후제를 차렸다. 나머지 세경은 동네 기금으로 주었다. 그 후 몇 번 토지를 부치는 사람이 바뀌었는데, 올해 제보자가 토지를 다시 부치면서 제수를 장만했다.
제를 지내는 날짜는 원래 음력 10월 20일인데, 올해는 날짜를 잘못 알아서 음력 10월 25일(양력 12월 15일)에 지냈다. 그래서 내년부터는 원래 날짜를 따라서 음력 10월 20일에 지낼 것이란다.
제상에는 아주 푸짐하게 제수를 진설하였다. 산소 앞에서 지내는 제사인데 큰 교자상을 놓아서 마치 집에서 지내는 제사와 같았다. 상 위에 올려진 제물의 진설 방법은 따로 정해진 것이 없었다. 무후자의 토지를 부치는 사람이 제물을 준비하고 진설도 맡아서 하였다. 놓는 순서며 위치며 모두가 진설하는 사람의 마음대로였다. 그 순서는 대체로 앞 좌에서부터 지그재그로 이렇게 놓여졌다. 배 감 사과 과자 약과 과질 녹두전 과자 숙주나물 고사리 무나물 밤 대추 통닭 소고기 두부 동그랑전 메밀전 시루떡 무탕 물김치 조기 간장 북어포 코다리찜 메 국 숟가락 젓가락이 놓여 있었다. 그 앞에는 술과 향이 있었다.
이장이 초헌을 하고 무후자 토지를 짓는 사람이 아헌을 하고 새마을 지도자가 종헌을 했다. 마지막으로 첨잔을 이장이 했다. 다음에는 돌아가면서 음복을 하고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였다.
이곳의 정확한 지명은 오음산 지르메봉이라고 한다. 지르메봉은 말안장봉을 일컫는 말이다. 여기 산의 형세가 말안장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다른 말로 작은 산마치 또는 소산마치라고도 한다. 저 건너가 큰 산마치이다.
무후제를 지내는 취지가 끊어질까 봐 이장은 염려하였다. 어른들이든 아이들이든 무후제를 지낼 때 많은 사람들이 와야 하는데, 오늘처럼 7-8명 정도에 그친다면 앞으로는 무후제가 끊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좀더 알리고 참가할 수 있도록 홍보를 해야겠다고 했다. 곧 마을을 위해서 재산을 희사한 무후자의 취지를 잘 살려야 한다고 했다. 젊은 학생들에게는 살아있는 교육의 장이 될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젊은 반장들이 모두 참여해서 다행이라고 말을 이었다.
첫댓글 무후자? 무후제?라고 하여 전설적 인물인줄 알고 읽다보니..ㅎㅎ 자손이 없는 사람을 말하네요..
자손이 아니지만, 그런 분들을 위해 제사를 대신해 주는 풍습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아직 그 명맥을 이어가는 지역도 있다니..놀랍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