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목조 1개 교실은
6학년 때 처음으로
우리 제1회 졸업생이 배운
단칸 교실로
사직국민학교 (1957년도의 사직초등학교)의
교사(校舍 : 학교의 건물) 모습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건물이
현재는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농촌 학생 수 감소로
폐교가 된 것도
벌써 20여 년 전의 일이다.
목조 교실이 신축되기 5년 전
(사직국민학교가 없을 때)
우리는 탄부국민학교에
입학(1952년 3월)을 했답니다.
1952년 3월,
38선 격전지가 최전방으로
전면전쟁(全面戰爭 : 광범위하게 벌어진 전쟁)에서
국지전쟁(局地戰爭 : 지리적 제약을 받는 전쟁)으로
백마 고지와 같은 곳에서는 밤과 낮으로
격렬한 전투가 끊이지는 않던 때였습니다.
조금은 소강 상태에 접어들 무렵으로
판단됩니다만 그런 시절이었지만
"교육은 국가의 백년대계" 로 보기에
학교에 입학이라 하면
어디 사는 누구의 아들,
또는 누구의 딸이라고
이름 석자만 적고, 그 이튼날부터
등교만 하면 입학 절차가
쉽게 마무리되었던 같습니다.
1953년 7월 27일 월요일
유엔군 사령부의 월리엄 K 해리슨 중령과
북한의 남일이 1952년
휴회 기간에 공산측이 건립한 목조건물(판문점)
10시 1분에
쌍방이 준비한 18개 문서 중의
첫번재 문서에 서명을 하였다.
그들이 모든 문서에
서명하는 데는 12분이 걸렸다.
그후 영문, 중국어, 한국어로 된 그 문서들은
김일성(金日成), 팽덕회(彭德懷),
마크 ˙ 웨인 ˙ 클라크 장군이 각각 서명하였다.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 조인
1년 4개월 전에
나는 국민학교 1학년
입학을 하였습니다.
입학 후 1년을 다니는 도중에
탄부국민학교 사직 분교가 설립 인가 되어
2학기 때는 탄부국민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탄부면 사직리 마을
동사(洞舍 : 오늘날 새마을 회관) 초가집으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답니다.
말이 분교이지
전쟁중이라 사정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몽당 연필 하나에
국어책과 산수책 2권을 보자기에 말아서
어깨에 동여매고 다녔습니다.
그것도 또 반년이 지나니
바로 1학년 신입생들이 입학을 하는 관계로
오전반 오후반으로 공부를 하였답니다.
창고형 토담집 단칸 방에서
작은 소칠판 하나에 바닥은 멍석을 깔고
책걸상도 없이 엎드려서 글씨를 쓰며,
공부를 하여야 하는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급우들은
나이가 5살 내지 8살이나 더 많으신 누님들도
같이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당시 학교에서의 교우 관계는 매우 엄격했답니다.
그렇게 동사에서 또 2학년을 다니고 있을 때
각 마을에서는 마을마다 학부형님들께서는
부역으로 일을 도와 흙벽돌을 찍고,
볏집으로 이엉을 이어 창고형 초가집에
조그만 교실 3칸을 완공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야 또 이듬해 1학년 신입생을 유치할 수 있기 때문
우리 부모님들께서는 농한기를 틈타서
학교 교실 신축공사에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당시에 나라 경제가 어려워
학교 신축 부지를 매입할 수 없는 시절에
마을 주민으로부터 토지 희사를 받아야
공사를 시작할 수 있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였으나
다행히 국가의 백년지계(百年之計)는
막여수인(莫如樹人)이라
사람을 기르는 것이 가장 좋다는 말처럼
후학양성에 큰 뜻을 두시고
문제의 학교 부지 희사에 선뜻 응하여 주시는
마을 어르신이 계셨기에 신축 공사를 착수하여
조그만 교실 3칸을 흙벽돌로 쌓고
볏짚으로 이엉을 이어서 초가집의
학교를 건립하였답니다.
그래서 그 이듬해에는
1, 2, 3 학년의 어린이들이
각기 자기 교실이 있었으나
그것도 1년간 잠시 뿐이었습니다.
이듬해 1학년 신입생들이 입학을 하는 관계로
우리 1회 졸업생들은 후배에게 배움의 교실을 물려주고
또 멀리 탄부국민학교로 4km를 걸어다녀야 했습니다.
그래서 4학년 시절은
또 탄부국민학교를 다녀야 했던 것입니다.
그동안에 사직 분교에서는
부족한 토담 교실을 증축하고
현대식 목조 기와집 1개교실까지 신축하여
5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는
사직 분교의 목조로된 기와집 새교실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그 교실에서 졸업식도 거행하였습니다.
교실 부족으로 오전반 오후반으로 공부할 때
오후반 1학년들은 점심 먹고 집에서 등교를 하였답니다.
그 때 그 어려운 시절에 코찔찌지리 어린이들에게
열과 성을 다 바쳐 가르쳐 주시고
일깨워 주시며 이끌어 주셨던 은사님들
이제라도 늦게나마 살아 생전에 찾아뵙고
큰절을 올린다고 하면서도
마음과 뜻대로
행동으로 실천에 옮기지 못한
못난 제자들을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시길 비옵니다.
멀리 하늘나라에 계신 선생님들!
부디 천국에서 영광과 축복속에
영생불멸 하시기를 기원하옵니다.
그리고 여러 은사님 중
아직도 무탈하옵시며
건재하신 우리들의 영원한 은사님!
아래 사진에선
두 분 선생님만
생존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 사시는 데에도 바쁘다는 핑계로
아직까지도 한 번을 찾아 뵙지 못하여
너무나 커다란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만 은사님 곁에 가 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은사님!
아무쪼록 오래오래
만수무강 하시기를 빌겠습니다.
은사님의 소식이 닿는 즉시
65세 내지 67 ~ 68세가 지난
여러 제자들과 함께
꼭 한 번은 찾아뵈올 것을
약속을 드리면서
만나뵈올 때까지
오래오래 만수무강하시기를 기원하옵니다.
-< 2009년 8월 4일 제자 올림 >-
변선생님 사진에 붉은 물감 칠은 아마도 철없던 어린 시절 칼라 사진으로 잘 만들어 보려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선생님 사진에는 정말로 너무나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앞줄 왼쪽부터(여 : 9명) : (1) 천정순 (2) 김정자 (3) 장재분 (4) 권덕륜 (5) 김순 (6) 홍정자 (7) 김홍만 (8) 홍추자 (9)안재숙
뒷줄 왼쪽 (어민수 담임 선생님)
뒷줄 왼쪽부터(남 : 17명) : (1) 안광용 (2) 고두호 (3) 어병선 (4) 안창덕 (5) 어용선 (6) 황용서 (7) 유재일 (8) 강창희 (9) 홍대식
(10) 김현진 (11)어홍 (12)김현제 (13) 김종수 (14) 임점수 (15) 김정훈 (16) 김종식 (17) 이재식
-<앞과 뒤 관계없이 비어 있는 공간마다 나와 있는 얼굴의 순으로 표기한 것입니다.>-
아래의 다섯번째 학생 이름은 - 황용서 입니다.
사진의 아래 3명은 이름이 바뀌어 바로 잡습니다. -
우측 맨 밑에 홍추자가 아니고 홍정자로 정정합니다.
바로 그위는 장재분이 아니고 홍추자로 정정합니다.
바로 그 옆에 홍정자가 아니고 장재분으로 정정합니다.
☞ 당시 편집을 보실 때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