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재미난 추리소설을 읽었습니다. 친구가 얼마 전 읽었는데, 재미있었다며 단순한 재미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관점에서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준다고 하더군요. 소설 책 추천은 절대 받지 않지만, 워낙 재미있다고 강추하길래 어렵게 빌려다 읽었습니다. (구입하려고 했더니 3일 배송의 압박~)

『무덤의 침묵』
_ 이 책은 그저 단순한 추리소설이 아닙니다. 누가 죽었는가를 추적하는 동시에, 폭력이 어떻게 사람을 파괴시키는지를 섬세하게 기록한 책입니다.
_ 이 책은 그저 단순한 추리소설이 아닙니다. 누가 죽었는가를 추적하는 동시에, 폭력이 어떻게 사람을 파괴시키는지를 섬세하게 기록한 책입니다.
유골이 발견되면서 형사들은 그 유골이 있던 자리에 살던 사람, 벤자민이란 남자를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유능했던 청년 실업가인 벤자민은 약혼녀가 죽고 난 후, 삶에 대한 의욕을 완전 상실해, 서서히 몰락하다 그 역시도 죽어 가죠. 문제는 약혼녀가 죽긴 했지만,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고 지금까지 시체가 발견되지도 않았다는 것. 그래서 형사들은 그 시체가 벤자민의 약혼녀가 아닐까 하고 사건을 수사해 갑니다. 벤자민이 약혼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죽이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는 거죠. 두번째로는 그 유골이 발견된 곳에 오두막집이 있었고, 영국군과 미국군이 주둔했었다는 사실에 기초해 사망한 사람이 군인이거나, 아니면 오두막집에 살았던 사람일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하지만 둘 다 분명하진 않습니다. 모든 것이 그저 추측일 뿐이죠.
도대체 어느 게 중요 사건이지 하며 궁금해 하면서 한 쪽, 한 쪽 넘기자 사건의 실체는 점점 명확해집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누가 죽고, 무엇 때문에 죽였는가를 알아맞히는지에 초점을 두기보다 오히려 가부장적 문화가 여성을 어떻게 살해해 갔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선 벤자민의 약혼녀. 정말 벤자민이 사랑하다 못해서 죽였을까요? 벤자민의 약혼녀인 솔베이그는 삼촌을 만나러 여행을 갔다가 사촌동생에게 강간을 당합니다. 거기다가 강간으로 임신까지 하게 되지요. 가족들은 강간당한 그녀가 어떻게 그 사회에서 대우받게 될지를 잘 알기에, 낙태를 종용하고, 낳거든 멀리 보내겠다고 말합니다. 강간피해자에게 낙인을 찍어 버리는 그 문화 덕분에 솔베이그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며 살아가거나 자살하는 것이죠. 결국 그녀는 자살합니다.
그렇다면 그 유골의 주인공은 솔베이그였을까요? 솔베이그는 오두막집 근처에 살던 벤자민과 관련된 사람일 뿐, 그 유골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습니다. 그 유골은 형사들의 두번째 추측대로, 벤자민이 빌려 줬던 그 오두막집에 살던 남자였습니다. 아니 도대체 아빠, 엄마, 자식들이 행복하게 사는 듯한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요? 가족들은 어디로 가고, 아빠만 집 앞에 덜렁 묻혀 있는 것일까요?
이 이야기는 솔베이그의 이야기와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아이가 있었던 한 여자가 어떤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합니다.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던 결혼은 폭력으로 시작합니다. 설마 그 남자가 자신을 이렇게 때릴 거라곤 상상도 못했던 그녀는 우발적인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그녀를 때리고 미안해했던 남자는 이제 지속적으로 그녀를 폭행합니다. 나중에 그녀는 그 남자에게 이름도 갖지 못하는 존재가 됩니다. (소설이 끝날 때까지 그녀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고, 그녀는 계속 그 남자에 의해 ‘xx년’으로만 불립니다) 폭력에 시달리던 그녀는 남자에게서 도망치지만, 언제나 잡힙니다. 그 남자가 한 번 더 도망치면 자식을 죽여 버리겠다고 말하자 그녀는 삶의 의지마저 포기합니다. 결국 이 폭력은 아버지의 학대에 지친 아들에 의해 끝이 납니다. 유골의 주인공은 바로 그 가족의 아빠였죠.

<두려움>
_ 가정폭력은 한 가족에게서 삶의 의지를 박탈해 버립니다. 이런 박탈감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능력까지 빼앗아 버리죠.
_ 가정폭력은 한 가족에게서 삶의 의지를 박탈해 버립니다. 이런 박탈감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능력까지 빼앗아 버리죠.
『무덤의 침묵』을 이끌어 가는 주된 내용은 말씀드렸듯 여성에 대한 폭력입니다. 벤자민의 약혼녀는 여성의 신체를 정조의 관념으로만 바라보는 사회가 어떻게 여성을 살해하는지를 드러내고, 유골의 주인공은 폭력적인 가부장이 한 가족의 삶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또 어떻게 스스로를 파괴해 가는지 잘 보여 주죠. 소설 안에서도 드러나지만, 가부장적인 사회,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아버지란 존재들이 보여 주는 폭력은 여성의 신체뿐만 아니라 영혼과 마음까지 손상시켜 버립니다. 게다가 은폐되어 있는 폭력은 해결되지 않기에, 끊임없는 연쇄효과를 형성하죠. 솔베이그가 죽자, 그녀의 아버지도 자살하고, 그녀의 약혼자도 삶을 무덤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던 가족들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폭력에서 벗어났지만, 성장을 거부하거나,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거나, 혹은 아버지와 똑같은 삶을 살아감으로써 삶의 의지를 포기하죠.
이런 폭력은 왜 드러나지 않았을까요? 우선 그녀들이 속한 사회는 그녀들의 고통을 들어 주지도 않으면서, 침묵하게 만듭니다. 벤자민의 약혼녀인 솔베이그나 남편에게 맞던 마르그렛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도움을 청해도 도와주지 않으리란 걸, 세상의 모든 폭력을 비판하면서도 사람들은 가정폭력과 성폭력에 대해선 마치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하며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는 걸. 마르그렛이 비명을 지르고 맞을 때, 신고를 받은 경찰들이 남편에게 말하죠. 너무 시끄러우니, 좀 조용히 싸우라고요. 이들은 여성들의 고통과 비명을 듣지 않습니다. 강요된 침묵은 오직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만, 목소리로 변화할 수 있죠. 게다가 그 목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습니다. 책 안에서도 솔베이그와 마르그렛이 직접적으로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녀들은 숨기고,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대신 맞아야 하고, 죽어야 했으니까요. 그녀들이 겪은 폭력과 두려움은 오직 그 폭력을 지켜보는 사람들에 의해서 언어화되죠. 지독한 폭력에 노출된 여성들은 자신의 피해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도 잃어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퍼플 리본>
_ Domestic Violence에 대항한다는 의미인 퍼플 리본입니다. 아버지 혹은 남편이라는 위치가 주는 그 작은 권력을 무기로 삼아 가장 약한 사람들에 폭력을 가하는 사람들. 그저 상담하고, 달라지면 끝나는 문제일까요? 가정폭력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어디까지 향하고 있을까요?
_ Domestic Violence에 대항한다는 의미인 퍼플 리본입니다. 아버지 혹은 남편이라는 위치가 주는 그 작은 권력을 무기로 삼아 가장 약한 사람들에 폭력을 가하는 사람들. 그저 상담하고, 달라지면 끝나는 문제일까요? 가정폭력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어디까지 향하고 있을까요?
이 책 안에서 묘사되는 가정폭력은 끔찍스럽다 못해, 저에겐 스너프 필름처럼 느껴졌습니다. 게다가 솔베이그의 이야기는 단순히 사람만이 누군가를 살해하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게 만들었구요. 얼마 전에 읽었던 책에서도 느꼈지만, 여전히 가정폭력을 폭력이 아닌 가정에 초점을 맞춰, 부부가 상담하고 좋은 결과를 얻으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일로 생각하는 이 현실이 우스웠습니다. 또한 언어폭력이 심한 남편이 아내를 때린 것도 아닌데, 왜 내가 가정폭력범이 되어야 하냐며 항변하던, 이전에 읽었던 사례집의 아저씨들이 생각나기도 했구요.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긴 했지만, 이 책의 핵심은 가정폭력의 생존자였던 딸이 유골의 정체를 물으러 온 형사에게 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정폭력은 '영혼을 살해하는 범죄'를 일컫는 편리한 말이죠. 그게 진정 어떤 일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쓰는 순진한 말 말예요. 평생 동안 영원한 두려움에 떨며 사는 인생이 어떤지 아세요?”
- 편집부 강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