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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문화의 원류 원문보기 글쓴이: 솔롱고
고조선본토기(古朝鮮本土記)
들어가며
《삼국유사》는 국보 제306호로 지정받은 우리나라의 고대사를 밝힌 귀중한 사서다.
비록 나라의 후원이 없이 개인이 저술하여 그 신빙도가 낮다고는 하지만 나라가 사실상의 통치권을 타국에
빼앗기고 후원할 수 없었던 당시의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저자의 고뇌를 깊이있게 헤아리는 아량이 필요
하다 할것이다.
저자 일연스님은 고려 충렬왕 7년(서기 1281년)에 군위 인각사에서 이 책을 편찬하였다.
원나라의 간섭이 극에 달하고 있을때이기에 역사서를 저작하는 사업은 상상을 초월하는 난관이 있었을것
으로 생각이 든다.
그러한 어려움을 딛고 햇볓을 본 책이기에 어떤 사건들은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전문가가 아니면
풀어낼 수 없도록 은유방법을 선택한 부분이 많았다.
이러한 은유기법이 신화라는 혼선을 가져오게 하였기에 책이 폐기되지않고 장기간 생명을 유지하는 장점이
되기도 하였다고 보는것이다.
그런면에서 기이편에 나오는 고조선 즉 왕검조선편을 보면 일연 자신도 기이하다고 하면서도 인용하고
있음을 본다.
만약 그 기이의 내용이 정말 황당한 얘기였다면 인용을 안하면 그만인것을 구태어 인용한 뜻은 일연은 이미
그 내용의 전모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입으로는 직접 발설할수 없었던 상황이었기에 《위서》라는 중국의 사료를 인용한것으로
보인다.
당시 나라의 분위기가 친원파(親元派)들의 세상이었기에 자칫하면 모함을 받기가 쉬울때었다.
그런데 그 비밀을 풀어내는 후대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게 문제였다.
《삼국유사》외에도 단군조선을 기록한 사서는 서거정의 《동국통감》과 이승휴의 《제왕운기》등이
있지만 이들의 기록들이 서로 조금씩 다른점은 논외로 하고 《삼국유사》를 집중하여 조명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함께 현존하는 우리 고대(古代) 사적(史籍)의 쌍벽
으로 일컬어져 온다.
<삼국사기>는 왕명(王命)에 의하여 사관(史官)이 저술한 정사(正史)로서, 체재(體裁)가 정연하고 문사
(文辭)가 유창하고 화려하다.
이에 비하여 <삼국유사>는 선사(禪師) 한 개인의 손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야사(野史)로서, 체재가 짜여
지지 못했고 문사 또한 박잡(駁雜)하다 하겠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많은 값어치를 지니고 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신라·백제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史書)이지만,
그 밖에 고조선·기자 및 위만조선을 비롯하여 가락 등의 역사가 포함되어 있다.
특히 고조선에 관한 서술은 오늘날 우리들로 하여금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할 수 있고, 단군을
국조(國祖)로 받드는 배달 민족의 긍지를 갖게 해 주었다.
만약 이 기록이 없었던들 우리는 삼국 시대 이전에 우리 역사를 중국의 사료(史料)인 <삼국지(三國志)>의
동이전(東夷傳)에 겨우 의존하는 초라함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삼국유사>는 당시의 사서 찬술이 규범에는
벗어나는 체재의 부정연(不整然)과 내용의 탄괴(誕怪)·
잡다(雜多)함이 오히려 오늘날 이 책을 더욱 귀한 재보(財寶)로 여기지 않을 수 없는 소이(所以)가 되고
있다.
우선 <삼국유사>에는 단군 신화를 비롯한 많은
신화와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실로 <삼국유사>는 우리의 신화와 원형적 옛 전설의 모습을 알게 하는 유일한 책으로 가위 설화 문학(說話
文學)의 보고라 할 만하다.
게다가 이 땅 최고(最古)의 정형 시가(定型詩歌)인 향가(鄕歌) 14수가 실려 있어 <균여전(均與傳)>에 전
하는 11수와 함께 주옥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으니 국문학 관계로는 사서 이상의 귀한 보전(寶典)이 되고
있다.
수록한 향가의 수는 비록 많은 것이 못 되지만 향가를
집대성한 책으로 알려진 <삼대목(三代目)>이 전하지
않는 지금, <삼국유사>의 문학사적 가치는 실로 절대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밖에도 <삼국사기>에는 빠졌거나 또는 고의로 빼 버린 많은 사실들이 수록되어 있다.
불교에 관한 풍부한 자료와 신앙 사상·민속·일화 등 다방면에 걸친 내용은 모두가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물론 저자가 사관이 아닌 승려의 신분으로서 이 같은 책을 저술함에 있어, 더러는 인용서와 그 내용이 같지
않은 것도 있고, 잘못 전해져 오는 것을 그대로 수집·수록한 것도 없지 않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 책
자체가 그 서명(書名)이 말하듯이 일사 유문적(逸事遺聞的)인 것이기 때문에 따르는 불가피한 것이라
하겠다.
이 책의 저자 일연(一然)은 고려 희종(熙宗)
2년(1206)에 경산(慶山)에서 출생했다. 속성(俗姓)은 김씨요,
이름은 경명(景明), 자는 회연(晦然)이다. 9세 때 출가하여 남해(南海)의 무량사(無量寺)에 들어가 수도
생활을 했다. 22세 때에 선과(禪科)에 급제하고 54세 때에 대선사가 되었다. 78세 때 충렬왕(忠烈王)이
승지(承旨)를 보내어 왕명으로 국사의 예를 갖추고자 하였으나, 굳이 이를 사양하므로 다시 근친의 장군을
보내어 국존(國尊)으로 책봉하고 궁내로 맞이해 들였다.
그러나 그는 궁성에 있기를 싫어하여 노모의 병을 빙자하고
구산(舊山)으로 내려갔다.
84세 되던 1289년 7월 8일 제자로 하여금 북을 치게 하고 자기는 의자에 앉아 여러 승려와 더불어 담소자약
(談笑自若)하게 선문답을 하다가 갑자기 손으로 금강인(金剛印)을 맺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높은 덕과 깊은 학문으로 왕의 극진한 존경을 받았으며 많은 사람들의 추상의 대상이었다 한다.
비문에 의하면 그의 저·편저로는, 어록 2권, 게송
잡서(偈頌雜書) 3권, 조동 오위(曹洞五位) 2권, 조도(祖圖)
2권,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3권, 제승 법수(諸乘法數) 7권, 조정 사원(祖庭事苑) 30권, 선문 점송 사원
(禪門拈頌事苑) 30권 등 불서(佛書) 80권이 넘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는 것이 거의 없고, 어찌 보면 그로서는
희작(戱作)이라 할 수 있어 비문에도 적혀 있지 않은 <삼국유사>만이 유저(遺著)로 전해지고 있다.
근래에들어 삼국유사의 여타의 기록에 대해서는 근거를 밝혀낸것들도 많지만 기이1편에 등장하는 고조선과
위만조선 역사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밝혀진바가 없다.
때문에 실증을 생명으로 주장하는 사학계에서의 평가는 미흡했던게 사실이다.
그러나 전문 사학자라면 저자가 기록하면서도 의아하게 생각했던 설화의 배경을 연구했어야 한다.
이런면에서는 오늘날까지 사학계의 태두로 인정받고 있는 두계 이병도 박사가 병상에서 남겼다는 말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단군조선을 부정하던 그가 '단군은 실화'라는 말을 남겼고, 이어 중국 산동땅에
있는 무씨사당을 한번만이라도 구경하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는 후문이다.
그는 어떠한 마음으로 무씨사당을 보고싶어했을까.선각자들에게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영감이라는게 있
다면 무씨사당에는 중요한 단서가 숨겨있으리라고 믿고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무씨사당 화상석에 대한 연구는 광복후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김재원박사에 의해서 이루어졌
으나 학계의 각광을 받지못한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면 이병도박사의 생전의 소원이었던 무씨사당의 화상석이 단군조선을 실증할 수있는 비밀이 있다는
말일까? 그 비밀만 풀어내면 신화로 떠돌고 있는 삼국유사의 비밀도 풀릴수 있다는 말일까,
무씨사당 화상석은 분명 한민족의 천손족설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삼신산문화와 천손족설이 연계되어있기 때문이다.
한민족을 왜 천손족이라 부르게 되었는지 사료적 근거를 살펴보면 사마천이 쓴 《사기》 권117 <사마상여
열전>의 주(註)(주1)에서 삼신(三神)은 하느님이(上帝)라고 되어 있다고 한 대목에서 근거를 찾았기 때문
이다. 그러니까 한민족을 천손족이라 부르는 근거는 한민족은 삼신산을 요람으로 출발한 민족이기 때문이
라는 답이다.
(주1) 「且夫賢君之踐位也。豈特委瑣握□,拘文牽俗,循誦習傳,當世取說云爾哉!必將崇論閎議,創業垂統,
為萬世規。故馳騖乎兼容並包,而勤思乎參天貳地。且詩不雲乎:『普天之下,莫非王土;率土之濱,莫非王臣。』
是以六合之內,八方之外,浸潯衍溢,懷生之物有不浸潤於澤者,賢君恥之。今封疆之內,冠帶之倫,鹹獲嘉祉,
靡有闕遺矣。而夷狄殊俗之國,遼絕異黨之地,舟輿不通,人□罕至,政教未加,流風猶微。
注索隱案:天子比德於地,是貳地也。與己並天為三,是參天也。故禮曰「天子與天地參」是也。
이와같이 삼신설을 주장한 선교(仙敎)발상지는고조선의 요람이었던 삼신산이다.
한무제가 즉위한 후 총신 이소군(李少君) ․ 소옹(少翁) 등은 방사(方士)들을 모아 연단구선(煉丹求仙 :
이는 신선가에서 황제(黃帝)를 자신들의 교조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한무제 시대부터 신선가들은
신선설(神仙說)을 주장하며 황제(黃帝)의 기치를 치켜들었다.
그런데 신선설의 본향인 삼신산이 조선이란 사실은 왜 밝히지 않는것일까.
한 무제는 수차례 방사들을 앞세워 신선들과의 조우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자 결국 군대를 앞세워
조선을 침공한것이다.
결과 군자국으로 부르던 낙원 조선은 패허로 변한것이다. (이상 사기<무제본기>에서 일부 인용)
동왕공(東王公)은 동방에 있다는 뜻으로 동도(東到)와 같고 창령(蒼靈)의 허(墟)는 푸른 토양(土壤)
으로서 청구(靑丘)를 가리킨 것이요, 동화(東華)는 조선의 이명(異名)이다.(秉穗錄).
그리고 선인(仙人)의 거처를 가리킨 것이다.(雲笈七籤).
자부(紫府)는 자부(紫府)선생을 가리킨 것이요, 원시천지(元始天地)가 개벽한 초두(初頭)는 천황(天皇)·
지황(地皇)·인황(人皇)등 삼성내문(三皇內文)과 같다.
그럼으로 동왕공(東王公)의 신화(神話)가 황제(黃帝)가 찾아간 자부(紫府) 선생의 신화(神話)를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운급칠첨( 雲笈七籤)에 의하면
봉래에는 중국과 별도의 천제가 있었으며 그 천제의 나라와 글씨는 동이족의 글씨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봉래산에 대해 가르쳐 준 적송자(赤松子)의 선인은 동이족이거나 동이땅에서
살다 가 간 인물일 것이 분명하다.따라서 여와가 배운 것은 동이족 나라의 풍속을 배운 것이 된다.
운급칠첨(雲笈七籤) 은 중국 도교의 유서(類書)다.
약 170만 자에 이른다. 송대의 장군방(張君房)이 명을 받들어 〈도장 道藏〉을 수찬하고 〈대송천궁보장
大宋天宮寶藏〉 4,565권을 편찬했는데, 나중에 그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부분만을 뽑아 편찬한 것이
바로 〈운급칠첨〉 122권이다.
도교에서는 책상자를 '운급'이라고 부르고, 〈도장〉은 3동4보(三洞四輔)로 나뉘는데, 이것을 총칭하여
'칠첨'이라고 부른다.
〈운급칠첨〉은 도교경전만을 수록하고 도교에 속하지 않는 저작은 모두 삭제해 버렸다.
이 책을 도교경전의 원문을 절록(節錄)하거나 전록(全錄)하여 논설을 가하지 않은 채 분류·집록했다.
이미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는 많은 도교경전의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어, 중국 도교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중국 3황5제와 일본
천황계, 그 뿌리는 한민족” 이다.
존 패어뱅크 하버드대 교수는 생전 “중국을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더 많은 의문점이 생긴다"는 말을
남겼다.
중국의 동북공정 사관과 일본의 식민사관이 왜곡하고 날조한 동아시아 역사관을 서구학계가 그대로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민족을 폄하하는 중ㆍ일 학자들의 역사관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 학계에서 그대로 수용돼 왔고,
오늘날 대 한반도
정책의 학문적 배경이 되고 있기도 하다.
오는 30일 세계적
석학들의 저서를 출간해온 뉴욕 캠브리아 출판사에서 중, 일 학자들의 왜곡된 역사
관과 서구 학계의 무지를 깨우칠 수 있을 만한 한 권의 책이 나온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헌팅턴 커리어 칼리지의 이홍범 학장이 평생의 연구결과를 정리해 영문으로
출간하는 ‘아시아 이상주의(Asian
Millenarianism)’란
400쪽 분량의 저서가 바로 그 책이다.
‘태평천국과 동학혁명
사상의 세계사적 의미’라는 부제만 보면 동아시아의 근대사에 국한된 내용
같지만 “고대 한민족의 정신문명이 중국과 일본 문명의 원류”라는 코페르니쿠스적 주장을 담고 있다.
때문에 저자는 이 책을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선 ‘대륙공정’이라고 단언한다.
저자는 동경대 법학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고, 미국 동부의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펜실베이니아대학
에서 국제관계와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하버드대학에서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전공했다.
이 박사는 이제 자신의 저서를 통해 자신이 밟아온 최고의 학풍을 스스로 백지화하는
셈이다.
이 학장은 “한민족의 역사는 ‘객관적 연구’란 미명 아래
고대에는 중국의 식민지로, 근대에는 일본의
식민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비문명의 역사로 폄하되고 있고,
불행하게도 이런 역사관이 세계 학계의 정설로
통하는 실정”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 학장은 책의 첫머리에서 영자역학 이론을 들어 “중, 일
학자들이 어떤 목적 의식을 가지고 연구할
때 연구대상의 실체는 사라진다”며 새로운 연구방법론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객관적 연구방법론 자체가 주관적 오류를 범한다”며 “동양의 초합리적인 직관적 방법과 자연과학의
이론까지 병행하는 ‘총체적 방법론’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학장은 자연과학의 실증적 방법으로 한민족의 역사는
5000년이 아니라 1만년이며, 4대 문명이
존재하기 전 이미 한민족의 고대문화가 있었다고 입증했다.
그리고 방사선 동위원소 추적결과, 9000여년 전 한민족 일부가 베링해를 건너 오레곤주 일대의 미국에
정착했으며, 오늘날에도 ‘아파치’(아버지), ‘가시내’(처녀), ‘지풍’(지붕) 등의 인디언 말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저자는 이어 다양한 고증을 통해 중국의 3황5제,
일본의 천황계가 모두 한민족 계열이며, 한(漢)문화는
다름아닌 한(韓)민족 문화였음을 입증한다.
청(淸) 태조 누르하치 또한 중국 역사문헌에서 `애신각라`(愛新覺羅), 즉 `신라를 사랑하고 기억하는
사람`으로 나타나는 점을 들어 한민족의 후손임을
드러낸다.
이 학장은 이런 실증과 고증을 통해 한민족 정신문화가
중, 일 문화의 원류임을 입증한 뒤 근세 이후
세계를 지배해온 서구문명의 우월성 주장도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분법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서구문명이 세계를 지배해왔으나 이제는 한민족의 홍익이념을 세계
민주주의(Unicracy)로 승화시켜야 할 때”라고 제안한다.
“태평천국이나 동학이념은 모두 고대 한민족의 천부(天符 )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유,불,선이
한민족의 정신문화에 영향을 ***** 것이 아니라 천부사상이 동아시아 정신문명의 원류”라고 본다.
더 나아가 “인간과 자연, 만유를 포괄하는 홍익이념이야 말로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의 민주
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세계민주주의의 정신적 기초”라고 말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관이 ‘도전과 응전’이라면 이 학장의 역사관은 ‘자아투쟁’이다.
역사를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동력은 정신과 인격이며 세계민주주의는 물질과 경제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정신과 인격을 더 중시한다는 것.
이런 역사관은 ‘H=PNT’라는 공식으로 집약된다.
여기에서 H는 역사(History), P는 인격(Personality), N은 비인격적 요소(Non-Personality),
즉 경제와 자원, 군사력 등을 말한다.
“역사는 자아의 투쟁”이며 “인격이 몰락하면 역사도 몰락한다”는 것이 이 역사공식의 의미다.
이 학장은 “중국과 일본은 한민족 인물까지 자기네 민족으로 둔갑시켜 자아를 확장하려 애쓰는데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폐기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이 책이 미국 학계에서 어느 정도 반향을
일으킬지 주목된다.
이 학장은 자신의 저서가 “미국을 움직이는 아이비리그의 지원으로 출판되는 것”이라고 전했다.
미국 학계 역시 대륙공정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 학장에 따르면 책의 서문을 쓴 힐러리 콘로이(Hilary Conroy) 펜실베이니아대학 교수는 원래 동경
대학에서 동아시아학을 연구한 친일 학자였으나 최근에는 친한파로 자신의 학문적 궤도를 수정하고
있다고 한다.
한 때는 “일본이 갑오경장을 통해 한국에 근대화의 방법까지 숟가락으로 떠먹여주었으나 한국은 받아
먹지
못했다”며 한민족을 우매한 나라로 취급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버드대학의 아키라 이리에(Akira Irie) 교수, 스탠포드대학의 피터 두스(Peter Duus)
교수 등 미국
내 동아시아학계를 주도하는 다른 두 명의 학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이 박사의 관심거리다.
이상 글: 해랄드 생생뉴스 김영한 LA특파원
고조선사는 숭조(崇祖)경천사상(敬天思想)과 삼신문화를 바탕으로 한다
사마천이 쓴 《사기》 권117 사마상여 열전의 주(註)에는 삼신(三神)은 하느님(上帝)이라고 되어 있고
《환단고기》《규원사화》 등의 사서에서 삼신은 우주의 모든 만물을 창조하고 백성과 사물을 이루고
다스린다고 되어있다.
그렇다면 인류시원문명이 삼신산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삼신산의 소재에 대해서는 국내 사서들의 엉뚱한 주장때문에 아직까지 미궁에 빠져있는것
이다.
따라서 삼신산의 소재지를 논하기 전에 먼저 삼신의 개념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삼신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하느님이며 우리에게 생명을 준 삼신 할머니이며 《부도지》에 나오는 마고
(麻姑)라고 하였다.
삼신 할머니라는 말의 뜻은 모든 생명을 낳는 것은 어머니 즉 여성이며 최초의 생명을 낳은 분이라는
뜻으로 할머니가 붙은 것이다.
지방에 따라서는 삼신 할머니는 삼신 할매, 삼신 할미라고도 불리어 왔다.
《부도지》에서 우주를 창조하였다는 마고의 뜻은 삼신 할머니를 한자로 나타낸 것이다.
청나라가 1866년
중간한 《마고산지麻姑山志》에 실린 마고의 모습에서 마고의 마(麻)는 《계림유사》
에서 이르기를 마왈삼(麻曰三)’이라 하였는데 마(麻)의 음(音)은 삼(三)이며 우리나라 사람들은 마(麻)를
삼(三)이라 불렀다는 말이다.
또한 고(姑)는 시어머니, 고모 등의 의미로 쓰이지만 여자, 부녀자를 통칭하는 말로서 어머니를 낳은
어머니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며 집 가(家)와도 통한다.따라서 마고라는 말은 삼신 할머니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마구할멈, 마귀할멈도 마고와
삼신할머니가 합해지고 변형되어 생겨나서 와전이 된 말들이다.
삼(三)이라는 것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성수(成數)를 나타낸다.
중국의 정장상방이 쓴 《상고음계》를 보면 삼(三)의 고대의 음가는 심(心)과 같이 숨(soom)이었다.
숨이라는 것은 모든 만물이 살아가는데 필수요소인 호흡을 말하는 것이다.
생명을 영위하는 생물체는 하늘의 (氣)인 숨을 들이 마시고 땅의 기(氣)인 음식을 먹어야만 살 수 있다.
기(氣)라는 글자는 기(气)와 미(米)가 합쳐진 것이다.
기(气)는 하늘의 정기를 미(米)는 땅의 정기를 나타내는 것이며 이 두 가지 것 중 어느 한 가지만 없어도
생명은 유지될 수 없다. 죽었다는 표현을 “숨이 멎었다”, “숨이 끊어졌다”라고도 하는데 이는 더 이상
하늘과 땅의 정기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에 이르른 것을 말한다.
따라서 숨이라는 것은 만물의 생명의 근원이 된다.
숨이라는 것은 하늘에서 오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신(神)이 최초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고 생각을 하였다.
따라서 신(神)을 일컬어서 숨(soom)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이 숨(soom)의 음가가 삼(三)으로 변한 것
이다.
우리는 숨을 쉬는 곳 또는 숨이 있는 곳을 가숨(가슴)이라고 한다.
가슴에는 숨을 쉬는 허파와 혈액을 공급하는 심장이 있다.
심장은 허파를 통하여 들이마신 숨을 혈액을 통하여 온 몸에 산소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며
그래서 마음 심(心)자의 고대음도 숨을 쉰다고 할 때와 같은
숨이었다.
삼신에게 마음껏 푸념을 늘어놓는 세상이 되기를....불교에서는 “모든 만물이 오직 마음에서 만들어
진다”라고 하는 일체유심조(一体唯心造)를 이야기한다.
<태백일사.삼신오제본기>에 인용된 대변경(大辯經)에서는 일체유삼신소조(一体惟三神所造)라고
하여 “모든 만물은 오직 삼신(三神)이 만든
바이시다.”라고 하였다.
삼신은 하느님이고 하느님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이를 이렇게 표현한 것이고,
이를 불가에서 삼신을 심(心)으로 표현한 것이다.
삼신(三神)은 세 명의 신을 가리켜서 삼신이라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생명 즉 삶을 주신 하느님인
삶신이라는 의미이며 생명의 신, 창조의 신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종교와 상관없이 부르며 애국가에 나오는 최고의
신인 하느님이 삼신이다.
이러한 삼신에 대한 관념은 우리 천손민족이
간직해온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가치관이며 이를 토대로
세계로 퍼져나간 것이다.지금은 사라지고 없어진 지 오래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제천행사와 함께 삼신
항아리의 쌀을 꺼내 떡을 쪄서 먹고 삼신에게 마음껏 푸념을 늘어놓고 서로 마음을 열고 자유로이
하늘과 자연을 이야기하며 더불어 같이 즐겼던 것이 진정한 홍익인간과 재세이화의 세상이 아닐까?
이러한 천자신손의 유전인자가 다시금 발현되어 참다운 광명이 비추는
세상이 왔으면 한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완전한 하나가 되었을 때
《부도지》에서 이야기하는 마고 삼신할머니 의 복본
(復本)의 문은 열릴 것이다.
그러면 적송자가 말하는 삼신산의 정체를 알아보기로 하자.
적송자가
말하는 삼신산 중 봉래산에 대한 내용이 《운급칠첨》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봉래산이 동해의 동북쪽 언덕을 오천리 돌아서 북쪽으로 가면 그곳에 닿는다.
이곳은 중국의 밖이다. 천제 임금이 다스리는 곳이다.
곤륜산과 같은 곳으로 옛날 우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때 교차를 타고 약수를 지나서 이 곳에 도착했다.
*《한서》<지리지>는 경사에서 낙랑군의 거리를 동북 5천리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봉래산과 낙랑군은 동일지역이다.
동북쪽 언덕을 5천리를 돌아서 북쪽으로 간다는 말은 등주와 장도사이의 험한 물(낙랑 험독)때문에
바로 건너지를 못하고 요양방면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편집자 주)
상제에게 제사를 지내고 북쪽 땅에서 돌아 가 큰 공을 이루었다.
우임금은 다섯 산악의 돌에 그 산의 거리와 높낮이 등을 새겨 놓게 했다.
그런데 그 글자는 과두서 (科斗書)로써 중국 한족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하였다.
과두서는 한문이 있기 전에 옛 동이족들이 대나무를 쪼개어 만든 붓으로
쓰는 글자이며 그 글자 모양이
올챙이를 닮았다 하여 과두서라 부른 것이다.
운급칠첨( 雲笈七籤)에 의하면
봉래에는 중국과 별도의 천제가 있었으며 그 천제의 나라와 글씨는 동이족의 글씨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봉래산에 대해 가르쳐 준 적송자(赤松子)는 선인은 동이족이거나 동이땅에 살다 가 간
인물일 것이
분명하며 여와가 배운 것은 동이족의 나라에 대한 것을 배운 것이 된다.
그러나 밖으로 알려진 발해 북안의 신석기문화중 가장 주목할 문화는 홍산문화다.
이 홍산문화는 실로 엄청난 문화다.
이 문화를 발굴하므로 인해서 중국은 황하 중심 문화 전파론을 지양하고 이른바 '다중심문화론(多中心
文化論)'을 인정하게 되었으며 산동반도에서 발견 되는 북신문화-대문구-용산문화가 바로 이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론까지 나오게 되었다.
또한 이문화가 바로 고조선 중심지였다고 공식화시킬
수 있는 실증이 요녕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중국 학자 부사년은 이하동서설의 주인공인 이(夷)가 바로 고조선인이거나 그 선조였다는 주장으로까지
확산될 조짐이 보이고 있다.
또 우리나라 학계의 일부에서도 이 문화를 가지고 고조선이 실제로 기원전
2333년에 건국이 되었을
가능성을 제기 하기도 하였고, 기존의 고조선의 중심을 평양으로 주장하는 학자와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 문화는 또한 《환단고기》를 중심으로 하여 꾸준히 강단 사학계를 한반도 중심의 식민사관이라고
비판했던 재야사학자들에게 힘이 되어주었다.
홍산문화는 황하문명 보다도 빨리 고대 국가를 형성한 유적이 보이며
성곽이나 신전,제단등이 발견되어
고조선이 건국되기전에 이미 고대국가의 발판을 만들었다는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을 뒷받침 하는 근거
까지 되었다.
《환단고기》에서 나오는 배달국이
바로 홍산문화(B.C.4500~B.C.2500), 더 나아가 홍산문화의 전신인
흥륭화문화, 신락문화(B.C.6000~B.C.5000)를 기반으로 세워졌다는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
라고 매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홍산문화는 요녕지역과 내몽고 동부 지역에 광범하게 전개된 6천년
(B.C.4,000)의 신석기 시대중기에
해당하는 2단계 신석기문화로 인식된다.
홍산문화는 앙소문화의 채도와 이전단계의 연속 고선문계 토기와 세석기등을 융합하여 한단계 발전
하여 전개되었는데 후에 이 지역 하가점하층문화에 연결되고 중국 황하유역과 산동반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봉황 모양의 가장 오랜 된 그릇은 내몽고의 홍산문화에서 나옴으로써 봉황을 가장 먼저 가진 겨레가
만리장성 밖의 동이 겨례임이 밝혀졌다 이 봉황형 토기는 Bc4800년 조보구문화 출토품이다.
아울러 옥룡도 역시 홍산문화의 출토품이다.
그러나 이 용봉문화의 발상지는 요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것이다.
'동이족'('東夷族')의 활동지역을 문헌상으로 보면, 하북성 동북부와 산동 일대, 양자강 하류 유역등
이다.
산동지역에서 가장 앞서는 신석기문화유적은 북신문화인데, 북신문화는 7천년전까지 소급되어지고
황하의 자산, 배리강문화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또한 B.C.4500년경의 이지역 대문구문화
와도 직접적인 연원관계에 있다.
대문구문화는 하남성서쪽의 앙소문화와 대비되는 문화로써
동이계(東夷系)문화로 추정되고 있고
이후의 용산문화에 연결된다.
홍산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석묘계(石墓系) 돌무덤이다.
돌을 쌓아 묘실을 구성하는 적석총(積石塚-돌무지무덤)과 돌판을 잘라 묘실벽을 짜는 석관묘(石棺墓-
돌널무덤)가 대능하 상류지역 요녕성 우하량유적에서 발굴되었다.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시하게 여기는 분야가 묘장법인데 죽은 사람을
장례치르는 의식이야말로 오랜
기간 변하지 않는 그민족 고유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우 은(나라)이전에는 땅을 파서 묘실을 만들고 시신과 유물을 안장하는 토광묘가 유행하고
있고, 주대(周代)에 들어와서야 나무로 곽을 짜서 묘실을 만드는 목관묘가 유행한다.
역사상에서 홍산문화와 동일한 석묘계의 묘장법을 채용하고 있는 나라가 고조선이므로 고조선의 전
단계인 홍산문화는 고조선의 선조들이 이룩한 문화로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 그래서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돌을 이용하여 구조물을 축조하는 방식이 고조선 이후 부여, 고구려에도 계속하여 전승되는 고유의
산물이기도 하다
중국의 고전이나 사서에 나오는 황제헌원과 대결을 벌였던 치우의 세력 근거지로도 지적이 되기도
하는데 황제헌원과 결전을 벌이며 하북과 산동일대를 개척하여 청구국을 세웠다는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에 더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홍산문화 이후 하가점 하층문화(B.C.2000~B.C.1300)가 그 지역에 보다 광범하게 확산되어
등장하는데 홍산문화는 하가점하층문화로 이어졌고 하가점하층 문화는 바로 고조선의 문화였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홍산(紅山)문화는 소하연(小河沿)문화를 거쳐 하가점하층문화로 연결된다는 것은 중국학계에서 거의
공식화 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소하연문화에 이어지는 하가점하층문화, 구체적으로 풍하 (豊下)문화에서는 고조선의 건국
연대보다 조금 앞서는 서기전 2천4백년경으로 보이는 청동기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출토된 유물을
보면 화살촉, 칼, 창 등도 발굴되어 기원전 2333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기록의 신빙성을 높여
주고 있다.
이 요동, 요서 일대에서 발굴된
이 청동기 유물들은 황하유역에서 발굴되는 청동기 유물보다 연대가
훨씬 빨라 중국 동부지역에 발견되는 청동기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예상
되기까지 한다.
이 홍산문화의 발견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고대역사를 다시 써야할 정도로 파장이 실로 크다.
중국의 학자들은 지금까지 중국의 앙소문화와 대비되는 문화로 대문구문화와 용산문화로 보았었는데
홍산문화를 발견한 이후로 이 대문구문화와 용산문화의 주인공으로 홍산문화를 들고 있다.
즉, 홍산문화의 주인공을 고조선이나 그 선조로 파악하였을 경우에는 중국의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하북,산동등지의 동이족이 한민족의 선조였다는 근거가 된다.
또한 북신문화-대문구문화-용산문화-악석문화로 이어지는 산동문화와 흥륭화문화,신락문화-홍산
문화-하가점하층문화(풍하문화)로 이어지는 요령문화의 주인공이 한민족의 선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의 학자들도 산동문화의 주인공인 동이족이 동북에서
기원하였다고 주장을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느민족이었나를 밝히기를 꺼려하고 전백찬 같은 중국학자의 일부가 사적상에 보이는
辰國(고조선?)이 동이족의 중심지였다고 주장을 하고 있을 뿐이다.
과연 홍산문화는 고조선인의 선조가 일으킨 문명일까?
분명한 것은 중국학계에서도 은나라때까지 화하족이 하북성과 산동성을 넘어오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홍산문화의 주인공이 동이족이라는 것은 중국학계가 인정하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그 동이족이 과연
고조선인이냐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학계에서도 고조선의 중심을 예전의 평양에서
요서, 요동 등 요녕으로 보고 있다.
한민족의 기원도 그곳에서 발생하여 한반도로 이주를 해왔다는 이론이 점차로 신빙성을 더해 가고
있기 때문에 홍산문화의 주인공 나아가서 중국문화의 중요한 획을 그었던 세력이 누구냐 하는 중요한
기로에 서있게 되었다.
이 홍산문화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는 것을 떠나서 분명한 것은 이 문화가 고조선을 건국하는데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이상의 글은<홍산문화에 대하여>란 제하로 소개된 조의선인님의 글중 일부를 인용하였다.
따라서 필자는 이와같은 역사사실들을 구체적으로 실증하여 홍산문화와 고조선 역사의 연계성을
밝히고자
한다.
고조선사의 시작은 왕검조선으로 부터 시작한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왕검조선>조에서 확인된다.
그렇지만 기록들이 황당하게만 인식되어 실화가 아닌 신화로 인식되었던게 사실이었다.
이를 어떻게 실증하면 신화를 실화로 바꿀수가 있을까.
다음 글에서 그 해답을 얻기 바란다.
이와같은 실증행위는 오해와 불신으로 얼룩진 사료들을 믿을 수 있는 사료로 전환하기 위해서다.
이와같은 실증은 필자의 직접 답사에 의해서 얻어진 해석들임을 밝힌다.
청(淸)나라 때 오임신(吳任臣)의 '산해경광주(山海經廣註)1)'에는 '해내경(海內經)에 동해 안쪽 북해
(발해) 모퉁이에 조선(朝鮮)이 있다고 말한 그 조선이 바로 단군조선'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조선의 '태조실록(太祖實錄)'에는 1397년 3월 권근(權近)이 명(明)나라를 방문했을 때,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이 '단군(檀君) 가신 지 오래인데 그동안 왕조가 몇 번이나 바뀌었는가(檀君逝久幾更張)'
라고 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명나라 때 오명제(吳明濟)의 '조선세기(朝鮮世記)'에는 '단군은 동방 구이(九夷)의 나라 고조선의
지도
자였다(國號朝鮮… 九夷君之)'는 기록이 나와 있고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단군고기'에는
조선·시라(尸羅)·고례(高禮)·남북옥저·동북부여·예·맥 등 단군이 다스리던 구이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거명돼 있다.
'논어(論語)' 자한(子罕)편에도 '공자가 구이에 가서 살고
싶어했다(子欲居九夷)'는 기록이 보이는데,
하안(何晏)의 집해(集解)에 '구이는 동방의 이(夷)가 9종(種)이 있는 것을 말한다(九夷 東方之夷 有九種)'
고 하였고 형병(邢昺)의 소(疏)에는 이 구이(九夷)를 현토(玄?)·낙랑(樂浪)·고려(高麗)·만식(滿 )· 부유
(鳧臾)·색가(索家)·동도(東屠)·왜인(倭人) ·천비(天鄙)로 설명하였다.
이처럼 한국과 중국의 여러 사료를 종합해볼 때 고조선은 동방의 구이가 세운 최초의 동이 국가이고
단군은 최초의 동이 국가 고조선의 지도자였다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일인 사학자들은 단군을 역사가 아닌 신화로 취급해 1894년 '사학잡지(史學雜誌)' 5·6집에
발표한 '조선고사(朝鮮古史)'라는 논문에서 단군을 부정하였고, 이와 같은 단군 부정론은 1910년 이후
조선총독부 설치와 함께 본격화됐다.
그 이후 단군신화는 식민사학의 산물이 되었다.
일제가 단군을 역사가 아닌 신화로 끌어내려 말살한 근거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고조선조에 보이는
다음의 웅녀(熊女) 이야기가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遺靈艾一炷 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 而不得人身 熊女者 無與爲婚 故每於檀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檀君王儉'
'때마침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에서 살면서
신으로 있는 웅에게 사람으로 변하도록
해 달라고 늘 빌었다.
이 때 신이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바로 사람의 모양으로 될 수 있으리라고 하였다.
곰과 범은 그것을 얻어먹고 스무하루 동안 기(忌)하여 곰은 여인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능히 기하지
못해 사람의 몸이 되지 못했다.
곰 여인은 혼인할 자리가 없으므로 매번 신단수 아래서 애기를 배도록 해 달라고 빌었다.
웅이 이에 잠시 사람으로 변해 그와 혼인해 애기를 배게 하여 아들을 낳으니 부르기를 단군왕검이라고
하였다.'
식민사가들은 단군의 출생과 관련된 이 기사를 위와 같이 신화적 관점으로 해석하였고 이것이 오늘날
까지 우리 학계의 정설로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잘못 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일웅일호(一熊一虎)'는 한 마리의 곰과 한 마리
의 범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하나의 웅(熊) 부족과 하나의 호(虎) 부족이 있었던 사실을 언급한 것이다.
그리고 '동혈이거(同穴而居)'는 곰과 범이 같은 동굴에서 살았다는 것이 아니고 웅 부족과 호 부족 등
두 부족이 같은 지역에서 함께 살았던 사실을 말한다.
상고시대에는 인간들이 오늘날과 같은 가옥 구조에서 살았던 것이
아니고 '혈거이소처(穴居而巢處)',
즉 높은 지대에서는 땅에 굴을 파고 그 속에서 살았고 낮은 지대에서는 서 있는 나무를 얽어 매어 그
위에 올라가 살았으므로 웅족(熊族)과 호족(虎族)이 당시 함께 혈거생활을 했던 사실을 가리키는 것
이다.
또한 환웅(桓雄)에 대해 신(神)자를 덧붙여 '신웅(神雄)'으로 표현한 것은 그가 인간이 아닌
신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신성한 인간이라는 뜻이다.
예컨대 맹자(孟子)는 인간을 선인(善人)·신인(信人)·미인(美人)·대인(大人)·성인(聖人)·신인(神人)의
여섯 단계로 분류해 말했다.
환웅의 환은 예로부터 환수(桓水)·환씨(桓氏) 등 지명 혹은 성씨(姓氏) 또는 오환국(烏桓國)과 같이
나라를 가리키는 의미로 쓰이기도 했는데 춘추시대까지도 환족(桓族)이 존재했다.
따라서 하늘과 태양을 지칭하기도 하는 환은 태양 또는 하늘을 숭배하던 부족 명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쑥과 마늘을 먹고 삼칠일 동안 기하라'는 것은 어린 새 생명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부정을 타지 않게
할 목적으로 행한 원시사회의 민속상의 행위와 관련 있다고 본다.
예컨대 우리 전통사회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그 집에 금줄을 쳐 잡인의 출입을 막아 부정타는 일을
방지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웅득여신(熊得女身) 호불능기(虎不能忌) 이불득인신(而不得人身)'이라는 말은 '곰은 사람이 되었으나
범은 신의 계시대로 잘 따르지 않아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웅족의 가문에서는 어린
생명을 잉태·탄생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덕목을 잘 지켜 훌륭한 아이를 얻은 반면 호족의 가문에서는
그렇지 못하여 실패한 사실을 설명한 것이다.
그리고 '웅녀(熊女)와 환웅이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것은 환웅이 곰이 여자로 변한 '곰 여인'과
결혼해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 아니고 웅족 가문에서 훌륭하게 자란 웅녀와 환족의 추장인 웅의 결합에
의해 단군이 탄생한 것을 말한 것이다.
'웅내가화이혼지(熊乃假化而婚之)'라는 말은 '웅이 잠시 사람으로 변해 웅녀와 혼인했다'는 말이 아니고
'환웅이 잠시 음양의 조화를 빌려 혼인했다'는, 다시 말하면 '잠시 성적 결합의 방식을 빌려 혼인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면 웅녀가 '곰 여인'이 아닌 웅 부족의 여인, 쉽게 말해 웅씨 가문의 따님을 말한다면 과연 고전
기록상에 과연 여인의 이름 앞에 성(姓)만 붙여 부인을 호칭한
사례가 있는지 알아보자.
예컨대 주(周)나라 태왕(太王), 즉
고공단보(古公亶父)의 부인이 강태공과 같은 강씨(姜氏)였는데 이를
후세처럼 강씨부인이라고 하지 않고 여(女) 자 앞에 강자를 붙여 강녀(姜女)라고 한 내용이 '시경(詩經)'
과 '맹자(孟子)'에 '고공단보가 강녀와 함께 와서 살 집을 보셨다(古公亶父… 爰及姜女 聿來胥宇)'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단군 당시에 과연 실제 웅씨 성을 가진 부족이나 가문이나 사람이 있었는가.
'좌전(左傳)' 문공(文公) 18년조에 고신씨(高辛氏)의 여덟 아들 가운데 큰아들 이름이 호(虎)이고
둘째
아들이 웅(熊)이었다는 기록이 나오고 요순시대의 기록인 '서경(書經)' 순전(舜典)에는 순임금의 어진
신하들 중에 웅(熊)이라는 신하가 있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그리고 사마천의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 제1에는 황제(黃帝)의 용맹한 전사(戰士)를 거명한
것 중에 웅(熊)·호(虎) 등의 이름이 들어 있다.
시기적으로 볼 때 황제·고신씨·요순시대는 바로 고조선의 단군시대와 거의 동시대다.
이런 자료들은 이 시기에 호나 웅이 범이나 곰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부족 또는 사람의 이름으로
널리 사용되었던 것을 방증하기에 충분하다고 하겠다.
그러면 단군 당시 단군의 아버지 환웅과 혼인했다는 웅녀의 가문은 과연 어디에 있던 어느 집안이었
을까.
《왕회해(王會解)》에 대해 주석을 한 바 있는 동진 때의 공조(孔晁)라는 학자의 주장을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즉 그는 "예(濊)는 한예(韓濊)로서 동이의 별종이다.(濊, 韓濊, 東夷別種也。)"라고 하고, 양이(良夷)에
대해서는 "양이(良夷)는 낙랑(樂浪)의 이(夷)이다(良夷, 樂浪之夷也。)"라 하였다.
발인에 대해서는 "발(發)도 역시 동이다.(發亦東夷)"라 하였고, 맥인(貊人)에 대해서는 "맥(貊)은 동북의
이이다(貊, 東北夷。)"라고 하였다.
청구(靑丘)에 대해서는 "청구(靑丘)는 해동(海東)의 이이다(靑丘, 海東夷。)"라고 하였다.
중국 동남쪽에 있던, 춘추시대까지도 공자에 의해 동이족으로 폄하된 초나라의 시조가 바로 전욱의
후예인 육웅이고, 그 후예들은 모두 웅씨 성을 사용해 왕위는 웅려(熊麗)·웅광(熊狂)·웅역(熊繹) 등
으로 이어졌다.
'서경(書經)' 우공(禹貢)편에 청주(靑州)에 우이(嵎夷)가 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는 기록이 여러 군데 나온다.
그리고 청주는 하우(夏禹)시대 구주(九州)의 하나로 중국의 동북 지역에 있었다.
따라서 고조선시대에 환족은 오늘의 산동성·요녕성·하북성 등지에 걸쳐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초나라의 웅족은 이 시기에 중국의 동남쪽, 즉 청주와 인접한 지대인 양주(楊州)에 살았으며 당시
양주는 오늘의 강소(江蘇)·안휘(安徽)·강서(江西)·절강(浙江) 등지에 해당한다.
환족과 웅족은
다 같은 동이족으로 하나는 동북의 봉래(장도), 하나는 요동의 개주(웅악성)에 서로
떨어져 살았으나 이들 두 종족이 서로 혼인해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단군이었다.
단군은 곰의 아들이 아니라 웅씨의 가문에서 환인·환웅의 가문으로 시집온 여인 웅녀에게서 태어난
아들이었던 것이다.
개국 이래 조선조 말엽 고종 때에
이르기까지 단군은 우리의 국조(國祖)였고,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35년을 거치면서 단군의 역사는 신화로 변조되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역사는 단군을 뺀 위만조선에서 시작되는데 이렇게 되면 한국사는 유구한 역사가
아닐 뿐더러 위만은 한민족이긴 하나, 당시 연인(燕人)으로서 침입자의 신분이기 때문에 출발부터
기형이 된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 역사를 고조선을 뺀 고구려·백제·신라 이후의 역사로 한정하다 보면
피지배·
피침탈과 동족상잔으로 일관된 어두운 역사만 부각된다.
이런 기형적 역사, 어두운 면만 부각된 역사가 오늘의 우리를 이처럼 민족적 긍지도, 문화적 자신감도
없는 분열과 투쟁이나 일삼는 한심한 국민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이제는 부질없는 단군신화 논쟁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하루속히 일제가 우리 국조 단군에게 씌운 신화의 굴레를 벗기고 그 역사적 실체를 복원하는 데 우리
모두 앞장서야 한다.
주1: 오임신의 山海經廣注 卷十八,
海內經
산해경광주 권18, 해내경
【經文】東海之內、北海之隅、有國名曰朝鮮。
【경문】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으니 이름이 조선이다.
【注】錢溥朝鮮國志、朝鮮有三種。一檀君朝鮮、一箕子朝鮮、一衛滿朝鮮。考箕子封朝鮮傳四十一代至
王準凡九百二十八年、而失國于衛滿。
【주】전부의 조선국지는, 조선은 세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단군조선이요 하나는 기자조선이요 하나는
위만조선이라 하였다. 상고하건데 기자는 조선에 봉해져 41대를 전하여 왕 준에 이르기까지 무릇 928
년이었으나 위만에게 나라를 잃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의 우이부에 의하면(嵎夷)부
戊)《薛士龍書古文訓》 "嵎夷, 海隅諸夷, 今登州。" 于欽《齊乘》因以寧海州爲嵎夷, 今登州。寧海,
今山東縣。(己)《東坡書傳》 當在東方海上。
《설사용 서 고문훈》에 의하면 "우이"는 지금 등주 주변의 바닷가에 있는 모든 이족을 말한다.라고 하였고,"우흠의 《재승》에 의하면 영해주를 우이라 불렀다.지금의 등주와 영해로서 산동현이다.(己)《동파서전》은 당시 동방해상에 있던 모든 이족을 우이라고 불렀다.
***삼신산지역이 있는 장도(구 사문도)와 묘도열도 전역을 포함한다.
위 원문을 현대 중국어로 단구표점하면 다음과 같다.
《書堯典》 嵎夷。其說有六。(甲)《孔傳》東表之地稱嵎夷。(乙)《釋文》馬融曰: "嵎、海嵎也, 夷、萊夷也。"(丙)《後漢書·東夷傳》 夷有九種, 曰畎夷、于夷、方夷、黃夷、白夷、赤夷、玄夷、風夷、陽夷。昔堯合羲仲, 宅嵎夷, 曰暘谷, 巢山潛海, 厥區九族。" 是以九夷爲嵎夷也。(丁)《說文》嵎山在遼西, 一曰嵎鐵, 暘谷也。《通典》亦用其說。胡渭謂卽今朝鮮。(戊)《薛士龍書古文訓》 "嵎夷, 海隅諸夷, 今登州。" 于欽《齊乘》因以寧海州爲嵎夷, 今登州。寧海, 今山東縣。(己)《東坡書傳》 當在東方海
공전(孔傳)
《우공추지(禹貢錐指)》<권4>
其東北跨海為故遼東都司之東境及朝鮮國,皆古青州域也。
青之東境,登、萊二府之地鬥入大海中,東西長八九百裏,形如吐舌。《史記》《齊世家》雲:齊自泰山屬之琅邪,
北被於海,膏壤二千裏。蓋並登、萊計之也。海水自日照縣東與徐分界,日照本漢海曲縣,屬琅邪郡。今屬青州府莒州。
北曆諸城縣東,折而東北,曆膠州、即墨、萊陽、棲霞、文登諸縣南,又東北出而西折,曆寧海州及福山、
蓬萊二縣北,蓬萊,登州府治也。海在府城北五裏,北與遼東相望。自新開海口而東北,抵遼東金州衛南之旅順口,三百裏而近。有沙門、砣磯、
鐵山諸島,可以泊舟避風,一帆徑度,亦不甚險。《漢書》:元封二年,遣樓船將軍楊仆從,齊浮勃海擊朝鮮。《元和誌》:大人故城在登州黃縣北二
十裏。司馬宣王伐遼東,造此城運糧,船從此入。今新羅、百濟往還常由於此。又西曆招遠、掖縣、昌邑、濰縣北與兗分界。
禹河自碣石入海,碣石以西為逆河,其東則海,無所謂勃海也,勃海之名,始見於《戰國策》。蘇秦說齊曰「北
有勃海」是也。然春秋時已有之。《左傳》:楚子使屈完謂齊桓公曰:君處北海。《韓非子》曰:齊景公與晏子
遊於少海。北海、少海即勃海也,亦作勃澥。《說文》雲:海之別,又謂之裨海。《齊語》:渠弭於有渚。韋昭
注雲:渠弭,裨海是也。《列子》曰:勃海之東有大壑,名曰歸墟。歸墟者,尾閭也。應劭曰海之橫出者曰勃。
《史記》《索隱》:崔浩曰勃,旁跌也。旁跌出者,橫在齊北,故《齊都賦》雲「海旁出為勃」。
徐幹、左思皆有《齊都賦》。
漢置勃海郡,治浮陽縣,即今河間府之滄州。又置北海郡,治營陵縣,即今青州府之昌樂縣。二郡皆在
勃海之濱,一屬兗,一屬青也。《元和誌》:萊州掖縣北有渤海。則已入東萊郡界,過碣石二百餘裏矣。
元人又以鐵山為碣石。於欽《齊乘》曰:青州東北跨海。跨小海也。蓋太行、恆嶽北徼之山,循塞東入
朝鮮。海限塞山,有此一曲。北自平州碣石,南至登州沙門島,是為渤海之口,闊五百裏,西入直沽,
幾千裏焉。於氏所謂碣石,蓋即鐵山也。鐵山南對沙門島,北與旅順口相接,正當渤海之口。若在昌黎者,與此地遙隔五
六百裏,安得舉以為言。
勃海初不若是之遠。《經》雲:夾右碣石入於河。又雲:至於碣石入於海。《漢天文誌》雲:中國山川
東北流,其維首在隴、蜀,尾沒於勃海碣石。碣石者,河、海分界處也。碣石以西至直沽口,禹時為逆河,
戰國時謂之勃海,勃海止此耳。以鐵山、沙門為勃海之口,而旅順以東為大海,近誌之失也。詳見《導河》。
지도는 <대청광여도>의 우이(등주)지역과 수몰된 광령지역이 같은 청주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광위廣衛>라고 쓴 글씨 위에 청색으로 표시하고 위에 붉은색으로 꼬깔을 씌웠습니다.
큰 지도에서 보면 각 주마다 색으로 구분한것을 볼수 있습니다.
두번째는 <대청광여도>의 색으로 구분하는 보기입니다. 원 청주인 산동은 록색입니다.
대동강 평양 낙랑군설은 원천무효다 .
이유는 한나라 누선(樓船)은 대동강을 건널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 글은 미국상선 져너널 셔먼호의 평양 침공사건 진상이다.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신미양요로 발전하는 계기를 가져왔는데 외국의 선박이 대동강을 통하여 평양성
까지 공격하였다는 사건은 이 사건 외에도 한나라와 수.당나라의 침공사건이 있었다고 전해온다.
그 첫번째가 위만조선을 한나라가 누선(樓船)으로 공격한 사건이고, 두번째가 수.당나라가 고구려를
칠때 수천여척에 달하는 배들을 동원하여 평양성을 함락시켰다던 사건이다.
그동안 우리들은 단 한번도 당시의 배들이 대동강을 운항하는데 수심이 문제될것이라고 의심해본일이
없었다.그러나 져너럴 셔먼호의 사건으로 대형선박은 대동강 운항이 불가하다는 사실이 밝혀진것이다.
따라서 사서들이 전하는 기록들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실재 사건을 일으켰던
미국의 무장상선 셔먼호를 통하여 그때 상황을 검토하기로 하였다.
이 사건을 통해서 중국의 대형선박(누선)들의 대동강 운항이 가능했는가를 검토하기 위한것이었다.
당시 미국의 공식 대표도 아닌 일개 무장상선이 무슨 이유로 수도도 아닌 평양으로 행했는가 하는 점은
두번째 밝혀볼 문제다.
전문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대동강은 수심이 단계적으로 달라 평양까지 운항할 수 있는 배의 크기는
30톤 이하라고 밝히고 있는데 져너럴 셔먼호는 80톤이었다.
평소대로라면 이 상선은 평양까지 운항할 수 없었지만 홍수로 불어난 물울 이용하여 올라갔다가 며칠을
머무르는동안 물이 빠져서 인근 섬에 좌초되어 전소당하는 비극을 맞었던것이다.
그렇다면 한나라 누선(樓船)의 최대 적재능력이 6.7백명이었다고 한다면 그 무개가 최소 수백톤으로
예상되므로 누선은 평양까지 운항이 불가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청천강을 경계로 남쪽에서 이질적으로 발굴되는 세형동검과 북쪽에서 발굴되는 철제 농기구및
명도전등을 구분하여 청천강 이북까지 연나라 문화가 진출하였다고 하는 추론은 사료의 기록상 근거가
없고 그곳은 위만조선의 후국이었던 남옥저의 영역이였다.
반면 대동강유역 평양은 당시 준왕의 낙랑조선 망명세력이 점거하고 있었다.
이로서 잡다한 이론이 필요없는 대동강 평양 낙랑군설은 원천무효가 된다.
또한 중국의 각종 사료들에 의한 구평양성 설명은 전연히 딴판이다.그 크기와 용도를 비교하기 바란다.
○ 평양성(平壤城)ㆍ한성(漢城)
《후주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성이다.
《수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고구려국은 평양성에 도읍하였는데, 장안성(長安城)
《통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고구려는, 동진(東晉) 이후로 그 왕이 거처하는 곳은 평양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평양성이 압록강의 동쪽에 있는데, 일명 왕험성이라고도
한나라 수군의 최종 목적지는 사문도 《한서 조선전 보주=漢書 朝鮮傳 補注》
한무제는 양복이 지휘하는 누상선을 동원하여 해로로 천여리를 돌아 사문도(장도)에 도착한 기록을
《한서》의 <조선전>에 보주(補注)로 밝혀 놓았지만 국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중국정사조선전》
역주1 52쪽에서 보주 내용을 설명하는 같은책 조선전 주석 84쪽에서는 원문대로 해석하지 않고
핵심을 피하고 있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원문을 제대로 해석하였다면 한반도의 평양을 위만조선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데도 이를 탈락시킨
이유는 무엇인가. 왜 보주의 명문을 원문대로 소개하지 못한것인지도 국사편찬위원회는 밝혀야 할
것이다.
다음은 위만조선을 정벌하기 위하여 제남에서 출발하여 발해바다를 건너 갈석산 근처의 열구에
들렸다가 순체의 육군 병력을 싣고 떠나기로했던 해군장수 양복이 다시 등주의"사문도"로 향하였
다는 <한서>의 보주 기록이다.
이러한 기록만으로도 위만조선의 위치는 발해 내에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지만, 자세히 검토하면
이곳이 제. 조. 연나라의 난민들이 망명하여 머물렀던 장소라는것도 설명이 되고 있다.
"樓 船 將軍 楊 僕 從 齊 浮 渤海" 를 해설하는 보주(補注)다.
[補注] 先謙曰, 胡注 僕 從 齊 浮 渤海, 蓋自靑 以北. 幽平以南皆賓於海, 其海通謂之渤海, 非之渤海郡
而言也.沈欽韓云, 于欽齊乘, 北自平州碣石, 南至登州沙門島, 是渤海之口, 闊五百餘里. 紀要, 海在幽平
閒者, 皆爲之溟渤, 東西浩翰千有餘里. 薛季宣云, 河入海處, 舊在平州石城縣, 東望碣石. 其後, 大風逆河,
其漸于海, 程大昌云, 逆河, 世之所謂渤海者也. 하략
[선겸왈, 호의 주에 이르기를, 양복이 제를 따라나와 발해에 떳다고 하였는데,
이 발해는 청주의 북쪽에서 유주와 평주의 남쪽에 걸쳐있는 바다를 말한다.
그 바다를 통상적으로 발해라고 한다. 이 발해는 발해군과는 뜻이 다른 말이다.
(호주(胡注란 호위(胡謂의 주라는 말)
심흠한이 말 하기를, 제남에서 배를타고 떠나 북쪽으로 갔다가 북쪽에 있는 평주갈석에서 출발하여
남쪽의 발해의 입구에 있는 등주 사문도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평주 갈석과 등주 사문도간의 거리는
오백여리이다.
<독서방여기요>에 이르기를, 그 바다에는 유주와 평주등에서 건너간 한량? 들이 있다고 하였다.
이 발해바다는 동과 서의 넓이가 천 여리이다.설개선이 말 하기를 하구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은
옛날에는 평주 석성현에 있었는데, 이 곳은 갈석이 동쪽으로 바라다 보이던 곳이었다.
그 후 역하에 대풍이 불어 그 곳은 점점 바다로 갈아 앉어버렸다.
정대창이 말 하기를 역하(逆河)는 세상에서 말하는 발해라는 바다다. 이상
지도로 보는 한나라수군의 공격 경로도
아래 지도는 송나라시대 제작된 우적도다.우공시대의 산천이름과 고금의 주군명,고금의 산수명등을
장안본에 의거하여 그린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지도가 일반지도와 다른점은 발해의 모양세다.
동서로 1000여리이고 남북으로 500여리라고 설명되어있다.
따라서 이 지도는 산해관 동쪽에 바다가 아니라 평지 모양을 그리고 있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요동만은 후대에 광령평원이 윤몰되어 만들어진 바다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한나라 공격군은 바다가운데 있던 조선을 공격하였음으로 낙랑조선은 요서지역이나 요동내륙
에는 없었다는 증명이 되기도 한다.
우적도 송시대 기원1100년제작
우적도해설: 이 우적도는 우공의 산천이름과 고금의 주군명,고금의 산수명등을 장안본에 의거하여
기원1100년에 제작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사각형 한칸의 크기는 100리
한국의 사학자들은 한나라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하여 바다로 진격하던 경로를 다음과 같이 예상
하였다. 너무나 예상이 빗나가고 있음을 본다.
* 이병도; 평양 왕험성 (고구려 후 평양성) <한국고대사연구> 88쪽
* 국사편찬위원회 ; 발해를 건너 왕험성 으로.(지명 없음) < 한국사> 107쪽
* 문정창 목표지; 발해를 건너 왕험성 으로.( “ ) <고 조선사 연구> 160쪽
* 윤내현 “ 난하~ 요하 서쪽 (발해 서쪽) <한국 고대사 신론> 284~285
* 북한 “ 요하 하구 [부수도 왕검성 (영구 발해)] <고조선의 력사개관> 125~126쪽
* 신채호 “ 헌우란 (요동반도 서쪽) <조선 상고사> 107쪽
한무왕(제)의 조선해로(海路)침입 실패 출전:《고대사 동방대제국》정영일저
요동은 한나라의 새외 국경 밖이다. 진시왕은 불로초가 나는 삼신산을 가려면 조선 제국과 전쟁을 해야
하고 한무왕은 삼신산을 가려면 고구려와 싸워야 했다.
그들은 승산 없는 전쟁을 할 수는 없고 바다를 건너 바로 건너가서 신선이 나타나서 불로초를 구해 준다고
믿을 수도 없는데 적이 해로를 차단하면 속수무책으로 잡혀 죽을 것임에 감히 할 수 없는 일인데 무왕은
만년에 진시왕이 구하지 못한 불로초를 구하고자 이성을 잃었다.
무왕은 멀리 동해 바다를 바라보다가 봉내산에 건너가리라 선언하였다. 시신(侍臣) 중신들이 크게 놀랐다.
군신(群臣)이 간하여도 막무가내였다. 동방삭(東方朔)이 간하였다.
동방삭은 중원 제일의 장수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신선이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럽게 얻는 것이옵고 조급
하면 이익 되지 못합니다.
봉내산은 수중에 있는 나라에 있고(東海之內北海之隅有國名曰朝鮮天毒其人水居倚人愛人) 여기 물에서
산다는 것은 바다에 둘러싸인 나라의 산에 산다는 뜻이다.
위험한 산악 지역에 가서 신선은 못 만나고 주위 적에게 잘못 포위 되면 어찌 하옵니까?
그 곳에는 사람이 살지 아니하나 요동의 고구려가 그들의 후방에 적이 침입하는 것을 묵과하지 아니할 것
입니다.
대군을 동원하여 싸울 수 없는 것은 진시왕과 같은 처지입니다 하였다.
무왕은 일찍이 요동을 거처 조선 반도에 가고자 발해에 창해군을 설치하여 동부여와 교통을 터서 후원을
얻고자 하였으나 고구려에게 패하여 창해군을 철수하였던 것이다.
무왕은 나이를 헤아릴 수 없이 장수한 동방삭(者 東方朔)의 말을 따라 바다로 조선을 침입하는 일을 중지
하고 동방삭이 시키는 데로 궁으로 돌아가서 조용히 신선의 출현을 기다렸다.
무왕은 그 후 계속 발해 근방 태산에 행차하여 제사도 지내고 높이 이십장(二十丈)이 되는 지점대를 세워서
정성을 드리고 방사(方士)를 봉래 방장에 보내어 신선을 만나도록 하라 하고 다시 동(東)으로 태산을 찾아
상제(上帝)에게 제사를 올려 복음을 빌고 친히 발해에 나아가서 멀리 동(東)녘 하늘 아래 삼신산(三神山)
봉래.방장을 바라보며 간절히 신선이 불로초를 가지고 올 것을 빌었다.
(太初元年冬十月上行幸泰山十二月甲午朔旦冬至祠上帝於明堂東至海上考入海及方士求神者莫驗然翌遣冀遇
之十二月甲午朔上親禪高里?后土臨渤海將以望祀逢來之屬冀至朱延焉, 漢書)
그러나 아무런 효험도 없었다. 무제는 이에 위험을 무릅쓰고 조선을 침공하겠다고 우겨서
<上欲浮海求 神仙 君臣諫 弗聽會 大風冥海水彿涌 留 十餘日 及還>
동래에 수군을 집결시켜 발해에서 일개 군단을 이끌고 군신의 만류를 뿌리치고 삼신산 신선을 만나려
진격하였다. 그러나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상륙하지 못하고 십여일을 머무르다 돌아왔다.
무제는 다시 선단을 이끌고 갔다가 4일후에 어루선(御樓船=임금이 타는 배)만 돌아 왔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임금을 호위하던 병선들은 어떻게 되엇을까?
이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없다.한무제는 삼신산의 불로초를 구하는 일로 많은 인명들을 잃었으며 이에
관련된 조정의 궁인과 신료들을 죽인자도 백여명에 이른다고 감역(鑑易)은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한무제가 전쟁을 이르키기 전의 사건이다.일부가 《한서》에도 기록되어있다.
(출전;九山, 일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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