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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문화의 원류 원문보기 글쓴이: 솔롱고
조선의 정변과 기자족의 망명
근래의 남북한 사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의 존재에 대하여 한국의 역사에서는 지워버리기로 약속이나 한것
처럼 보입니다.
무려 천여년이나 존속되었던 중국도 무시못하는 역사를 한반도로는 건너온 사실이 없기때문에 지워야
한다면 고조선의 역사를 아예 없에버리자는, 조상들을 버리는 패륜아들이 되는것입니다.
밝혀보지도 않고 찾기가 어렵다고 없었던걸로 덮어두자는 수작들이 가당치나 한 예기입니까
중국에게 더 이상 무시당하는 바보가 되지 않으려거던 기자조선의 실체를 밝혀내야 합니다.
만약 한국에서 기자의 존재를 무시한다면 중국의 25사를 근본부터 수정해야되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다는 사실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중국인들이 기록하였던 사서에는 평양을 기록 할때 빼놓지않고 강조 하는것은 기자조선과 한의
낙랑과
장수왕이 살았던 평양성이었고 조선의 사서에는 한결같이 선인왕검이 살았던 왕검성을 강조하였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만약
일부 사학계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기자가 동래할 당시 기자조선이 요서지방에 있었다면 북쪽으로
갔다는 뜻으로 "북래"라고 해야 맞는것이지 어떻게 "동래"라고 할 수 가 있겠습니까
중국인들을 동쪽과 북쪽도 구별못하는 바보로 안다면 그것이야말로 큰 오산입니다.
기자의 선조가
고조선을 떠나 은나라로 망명 하였던 사연을 <단군 세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자가 본시 은 나라 사람이 아니고 조선사람 이라는 근거 사료입니다.
단군소태 시대에 있었던 우현왕 색불루의 반란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기자족은 망명을 떠나야
했습니다.
二十一世 檀君 蘇 台 在位 五 十 二 年
甲辰元年(紀元997年)殷 主 小 乙 遣 使 入 貢
庚寅四十七年(1043)殷主武丁旣勝鬼方又引大軍侵攻索度令支
等國爲我大敗請和入貢壬辰四十九年(1045)蓋斯原褥薩高登潛師襲鬼方減之一群養雲二國遣使朝貢於是 高登
手握重兵經略西北地勢甚强盛
遣人請爲右賢王帝憚之不允屢請乃許號爲豆莫婁 乙未 五 十 二 年(1048) 右 賢 王 高 登
薨基孫索弗婁襲爲
右賢王帝巡狩國中南至海城大會父老祭天歌舞
仍召五加與之議傳位自謂老倦于勤欲委政於徐于餘
環薩水百里而封之命爲攝主號曰奇首右賢王聞之遣人勸帝
止之帝綜不聽 於是右賢王率左右及獵戶數千遂卽位于夫餘新宮帝不得已傳玉冊國寶廢徐于餘爲庶人帝隱於阿
斯達以終是歲伯夷叔齊亦以孤竹君之子遜國而逃居東海濱力田自給
21세 단군 소태 재위 52년
갑진 원년(B. C 1337) 은 나라 왕 소을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경인 47년 은 나라 왕 무정 이 귀방을 쳐 이기더니 또 대군을 이끌고 색도 영지 등의 나라를 침공하였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
임진 49년 개 사원의 욕살 고등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을 습격하여 멸망시키니 일군국과 양 운국의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이 때에 고등이 많은 군대를 손에 넣고 서북의 땅을 공격하여 차지하게 되니, 그 세력이 매우 강하였다.
이에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와 우현왕으로 임명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단 제는 이를 위태롭게 여겨 허락치 않으려 했는데 거듭하여 이를 청하매 허락하여 두막루 라
부르도록 하였다.
을미 52년 우 현왕 고등이 죽으니 그의 손자 색불루 가 세습하여 우현왕이 되었다.
단제께서 나라안을 돌아보시다가 남쪽에 있는 해성에 이르러 부로 들을 모두 불러모아서 하늘에 제사
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그리고는 오가를 불러 이들과 더불어 제위를 물려줄 것을 의논하셨는데 스스로는 늙어서 제위를 지키기
어렵다하시며 정치를 서 우여 에게 맞기고 싶어 하셨다.
이에 살수의 땅 백 리를 둘러보시고 이를 그에게 봉하시사 명을 내려 섭주로 하여 기수(奇首)라 부르게
하였다.
우
현왕은 이를 듣고 사람을 보내 단 제에게 권하여 이를 중지케 하였으나 단제는 종래 이를 듣지 않으셨다.
이에 우 현왕은 주변의 여러 사람들과
사냥 족 수천을 이끌고 마침내 부여의 신궁 에서 즉위하였다.
단제도 어쩔 수 없이 옥책 국보를 전하고 서우여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아사달에 은퇴하여 마침내 붕어
하셨다. 이해에 백이와 숙제도 역시 고죽군의 자손들로서 나라를 버리고 동해의 해변가에 와서 살며 밭
갈기에 힘쓰며 혼자 살아갔다.
이렇게 쫓겨난 기자족은 좌원등지를 유랑 하다가 사냥꾼들을 규합하여 반격세력을 만들고 저항하여 마침내
복귀하는 절차를 밟게 되는데 가족중 일부가
은나라로 망명하는 과정은 생략되어 있습니다.
번한 세가 하
단군 색불루 는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혁하였다.
은나라 왕 무정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약속하였다. 이보다 앞서 서우여를 폐하여 서인을 삼았더니
서우여는 몰래 좌 원에 돌아와 사냥꾼 무리 수천인과 더불어 짜고 군대를 일으키니 개천령 이 듣고 즉각
토벌하려 했으나 패하여 싸움터에서 죽고 말았다.
단제 께서는 몸소 삼군을 이끌고 토벌하러 갔다. 이에 먼저 사람을 보내 서우여를 비왕에 봉할 것을 약속
하시며 다시 설득하니 서우여가 이에 따르므로 단제께서는 서우여를 번한으로 삼으셨다.
4년 기해에 진 조선은 천왕의 칙서를 전하였는데 가로대 '그대들 삼한은 천 신을 위로 받들고 백성들도
이에 따르도록 교화하라'고 하다.
이때부터 백성들에게 예의,누에치기, 베 짜기, 활쏘기, 글 등을 가르쳤으며, 백성들을 위하여 금팔금법을
만들었으니, 남을 죽이면 같이 죽여서 다스리고, 남을 다치게 하면 곡식으로 배상케 하고, 남의 것을 도둑
질하면 남자는 신분을 무시해 버리고는 그 집의 노비가 되게 하고,
여자는 계집종이 되게 하며,
소도를 훼손시키는 자는 가두어 두며, 예의 를 잃은 자는 군에 복무하게 하고, 근면하게 노동하지
않는자는
부역을 시키며, 음란한 행동을 하는자는 태형으로 다스리고, 사기치는 자는 훈계방면하나 스스로 속죄하려
하면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은 면하여 주지만 백성들이 오히려 수치스럽게 여겨서 결혼도 할 수 없었던
듯하다.
이로써 백성들은 끝내 도둑질 따위는 하지 않았으니
문을 닫거나 잠그는 일도 없었고 부녀자들은 정숙하여
음란하지 않았다. 밭이나 들, 도읍지를 막론하고 음식을 바쳐 제사 올리니 어질고 경망 하는
풍속이 가득했다.
병신년에 서우여가 죽고 정유년에 아락이 즉위하더니, 그도 죽었다.
정축년에 솔 귀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갑자년에 임나가 즉위하였다.
신미년에 천왕의 조서로써 천단을 동교에 설치하고 삼신께 제사지내다.
무리들이 둥그레 모여 북
치며 노래하기를 다음과 같다.
진정으로 천 단을 쌓고 삼신을 축 수 하세
황 운을 축 수 함이여 만 만세로다.
만인을 돌아봄이여 풍년을 즐거워 하도다.
<번한세가>하에 기록된 기자의 8조금법과 기타 낙랑조선인에게 배풀었던 교육내용은 앞서 제시한 <한서>
지리지의 내용과 동일함을 알 수 있습니다.
단 이렇게 평화롭던 고장에 인심이 흉하게 된것은 외부의 장사치들이 내왕하면서 도둑이 생겼기 때문이며
이로 말미암아 법은 8조에서 60조로 늘어나게 됩니다. 원래 이 곳에는 대문이나 사립문도 없었다고 합니다.
殷道衰,箕子去之朝鮮,眞番朝鮮.樂浪朝鮮
其民以禮義,田蠶織作。樂浪朝鮮民犯禁八條: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谷償;相盜者男沒入?其家奴,女子?婢,欲自贖者,人五十萬。
雖免?民,欲猶羞之,嫁取無所?,是以其民終不相盜,無門戶之閉,婦人貞信不淫?。其田民?食以?
豆,
都邑頗放效吏及內郡賈人,往往以懷器食。郡初取吏於遼東,吏見民無閉臧,及賈人往者,夜則?盜,俗稍益薄。
今於犯禁浸多,至六十餘條
단군 소태에게 항명 하여 반란을 이르켰던 색불루는 일단 서우여 사건을 마무리 하고 은 나라와의 간헐적인
전쟁을 계속하게 되는데 그는 성격이 공격적이여서 삼한으로 나누어 통치하던 자치권을 한군대로 모아
국력을 결집시키고, 은 나라와의 전쟁을 하게 됩니다.
조선의 역사를
통하여 다른나라를 공격하여 땅을 빼앗고 자국민을 옮겨서 살게 했던 기록을 보았던 기억이
별로 없었던 우리들 입니다.
은 나라가 혁명할 당시 군대를 보내어 도와주었던 조선도 형제국처럼 여기던 은 나라와 전쟁을 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은 나라 말기 기자가 조선으로 돌아 올때까지의 기록을 보시겠습니다.
22세 단군 색 불 루 재위 48년 <단군세기>
병신 원년(B C 1285) 단제 명 하사 녹산을 개축시키고 관제를
개정하였다.
가을 9월엔 친히 장당경으로 행차하시어 묘를 세우고 고등왕을 제사지냈다.
11월 몸소 9한의 군사를 이끌고 여러 차례 싸워 은나라 서울을 격파하고 곧 화친하였으나 또 다시 크게
싸워 이를 쳐부쉈다.
이듬해 2월 이들을 추격하여 황하주변에서 승전의 축하를
받고 변한의 백성들을 회대의 땅으로 옮겨
그들로 하여금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떨쳐졌다.
신축 6년 신지인 육우는 '천년 제업의 땅이라 해도 대운이 이미 다했으며 영고탑은 왕기가 짙어 백악산을
오히려 능가하는 듯 합니다.
청컨대 성을
쌓고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 시옵소서'라고 상주하였으나 단 제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신도에 이미 집이 있는데 다시 어째서 옮길 것인가?'라고 하셨다.
을묘 20년 이 때에 남국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쫓고 남으로 이동하여 엄독골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렀으니 은나라 땅에 매우 가까웠다.
이에 여파달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기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그곳의
유민과 서로 단결하여 나라
를 세워 여(黎)라 칭하고 서융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남씨의 위세가
매우 성하여
황제의 교화는 멀리 항산(恒 山)의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신미 36년 변방의 장수 신독이 병력을 믿고 난을 일으켰다.
이에 단 제가 한동안 영고탑으로 피하니 많은 백성이 이에 따랐다.
계미 48년 단제 붕어 하시니 태자 아흘 이 즉위하였다.
23세 단군 아 흘 재위 76년
갑신 원년(B C 1237) 단 제의 숙부인 고불가에게 명하여 낙랑 골을 통치 하도록 하고,
웅갈손을 보내
남국의 왕과 함께 남쪽을 정벌한 군대가 은나라 땅에 여섯 읍을 설치하는 것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은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면서
결판을 보지 못하니 마침내 병력을 진격시켜 공격하여 이를 쳐부수었다.
가을 7월 신독을 주살하고 수도로 돌아온 뒤 포로들을
석방하도록 하였다.
을유 2년 남국의 임금 금 달이 청구의 임금, 구려의 임금과 주개에서 회합하고 몽고리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마다 은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깊숙이 오지로 들어가 회대의 땅을 평정하더니 포고 씨를 엄 으로,
영고 씨를 서땅에 방고 씨를 회 땅에 각각 임명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우러러보며 두려워
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무자 5년 이한 및 오가를 불러 영고 탑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의논하는 것을 중지하도록 하였다.
기해 76년 단 제 붕어 하시고 태자 연나가 즉위하였다.
24세 단군 연나 재위 11년
경자 원년(B C 1161) 황 숙고 불가를 섭정으로 삼다. 신축 2년 여러 한들은 조서를 받들고
소도를 증설
하여 하늘에 제사지냈으며, 나라에 큰일이나 이변이 있으면 전적으로 여기에 기도하여 백성의 뜻을 하나
로 모았다. 경술 11년 단제
붕어 하시고 태자 솔나가 즉위하였다.
25세 단군 솔 나 재위 88년
신해 원년(B C 1150) 정해 37년
기자(箕 子) 서화(西 華)에 옮겨가 있으면서 인사를 받는 일도 사절하였다.
정유 47년 단제 께서 상소도 에 계시며 예로부터 전해오는 의례를 강론하시다가 영신과 직신의 구분을
물으시다. 이에 삼랑 홍윤성이 나서서 대답했다.
'이치를 지켜 굽히지 않는 자는
직신 이옵고 위세를 두려워하여 굽혀 복종하는 자는 영신 이오며, 임금은
근원이요 신하는 흘러가는 물입니다.
근원이 이미 흐렸으면 그 흐름이 맑기를 구하여도 이것이 될 수 없는 일이나니, 때문에 임금이 성인이 된
후라야 신하가 바른 법입니다.
' 단제 가로되
'옳은 말인지고'라 하다. 기유 59년 밭곡식에 풍년이 들어 한 줄기에 다섯 개 이삭의 조가
있었다. 무인 88년 단제 붕어 하시고 태자 추로가 즉위하였다.
二十二世 檀君 索弗婁 在位四十八年
丙申元年(紀元1049年)帝命修築鹿山改官制秋九月親幸藏唐京立廟祀高登王十一月親率九桓之師
屢戰破殷都
尋和又得大戰破之明年二月追至河上而受捷賀遷弁民于淮垈之地使之畜農國威大振 辰丑六年(1054)臣智陸右
奏曰阿斯達千年帝業之地大運已盡寧古塔王氣濃厚以勝於白岳山請築城移之帝不許曰新都已宅更何他往
乙卯二十年(1068)至是藍國頗强與孤竹君逐諸賊南遷至俺瀆忽居之近於殷境使黎巴達頒兵進據 岐與其遺民
相結立國稱黎與西戎雜處於殷家諸侯之間藍氏威勢甚盛皇化遠及恒山以南之地 辛未三十六年(1084)邊將申督
因兵作亂帝暫避于寧古塔民多從之癸未四十八年(1096)帝崩太子阿忽立
二十三世 檀君 阿忽 在位七十六年
甲申元年(紀元1097年)命皇叔固弗加治樂浪忽遣熊乫孫與藍國君觀南征之兵置六邑於殷地殷人相爭不決乃進
兵攻破之秋七月誅申督還都命釋囚浮 乙酉二年(1098)藍國君今達與靑邱君句麗君會于周愷合蒙古里之兵所
到破殷城柵深入奧地定淮岱之地分封蒲古氏於淹盈古氏於徐邦古氏於淮殷人望風煌怯莫敢近之 戊子五年
(1101)召二韓及五加議停寧古塔移都事己亥七十六年(1172)帝崩太子延那立
二十四世 檀君 延那 在位十一年
庚子元年(紀元1173年)命皇叔固弗加爲攝政辛丑二年(1174)諸汗奉詔增設蘇塗祭天國家有大事異災則輒禱之
定民志于一庚戌十一年(1183)帝崩太子率那立
二十五世 檀君 率那 在位八十八年
辛亥元年(紀元1184年)
丁亥三十七年(1220)箕徙居西華謝絶人事丁酉四十七年(1230)帝在上蘇塗
講古禮因間
臣直臣之分三郞洪雲性進對曰執理不屈者直臣也畏威曲從者 臣也君源臣流源旣濁矣流其求淸是爲不可故君聖
然後臣直帝曰善哉 己酉五十九年(1242)田穀豊登有一莖五穗之栗戊寅八十八年(1271)帝崩太子鄒魯立
다음은 단군 21세 소태 때부터 은나라와 교전한 <<규 원 사화>><단 군기>의 기록입니다.
庚 辰
歲, (王)[壬]儉 蘇 台 元年. 西 巡 諸 地, 觀 藍 侯 之 政, 尋 陳 兵 于 商 地. 在 位 三 十 三 歲, 崩. 子,
索 弗 婁 立.
경 진 년은 소태 임금의 원년이다. 서쪽의 여러 지역을 순행하고 남 후의 정치를 살펴 본 뒤 얼마 후에
상 나라 땅에 군대를 들여놓았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33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색 불 루(索 弗 婁)가 임금이 되었다.
癸 丑 歲,
(王)[壬]儉 索 弗 婁 元年. 與 商 戰 破 之, 尋 和. 後, 復 大 戰 破 之, 進 入 其 境, 遂 屯 海上,
庶 民 復 漸 遷徙. 在 位
十 七 歲, 崩. 子, 阿 勿 立.
계 축년은 색 불 루 임금의 원년이다. 상 나라와 싸워 이긴 후 얼마 있지 않아 화해하였다.
뒤에 다시 크게 싸워 상 나라를 깨트리고 그 국경 안까지 들어가서 마침내 해대(海 岱)의 위에 주둔하니
많은 백성들이 다시 점차 옮겨갔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7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아물(阿 勿)이 임금이 되었다.
庚 午 歲, (王)[壬]儉 阿 勿 元年, 令 弟 固 弗 加 治 樂 浪 忽. 遣 熊 加 乙 孫, 觀 南 征 之 兵, 立 邑 商 地.
後, 商 人
互 爭 不和, 乃 進 兵 攻 之, 尋 罷. 蓋 馬 侯 獻 九 尾 獸. 在 位 十 九 歲, 崩. 子, 延 那 立.
경 오 년은 아물
임금의 원년이다.
아우 고 불가(固 弗 加)에게 영을 내려 낙랑 홀을 다스리게 하였다.
웅 가을 손(乙 孫)을 보내 남쪽으로 정벌을 나간 군사들을 살펴보게 하고는 상 나라 땅에 고을을 세웠다.
뒤에 상 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며 화해하지 않으니 병사를 진격시켜 이를 공격하고는 얼마 있지 않아 물
러 나왔다.
개마 후가 꼬리가 아홉 달린 짐승을 바쳤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9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연나(延 那)가
임금이 되었다.
己 丑 歲, (王)[壬]儉 延 那 元年. 叔父 固 弗 加 攝政. 翌年, 商人 攻 我, 師 至 南界, 藍 侯 率
諸軍, 戰 克.
後, 互 相 戰 和. 國內, 增設壇所, 使 諸侯, 承 命 禱 天, 凡 國 中 大事 及 風雨 災異 有 求, 則 祈 于 主神,
以
遍 于 諸神 也. 有 大蛇 現 之 地, 靑 質 黃 頭, 能
呑 大鹿, 民 有 趨 拜 者, 乃 使 巨 屈 支 斷 戮 之. 在 位 十 三
歲, 崩. 弟, 率 那 立.
기축 년은 연 나 임금의 원년이다. 숙부 고 불가(固 弗 加)가 섭 정을 하였다.
이듬해 상 나라 사람들이 우리를 공격하여 그 군사가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렀는데 남 후가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싸워 이겼으며, 뒤에는 서로 싸움과 화해를 반복하였다.
나라 안에 제단을
증설하고 제후들로 하여금 명을 받들어 하늘에 기도하게 하였으니, 무릇 나라안에 큰
일이나 비바람 등 별스런 재난이 있거나 구하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곧 주신에게 빌어 이로서 뭇 신들에게
두루 미치게 하였다.
큰 뱀이 속 진의 땅에 나타났는데 몸은 푸르고 머리는 누런 것이
능히 큰사슴을 삼키니, 백성들 가운데
이를 좇아 숭배하는 자가 있기에 거 굴지(巨 屈 支)를 시켜 끊어 죽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3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우 솔 나(率 那)가 임금이 되었다.
색불루왕의 은의 침공으로 수도를 형으로 옮긴내용을
<<사기>>은본기는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을 천우 형 祖乙遷于邢.
<<史記>><殷本紀> 조을은 형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상의 글을 통해서 그 동안 전연히 들어보지 못했던 조선과 은나라의 관계를 반신반의 의 심정으로 살피
셨을 줄 압니다.
은 족의 선조는 번 조선족이었으며 하 나라지역에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한족화되었지만 은나라가 멸망한
후에는 자신들의 옛 땅인 '박'으로 돌아옴으로서 그 뿌리를
잊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기자를 따라서 돌아온 무리는 약 5000여 명이었고, 이들 대부분이 백공 기예의 기술
인력이었습니다.
찬란하던 은나라문화는 조국이었던 고조선으로 송두리체 가지고 넘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기구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성인 기자는 오늘날까지도 떳떳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의심을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다고 그 책임을 후손들에게만 돌릴 수도 없는 것은 그 동안의 여건이 진실을 밝힐 수 없도록 되었다
는데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을법한 중국 측의 진실 감추기 공작들이 진행되고 있었고, 그 동안의 천재지변
에 의한 당시 강역의 변화된 모습들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겠습니다.
이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으므로 연구는 다시 다른 각도에서 침착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하마터면 잃을 뻔했던 동양의 성인 조선족 기자의 진실을 반듯이 찾는 날이 오기를 기다려 봅니다.
후세 사가들의 기자논쟁
위에 제시된 선인석림에 대한 출전을 <<대명일통지>>에서 발견하였기에 추가합니다. <대명일통지> 평양성재 압록강동 일명 왕험성 즉 기자지고국 성외유 기자묘 한위 낙랑군치. 平壤城在 鴨綠江東 一名王險城
卽箕子之故國 城外有 箕子墓 漢爲 樂浪郡治 [海東繹史續券第二] 地理考二 |
사마천은 <사기>를 쓰면서 천년 전에 있었던 은나라의 태사였던 기자의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기산(箕 山)
을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그는 그곳에 올라가서 기자의 묘는 찾지 못하고 허유(許由)의 묘 만 발견하고 돌아 왔다고 하였습니다.
기자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기에 천년전의 영향력이 사마천을 현장까지 출동하게 하여 진실여부를 확인
하게 하였을까요.
그리고 그는 기자의 흔적이 완전히
중국에서는 살아진 것을 확인하고 조선인으로 인정하여 사기의 세가나
열전에서 제외시켰습니다.
그리고도 미련이남아 송미자 세가에 얹어서 기자에 대한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기자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모두 동원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록을
남겼습니다.
<<사기>>권 130 태 사공 자서
" 아 깝 도다 기자여! 아 깝 도다
기자여! 바른말이 체납되지 않더니, 마침내 미치광이로 가장하여 노예가
되었다....... 미 자가 책봉될 때, 태 사 기자에게 정치에 관하여 질문하였던 일을 찬미하여 "송 세가 " 제
8을 지었다. 고 하였습니다. 기자가 남긴 일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그 하나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법을 집행하는 임금자신이 지켜야 하는 자연의 가르침과 요구입니다.
즉 하늘의 요구에 순응하는 자세와 그 하늘의 요구를 알아낼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입니다.
이것이 큰 법 즉 "홍 범 구주" 일 것이고,
두 번째는 조선의 백성들에게 가르쳐준 여덟 가지의 기본 행동법규입니다. 이것이 8조 금법입니다.
이렇게 큰 두 가지의 틀을 마련한 기자는 이미 은나라의 존경받는 성인이었음에도 불행은 그를 동반하고
있었습니다.
은이 망한 뒤 주 무왕과의 관계며 벼슬의 유혹을 뿌리치고 돌아갔던 조선의 어정쩡한 대접 때문에 그는
8개년을 고죽국 이 있던 요서 지방을 방황하다가 장도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외부와의 모든 연락을 끊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말많은 세상이 싫었으면 섬에 들어가 있으면서 농사일에만 전염하였을까요 이러한 본심을 모르고
그 후손들마져 진실을 오해하여 혈연관계마저 끊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황망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그들만을 나무랄 수 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 기자의 묘가 어디에 있다고 하더라는, 근거가 에매한 후문이 사마천 때까지 이르자 <사기>
를 쓰던 사마천은 진위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현장까지 출동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양 나라의 두예가 주석으로 주장하였던 하남의 몽성 근처에서는 이렇다 할 유물도 발견
하지 못하였다는 이 형구 교수의 고고학적인 증언도 있었습니다.
후대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풍문들이 몇 군데 기록으로 남아 사실을 확인하는데 방해가 되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 후학들은 몇 가지 기준을 설정하고 기자의 진실을 확인하여야 될 줄 압니다.
* 기자가 동쪽 조선으로 떠난 뒤 소식을 끊었다는 기록을 믿는다면, 중국 내에서의 기자 묘에 대한 유적
설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왜 기자가 수유(須臾)로 들어가 외부와의 소식을 끊었다는 사실을 강조했는지를 새겨봐야 합니다.
그리고 동쪽조선을 한반도로 단정짓는 미숙한 견해를 버려야 합니다. 수유가 중국 땅에 있다는 설은 기자
와는 무관한 모두 가짜입니다.
기자는 이미 중국 땅을 떠났다는 기록을 믿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기자가 들어간 수유는 조선입니다.
* 한반도 평양에 기자가 들어온 사실을 확인 할 수 없다면 그것은 기자가 들어간 평양과는 관계가 없는
가짜 평양이란 사실을 알고 진짜평양을 찾아야 합니다.
기자가 들어간 평양이 아니라면 위만의 왕험성이 될 수 없고, 또한 낙랑군이 될 수 없습니다.
기자의 조선입국을 거부하면서 낙랑군의 위치를 인정하는 것은 학자들의 양심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낙랑조선(기자 조선 이 아님) 과 위만의 왕험성과 한의 낙랑군은 따로따로 나뉘어 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명심해야 됩니다.
* 이형구 교수의 고고학적인 증언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서> 지리지의 한사군 설을 참고하여 위치를 추적하면 찾을 수 있습니다.
또 무엇보다 발해내륙의 윤몰 진상을 밝혀야 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이형구 교수에게 발해내륙의 윤몰설을 연구하길 권합니다.
* <한단고기>나 <규 원 사화>등의 민족사서를 강력하게 주장하시는 신봉자들께서는 기자가 활동하였던
낙랑조선과 기자의 실존설을 거부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기자의 실존설을 부정한다면 <한단고기>나 <규 원 사화>의 생명도 잃습니다.
* 만약 기자가 중국인이었다면 오늘날의 공자는 중국의 성인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기자는 공자가 존경하는 큰 성인이었습니다.
그릇이 큰 사람만이 현자를 알아 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성인의 본성은 하찮은 부귀영화나 생사 등의 문제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지금에 와서 그를 비판하고자 하는 학자들이 계신다면 오염된 판단력으로 그를 평가하는 누를 범하지
말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사마천이 기산에 올랐었다는 <이제열전>기록과 <태사공 자서>원문을 올립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기산이라는 이름 때문에 기자의 응용은 조금 과장된 감이 있습니다.
원래 산에 오른 목적은 허유같은 특별한 군자들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 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此何以稱焉??太史公曰:余登箕山,?其上蓋有許由□雲。孔子序列古之仁聖賢人,如吳太伯?伯夷之倫詳矣。
余以所聞由?光?義至高,?其文辭不少?見,何哉? 注?索隱詹頃公也]。<夷齊列傳>
[嗟箕子乎!嗟箕子乎!正言不用,乃反?奴。武庚?死,周封微子。襄公傷於泓,?君子孰稱。景公謙德,
熒惑退行。剔成暴虐,?宋乃滅亡。喜微子問太師,作宋世家第八]。<太師公自敍傳>
기산(箕山)에대한 위치 고증입니다.
<사기>권 61 (백이열전) 사기고증 하책 1287쪽
주석 : 고증.... 기산은 오늘날 하남성 동봉현 동남쪽에 있다.
<수경주> 기산 영수조
남쪽으로 기산이 있고 산 정상에는 허유총이있다. 요임금이 봉을 받은곳이다.
옛날에 태사공 왈 내가 기산에 올라갔는데 그 산위에는 허유총이 있었다.
산 아래는 견우 유적이 있다. [수경주 권 22 영수조] 사고전서. 573책 332쪽
이 자료는 다물회에서 발행한 <다물총서>제 3집470쪽 에서 참고하였습니다.
다물회에서는 다물지 창간 10주년 기념 특집으로 기자조선을 집중 조명하여 <기자조선 있었나?>라는
귀중한 자료를 발간 하였습니다.
회원 59명의 출연금으로 만들어진 이 책의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위에서 소개 드린 <기자조선 있었나?> 라는 책에는 놀랄 만한 자료들을 망라하여 기자를 집중 조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기자에 대한 사실만 확실히 밝혀진다면 고조선의 역사는 그 핵이 밝혀진다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무려 470쪽에 달하는 내용을 분석하여 보고 드리는 것은 필자의 힘에 버거운 일이므로 어떠한 자료들이
수집되어 제시되고 있는지 구성내용만 보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순번 제목 소속 발표자
1 기자, 고조선을 말하다 한국역사문화연구소장 오 정 윤
2 기자동래설은 날조였다. 정 인 보
3 난 하 유역의 조선(기자조선) 윤 내 현
4 기자조선의 위치 김 득 항
5 석주 이 상 용 선생의 역사관 이 유 립
6 기 자 조 선 한 순 근
7 기 자 고 천 관 우
8 기자신고 윤 내 현
9 대 능 하 유역의 은 말. 주 초청동기 문화 및 기자조선 이 형 구
10 기자조선은 시대와 司 武 輩의 誣 作 (사 무 배의 무 작) 박 형 표
11 소위 한 씨 조선 설에 대하여 이 유 립
12 환 작(幻 作)된 기자조선의 역사적 정체를 해부한다. 이 유 립
이상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논술들은 모두가 타당성이 있는 주장들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핵심을 밝히지 못하는 것은 평양의 위치가 잘못 설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엉터리장소를 선정해놓고 거기에 없었던 사실을 맞추려고 하니 잘 안 맞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바보짓들을 해놓고 죄 없는 조상들만 있었니, 없었니 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불효입니다.
연구논문 중에 기명이 뚜렸한 제기로 보이는 청동기의 내용을 분석한 이 형구 교수의 주장이 은나라가
망한후 주 나라 초에 해당된다고 하는 것은 기자가 요서 지방으로 들어 와 8년간을 유랑할 때이고
주 말경 시대의 제품이 발견된 연태시 근 역은 그들이 장도로(수유)로 들어와 살던 시대로서 그 세력이
번 조선왕이 될 수 있을 만큼 강할 때였습니다.
땅이 좁은 섬의 약점은 죽은사람의 장지 문제입니다.
그래서 섬 지방에서는 주로 초분들이 많이 발전 되어 있습니다.
시신을 풀로 덮어 가매장하였다가 살이 다 썩고 나면 뼈만 골라 합장하는 풍습을 말합니다.
연 태는 장도와 아주 긴밀한 근접지역입니다.
등 주. 내주 연 태 지역 어느 곳인가는 장도의 조선족들이 합장된 떼 무덤 지역이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장도 내에서는 대흑산도에서 많은 유골이 발굴되어 장도 역사박물관 부설 대흑산도 별관 이 2002년도에
개설되어 있습니다.
같은 권 역에 있었던 고구려도 외적에게 왕의 시신을 탈취 당하여 온갖 수모를 겪고 난 후에야 집안이라는
후방지대의 안전한 공동묘역을 마련하였던 것으로 봅니다.
다물회가 발간한 <기자조선 있었는가?>라는 책의 발간목적은 가능하다면 기자의 흔적을 조선사에서 털어
내자고 하는데 있었던게 아닌가 하는 심증이 듭니다.
하지만 필자는 그에 반대하는 반론을 제시하였습니다.
<한단고기>를 출현시킨 이유립선생이 기자의 존재를 부정하는걸 보고 참으로 착잡한 심정입니다.
책속에 담겨있는 내용을 부정하면서 어떻게 그 책의진서여부를 논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일부 유학자들이 중국에 사대하기위하여 기자를 이용하였다는 억설에는 말문이 막힐 뿐입니다.
더구나 현재의 책임있는 학자들 조차 기자설을 한나라의 조작으로 인정 한다면 중국과 한반도사이에서
실종된 고조선은 어디에서 찾아야 될까요?
송 호 정교수의 기 자 조선 에대한 견해를 보시겠습니다.
현재의 실재적인 한국고대사의 실세 격인 송 호 정 교수는 기자조선을 어떠한 관점으로 보고 후학들에게
지도하고 있을까요.
그는 기자설화가 <상서대전>. <사기>. <한서>등에 비슷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이 진실이라면 왜
기원전 3세기이전에 저술된 <논어>나 〈죽서 기년>에 보이지 않느냐는 의문을 제기 했습니다.
고로 '기자가 조선에 왔다는 전설은 실제사실이 아니라 기원전3~2세기 무렵에 한나라사람들이 꾸며낸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157~158쪽)
그의 저서 <만들어진 신화>에 서 옮겨봅니다.
* [기자조선은 실재했는가] 라는 제 하에 달린 부제 " 한국사는 기자조선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라는
결론 부분입니다. (164쪽~165쪽)
기자동래설 자체는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수백 년 동안 우리조상들이 사실로 믿어왔다는 점에서 적잖은
의미가 있다.
조선후기의 토지제도 모순의 개혁방안을 강구하던 일부 실학자들은 농민의 토지를 균등하게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주장의 역사적 근거를 정전 제에서 찾기도 했다.
그러나 그 정전제의 토지를 구획했던 흔적이라는 것은 고구려 수도인 장안성의 방 리(坊 里)를 구획했던
흔적일 가능성이 크다.
앞에서 보았듯이 기자전설을 구체적인 사실로 믿기는 어렵다.
기자를 대표로 하는 주민집단의 존재는 인정할 수는 있어도 요서 대능하 유역이 기자조선이었다는 논리는
성립하기 어렵다.
기자조선과 관련하여 언급되는 고죽이나 기자 집단, 영지 등은 대개 은 의 유 이민이 중심이 된 집단이지만 ,
결국은 토착 융 적 문화에 흡수 되여 존재했던 것이다.
따라서 복 생의 <상서대전>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주 무왕이 은을 이기자 기자가 북쪽으로 향해 갔다"는
고사는 기자조선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이 광대한 지역에 기후가 존재했고 ,
또 상 왕조와 밀접한 관계 가 있었음을 드러 내준다 하겠다. 중략
앞으로 좀더 면밀한 검토를 통해 기자의 동래를 인정하게 된다 할지라도, 그 후의 기 자족은 오늘날의
한국인을 형성한 많은 요소가운데 일부일 뿐임을 기억하자.
기자가 중국인이고 우리문화형성에 영양을 주었다고 해서 우리역사의 정통성을 해치는 것은 아니다.
이상과 같이 기자의 존재 설을 한 나라의 조작일 것이라고 부정한 송 교수는 한사군 설 또한 한 나라의
조작일 것이라는 말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낙랑조선의 준 왕으로부터 약탈하여 위만조선이 건국되었고, 그 위만 조선은 분명 한강 이북지방에
존재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단군, 만들어진 신화>309쪽. 185쪽
더구나 교과서가 한사군을 분명히 기록하지 못하고 제외시킨 것은 또 다른 역사왜곡 이라고 질타하고 있습
니다.
그러니까 한사군을 분명히 역사교과서에 기록하고 지도를 넣어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최근 05년 초에 발행된 신간 <아틀라스 한국사>에는 떳떳하게 한국지도에 한사군을 그려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중국인들의 역사조작을 돕고 있습니다.
송 교수는 중국과의 사실상 역사전쟁이 진행중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역사전쟁의 선봉장을 맡아야
할 사람이 확실한 근거가 취약한 한사군 설과 위만조선의 북한지역 위치 설을 강조함으로서 적에게 유리한
빌미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국정 교과서의 권위를 스스로 무너트리고 말입니다.
기자의 동래 설을 한나라의 조작으로 본다면 한사군의 한반도 설정설은 왜 조작으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는 중국과의 역사전쟁이 시작된 이래 2년도 되기 전에 벌써 세 권의 고대사 책을 내놓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적에게 유리한 기록을 강조한 내용들입니다.
그것이 설령 진실이라 가정하더라도 침묵이 필요했을 시기에 이렇게 무분별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기후국(箕候國)에서 선우중산국(鮮于中山國)까지
태원(太原)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은나라의 방국(方國) 기(箕)의 위치도입니다.
이 나라는 은나라가 망한 이후 사라졌습니다.
대신 그 동쪽으로 기자의 후손들이 이르킨 선우 중산국이 다시 일어나 주위의 진,조,연과 수많은 전쟁을
벌려왔습니다.
서쪽으로는 한(韓)나라가 있었고 백이숙제가 살던 본향이 있었지만 은의 폭군이었던 주왕을 피하여
노룡땅의 고죽국으로 옮겨간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옮겨간 근거는 맹자를 통하여 북해(北海)의 주변으로 옮겼다는 기록으로 알수 있습니다.
베일에 쌓였던 기자의 후손으로 둥장한 선우국(鮮于國)과 중산국의 위치를 밝힌 지도입니다.
한때 주나라의 제후국으로 등장했던 선우국의 범위는 놀라울 만큼 넓어 은허(殷墟)까지를 커버하고 있습
니다.
선우는 기자의 둘째아들로 알려져 있고 성씨의 본을 태원(太原)으로 하고 있으며 활동의 근거지는 어양
(漁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자가 조선으로 떠났던 첫번째 봉지가 영평의 조선성이었는데. 이곳은 북평군으로 다시 신창현으로
지명을 바꾸었습니다.
연나라가 태행산을 넘어 요동으로 진출하기 전까지 이곳에는 예맥조선의 영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상곡,어양,우북평지역이 모두 선우국자리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다 치우가 활동하던 탁군의 서남쪽에 중산이라는 선우의 후신국이 살아난것입니다.
후에 이곳은 조(趙)나라에 망하지만 한나라시대를 거쳐 다시 선비(鮮卑)족이 후연을 세웁니다.
다음에 올려드리는 내용은 경향신문을 통하여 우리나라 사학계를 강타했던 기자조선에 대한 폭로 기사
입니다.
당시 이기사를 고조선사 연구의 뇌관이라고 까지 확대시켰지만 3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완강하게
부정하는 실세에 의해서 오히려 후퇴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직까지도 꾸며지고 날조된 얘기쯤으로 얼버무리려고 하지만 그것 또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유치한 작난에 불과합니다.
예를 기본으로 하여 나라를 지탱하던 고대중국은 그 학문의 최고 정점에 있던 기자라는 성인을 참아 외면
할수없었던 관계로 그들의 역사 구석 구석에 흔적을 심어놓고 있습니다.
오행지(五行志)라는 천문의 장을 열어보시면 기자를 만날수 있습니다.
당시 각계 언론사들과 사학자들의 반응을 되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 다른 신문들도 사설에서 ‘기자조선이 뜻하는 것-적극적인 자세로 史實을 밝히자’(한국일보 7일자),
‘상고사연구와 국제협력’(동아일보 8일), ‘기자조선의 허실-이를 밝히는 학술작업’(조선일보 10일자)이라며
연일 다투어 촉구했다.
학계논쟁은 한국을 대표하는 내로라하는 학자들의 대리전으로 번졌다.
74년 이미 ‘기자고(箕子攷)’라는 논문에서 기자의 한반도 전래설을 주장해온 사학자 천관우씨는 “우리
상고사의 큰 문제점의 하나에 명쾌한 조명을 던진 연구”라고 평가했다.
손보기 연세대 교수는 “위당(爲堂), 홍이섭 등 민족사학자들은 이미 은(殷)을 중국문화가 아니라 동이
문화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김원룡 서울대 교수도 “기자조선의 기(箕)씨가 가공인물이 아니라 실존했음이 확실해졌다”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김철준 서울대 교수는 “‘기후(箕侯)’라는 명문을 새긴 방정(方鼎)이 출토되면서 기자조선 문제가 다시 부
각되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반면 김정배 고려대 교수와 김정학씨는 “중공자료에 집착한 인상”(김정배 교수·중앙일보 3월20일자)
“랴오닝 지방 청동기는 은·주가 아니라 시베리아 계통”(김정학씨·중앙일보 1월17일자)이라고 반박했다.
이기백 서강대 교수는 이형구 교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기후(箕侯)가 기자조선이었다는 증거가 제시
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1968년 역사학자 천판(陳槃)이 펴낸 ‘춘추대사표열국작성급존멸선이(春秋大事表列國爵姓及存滅선異)’라는
책이었다.
기존 사서를 근거로 중국 중원에 산재했던 춘추시대 170여 소국의 역사를 비정한 역사책인데,
바로 선우라는 항목이 있다.
“선우는 일명 중산이라 한다. 회남자는 우(虞)는 혹 우(于)라 했다.
선우(鮮于)는 그 선조가 자성인데(其先子姓), 기자는 조선에 봉하고(以箕子封朝鮮), 기자의 둘째 아들은
우(于·핑산으로 추정)에 봉했다.
여기서 자손들은 조선의 선(鮮)과 봉지 우(于)를 따서 선우(鮮于)씨라 했다.(子孫因合 ‘鮮于’爲氏)”(천판)
기막힌 일이다.
선우국이 조선의 선(鮮)과 봉지 우(于)를 딴 것이라니. 그런 와중에 중산국 발굴보고서를 입수한 것이었다.
우선 중산왕릉이 중산왕의 묘곽, 즉 석곽묘의 형태로 발견된 점이 눈에 띄었다.
석곽에 판축봉분의 형태로 조성된 묘제.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계속 검토해왔던 발해문명권의 전형적인
묘제가 아닌가.
또한 왕릉의 ‘중(中)’자형 대묘와 조주분(鳥柱盆·새 모양의 기둥을 박은 그릇), 그리고 옥기문화 등은 은(상)
문화와 놀라운 일치를 보였다. 흥분을 감출 수 없었던 젊은 고고학도는 1년 뒤 깜짝 놀랄 소식을 접한다.
■ 선우도 기자(箕子)의 후예
중국학계는 선우가 기자의 후예라는 내용을 뺀 비문내용만을 소개하고 있다.
대륙에서 막 출간된 1979년판 ‘문물’지를 어렵게 입수한 것이다.
당시 대만에서는 이른바 중공 간행물이 철저히 금수되고 있었다.
이 학술지는 이때 중산국 발굴 소식을 비교적 소상하게 담았는데,
대륙의 저명한 역사학자 리쉐친(李學勤)의 글은 이형구를 자극시켰다.
“최근 톈진(天津) 우칭셴(武淸縣) 가오춘(高村)에서 발굴된 선우황(鮮于황)비는 ‘선우씨는 상나라 기자
(箕子)의 후예다’(鮮于氏系商箕子後裔)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선우=은(상)의 후예인 것도 모자라 아예 기자(箕子)의 후예라는 비문이 발굴됐다는 얘기가 아닌가.
하지만 리쉐친 등은 짤막한 내용만을 전하고는 비문 내용에 대해서는 더 언급하지 않았다.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자료, 즉 중국사회과학원이 펴낸 ‘문물고고공작30년’
이라는 책에는 선우황비에 대한 내용이 비교적 소상하게 나왔다.
*당시 천진 무청현 고촌에서 발굴된 선우황 비문에 선우는 기자의 후예라는 명문이 발견된것입니다.
그렇다면 천진의 동쪽에 있었다는 낙랑조선은 어디를 말한 것일까요.
중산국에 즐비한 은(상)의 흔적
*만약 한나라가 조선을 멸하고 한사군을 설치할때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하여 기자의 동래설을 조작하였
다면 근래에 중산국에서 발견되는 증거품들의 내용을 숨길 필요가 없는것 아닙니까?
왜 그들은 기자와 그 후손들이 실존하였다는 흔적을 숨기려 할까요.
어떻든 이 선우황비가 발견됨으로써 선우·중산의 선조 논란과 성씨 논란은 종지부를 찍은 셈이다.
리쉐친 등 중국 학자들도 선우황비뿐 아니라 중산군 근처에서 잇달아 출토되는 은(상)나라의 유적을 무시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중산의 땅으로 판명된 정딩(正定)시 신청푸(新城鋪) 유적에서는 명문이 있는 상나라 청동기가, 가오청
(藁城)시 시타이(西臺) 유적에서는 상나라 청동기와 옥기가 세트로 확인된다.
또한 허베이성 성도 스자좡(石家庄)시에서는 27곳의 상나라 유적이 확인되었다.”(리쉐친)
이형구 교수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곳에 은(상)나라 후예인 자성(子姓)의 선우국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혹시 이 지역은 은(상)나라 시절 은(상)의 제후국인 기자의 기국(箕國)이 있었지 않았을까.
그리고 은(상)이 멸망하자 기자(箕子)는 첫째 아들과 옌산산맥을 넘어 본향, 즉 고조선의 영역으로 들어
가고, 기자의 둘째 아들은 타이헝(태행·太行)산록에 숨어 들어 이 선우·중산국 영역에서 은(상)의 복국(復國)
을 꿈꾸지 않았을까.”
따라서 수수께끼로 남아있던 은나라의 찬란했던 청동기를 만들던 주인공들이 그 윤곽을 서서이 들어내고
있음을 볼수 있습니다.
그들은 원래가 조나라사람들이 아니고 중산국 사람들이었고, 초나라의 제철부족과도 연계가 되어있던 사람
들이었습니다.
모두가 동이계 사람들이지요.
탁무(卓茂)라는 사람은 남양의 제철부족이었던 완인들의 조상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卓茂:字子康,南阳宛人。卓茂:字子康,南陽宛人。>
<이른바 주(周) 전국(戰國)의 시대에 조(趙), 위(魏), 한(韓)이라는 세 국가가 있어,
이것을 3진(晋)이라 하는데, 이 중 한(韓)은 낙양을 중심으로 하고,
위(魏)는 남양(南陽) 완(宛)의 제철부족의 서(徐)씨를 지배하고,
조(趙)는 중산국(中山國)의 제철부족의 탁씨(卓氏)를 지배하고 있다가 후에 3진(晋)은 모두 진(秦)의
공격에 굴복하고 말았다. >
은나라가 망하였을때 기자를 따라 나섰든 사람들은 5천명의 백공기예인(百工技藝人)들이었다고 하고,
남어지 기국(箕國)인들은 봉지를 산동으로 옮겼다고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秦나라에게 중산국을 지배하고 있던 趙나라가 망하자 중산국의 제철부족이었던 탁씨 일족은
모든 재산을 압류당하고 산동의 촉(蜀)지방으로 옮겨갔습니다
(위에 올려진 첫번째 지도에서 夷方 윗쪽 '蜀')
이들은 모두가 발해의 바다가 까까운 濟水의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는것을 볼수 있습니다..
진(秦)나라의 폭정에 못이겨 연, 제.조나라등에 남아있던 동이계의 난민들이 발해바다안으로 도망을 친
루트가 산동의 북부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는것입니다.
이들 모두가 장도로 건너갔다는 사실은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장도로 들어가는 물몫을 위만이 지키고 있었지요.
《춘추좌씨전》에는 주나라 초기의 제후국으로서 '기국'이 보이며,
《국어(國語)》에는 기국을 정복한 진(晋)나라 고대의 성씨에 기씨(箕氏)가 있다는 사실이 전한다.
또한 기후(箕侯)를 중심으로 한 기씨 일족이 주(周) 초기에 북방의 정복활동에 종사하다가 뒤에 산시(山西)
에서 산둥(山東)으로 이봉(移封)되었다는 기록들을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아무튼 탁씨 일족은 제철부족으로서 기술을 이용하여 전란을 겪으면서도 치부에 성공하였든 것으로 보입
니다.
중산국에서 쫓겨날때는 많은 재산을 빼앗기고 부부간 단둘이서 연을 밀고 떠나왔었는데 처음에는 장터
에서 손바닥만한 자리를 얻어 제사용으로 쓰이는 올빼미모양의 술병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서 굶는
일은 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차차 멀리있는 임공(철산지)까지 내통하여 제철원료를 구해와서 비교적 대형의 종,징등의 물건을
만들어서 치부에 성공하자 천여명의 공인들을 거느리게 되었고 제후 부럽지 않는 영광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후 그들의 행적은 나와있는게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머무르고 있던 촉(蜀)지역은 제수(濟水)의 동쪽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임공과 거래하던 통행로도 제수를 거슬러 오르는 황하연안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제수를 교통수단으로 이용하였으리라는 추측은 무리가 없는것이고 은나라를 내륙에
건국하게 된 수단도 황하라는 물길을 따라서 이루어진것입니다.
이 제수를 따라 북동쪽으로 내려가면 내주만에 있는 영구로 통하게 됩니다.
기자가 머물렀었다고 하는 창락현 지역이지요.
준왕이 있던 장도와 가까워지는것입니다.
중산국과 준왕의 조선국과는 형제국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치부를 이룬후 천여명의 난민들을 대동하고 장도로 들어갔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는것입
니다.
그후로 대장군 탁이 등장하는것은 준왕이 바다로 망명한 이후입니다.
<한단고기 북부여기 상> 2세 단군 모 수리 재위 35년
정미원년(B,C 194) 번조선 왕은 오랫동안 수유에 있으면서 항상 많은 복을 심어 백성들이 매우 풍부하
였다. 뒤에 떠돌이 도적떼들에게 패하여 망 한 뒤 바다로 들어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오가의 무리들은 대장군 탁을 받들어 모두 함께 산을 넘어 월지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탁의 태어난 고향이니 이를 가리켜 중 마한이라 한다.
이에 이르러 변, 진한의 두 한도 역시 각각 자기들의 받았던 땅 백리를 가지고 수도도 정하고 나름대로
나라 이름을 정했는데 모두 마한의 다스림을 따르며 세세토록 배반하는 일이 없었다.
당시 진한(辰韓)인들은 진주(辰州)로 지명이 바뀐 개주(蓋州)에 있었고, 변한(弁韓)인들은 탕주(湯州)로
지명이 바뀐 탕지보(湯地堡)에 머물러 있엇습니다.
이곳의 주변에는 안산, 탕주등의 철 생산지가 있었지요.
따라서 제철 전문가인 탁장군은 이곳에서 제철생산을 도모하다가 준왕의 망명소식을 듣게 되었고,
준왕이 망명한 방향으로 난민들을 데리고 다시 피란을 떠난것입니다.
마침 개마대산 넘어 요동번도의 남쪽에는 월지라는 탁장군의 출생지었던 넓은 땅이 있어 그곳으로 떠나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고 한것입니다.
탁장군은 진,변한인들에게 각각 땅 백리씩을 떼어주고 살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중마한이었습니다.
이쯤해서 기억해두어야 할것이 있습니다.
당시 준왕은 번조선왕의 직위었고, 진조선왕은 부여가 맡고 있었기에 탁장군은 북부여소속이었습니다.
후대에 가야에서 발굴된 철로만든 갑주나 마구들이 부여계가 아닌가하는 추론들이 모두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제철원료만 확보되면 아무데서나 무기를 생산할수있는 기술과 기술자들이 동행하며 단결을 과시하였습니다.
이들이 준왕과 함께 만나 준왕을 한왕으로 모신곳은 장산군도였습니다.
조선은 은,주의 태사국
현재 소주(蘇州) 석각 박물관에 남아있는 “거란지리도”는 1190년에 남송(南宋)에서 그려진 것을 1270년에 돌판에 새긴 것입니다. 은나라의 발상지로 예상되는 발해북안의 난하동쪽의 바다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그렇게도 많이 있던 지명들이 지금의 지도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
지도의 전체그림은 너무커서 해당부분만 요약하였습니다. 중앙의 아래쪽에 노란색으로 표시된 곳이 갈석산
으로 보이는데 실제 글씨는 연석산으로 되어 있읍니다.
난하의 이름 요수가 평주와난주를 거쳐 영주까지 흘러 방향을 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가는걸로 되어 있군요.
그렇다면 영주의 우측으로 비스듬이 전개되어 있는 많은 지명들이 지금은 보이지 않으니 이곳이 과거 진나라
때에 요동군으로 설정되었다가 바다로 윤몰되었다는 지역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이곳 요수(난하)의 동쪽에서 당시 요하의 서쪽을 요동군이라고 불렀다는 얘기가 됩니다.
대체적으로 살아진곳을 살펴보면 간주. 영주. 갈석산 .엄주.내주.습주.금주(이동). 십삼산.요주. 건주.현주.
화주.용궁사.?하주등...이 지도에서 보이는 곳만 대강 그렇다는 것이고 좀더 확대하면 내용은 훨씬 달라
집니다. 지형을 살펴보면 굴곡이 많은 만(灣)지대가 많이 보입니다.
좀더 완전한 지도를 보면 용궁사나 십삼산등은 바다가운데로 많이 나와 있는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살던 도이로 불리던 조선족들이 주체가 되어 은나라를 세웠고 또 변란이 일어나자 기자의 선친족
들이 은나라로 망명하였다가 은나라가 망하자 다시 귀국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은 통전에서 조선의 기자를 상의 태사였고 또 주나라의 태사였는데 조선에 봉하였다는 기록을 보시겠
습니다. 이곳 말고도 비슷한 동이의 기록들은 한서나 후한서의 동이전에도 보이지만 조선이 은.주의 태사
였던 기자가 봉해진 태사국이라는 기록은 통전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춘추필법에 의해서 기록된 중국의 사서들 중에서도 이렇게 중요하고 또 중국에는 자존심 구기는 기록이지만
뚜렷하게 기록해 놓은것을 보면 조선은 대단했던 나라였고 또 기자는 성인으로 존경 받았던 문화국 조선의
얼굴이었습니다.
<한서>의 기록중에 나라를 다스리는 근간이 되었던 <오행지> 등은 모두가 성인 기자의 홍범구주에서 비롯
되고 있습니다.
중국은 기자를 빼놓고는 역사를 기록할수도 없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정사의 첫머리에 공자께서 땟목을 타고 건너서 가고 싶어 했던 기자가 살던 조선의 기록들이 오를 수 있다는
것은 그 후손들이 자부심을 가져도 부끄러울게 없다는 얘기입니다.
東 夷 上
序 略
東 夷 白 虎 通 云 : 「 夷 者 ? 也 , 言 無禮 儀 。 」 云 : 「 夷 者 抵 也 , 言 仁 而 好 生 ,
萬 物 抵 地 而出 , 故 天 性 柔順 , 易 以 道 禦 。 」 有 九 種 , 曰 ? 夷 、方 夷 、 于 夷 、 黃 夷 、
白 夷 、 赤 夷 、 玄 夷 、 風 夷 、 陽 夷 ,率 皆 土 著 , 遲 略 反 。
喜 ? 酒 、 喜, 許 利 反 。 歌 舞 , 或 冠 弁 衣 錦 , 器
用 俎 豆 , 所 謂 中國 失 禮 , 求 之 四 夷 者 也 。 凡 蠻 、夷 、 戎、 狄 , 總 名 四 夷 者 , 猶 公 、
侯 、 伯 、 子 、 男 , 皆 號 諸 侯。 昔 堯 命 羲 仲 宅 ? 夷 , 曰 暘 谷 , 蓋 日 之 所 出 也 。
夏后 氏 太 康 失 德 , 夷 人 始 叛 , 其 後 至 后 發 ? 位 , 賓 於 王 門, 獻 其 樂 舞 。 桀 ? 暴 虐 ,
諸 夷 內 侵 。 商 湯 革 命 , 伐 而 定之 。 至 於 仲 丁 , 藍 夷 作 寇 。 自 是 或 服 或 叛 , 三 百 餘 年 。
武 乙 衰 弊 , 東 夷 ? 盛 , 遂 分 遷 淮 岱 , 漸 居 中 土 ,
周 初封 商 太 師 國 於 朝 鮮 。 太 師 ? 周 陳 洪 範 。其 地 , 今 安 東 府 之 東 , 悉 ? 東 夷 所 據 .
時 管 、 蔡 畔周 , 乃 招 誘 淮 夷 作 亂 , 周 公 征 定 之 。 其 後 徐 夷 僭 號 , 穆王 命 楚 滅 之 。 徐 偃 王 也 。 至 楚 靈王 會 申 , 亦 來 同 盟 。 後 越 遷 瑯 ? , 遂 陵 暴 諸 夏 , 侵 滅 小國 。
이 기록들은 대부분의 사서들이 공통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통전>만이 추가한 기록은 아래 대목입니다.
[周 初 封 商 太 師 國 於 朝 鮮 。 太 師 ? 周 陳 洪 範 。其 地 , 今 安 東 府 之 東 , 悉 ? 東 夷 所 據 ].
[주 나라에서 처음으로 상 태사를 조선에 봉하였는데 태사란 주 나라에 홍범을 전해 주었기 때문이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자는 상나라의 태사였고, 또한 주나라의 태사였으니까 그가 지도하던 조선은 양국의 태사국이
된다는 것입니다.
수 천년동안을 변방의 오 랑케로만 취급받던 조선인 중에도 그들이 진실로 존경하던 기자라는 분이 큰
스승으로 기록되어 내려 온 다는 것이 반가웠다는 말씀입니다.
뿐만아니라 "조선"이라는 정식국호가 주나라 이전부터 있어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통전>은 중국이 오랫동안 감추어왔던 조선이라는 국호가 주나라 이전부터 있었노라고 실토하고 있습니다.
약자들은 입으로만 전하여 오는 선조 들의 무용담만 들어도 큰 자랑거리로 여깁니다.
너무나도 낯 서른 주나라의 태 사였다는 기록은 아무 데나 없습니다.
그러나 실재로 기자가 홍 범 구주를 주나라의 무왕에게 가르쳐 주었다는 기록은 <상서> 에도 있고 <한서>
등에도 있지만 태 사라는 직접적인 기록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태 사의 예우를 요청한 일도 없고 중국인스스로의 판단에 의해서 "태사"라고 기록 한 것입니다.
저는 주나라 당시의 이 태사를 제후나 왕 보다도 더 높게평가 하고 싶습니다.
무상한 권력을 능가할 수 있는것은 우주의 섭리를 깨달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는 성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미쳐 기자라는 뛰어난 성인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태 사를 설명하는 보조해설이 따로 설명되는데, 태 사란 주에게 홍 범 구주를 가르친 것을 말한다는
뜻이 아닙니까.
지금까지 이러한 기록들을 발견하지 못했던 이유는 우리들은 의외로 자신들의 조선의 역사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제는 좀더 적극적으로 우리들과 관계되는 역사는 주인의 입장에서 살펴봐야 한다고 봅니다.
앞에 올려놓은 지도의 지명 중에 <요사지리지>의 영주에 대한 참고 사항입니다.
[영주는 본래 은 나라 때에는 고죽국이었고 진나라 때에는 요서군에 속했으며 한나라 때에는 창려군이
되었다]
이 기록은 영주가 현재의 창려 라는 것이고 <서전>에 [영주는 요동이다] 라는 기록이 있는데 전한(前漢)
시대의 요동은 현재의 요서라는 말이 됩니다.
<통 전>
[요동은 옛날의 병 주, 영주의 땅이다]
당나라의 <통 전>에도 병 주, 영주가 요동에 있다는 것으로 병 주는 유 주를 가리키고 영주는 창려 로
당시의 요동은 현재의 요 서에 해당한다고 할 수가 있다. *유 주와 창 려 는 모두 요 서 지방에 있음
<대명 일 통지>
[요동과 조선은 모두 영역(營域)에 있다]
영역은 영주이므로 요동과 고조선도 난 하와 관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 씨 춘추>
[요 수는 지 석산(砥 石山)에서 나와 새(塞)의 북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곧게 요동의 서남에 이르러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지석산은 갈 석 산을 말함, 그리고 갈석산에 대한 한(漢)나라의 사서에 [갈석산은 한나라의 낙랑 수성현에
있다. 장성은 동쪽 요 수에서 끊어져서 이곳에서 기원한다]라는 내용이 나오므로 갈석산은 현재의 창려
지역(난 하)에 있다는 말이 됩니다.
갈석산이 창려 지역에 있고 요수는 현재의 난하이고 새(塞)는 조양(造 陽)에서 난하를 지나 창려의 갈석산에
이르게 되고 진나라 장성의 위치도 새(塞)와 일치하게 된다.
따라서 요수는 한(漢)나라시대에는 현재의 난하이고 난하를 중심으로 그 서쪽은 요수 , 동쪽은 요동이 된다.
이 글은 아래 사이트에서 인용 참고하였습니다.
http://blog.naver.com/casahoo/20001598473
고대의 갈 석산(인용자료-편집) 갈 석산(碣 石山)의 위치는 청동기를 사용한 시기의 한(韓)민족 환 국(桓 國)
의 치우- 청구국(靑丘國)의 영역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기자설에 대하여 한국의 사학계를 대표하여 연구한 두계 이병도박사의 저서 <한국사>의 고대편을 보시겠
습니다. 92쪽에서
재래 소위 "기자조선" 의 정체와 주위 제 종족 및 연. 진. 한과의 관계
[고대 조선사 상에 있어 단군 문제에 다음 하여 제기되는 문제는, 종래 소위 "기자조선의 정체가 무엇인가에
있다. 은 말(殷 末) 삼 인(三仁)의 하나로 전하여 오는 "기자가 동으로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재래의
설은 여러모로 검토해보아 성립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기자조선의 정체를 밝히자면 먼저 그 전설을 비판하여 거기 덮인 의 운을 벗겨 내지 않으면 안되
겠다.
기자동래설을 전하는 오랜 기재에 셋이 있다. (A), 하나는 복 생의 <상서대전>이니 거기에는 아래와 같은
말이 적혀있다.....주 무왕의 기자 석방 이야기와 국가의 치도 방법을 기자에게 묻자 "홍 범 구주"를 주 무왕
에게 전하여 준 얘 기 등, (B) 그리고 기자가 패 허 가된 은의 구도를 지나다가 맥 수가를 지었다는 얘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한서>> <지리지>연 조의 기재로서, 거기에는 은 도가 쇄하매 기자가 조선에 가서 그
인민에게 예의와 전 잠과 지조를 가르쳐주었더니,(그 교화의 영향으로) 낙랑 조선민 사회에는 범 금8조란
8개조항의 법 금이 행하게 되었다는 것이 실려있다. 중략.....]
이상으로서 기자 에 대한 많은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서의 기록방법과 기자가 조선반도까지는 올 수
없었던 약점을 들어 실재로 존재하였던 사실들을 부정한 결과를 가져 온 것입니다.
필자가 보기에도 저자의 생각이 긍정보다는 부정 쪽으로 기울다보니 편견이 작용했던것으로 보입다.
그 이유는 평양에는 묘지명이 기록된 기자의 묘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부정할만한 특별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이 사실을 무시한데 있습니다. 낙랑유물들을 내 세운 기준과는 또 다른 것입니다.
그 묘안에 유골이 있었을 수도 있고 또 가묘일 수 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묘를 완전히 가짜라고 판단하기는 어렵다는 것이고, 그 이유는 기자의 후손인 준 왕이
그곳까지 옮겨간 흔적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조상에 대한 예의를 생명처럼 여겼던 기자의 후손들이었기에 특별한 존경을 받던 기자의 유골이나 유품
등이 이동대열에 따라서 움직였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저자 이병도박사가 평양의 기자묘를 인정하지 않은 이유는 하남의 몽성에 기자의 묘가 있다는 양 나라 두예의
주석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두 예의 주석 외에도 긍정하기엔 미흡한 요소가 많이 있었을 줄 압니다.
그러나 그는 비슷한 조건인데도 한 사군의 한 반도 위치 설은 수용하였습니다.
바라는 것은 <통 전>같은 사서를 광범위하게 검토하였더라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입니다.
그의 학 맥으로 따져서 손자뻘인 송 호 정교수는 이러한 <통 전>에 기록되어있는 조선이라는 국명이 은. 주
시대 이전까지 올라간다는 기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조선국명의 상한을 기원전 7세기로 고집하고 있는 것
입니다.
최근에 발행된 <아틀라스 한국사>의 고대 편을 보면 종래에 그가 주장하던 학설들과 조금도 달라 진 게 없
습니다.
두 계(斗 溪)의 학설이 이렇게 결론지어진 이후의 여타 소위 강단 사 학계의 학설은 진전을 보지 못하고
새로운 것이 전연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 칼 하게도 아직까지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한단고기>>의 <단 군 세기>에는
기자에 대한 상세하고 새로운 기록들이 있습니다.
강단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있는 이 기록들을 인정을 하고 안하고는 독자 님들의 몫입니다.
필자는 중국측이 기록하고있는 사서들과 우리 나라에서 기록하고있는 사서들을 연계하여 비교하기 위해서
노력하였지만 유감스럽게도 강단 사학계에서 발표한 만족한 기록들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맥을 이어야 하는 작업을 중단할 수 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아쉬운 마음으로 이러한 사서를 선택하게된 필자의 고충을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으로서 주나라에서 조선에 봉하였다는 기자는 이병도박사의 연구결과 조선의 왕으로 또는 조선으로
입국한 사실이 없다는 것으로 결론을 보았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 연구결과가 당연히 옳은 것이라고 필자는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의 <신 시 본 토기>가 쓰여진 것입다.
주나라에서 태사의 존칭으로 예우까지 받았던 기자 님은 틀림없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떠났다는 데 우리가
알고있는 조선 땅으로는 들어온 흔적이 없다는 것이니 예를 든다면 배달사고가 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국 땅에서 한반도사이를 조사하면 진상이 밝혀 질 것이 아니겠느냐 라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었
습니다.
결론을 요약하면 기자는 위의 지도에서 확인되는 영주 주위에 있던 고 죽 국을 거쳐 대능하 상류지역을
돌아 등 주의 건너편 에 있는 장도로들어 간 것입니다.
이 곳에 자리를 고정하고 8조 금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양잠과 직조 영농 등을 가르치며 외부와는
소식을 단절하셨습니다.
이 곳이 낙랑조선이고 기원전 1112년~ 195년까지 그의 후손들이 머물렀던 곳입니다.
신 한의 왕 망은 이 곳의 이름을 낙선(樂 鮮)이라고 고쳤는데 그 뜻은 낙랑조선의 줄임 말이었습니다.
약 380여 년 전1624년 명나라에 사은 겸 주 청사로 파견된 이 덕형 일행이 해로로 항해도중 이 곳에 들렸을
때는 창 락 현(昌 樂 縣)이라는 이름으로 있었는데 이는 창려 의 낙랑을 줄인 것으로 보입니다.
동행하였던 궁중화원이 그린 당시의 현장그림이 졸 저<신 시 본 토기>의 128쪽에 있고 기타사진들이 10여
장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곳에 수록된 자료 사진들은 일부가 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귀중한 것들입니다.
다음은<<한서>>지리지>의 기자가 동쪽으로 갔다는 기록입니다.
한 무제가 설치한 한사군의 현 도와 낙랑은 원래 예 맥 조선 땅이었는데 은 말에 기자가 동쪽으로 갔던 곳은
진 번 조선과 낙랑 조선이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필요하신 분들을 위하여 원문을 같이 올렸습니다.
그리고 이 곳은 원래 예맥조선이 있었던 곳이라는 단서까지 달았군요 이 예맥조선은 창해군과 관련이있는
예군 남여가 관장하던 곳 이었습니다.
玄도 、樂浪,武帝時置,皆朝鮮、濊貊、句驪蠻夷。殷道衰,箕子去之朝鮮,眞番朝鮮.樂浪朝鮮 其民以禮義,
田蠶織作。樂浪朝鮮民犯禁八條:相殺以當時償殺;相傷以谷償;相盜者男沒入?其家奴,女子?婢,欲自贖者,
人五十萬。
雖免?民,欲猶羞之,嫁取無所?,是以其民終不相盜,無門戶之閉,婦人貞信不淫?。其田民?食以? 豆,都邑
頗放效吏及內郡賈人,往往以懷器食。郡初取吏於遼東,吏見民無閉臧,及賈人往者,夜則?盜,俗稍益薄。
今於犯禁浸多,至六十餘條。
可貴哉,仁賢之化也!然東夷天性柔順,異於三方之外,故孔子悼道不行,設浮於海,欲居九夷,
有以也夫!樂浪海中有倭人,分?百餘國,以歲時來獻見雲
(九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