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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2년(태종 12)에 창건된 돈화문은 임진왜란(1592년 ~ 1598년) 때 소실되었다가
1609년(광해군 1)에 창덕궁이 복구되면서 돈화문도 함께 세워졌다. 현재의 건물은 이때 세워진 것이다.
1413년(태종 13)에는 이 문에 무게 1만 5천 근의 동종(銅鐘)을 걸었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사가 있다.
1451년(문종 1)에 돈화문은 처음에는 규모가 크지 않은 돈화문을 고치라는 왕명이 있었으며
1506년(연산군 12)에는 돈화문을 높고 크게 개조하라는 왕명이 있었다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으로 왕의 행차 같은 큰 의례나
국가의 큰 행사 때 쓰이던 상징적인 문이였다
태종(太宗 5년)은 창덕궁 인정전 건립을 1404년 10월에 시작하여 1405년 10월에 창건한 후 재위 12년만인,
1412년 5월에 창덕궁(昌德宮) 정문으로 돈화문(敦化門 )을 건립하였다
지금의 돈화문은 임진왜란(1592~1598년) 때 화재로 불타버린 것을
선조(宣祖) 재위 40년인 1607년에 복원이 시작되어 광해군(光海君) 원년인 1609년에 완공되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이때의 모습이 현재까지 남아있어, 돈화문은 현존하는 궁궐 정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문으로 유일하게
정면이 5칸 규모로 대한민국의 보물 제383호로 지정되어 있다
태종(太宗=이방원. 태조(이성계)의 5남) : 1367년 6월 13일 ~ 1422년 5월 30일
재위 기간 : 1400년 11월 28일 ~ 1418년 9월 9일
조선 제3대 임금
선조(宣祖) : 1552년(명종 7)∼1608년(선조 41)
재위 기간 : 1567년 ∼ 1608년
조선 제14대 왕
광해군(光海君) : 출생1575(선조 8) ∼ 사망1641(인조 19)
재위 기간 : 1608 ∼1623년
조선 제15대 왕
금천교 곁에서 바라본 돈화문
조선시대에는 시간을 알리는 종과 북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쉽게도 남아 있지 않다.
돈화문을 들어서면 금호문으로 연결된 서쪽행랑에 회화나무가 자란다. 이 회화나무들은 동궐도에서도 볼 수 있으며
회화나무를 심은 이유는 중국 주나라 때 조정에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어 삼공의 자리로 삼고 왕과 더불어
정사를 논했다는 예에 따른 것이다
회화나무는 나뭇가지가 사방으로 고루 뻗은 모습이 학자의 기개를 닮았다 하여 학자수라고도 부른다
회화나무는 8월에 꽃이 피는 콩과식물인데, 회화나무는 정승과 출세를 의미한다고 해요.
이 것은 중국에서 회화나무 꽃이 필 무렵에 과거시험을 보기 때문에 시작된 것이란 설이 있다고 합니다
돈화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회화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궐내각사에 근무하는 신하들이 출입하는 금호문에서 바라본 회화나무와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진선문과 내병조((內兵曹=현재는 창덕궁관리소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음)는 궁궐 안에 있는 병조란 뜻입니다
내병조(內兵曹)에서는 대궐 안 각 문의 자물쇠를 관리하고
임금님이 행차할 때 임금이 탄 가마를 선도하며, 시위나 의장 때 질서를 바로 잡는 일을 맡았다.
순조 30년(1830) 이전에 도화서 화원들이 1824~1830년 사이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동궐도>를 보면 창덕궁의 내병조는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인정문 맞은 편, 진선문과 숙장문 사이의 남쪽 행각에 있었다고 그려저 있다.
내병조는 1999년 복원되었다
현재는 창덕궁관리소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는 내병조(內兵曹)
내병조 앞의 원역처소는 원역들이 묵는 처소(處所 =사람이 기거하거나 임시로 머무는 곳)라 합니다
원역이란 벼슬아치 밑에서 일하는 구실아치로 서리를 말합니다.
2004년에 복원된 내병조와 원역처소 현판은 정도준(鄭道準)의 글씨를 오옥진(吳玉鎭)이 각자장(刻字匠)한 것이라 합니다
창덕궁의 돈화문 동쪽 곁에 있는 창덕궁 단봉문(昌德宮丹鳳門) 이름은 중국 당나라 장안성(長安城)의 대명궁(大明宮) 남문인
단봉문에서 딴 이름이라 한다
궁인들과 일반인이 출입하는 한칸짜리 단봉문이다. 궁궐에서 사망한 여성들의 시신도 대부분 이 문을 통해 나갔다
정조(조선 제22대 왕) 때 왕비 효의왕후가 아이를 못 낳자, 후궁을 간택했는데 그 때 후궁 후보들이 이 문으로 입궐했다.
1881년 4월, 조선은 5군영제각주를 폐지하고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했다. 5군영을 무위영과 장용영의 2영으로 개편하고,
무위영 소속으로 별기군을 창설한 것이다.
일본군 소위가 교관각주을 맡아 양반 자제 80명(임오군란 때는 400명으로 늘어남)에게 사관생도 교육을 실시했다.
급료 등에서 별기군을 우대하고, 5군영을 2영으로 줄이는 군제 개편으로 많은 군인이 일자리를 잃어
이른바 구식 군대의 원성을 샀다.
1882년(고종 19년) 조선의 권력은 왕비 민씨의 친가에서 모두 쥐고 쥐락펴락하였다. 이 시기를 민씨 정권이라고 부른다.
그중에서도 핵심적인 인물은 선혜청의 당사관이자 병조 판서 민겸호였어요.
민씨 일가의 부정부패가 점점 심해지면서 백성들의 삶이 힘들어졌지요.
(병조판서(兵曹判書) : 조선 시대에 둔, 병조의 으뜸 벼슬. 품계는 정이품으로, 군사와 국방에 관한 일을 총괄하였다.)
개화 정책이 실시되면서 조선은 신식 군대 별기군을 우대하면서, 구식 군인에게는 13개월 동안 월급조차 주지 않다가 겨우
한 달치 월급으로 받은 쌀 한가미니엔 절반은 모래와 쌀 겨가 섞여 있어 차별화에 불만과 분노가 폭발한
구식 군인들이 난을 일으켜 민씨 정권의 관리들과 민겸호를 죽였다. 일본 공사관도 공격하고, 선혜청에 불을 지르고
구식 군인들을 왕후 민씨마저 죽이려 창덕궁 궁궐에 난입을 하자 이 소식을 들은
명성황후는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 민씨와 무예별감(武藝別監) 홍재희(洪在羲)의 도움으로
궁녀 차림으로 변장하고 단봉문을 빠져나온 황후 민씨는
윤태준(尹泰駿)의 집에 은신했다가 광주(廣州)와 여주를 거쳐 장호원(長湖院) 충주목사 민응식(閔應植)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임오군란(壬午軍亂) 발생은 1882년(고종 19년) 6월 9일 발생하여 ~ 1882년 7월 13일 종결되었다
조선시대 의금부에 특별재판소를 설치하고 왕이 직접 중죄인을 친국(親鞫)을 진행할 때 창덕궁 숙장문에서 실시하였다.
은대편고(銀臺便攷), 은대조례(銀臺條例) 기록에 따르면 창덕궁에서 친국(親鞫)을 진행할 때
궁궐 밖에 있던 죄인은 단봉문을 통해 궁 안으로 등어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단봉문은 궁 안에서 여러 사적인 일이나 그닥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 주로 활용하던 단봉문(丹鳳門))으로
궁녀가 병이 들어 궁궐밖으로 쫏겨 날 때, 시신을 운구할 때 사용하던 문이다
승정원, 홍문관 같은 궐내각사(궁궐 내의 행정관청)에 근무하는 관원들이 주로 금호문으로 궁궐에 드나들었다.
금호문이란 이름은 당나라의 서쪽 궁문 이름에서 따왔다.
금(金)’은 오행에서 서쪽을 뜻한다. 호(虎)는 호랑이로, 역시 서쪽을 나타내는 동물이다. 즉 서쪽 문이라는 뜻이다.
1623년(인조 1년) 인조반정 당시 반정군들이 창덕궁으로 들어갈 때 이용하였던 문이다.
금호문의 문장 박효립이 문을 열고 반정군을 들여보냈다
금호문 앞은 1926년에 <송학선의사 의거터>이기도 하다
1926년 4월 28일에 송학선 의사가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의거의 현장이다. 거사 이틀 전에
순종황제가 창덕궁 흥복헌에서 승하하였다 그리고 창덕궁 내 빈소로 가는 출입문을 금호문으로 정하였다.
송학선 의사는 조선총독부의 고관들이 문상을 하러 금호문을 드나드는 것을 보고 사이토가 지날 때를 노려 암살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4월 28일에 일본인 3명이 탄 자동차가 금호문으로 나올 때 뛰어들어 안에 타고 있던 2명의 일본인을 죽이고 달아났다.
그러나 송학선 의사가 죽인 인물은 사이토가 아닌 다른 일본인이었다. 송학선 의사는 현장을 벗어나다 체포당한 뒤 사형
선고를 받고, 이듬해 5월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현재 창덕궁 앞에 <송학선의사 의거터>란 표지석이 있지만, 금호문이 아닌 돈화문 근처에 세워저 있다.
2021년 1월 10일 <송학선의사 의거터>란 표지석을 확인하려 하였지만 언제부터인가 철거되고 없었다
죽은 일본인은 국수회(國粹會) 지부장 다카야마(高山孝行)와 경성부회 평의원 사토(佐藤虎次郎)였다.
함께 탑승했던 평의원 이케다(池田長次郎)도 칼에 맞았으나 중상에 그쳤다.
바깥쪽에서 바라본 금호문
1909년 송학선(宋學先) 의사는 남대문로에 있는 일본인 경영의 오쿠다농구회사[奧田農具會社]의 고용인으로 일하게 되었다
일본인 밑에서 고용살이를 하며 일제에 대한 원한이 쌓였고, 사회적·민족적으로 항일의식에 눈뜨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안중근(安重根)을 숭배하고,
자기도 총독 사이토[齋藤實]를 사살하기로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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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1906년 3월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총독)으로 취임하였으며
이토는 1909년 6월 14일에 통감직을 사임하면서 같은 날 추밀원 의장에 임명됐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의 하얼빈 역에 내렸다가
독립 운동가 안중근 의사가 쏜 총탄에 맞아 사살당했다.
일본이 한국의 강압으로 외교권을 박탈하고, 내정 장악을 위해
광무 9년인 1905년 11월 17일 조선통감부를 설치하는 것이 을사늑약(乙巳勒約)의 핵심 조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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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3월 잠시 사진관에서 일하면서 양식도(洋食刀)를 손에 넣게 되었는데 그 칼을 품고 과자행상을 가장해 사이토를
노렸다. 1926년 4월 26일 순종이 죽자, 사이토가 조문하기 위해 창덕궁으로 올 것을 기대하고1926년 4월 28일
송학선(宋學先, 또는 宋學善) 창덕궁의 금호문(金虎門) 앞에 나아가 대기하였다. 오후 1시 30분경 일본인 3명이 탄 자동차가
금호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비호같이 자동차에 뛰어올라 이들을 찔렀다.
그러나 이들은 총독 일행이 아니라 경성부회 평의원인 다카야마(高山孝行), 사토(佐藤虎次郞), 이케다(池田長次郞) 등이었다.
현장에서 붙잡혀 1926년 11월 10일 사형이 확정 순국하였다.
그는 재판 예심 때 재판관에게 <나는 주의자도 사상가도 아니다. 아무것도 모른다. 다만 우리 나라를 강탈하고, 우리 민족을
압박하는 놈들은 백번 죽어도 마땅하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총독을 죽이지 못한 것이 저승에 가면서도 한이 된다>고 말하였다.
송학선은 붙잡힐 당시 부근에 있던 휘문고등보통학교(현 현대빌딩 본사 자리) 학생들에게 <만세를 불러라>고 몇 차례
호소하였고, 또 이 사건은 신문지상에 보도되어 학생들의 민족적 의분심을 크게 자극하였다.
금호문의거 자체는 비록 실패하였으나 민족운동에 고무하여
6·10만세(1926년 6월 10일 순종 황제의 장례일에 일어난 독립 운동) 운동의 발발을 자극하는 구실을 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재판정에 선 송학선 의사 당당한 모습)
1926년 4월 28일 조선제 27대 왕 순종의 승하에 울분한
송학선의사가 조선총독을 살해하려던 자리라는 표지석이 금호문 곁에 설치되어 있다
금호문 입구에 설치된 송학선의사의거터 표지석
금천교(錦川橋) 아래로 흐르는 금천(錦川)은
궁궐을 드나드는 관리들이 맑고 바른 마음으로 나랏일을 살피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창덕궁의 돈화문과 진선문(進善門)사이를 지나가는 금천(錦川)위에 설치된 금천교(錦川橋)는
창덕궁이 창건된 후 6년 뒤인 1411년(태종 11) 3월에 설치되었으며
금천교를 지날 때 이 궁에 들어오는 사람의 몸에 붙은 잡귀를 떼어내는 것이란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 금천교를 건너면 나오는 중문이 진선문이다.
1908년 탁지부 건축사무소에 의해 시행되었던
인정전 개수공사 때 헐렸던 진선문은 1996년 복원을 착수하여 둘레의 긴 회랑과 함께 1999년 복원 완공하였다.
진선문(進善門)을 들어서면 사다리꼴 형태의 넓은 마당이 펼쳐져 있으며 마당에는 어로(御路)가 나 있다.
마당 둘레에는 인정전으로 통하는 인정문과 호위청, 상서원, 정청 등의 행각이 있다.
진선문(進善門)으로 들어서면 궁궐의 두 번째 마당이 나온다. 이 곳은 인정전의 바깥 행랑과 더불어 사다리꼴 형태를
취하고 있는 점이 특징으로 인정전 외행랑 뜰'이라고도 부른다.
남쪽 행랑에는 내병조(內兵曺), 호위청(扈衛廳), 상서원(尙瑞院)이 있으며, 남쪽 행랑의 내병조 역시 남향하고 있어
진선문 쪽에서는 벽만 보인다. 동쪽 행랑에는 배설방(排設房)이 있다. 북쪽 행랑은 모두 인정전 마당을 향하고 있다
창덕궁의 내병조(昌德宮內兵曹)는 궁궐을 지키고 임금을 호위하기 위해 병조(兵曹)에서 파견한 일종의 지부(출장소)로
2003년 복원되었다. 궁궐 수비 병력은 각 문의 자물쇠를 관리하고
시위(侍衛:임금을 호위함)와 의장(儀仗:임금의 거둥 때 의장용 무기를 가지고 호위하는 군사)에
관한 업무를 담당했으며 병조의 당상관 1명이 근무하며 이들을 지휘했다.
순조 30년(1830) 이전에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동궐도>를 보면
창덕궁의 내병조는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인정문 맞은 편, 진선문과 숙장문 사이의 남쪽 행각에 있었다.
진선문과 인정문 주변은 일제 시대에 훼손되었다가 1996년부터 재건 공사를 시작하여 지금은 사방이 모두 행랑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곳에 복원된 행랑은 현재 기둥만 서 있고 빈 공간이나
원래 이 곳은 호위청, 상서원, 배설방 등 관청이 있던 곳이라 행랑에는 방과 마루로 채워져 있었다.
창덕궁 호위청(昌德宮扈衛廳)은 창덕궁 진선문과 숙장문 사이의 남쪽 행각에 있으며 현재는 현판과 기둥만 있다.
호위청 맞은편에는 대규모 조회의식 또는 신하들의 하례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의 접견장소로 이용한 인정전으로 통하는 인정문이 있다.
호위청은 인조반정 후 집권한 서인들이 국왕 호위를 명목으로 창설한 부대로, 자신들의 군사적 세력 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호위청에는 대장 1명과 별장 3명이 근무했으며 군관 350명을 거느렸다고 한다.
호위별장 1명이 호위군관 30명을 이끌고 경비업무에 투입되었다.
호위청은 궁중의 호위를 맡아보는 군영으로 인조1년(1623년)에 인조반정을 주도한 공신세력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설치하였다
창덕궁 상서원昌德宮 尙瑞院)은
새보를 비롯하여 임금의 명령을 상징하는 발병부, 마패, 절부월 등 각종 증명을 관장하는 기관이었다
절월(節鉞; 임금을 상징하는 도끼), 병부(兵符; 군대를 동원하는 표지로 쓰던 나무패), 순패(巡牌; 궁궐이나 도성 안팎을 순찰할
때 차고 다니던 패), 마패(馬牌) 등을 관리하였다.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으로 들어가는 인정문 맞은 편 행각에
호위청과 나란히 있는데, 현재 현판과 기둥만 있다. 조선을 개국한 해에 상서사(尙瑞司)란 이름으로 설치되었다가
세조 12년(1466)에 상서원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새보(璽寶) : 옥으로 만든 국새(國璽)인 옥새(玉璽)와 임금의 존호(尊號)를 새긴 도장인 옥보(玉寶)를 아울러 이르는 말.
남쪽 행랑의 호위청과 상서원
궁중을 수호하는 호위청(扈衛廳), 옥쇄나 마패 등을 관장하는 상서원
월랑(月廊)은 궁궐이나 사찰과 같이 규모있는 건물에서 앞이나 좌우에 줄지어 만든 건물을 지칭한다.
행랑, 행각, 상방이 있다. 기둥과 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는 복도 모양의 형식을 갖춘 것도 있고, 건물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다.
지금의 진선문은 창덕궁 창건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1908년 탁지부 건축사무소에서 시행되었던 인정전 개수 공사 때 헐렸다가 1996년에 복원 공사를 착수 1999년에 완공되었다.
조선시대 이조(吏曹)나 병조(兵曹)의 전관(銓官)이 궁중에서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보던 곳으로,
여기에는 사헌부(司憲府)의 대사헌(大司憲) 이병조 당상관(堂上官)
이병방승지(吏兵房承旨), 사관(史官)등이 전형(詮衡) 임면(任免) 출척(黜陟)등 인사에 관한 일을 의논하고 처리하는 곳이다
도목 정사(都目政事) : 고려와 조선 시대, 매년 음력 6월과 섣달에 관원들의 성적을 평가하여 면직 또는 승진시키던 일.
전형(詮衡) : 사람의 됨됨이나 재능 따위를 가려서 뽑음
출척(黜陟) : 못되고 무능한 사람을 물리치고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서용하는 일.
동쪽 행락에 있는 배설방(排設房)은 전설사에 소속된 관청으로 궁중 안에서 임금이 주관하는 의식(儀式)이나
행사 때 햇볕을 가리기 위해 치는 천막인 차일(遮日)과 휘장을 치는 일,
자리 등을 배설(排設 : 음식이나 기물(器物) 따위를 쭉 차려 베풂)하는 일을 맡은 직소(職所)이다
인정전 외행랑 뜰과 인정전 마당을 연결하는 인정문은 새로운 왕이 즉위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통상적으로 임금이 세상을 뜬 후 엿샛날 세자가 왕위에 오르는데,
임금이 나와서 조회하는 궁궐의 으뜸 건물인 정전의 정문에서 즉위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위식은 대부분 선왕이 별세한 후 그 상중에 이루어지므로 슬픔 속에서 간소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관례에 따라 창덕궁에서는 연산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이 인정문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1494년 연산군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
1649년 효종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
1659년 현종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
1674년 숙종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
1724년 영조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
1800년 순조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
1849년 철종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
1863년 고종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
성종(조선의 제9대 왕, 1457~1494) 6년(1475)에 서거정(徐居正)이 이름을 지어 올렸다는 숙장문(肅章門)
조선 전기의 학자 서거정(徐居正: 출생 1420년(세종 2) ~ 사망 1488년(성종 19))은
조선 초기 세종에서 성종대까지 문병(文柄)을 장악했던 핵심적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여섯 왕을 섬겨 45년 간 조정에 봉사, 23년 간 문형을 관장하고, 23차에 걸쳐 과거 시험을 관장해 많은 인재를 뽑았다.
성리학을 비롯하여 천문ㆍ지리ㆍ의약 따위에 정통하였고,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여 공동 찬집으로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동문선(東文選), 경국대전(經國大典),
연주시격언해(聯珠詩格言解) 편찬에 참여하였다.
개인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사가집(四佳集)과 역대연표(歷代年表), 동인시화(東人詩話),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필원잡기(筆苑雜記), 동인시문(東人詩文) 등이 있다.
지금의 모습은 1912년 무렵 일제가 행각을 전시장으로 용도 변경하면서 벽체와 바닥의 구성을 일본식으로 변형했던 것을 1988년 복원해놓은 것이다.
인정문은 태종(1405년) 5년 창덕궁의 창건 때 다른 전각들과 함께 지어졌다.
1592년(선조 25년) ~ 1598년(선조 31년)까지 임진왜란으로 이어진 전쟁으로 본래의 건물이 불타 없어지자
1608년 광해군(조선의 제15대 왕) 즉위년에 창덕궁을 재건하면서 다시 세웠는데,
영조 20년인 1744년 10월
인접한 승정원에 불이 나면서 연소되어 좌,우 행각과 함께 소실되었다가이듬해인 1745년3월에 복구되었다. 그 후
1803년 12월(순조3년) 선정전 서쪽 행각에서 화재가 나 인정전 등이 소실되어 이듬해 1804년 12월에 재건될 때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1910년대에 일제에 의해 주위 행랑을 전시장으로 용도 변경하면서 벽체와 바닥의 구성을 일본식으로 변형했던 것을
1988년 현재와 같이 복원해 원상을 회복하였다.
㉠ 향실은 궁중 제사에 쓰이는 향과 축문을 담당하던 곳이다.
향실이 서쪽 행랑에 있는 것은 인정전 서쪽에 제례 공간인 선원전이 있기 때문이다
㉡ 내삼청은 금군삼청(禁軍三廳)이라고도 하며, 임금을 호위하고 궁궐을 수비하던 내금위(內禁衛), 겸사복(兼司僕), 우림위(羽林衛) 삼청을 이른다.
내금위는 겸사복과 함께 왕을 가장 가까이서 호위하는 부대여서 5위에 속하지 않고 단독으로 내금위절제사에 의해 통솔되었다
세조는 내금위를 궁중에 숙직하여 왕을 경호하게 했다.
선발도 신중을 기하여 동서반 3품 이하관, 양반가문의 자제 중에서 무재도 탁월한 자들로 뽑았다.
왕이 이름을 모두 기억할 정도로 왕의 가까이에서 경호하는 부대로 실질적 특혜가 많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연산군 때는 수가 500명으로 늘었고 이후 약 400명 정도의 규모를 유지했다.
임진왜란 때 폐지했다가 1601년에 부활했으며, 나중에 겸사복·우림위와 함께 금군청으로 통합했다.
㉢ 북행랑에는 과거를 담당하는 관청으로 추정되는 관광청(觀光廳)이 있었다.
이 곳에 관광청이 있는 것은 인정전 마당이 과거 시험을 보는 장소로 자주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인정전 마당에서는 주로 문과의 전시(殿試)가 거행되었고, 무과의 전시는 후원에 있는 춘당대에서 시행되었다.
㉣ 동행랑에는 악기고(樂器庫), 육선루(六仙樓), 서방색(書房色)이 있다
창덕궁의 법전인 인정전(仁政殿)은 왕이 신하들로부터 조하를 받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등 공식적인 국가 행사를 치르던
곳으로 경복궁의 근정전과 같은 곳이다.
인정전은 태종 5년(1405) 창덕궁 창건 때 세운 건물로, 태종 18년(1418)에 다시 고쳐 짓기 시작해 그해 8월 세종이 즉위한 뒤에
준공되었고 단종 때 해체 보수공사가 있었으며, 임진왜란(1592년~1598년) 때 소진되어 광해군 원년(1609)에 복원되었다.
그러나 순조 3년(1803)에 다시 소실되었고 이듬해(1804년)에 중건된 후
철종 7년(1856) 또 한 번의 해체 보수공사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1803년(순조 3년) 소실된 인정전을 1804년(순조 4년)에 중건된 후
1856년(철종 7년) 인정전을 해체 보수공사를 거처 현재에 이른다
인정전(仁政殿)을 해체 보수공사한 1856년부터~2021년 1월까지 이제 165년의 세월의 흔적이 숨쉬고 있는 인정전이다
인정전(仁政殿)은 궁궐에서 으뜸되는 건물로 궁궐의 권위를 나타내는 동시에 의식을 치르는 공간이었으므로
외관이 주는 상징성에 초점이 맞추어 크고 높고 화려하게 지었다.
내부에는 임금의 자리인 어좌(御座)가 있고, 그 뒤로는 임금이 다스리는 삼라만상을 상징하는 병풍인
<일월오봉도>가 왕이 집무하는 전각의 어좌 뒤에 배설되어 있다
어좌 뒤에 놓인 일월오봉도는 절대자가 다스리는 세계를 시각화 한 것으로 음양과 오행의 원리를 보여주고 있다
다섯 개의 산봉우리, 해와 달을 그린 그림으로, 하늘에는 음양(陰陽)을 상징하는 흰 달과 붉은 해가 좌우에 떠 있다.
그 아래로는 오행(五行)을 상징하는 다섯 개의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다. 화면의 하단에는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가 그려져 있으며 화면의 좌우에는 소나무가 짝을 이루어 우뚝 서 있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라는 병풍에는 음양을 뜻하는 해와 달이 있으며 이는 왕과 왕비를 상징한다.
그 아래 다섯 개의 산봉우리는 우리나라의 동, 서, 남, 북, 중앙의 다섯 산을 가리키며 이는 국토를 의미한다.
이것은 왕이 중앙에서 사방을 다스리고, 음양의 이치에 따라 정치를 펼친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1405년 5월 4일 : 창덕궁 인정전 건립
1609년 5월 3일 : 선조의 사제가 창덕궁 인정전에서 거행하였다
1784년 8월 2일 : 문효세자는 창덕궁 인정전에서 책례를 거행하였다
1725년 2월 28일 : 효종은 창덕궁 인정전에서 책례를 거행하였다
(책례(冊禮) : 왕세자를 책봉(冊封)하던 예식)
창덕궁 인정전의 주변에는 유리창을 비롯하여 전구나 커튼 등 서양 장신구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외국과의 수교 후 들어온
당시의 다양한 외래 문물을 보여준다. 1907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겨 거주[移御]한 후에 창덕궁 인정전의
실내바닥이 전돌에서 마루로 바뀌고, 전구가 설치되는 등 부분적인 변화가 일어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태종5년(1405) 창덕궁 창건 때 세운 인정전(仁政殿)은 여러차례 소실로 재건된 정전(正殿) 용마루에 꽃무늬 문양이 그려저있다
<오얏꽃> 입니다
자두나무의 꽃을 오얏꽃이라고 부릅니다. 오얏꽃은 조선왕실을 상징하는 꽃문양으로
대한제국이 들어서면서 오얏꽃이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문장(紋章:국가의 상징적인 표지)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고려말 도선국사는 <오얏성씨 왕조가 들어서리라>라는 예언을 했고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했다.
열매가 진한 보라색이고 모양이 복숭아를 닮았다하여
그 열매를 자도(紫=자주빛 자, 桃=복숭아나무 도)라 하다가 자두로 불리게 되었다.
자두의 한자명은 이(李)이다.
이(李=오얏나무 리, 오얏 리, 성씨 리.)
이화(李花)를=자두 꽃이라 한다
오얏꽃(자두꽃)은 <삼국사기>와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에 복숭아꽃과 같이 등장하는 유서 깊은 꽃이다
깃부도다 깃부도다
만수성절 깃부도다
선리건곤((仙李乾坤) 밝은 꽃은
봄바람에 빗이 나네
한말에 불렀던 경축가 만수성절가(萬壽聖節歌)
황제의 성수절을 맞아 황실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함에 오얏꽃[仙李]을 등장시키고 있다.
이 오얏꽃 무늬는 지금까지 전주 이씨에서 문중 문양(門中紋樣)으로 사용하고 있다.
오얏꽃은 대한제국에서 황실 문장(紋章)으로 삼았으며
건축물, 용기, 집기, 훈장, 기장, 화폐 그리고 학교의 수료 졸업 증서까지 그 상징 문양으로 사용하여 왔다.
순종[(純宗), 재위 1907~1910년]이 탔던 어차로 미국의 자동차회사 제너럴모터스(GM)사가 제작한 캐딜락 리무진이다.
7인승으로 31.25마력, 배기량 5,153cc로 연식은 1918년으로 추정된다.
차체에는 황실 문장인 황금 오얏꽃 장식을 붙였고 내부는 오얏꽃이 수놓인 황금색 비단으로 꾸며 황실 어차로서 위엄과
화려함을 갖추었으며, 운전석 뒷편의 의자를 접거나 펼칠 수 있도록 하여 공간을 활용하는 실용성도 겸비하였다.
차체는 철재가 아닌 목재이고 외부는 칠(漆)로 칠해져 있다.
1992년 당시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과 현대자동차가 복원 작업에 뜻을 모아 순정황후어차와 함께
1997년부터 5년에 걸쳐 원형에 가깝게 수리 복원되었다. 2007년 창덕궁 어차고에서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왔다.
순종의 순정황후(純貞皇后)가 탔던 것으로 영국 다임러(Daimler)사가 제작한 리무진이다.
7인승으로 20마력이다. 배기량 3,309cc로 연식은 1914년으로 추정된다.
차체에는 황실 문장인 황금 오얏꽃 장식을 붙였고,
내부는 황실문장인 오얏꽃을 수놓은 황금색 비단으로 꾸며져 있으며 차체는 목재, 외부도장은 칠(漆)로 되어 있다
인정전(仁政殿) 동쪽 행각의 광범문(光範門)과 북쪽 회랑(回廊)이다
북쪽 회랑(回廊)은 인정전(仁政殿)에서 선정전(宣政殿)으로 통행할 수 있는 복도이다.
인정전(仁政殿)에서 선정전으로 임금만이 다닐 수 있는 회랑이다
1782년(정조 6년) 9월에 인정전(仁政殿) 월대 앞뜰 좌우에 줄지어 설치한 <문무 품계석>이다
선정문은 선정전의 정문이다
선정전(宣政殿)은 임금의 일상적인 집무 공간으로 쓰인 곳으로, 임금은 여기서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고 학문을 토론하며,
신하나 유생, 종친을 불러 시험을 치르기도 하였으며, 중국과 일본의 사신을 만나기도 하였다.
회랑문(回廊門)은 선정전(昌德宮 宣政殿)에서 인정전(昌德宮仁政殿)으로 연결된 복도(회랑=回廊])이다
창덕궁 인정전과 같이 의식을 위한 공간을 정전이라 하고, 선정전(宣政殿)처럼 일상 업무를 위한 공간을 편전(便殿)이라 하였다
창덕궁 안에는 청기와를 덮은 건물이 몇 채 있었으나 현재는 궁궐에 선정전(宣政殿)만이 유일하게 현존하는 청기와 지붕이다.
선정전 정면에 지붕, 기둥만 있고 벽체는 없는 복도가 붙어있어 선정전(宣政殿)으로 이어진다.
선정전 앞에 돌출된 전면 복도는
조선의 제22대 정조(재위 1776~1800년)왕 사후 선정전이 혼전(魂殿)으로 쓰인 것과 관련이 있다.
선정전은 순조(조선 제 23대 왕, 정조의 둘째 아들) 즉위년(1800년)에 정조의 혼전으로 쓰인 이래 순조, 헌종, 철종 등 역대
임금의 혼전으로 쓰였다. 그리하여 선정전에도 혼전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전면에 정자각(丁字閣)이 세워졌다.
순조 이후 선정전이 혼전으로 빈번하게 쓰이자, 편전(便殿)의 기능을 잃고
침전 권역에 있는 희정당(熙政堂)이 편전(便殿)으로 쓰이게 되었다.
혼전(魂殿) : 조선 시대, 임금이나 왕비의 국장(國葬) 뒤 삼 년 동안 신위(神位)를 모시던 전각.
정자각(丁字閣) :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丁자 모양으로 지은 집.
선정전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오랫동안 편전(便殿)으로 이용되다가 조선 후기에 내전의 희정당을 편전으로 사용하면서 별로 활용되지 못하였다. 당초에는 조계청(朝啓廳)이라는 건물이었는데 1461년(세조 7)에 선정전으로 개명하였다.
선정전 이 건물에서는 왕과 왕비가 크고작은 행사를 벌였는데, 성종 때 왕비는 이곳에서 양로연(養老宴)을 베풀었고 친히
누에를 치는 일을 모범으로 보였으며, 왕이 주연을 열기도 하였다.
선정전(宣政殿)을 에워싼 여러 관청의 전각들은 모두 없어지고 빈 땅으로 남아 있는 이 자리에 옛 관청들은
● 선정전 바로 앞에는 선전관청(宣傳官廳)과 장방(長房)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 선전관청에 근무하는 선전관은 숙직을 하면서 임금을 측근에서 호위하고 임금이 긴급하게 군사 지휘관을 소집하거나 군사를 동원할 때 연락을 담당하였다.
㉡ 장방은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내시를 일컫는 말로, 이들이 있던 곳을 장방이라고 하였다
● 인정전 동쪽 행각에 붙어 있는 선전관청 바로 아래 마당에는
우사(右史)와 당후(堂后)가 있으며 마당 중간에는 문서고(文書庫)가 있었다
㉢ 우사와 당후는 임금을 중심으로 조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록하는 사관을 일컫는 말로, 사관이 머물던 곳이다.
사관은 임금 가까이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모든 사실을 기록하여 실록을 편찬하는 자료가 되는 사초(史草)를 남겼다.
사초는 기록의 객관성을 확보하고 사관의 독립성을 보장하기위하여 비록 임금이라도볼 수 없도록 금하였다.
우사와 당후에서는 임금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사건을 날마다 기록하여 사초를 쓰는 곳이었으므로
계속 생산되는 사초를 보관하고자 옆에 문서고(文書庫)를 세웠다.
● 우사와 당후가 있는 마당의 바로 남쪽 마당을 중심으로
은대(銀臺)와 상서성(尙書省), 육선루와 악기고, 대청(臺廳)이 사방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 은대와 상서성은 도승지를 비롯하여 임금의 명령을 받드는 일을 담당하던 승정원의 다른 이름이다.
㉤ 육선루는 승정원의 다락이다.
육선루와 나란한 누마루에는 악기고가 있었는데, 인정전 마당에서 행사가 있을 때 장악원(掌樂院)
악사들이 손쉽게 악기를 꺼내 쓸 수 있도록 배려하여 이곳에 보관한 것이다.
㉥ 대청(臺廳)은 사헌부와 사간원 관리들이 임금의 옳고 그룻된 일을 아뢸 일이 있을 때 모이던 곳이었다
바른정치를 펼칠 수 있도록 그룻된 일을 아뢸 땐
<전하 아니되옵니다> 하고 목숨을 걸고 직언으로 고할 수 있는 조선의 언로가 살아이였다 한다
● 승정원(承政院) :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던 행정기관으로 오늘날의 대통령비서실에 해당한다.
왕이 내리는 교서나 신하들이
왕에게 올리는 글 등 모든 문서가 거치게 되어 있어 국왕의 비서기관이라 한다
(1400년(정종 2년) 4월 시행되어 ~ 1894년(고종 31년) 폐지되었다)
● 우사, 당후, 은대, 대청이 있는 마당 오른쪽에는 장방, 궁방(弓房), 주원(廚院), 공상청(供上廳), 서리방(書吏房),
정청(政廳), 대은원(戴恩院), 등촉방(燈燭房), 사알방(司謁房), 소주방, 내반원(內班院) 등이 각자 작은 마당을 이루고 있다
㉦ 주원은 사응원(司甕院)의 다른 이름으로 왕의 식사와 궐내 음식 공급 등을 담당하였다.
㉧ 궁방은 활과 화살촉, 등촉방은 등불과 촛불을 관장하는 관청으로 내시부(內侍府)에 속한다.
㉨ 사알방은 액정서에 소속된 정6품 잡직 관원으로
항상 임금 곁에 있으면서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고 신하들이 임금을 알현하는 것에 관한 일을 사알(司謁)하는 곳이었다.
㉩ 서리방은 궁궐내 각 기관의 하급 관리인 서리(書吏)가 머물던 곳으로, 문서 처리, 기록, 연락 등 행정 실무를 맡아보았다.
㉪ 정청은 이조의 당상관 및 병조판서 등 문무관을 선발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궁중에서 사무를 보던 곳이다.
㉫ 소주방은 임금의 식사를 비롯한 궐내의 더운 음식을 만드는 곳이다.
㉬ 내반원은 환관들의 관청인 내시부의 다른 이름으로, 궐내 음식물 감독, 명령 전달, 궁문 수직, 청소 등의 임무를 맡았다.
● 궁궐의 자질구레한 일을 담당했던 이런 기관들이 임금의 집무 공간인 선정전에 조밀하게 모인 까닭은 임금의 거처를 여러 겹의 마당과 건물과 에워싸기 위해서였다.
이는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임금을보호하는 동시에 임금의 편의와 관련된 이들의 역할이 고려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현재는 선정전(宣政殿)만 원래대로 남아 있고, 정자각과 선정문 그리고 선정전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은 모두 복원되엇으며
지금은 이런 관청이 있는 남쪽과 동쪽으로 수많은 전각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모두 헐려나가 없어지고 지금은 휑하개 빈 땅으로 남아 있다
창덕궁 창건 당시에는 조계청(朝啓廳)이라 부르던 것을 세조 7년(1461) 궁궐 건물의 이름을 바꿀 때 선정전이라 고쳤다고 한다
이 전각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광해군대에 중건하였으나 인조반정(1623)으로 다시 불타자 인조 25년(1647)에 인경궁의
광정전(光正殿)을 헐어 그 재목으로 재건하였다. 그러나 순조 3년(1803)에 다시 화재를 겪고 이듬해에 중건되었다
1479년(성종 10년) 음력 6월 2일에 선정전에서 어전회의(御前會議)가 있었다
성종(제9대 왕)은 1467년(세조 13) 1월 12일 11세 때, 한명회의 둘째 딸인 공혜왕후 한씨와 혼인했다.
1469년 성종이 예종(제8대 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한씨는 왕비에 책봉되었지만,
1474년(성종 5년) 음력 4월 15일 19세의 나이로 소생이 없이
훙서(薨逝 : 임금이나 왕족, 귀족 등 신분이 높은 사람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 하였다.
윤씨는 1473년(성종 4년) 4월 15일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淑儀)에 봉해졌다.
공혜왕후가 죽자, 1476년(성종 7년) 8월 27일 성종의 왕비로 책봉된
성종의 제1계비 제헌왕후(齊獻王后) 윤씨(尹氏)의 폐비를 논하는 회의였다
성종이 조정에서 폐비 문제를 거론하자 대신들은 윤씨가 세자(연산군)의 생모라는 이유로 격렬하게 반대하였지만
성종은 왕비 윤씨를 폐출시킨 뒤 사약을 내린다. 15년 뒤
1494년(성종 25년) 12월 24일, 성종은 자신이 죽은 뒤 백 년 동안 폐비 문제를 거론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승하했다.
닷새 뒤인 12월 29일 19세의 연산군이 보위에 올랐다.
훗날 피바람을 일으키는 사건들이 일어난다
(폐비 윤씨(廢妃 尹氏)는 조선 제9대 성종의 계비 윤씨를 폐비하고 사약을 내려 죽게 한 사건)
성종(조선의 제9대 왕, 1457~1494) 6년(1475) 좌찬성(左贊成 : 조선 시대, 의정부의 종일품 벼슬) 서거정(徐居正)이
이름을 지어 올린 숙장문(肅章門)이라 한다
진선문과 숙장문을 지나 내전으로 향하는 길에 자리잡은 전각은 비변사의 부속기관인 빈청(賓廳)으로,
건물의 이름은 비궁당(匪躬堂)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지어졌다.
대신들과 비변사 당상관 등 고위관료 들이 왕을 알현하기 전에 잠시 머물면서 회의하던 장소였다.
1865년(고종 2)에 흥선대원군의 집권으로 비변사가 폐지됨에 따라 비어버린 전각이 되었고, 한일합방 이후로 추정된 시기에
어차고(御車庫)로 변용되었다. 해방 후 2001년 순종황제의 어차와 순정효황후의 어차를 보관, 전시하였으나
2007년 어차(御車)는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진 후 현재는 카페로 활용되고 있다.
한일병합(韓日倂合) : 1910년 8월 22일에 조인되어 8월 29일 발효된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이루어진 합병조약)
순종(純宗) : 조선 제27대 왕, 대한 제국 제2대 황제(1874~1926, 재위 1907~1910). 고종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명성 황후 민 씨이다. 1907(융희 1)년에 즉위하였으나 1910(융희 4)년에 일본에 통치권을 빼앗기고 이 왕(李王)으로 불렸다.
선정전은 건물의 최고 위계를 나타내는 '전'(殿)으로
희정당은 그 다음 위계인 '당'(堂)이지만 선정전과 희정당은 임금의 집무 공간이다
1824년에서 ~ 1830년 사이에 그려진 동궐도 속에 그려진 희정당의 옛 모습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뀐다.
외양은 한식건물에 서양식 실내장식을 하고 있다.
남행각 현관의 경우 서구식 현관에 일본식이 가미되었고, 희정당도 왜곡과 변질이 가해졌다
내부는 쪽마루에 카펫이 깔리고 창문에는 유리가 끼워졌으며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설치되는 등 전형적인 서양식 실내
장식을 하고 있는 데다가 외관의 남행각에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현관이 설치되었다.
해방 후인 1985년에 보물 제815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후기에 편전으로 사용하게된 희정당은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1496년(연산군 2)에 궁내의 수문당(修文堂)이라는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재건되면서 당호를 희정당이라고 바꾸면서 창덕궁의 한 건물로 등장하게 되었다.
㉠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9년(광해군 1)에 창덕궁이 재건될 때 다시 지어졌으며,
㉡ 다시 인조반정(1623년 3월 13일,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세운 사건) 때 소실되었다가
1647년(인조 25)에 재건되었다. 이 때에는 인경궁(仁慶宮)의 건물을 철거하여 그 자재로 세웠다.
㉢ 1833년 또다시 소실되어 이듬해(1834년) 재건되었으나
㉣ 1917년에 화재로 타 버리고
㉤ 1920년에 다시 세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조전(大造殿)
희정당(熙政堂)에서 바라본 대조전(大造殿)의 정문인 선평문(宣平門)
대조전(大造殿)은 왕비의 생활 공간이자 임금과 왕비의 침전이었다.
대조전은 왕실의 대통을 이을 왕자를 생산하기 위하여 좋은 날을 골라 임금과 왕비가 동침하는 장소였다.
성종, 광해군, 인조, 효종, 철종, 순종등이 거처하였으며,
순조(조선 제23대 왕)의 세자 효명세자(익종)가 태어 났으며,
폐비 윤씨(조선 제9대 성종의 계비이자 제10대 연산군의 어머니)
효현왕후(조선 제 24대 왕 헌종(憲宗)의 왕비(王妃), 효정왕후(조선후기 제24대 헌종의 계비) 등 왕비들이 거처한 곳이다
대조전은 인조 때 재건될 당시 45칸 규모의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정면 9칸, 측면 4칸인 36칸으로 줄었다.
가운데 정면 3칸, 측면 2칸은 통칸으로 하여 거실로 삼았으며,
거실의 동ㆍ서쪽으로 각가 정면 2칸, 측면 2칸을 통칸으로 하여 왕과 왕비의 침실을 두었다.
거실의 앞 퇴칸은 월대로 출입하도록 하였고, 뒤 퇴칸은 후원으로 출입할 수 있게 하였으며, 각 침실 측면과 뒷면에는 작은
방을 두어 시종들의 처소로 삼았다. 현재 거실의 바닥은 마루를 깔고 큰 의자를 두었으며, 침실과 작은 방은 온돌로 꾸몄다
대조전 안 모습
대조전 뒷뜰에 4단으로 된 화계와 청장문
대조전 뒷뜰인 화계단의 동쪽에 있는 천장문
바깥에서 바라본 천장문
가정당(嘉靖堂)에 대한 건립 기록은 동궐도(1824년~1830년 그린 그림), 동궐지, 동궐도형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전각으로, 19세기(1801년부터~1900년까지) 후반 또는
일제강점기(1910년 8월 29일~1945년 8월 15일)인 1920년대에 덕수궁에서 이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순조(純祖) : 조선 제23대 왕(재위 1800~1834)
헌종(憲宗) : 조선 제24대 왕(재위 1834∼1849)
철종(哲宗) : 조선 제25대 왕(재위 1849~1863)
고종(高宗) : 조선 제26대 왕(재위 1863~1907)
순종(純宗) : 대한제국 제2대 황제(재위 1907∼1910)
일제강점기 : (1910년 8월 29일~1945년 8월 15일)
가정당(昌德宮嘉靖堂)은 대조전 뒷뜰인 화계 담장의 천장문(天章門)을 나서면 후원에 위치한 정자 중 하나로,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중앙 3칸은 마루로 되었으며, 좌우 각 1칸은 사분합(四分閤)을 단 온돌방이다
주위가 아늑하여 왕이 가끔 찾아와 국사(國事)를 생각하고, 왕실에 경사가 났을 때는 몇몇 신하와 소연(小宴)을 베풀던 곳이다.
1926년 순종황제가 병석에 누웠을 때 상궁과 나인들이 이곳을 기도처로 정하고 밤낮으로 쾌차를 기원하기도 했다.
1926년 4월 25일 순종황제(제27대 왕)가 붕어(崩御)한 장소가 흥복헌(昌德宮 興福軒)이다.
대조전(大造殿)은 왕비의 침전으로 1405년(태종 5)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을 포함해 여러 차례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다가
희정당과 마찬가지로 1917년 창덕군 내전 갱의실에서 일어난 대화재로 소실되자 일제는
이를 복구한다는 핑계로 경복궁 교태전을 비롯한 경복궁의 내전 건물을 모두 뜯어내 그 목재로 1920년에 창덕궁의 대조전,
희정당, 흥복헌, 경훈각 등을 재건하면서 내부가 일부 서양식 실내로 바뀌어졌다. 그 결과 대조전을 중심으로 경훈각을 비롯한 전각들이 행각(복도)으로 연결되었다.
내부에는 순정효황후 윤씨가 사용한 침대를 비롯한 근대시기의 고가구들이 보관되어 있다
창덕궁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大造殿) 동쪽에 딸려 있는 부속 전각인
흥복헌은 1910년 8월 22일 조선 왕조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다
한일병합 조약(韓日倂合條約)은 1910년 8월 22일에 조인되어
8월 29일 발효된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사이에 이루어진 합병조약이 흥복헌에서 이뤄졌다.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켰으며,
조약의 공포는 8월 29일에 이루어졌고, 이날 일본 제국 천황이 한국 병합에 관한 조서를 공포함으로서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국권피탈(國權被奪), 경술국치(庚戌國恥) 등으로 호칭하기도 한다.
을사조약(1905년)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으며, 정미7조약으로 군대 해산을 당하고, 기유각서로 사법권과
감옥사무까지 잃은 대한제국은 결국 일본 제국에 강제 병합되었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다.
창덕궁 흥복헌으로 불려온 대신들 중 학부대신 이용직은 조약을 반대하다 쫓겨났으며,
이른바 경술국적이라고 불리는
이완용(李完用) : 내각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윤덕영 : 시종원경
민병석 : 궁내부대신
민병석 : 탁지부대신
박제순 : 내부대신
조중응 : 농상공부대신
조민희 : 승녕부총관
이병무 :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8명 친일파 대신은 조약 체결에 찬성, 협조하였다.
이 8명은 한일병탄 조약 체결 이후 공을 인정받아 조선귀족 작위를 수여받았다.
정미7조약
1.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함.
2.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조항에 기재된 양여를 수락하고,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락함.
3.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들의 황후, 황비 및 후손들로 하여금 각기 지위를
응하여 적당한 존칭, 위신과 명예를 누리게 하는 동시에 이것을 유지하는데 충분한 세비를 공급함을 약속함.
4.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 조항 이외에 한국황족 및 후손에 대해 상당한 명예와 대우를 누리게 하고, 또 이를 유지하기에
필요한 자금을 공여함을 약속함.
5. 일본국 황제 폐하는 공로가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별히 표창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대하여 영예 작위를
주는 동시에 은금(恩金)을 줌.
6. 일본국 정부는 앞에 기록된 병합의 결과로 완전히 한국의 시정을 위임하여 해당 지역에 시행할 법규를 준수하는 한국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하여 전적인 보호를 제공하고 또 그 복리의 증진을 도모함.
7. 일본국 정부는 성의충실히 새 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 적당한 자금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 관리에 등용함.
본 조약은 한국 황제 폐하와 일본 황제 폐하의 재가를 받은 것이므로 공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함.
위 증거로 전권위원은 본 조약에 기명 조인함.
융희 4년(1910년) 8월 22일 내각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
메이지 43년 8월 22일 통감(統監) 자작(子爵)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대조전 서쪽으로는 수라간이 위치해 있으며 더 안쪽으로는 2층 건물인 징광루(澄光樓)와 경훈각(景薰閣)이 있다. 그 바로
오른쪽에는 대비의 처소인 집상전(集祥殿)이 있었다. 이 건물들은 광해군 15년(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모두 불탄 뒤 인조
25년(1647년)에 옛 모습으로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경훈각은 원래 2층 건물로 위쪽 건물은 징광루라고 하였다.
이 건물은 높은 월대 위에 올려진 이층집으로 청기와로 지붕을 덮어 모습이 화려하였다. 경훈각은 1층이므로 온돌방이 있으나
징광루는 2층이어서 마루로 되어 있어서, 가을과 겨울에는 온돌로 따듯한 경훈각을 주로 이용하고
봄과 여름에는 시원한 누마루가 있는 징광루를 썼다.
순조 33년(1833년)에 까닭 모를 화재로 희정당과 대조전을 비롯하여 징광루, 양심합(養心閤) 등이 불타 재건된 바 있다. 현재의
희정당과 대조전 일대는 원래의 모습이 아니다. 이 구역은 일제강점기였던 1917년에 화재로 불타 1920년에 새로 지었다.
불이 나고 나흘 뒤 이왕직에서는 조선총독부와 협의하여 새 궁전은 <조선식으로 하되 서양식을 참조>하기로 결정하고,
건물을 다시 짓되 경복궁에 있는 여러 전각을 헐어다 짓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강녕전은 희정당으로, 교태전은 대조전으로,
건순각은 흥복헌으로, 만경전은 경훈각으로 옮겨 지어졌다.
당시 화재로 주요 전각 뿐 아니라 궁중의 가구와 집기와 오래된 유물도 모두 소실되었다. 원래 대조전은 지붕이 일자형식이
아닌 솟을지붕 형식이었으며 뒤에 집상전도 있었으나 복원되지 못하였다.
대조전 뒤뜰인 화계 담장 넘어에 있는 가정당으로 가는 천장문이 있다.
넓은 잔디밭에 외롭게 홀로 서있는 가정당은 덕수궁에서 옮겨온 별원이라 한다
화계(花階)는 궁궐이나, 절 큰집 뒷뜰에 층계 모양으로 단(段)을 만들고 단마다 화초를 심을 수 있는 시설로 화계 위에
석함이나 식석(飾石), 대석(臺石), 돌확(石確) 등의 석물을 놓기도 하고 굴뚝을 세워 장식하기도 한다.
궁궐의 뒷뜰에 만들어진 화계 중에서 가장 잘 꾸며진 것은 창덕궁 낙선재의 뒷뜰에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유교를 국교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는 외간남자들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던 내당의 뒤편에 자리한 화계는
바깥 출입이 여의치 않았던 아녀자를 위한 위락 공간의 구실을 하였듯이
궁궐의 경우에도 왕비의 침전 뒤에 화계가 꾸며졌다.
대조전 북쪽의 경훈각 뒷뜰엔 계단을 쌓은 화단의 화계(花階)와 꽃담(갖가지 무늬를 넣고 쌓아 아름답게 꾸민 담장)엔
가정당으로 갈 수 있는 추양문과 천장문이 있다
예전에는 수정전이라는 전각이 있었다는 자리에 지금은 가정당이 있다
임금 순종은 천장문으로 가정당을 왕래하였으며, 왕친은 추양문을 출입하였다
상궁 나인들이 대조전과 수랏간을 드나들던 요휘문이다.
요휘문은 수랏간 출입문 입니다
대조전 서쪽 수라간은
왕과 왕비의 일상 진지를 지어 올리는 궁중 부엌이다
대조전 북쪽으로 붙어있는 부속건물인 함원전(含元殿)은 왕대비 또는 대왕대비의 침전으로 썼던 건물이라고 합니다.
경복궁 교태전 옆에 있던 부속건물 함원전을 뜯어다
대조전 부속건물로 복권한 함원(含元)은 만물이 생성되고 성장해 성취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동궐도〉와 현재의 창덕궁 선정전 주변을 비교해보면 마당이 원래보다 동서쪽이 좁아진 상태이고, 선정문도 현재보다 더욱
앞으로 배치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에 창덕궁을 개조하면서 선정전의 회랑과 인정전의 회랑에 석축을 높이 쌓고 통로를
만든 뒤 복도 건물을 세워 연결시키면서 이전 제도와 다르게 구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85년 보물 제814호로 지정)
순조(제23대 왕, 재위: 1800년 8월 23일) ~ 1834년 12월 13일) 때 창덕궁과 창경궁의 당시 모습을 그린 동궐도이다
동궐도는 1824년 ~ 1830년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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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년 10월에 시작하여 1405년 10월(태종 5년)에 창덕궁 인정전을 건립한 후 재위 12년만인,
1412년(태종 12) 5월에 창덕궁(昌德宮) 정문으로 돈화문(敦化門 )을 건립하였다
문도 함께 세워졌다. 현재의 건물은 이때 세워진 것이다
1411년(태종 11년) 진성문을 세우다
1411년 금천교를 놓다
1412년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을 건립하다
1418년(태종 18년)인정전을 다시 짓도록 명하다
1418년 8월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한 세종(조선 제4대왕) 창덕궁으로 입어하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창덕궁 대부분 전각들은 불에 타버린다. 그로부터 16년 뒤
임진왜란(1592~1598년) 때 화재로 불타버린 돈화문은
선조(宣祖) 재위 40년인 1607년에 창덕궁이 복구되면서
1609년(광해군光海君 1)에 돈화문도 함께 세워졌다. 현재의 건물은 이때 세워진 것이다
1608년부터 인정전 등 주요 전각들이 복구되기 시작해 1610년(광해군 2년) 마무리 된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외전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다시 소실되고
1647년(인조 25년) 인조반정으로 궁궐대부분이 소실되어 재건하였으며 당시 지어진 건물로는
외전의 인정전, 동월량, 승정원, 선정전 등 314칸이며, 내전의 대조전, 희정당, 태화당,
보경루, 징광루와 행각, 월랑 등 421칸으로 합하면 735칸을 이루는 큰공사였다.
1803년(순조 3년) 인정전이 소실되다
1804년 인정전이 중건되다
1833년(순조 33년) 희정당, 대조전, 등 내전의 많은 전각들이 화재로 사라저 버린다
1847년(헌종 13년) 후궁들을 위한 낙선재 일곽이 조성된다
1704년 숙종 30년 12월에 창덕궁 금원(禁苑) 옆에 대보단을 설치하였다
1921년 일제는 대보단을 없애고 그자리에 신선원전을 지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