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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제사孟子題辭
조기趙岐
(1) 孟子題辭者, 所以題號孟子之書 本末 指義 文辭之表也。
孟, 姓也。 子者, 男子之通稱也。 此書, 孟子之所作也, 故摠謂之孟子。 其篇目, 則各自有名。
‘맹자제사孟子題辭’라는 것은『맹자』라는 책의 본말과 지향하는 의미와 문장과 언사를 표명하기 위하여 붙인 제목이다. ‘맹孟’은 성이고, ‘자子’라는 것은 남자의 통칭이다. 이 책은 맹자가 지은 것이다. 그래서『맹자』라고 총칭하는 것이다. 그 편목篇目에는 각각 그 편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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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趙岐(109~201)는 후한後漢 말기의 인물이다. 그의 가정은 진대秦代 이래의 거족巨族으로 대대로 고관대작을 지냈고, 그가 출생하였을 때 그의 조부는 어사御史였다. 조기는 어려서부터 경전의 뜻에 밝았으며 재능이 있었다. 당시 저명한 학자였던 마융馬融의 형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마융이 외척호족外戚豪族이었던 관계로 마융과 상종하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경전에 의문이 있을 때는 마융에게 물어보는 일은 있었다. 조기는 여러 권의 저술이 있었으나 지금은『맹자장구孟子章句』14권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맹자제사孟子題辭’는 바로 조기의『맹자장구』의 서문이다. 송나라 사람인 손석孫奭(962~1033)은 그의『맹자소孟子疏』에서 ‘맹자제사’는 단순히『맹자』라는 책의 ‘서序’를 일컬을 뿐이라고 하였다. 장일張鎰의 의하면 “‘맹자제사’는 서序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조기는 색다른 것을 좋아하여 ‘서序’라고 하지 않고, ‘제사題辭’라고 한 것이다.”
조기가 이 제사를 쓴 것은 후한 말 160년경이다. 그 당시 조기가 읽게 된 책은 그 제목이『맹자』라 불리고 있었고, 각 편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그 편마다 이름이 붙어 있었다. 조기가 접한『맹자』는 내편이 7편, 외편이 4편, 도합 11편이었는데, 외편 4편은 ‘외서外書’로 간주되어 인정하지 않고 내편 7편만을 맹자가 저술한 저작물로 받아들였다. 조기는 이 7편을 모두 상·하 두 편으로 나누어 장구를 저술하였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접하는『맹자』14편은 조기의 편집체계를 따른 것이다. 편명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편이 시작하는 첫 글자를 딴 것이다.
(2) 孟子, 鄒人也。名軻, 字則未聞也。鄒本春秋邾子之國, 至孟子時改曰鄒矣。 國近魯, 後爲魯所幷。 又言邾爲楚所幷, 非魯也. 今鄒縣是也。 或曰, 孟子魯公族孟孫之後。 故孟子仕於齊, 喪母而歸葬於魯也。 三桓子孫旣以衰微, 分適他國。
맹자는 추鄒나라 사람이다. 이름은 가軻라 하는데, 자字는 듣지 못했다. 추나라는 본래『춘추』에 기록되기는 ‘주邾’라 하는 자작子爵의 나라인데 맹자시대에 이르러 이름을 바꾸어 추鄒라고 했다. 이 나라는 노魯나라에 가까이 있었는데, 후에 노나라에 병합되었다. 또 다른 말도 있는데, 주나라는 초楚나라에 병합된 바는 있어도, 노나라에 병합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지금의 추현鄒縣이 바로 추나라 지역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맹자는 노나라의 공족公族인 맹손씨의 후손이다. 그래서 맹자가 제나라에서 벼슬을 살다가 모친이 돌아가시자 노나라에 돌아와 장례를 치른 것이다. 삼환三桓의 자손들도 쇠미해지자 분산하여 다른 나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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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자의 이름이 ‘가軻’라는 것은 모든 기록이 일치한다. 이름을 가軻라고 한 것에 대한 유래가 있다. 맹자의 어머니 장仉씨가 만삭이었을 때 역산嶧山에 기도를 드리러 갔다가 진통을 느껴 돌아오는 길에 수레 안에서 맹자를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맹가孟軻(맹 수레)’라고 했다고 한다.
한편『공총자孔叢子』에는 맹자가 어려서 자사子思를 뵙기를 청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면에는 맹자의 이름이 ‘맹자거孟子車’로 되어 있다. 그런데 송함宋咸(北宋)이 주석을 하기를, ‘맹자거孟子車’는 보통 ‘맹자거孟子居’로 쓰며, 그것은 맹자의 자字라고 하였으며, “맹가는 어렸을 적부터 일찍이 빈곤 속에 거居 하였다. 그리고 감가坎軻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그 이름을 가軻라고 하였고 자자字를 자거子居라 한 것이다.”하였다.
°감가坎軻(坎坷): 때를 만나지 못해 불우하게 삶.
* 주邾나라는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전욱顓頊의 자손에게 봉한 작은 나라였는데, 자작子爵으로 대우했다.
고대에는 다른 나라에 가 있다가도 조상의 고향에 귀장歸葬하는 풍습이 있었다. 지금 전해지는 맹모孟母 묘비墓碑에 의하면, 그 묘는 추현鄒縣 북쪽 20리에 있는 마안산馬鞍山 양지쪽에 있다. 그곳이 노나라 땅은 아니나, 옛날에는 추鄒가 노나라 속지였을 수도 있다(청淸의 염약거閻若璩)
(3) 孟子生有淑質, 夙喪其父, 幼被慈母三遷之敎。 長師孔子之孫子思, 治儒術之道, 通五經, 尤長於詩書
맹자는 나면서부터 좋은 천품을 지니고 있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였고, 어려서는 인자한 어머니의 ‘삼천지교三遷之敎’를 받았다. 자라서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를 스승으로 모시어 유가 학술의 도리를 익히고 닦아, 오경五經에 통달하였고, 더욱이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 능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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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의 생몰연대는 확실한 역사기록이 없다. 여러 설이 있으나 BC372년에 태어나 BC289년에 사망하여 향년 84세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양백준楊伯峻은 BC385년에 태어난 것으로 보며, 전목錢穆은 BC390년에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맹자가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다는 말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맹자는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라는 기록이『궐리지闕里志』『사서인물고四書人物考』등에 있다. 맹자의 아버지는 이름이 격激이며 자가 공의公宜이고 어머니의 성씨는 장仉이라 한다. 그러나 ‘삼천三遷’의 고사가 실려 있는 유향劉向(BC79~8, BC77~6)의『열여전列女傳』에는 맹자가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다는 말은 없다.
맹모에 관하여 추구할 수 있는 최초의 문헌은 한영韓嬰이 쓴『한시외전韓詩外傳』인데, 거기에는 ‘삼천지교’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단기斷機’(其母引刀製其織)의 고사가 간단하게 나올 뿐이고,『열여전列女傳』에 그래도 소상하게 보인다.
맹자가 자사子思를 스승으로 모셨다는 말은 잘못된 것이며, 자사의 문인門人에게 학문을 배웠다고 보아야 한다. 자사의 나이와 맹자의 나이로 볼 때 맹자가 자사에게 사사했을 가능성은 없다. 이렇게 잘못 전해진 것은『열여전列女傳』에서 ‘단기斷機’의 고사 끝에, “이에 맹자가 두렵게 여겨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배워 쉼이 없었다. 자사를 스승으로서 섬기어 마침내 천하에 이름난 대학자가 되었다.”라는 기록 때문이다. 사마천의『사기』「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에는 “맹가는 추나라 사람인데, 자사의 문인에게서 수업을 받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통오경通五經’은 역易·서書·시詩·예禮·춘추春秋에 통달했다는 말이다. 그 가운데 특히 서경과 시경에 능통했다는 것이다.
(4) 周衰之末, 戰國縱橫, 用兵爭强, 以相侵奪。 當世取士, 務先權謀以爲上賢。 先王大道, 陵遲墮廢, 異端並起。 若楊朱 墨翟放蕩之言, 以干時惑衆者非一。
주나라가 쇠미해진 말기, 전국시대에는 전국戰國들이 합종연횡하고 무력으로 강해지기를 다투어 서로 침탈을 일삼았다. 당시 인물을 취택하는 데는 권모權謀를 앞세우는 데에 주력하는 자를 우수한 인물로 삼았다. 선왕의 대도는 소홀히 여겨 폐기되고 이단異端이 많이 일어나 양주楊朱, 묵적墨翟과 같이 방탕한 말로 시대를 모독하고 대중을 현혹시키는 자가 하나 둘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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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縱橫’은 ‘연형連衡(橫)’과 ‘합종合從(縱)’을 합하여 칭한 것이다. 전국시대의 강대국이었던 진秦·초楚·제齊를 둘러싼 열국列國의 연합 내지 대립을 조종하는 술책이다. ‘연형’은 열국이 합세하여 진秦을 지지하는 것, ‘합종’은 진秦에 대항하는 것이다. ‘종횡縱橫’의 술책을 펴도록 한 주역은 소진蘇秦과 장의張儀이었다. 이들은 ‘귀곡선생鬼谷先生’이라는 스승에게 배운 쌍벽이었다.
소진의 합종책은 6국이 위魏나라 중심으로 뭉쳐서 진秦에 대항하자는 종적縱的연맹을 의미한다. 이에 반하여 장의의 연형책은 진나라가 횡적으로 6국과 한 나라씩 개별적으로 강화를 맺어 6국의 단합을 깨뜨리는 계책이다.
*양주楊朱는 위아주의爲我主義를 고집한 사상가이며, 묵적墨翟은 겸애주의兼愛主義를 창도한 선진시대의 사상가이다. 전통 유가에서는 유가이외의 사상을 이단異端으로 치부하였다.
*‘간시干時’는 ‘시대를 모독하다’는 뜻. 한편 ‘간시군干時君’으로 풀어 당시의 국군에게 자기의 주장이나 정책을 채택하도록 하여 자기를 등용하도록 요구하는 것으로 푸는 이도 있다(“방탕한 말로 당시의 국군을 설복하고”(차주환車柱環))
맹자는 요, 순, 탕왕, 문왕, 주공 공자의 위대한 업적이 장차 인멸湮滅하여 쇠미해져서 정도正道가 막히고, 인의仁義가 거칠고 태만해져 입만 살아있는 위선자들이 날뛰고, 불그스레한 자주빛이 주홍빛을 어지럽히게 될 것을 슬프게 여겼다. 이에 맹자는 중니께서 두루 돌아다니며 세상을 우려하던 그 심정을 본받고 사모하여, 마침내 유가의 도를 가지고 제후들에게 유세遊說하고 백성들을 구제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맹자는 한 자를 굽혀 한 길을 펼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런 짓을 하지 않았던 관계로, 당시의 국군들은 모두 그가 실제의 일에 우활迂闊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끝내 그의 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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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도閔悼: 애석해 하고 슬퍼하는 것. 민閔은 ‘민憫’의 뜻이다.
*인미湮微: 막히고 미약해짐.
*옹저壅底: 밑바닥이 막히다.
*칙모則慕: 본받고 사모함. 초순焦循(淸)은 “법으로 받들어 익힘”이라 하였다. *영위佞僞: 아첨하고 거짓됨.
*홍자난주紅紫亂朱: 간색間色인 자색紫色이 정색正色인 주색朱色을 어지럽힌다는 뜻으로, 사이비似而非가 세상을 어지럽게 함을 말하는 것이다.
*주류周流: 두루 돌아다님.
*왕척직심枉尺直尋: 한 자를 굽혀서 한길을 편다는 말로, 작은 것을 희생시켜 큰 것을 살리는 것을 뜻함. 왕枉은 굽힘, 척尺은 한 자, 직直은 곧게 폄, 심尋은 여덟 자이다. 「등문공 하」제1장에 나온다.
*우활迂闊: 실제 사정에 어두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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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또한 주나라 희姬씨 왕실의 통치가 끝난 때를 맞아서, 그리고 한나라 유劉씨가 아직 분발하지 않은 때를 맞아서 스스로 깨달았다. 정치를 하려 세상에 나간다 해도 요·순 시대의 즐겁고 광명했던 화평한 세대를 일으키는 것에 도움을 줄 수 없고, 물러나 속세에 있다한들 하·은·주 삼대의 남아있는 미풍을 진작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맹자 자신이 세상을 하직하면 알려지지 않을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는 모범이 될 만한 말을 적어 드리워서 후세 사람들에게 남겨준 것이다. 중니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추상적이고 공허한 말에 의탁하려 했으나, 그것은 실제로 행하는 일의 과정을 기술하는 것과 같이 심히 절실하고 현저하게 명백한 것만 같지 않다”
이리하여 맹자는 정치현실에서 물러나, 우수한 제자 공손추·만장 등과 의심나는 것을 해설하고 질문에 대답한 것을 정리하여 모으고, 또 그의 법도가 되는 말을 손수 써서 책 7편을 저작하였으니, 그것은 도합261장, 34,685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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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희蒼姬: 주周왕조. 주周는 금金목木수水화火토土 오행五行 중에서 목덕木德에 속한다 하여, 주周의 성인 희姬를 목색木色인 창蒼을 붙여 창희蒼姬라고 부른 것이다.
*흘록訖錄: 종주권이 끝날 무렵. ‘록錄’은 ‘통솔’. ‘흘訖’은 ‘다하다’ ‘끝에 이름’
*조遭, 치値: 맞아서, 당하여,
*염유炎劉: 한漢왕조. 한漢은 유성劉姓인데, 화덕火德으로 왕이 되었다고 하여 ‘염유炎劉’라 한다.
*당우唐虞: 당唐은 요堯의 봉호封號, 우虞는 순舜의 봉호.
*옹희雍熙: 기뻐하고 밝은 모양.
*신信: ‘신伸-펴다’의 뜻.
*수헌언垂憲言: 법도가 되는 말을 천에 적어 드리우다.
*이후인詒後人: 후세 사람에게 주다. ‘이詒’는 ‘주다’
*난의難疑: 의문이 되는 것을 해설함. ‘난難’은 ‘해설하다’『여씨춘추呂氏春秋』「악성편樂成篇」고유高誘의 주註에 “난難은 해설이다. 難, 說也” 하였다.
*자찬自撰:『맹자』를 맹가孟軻가 저술하였다는 데는 이설이 있다. 조기趙岐는, 제자들과의 문답부분은 제자가 기록한 것을 맹가 자신이 정리 편차編次하고, 그 이외의 것은 직접 자기가 쓴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당唐 한유韓愈는 “맹가의 책은 가軻 자신이 저술한 것은 아니다. 가軻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제자인 만장과 공손추가 같이 가軻가 말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하였다. 송宋 조공무晁公武는 한유의 설을 지지하였고, 청淸 염약거閻若璩는 한유의 설을 받아들이지 않고, 7편은 맹자의 자작이고, 나머지는 맹자가 죽은 후에 그의 문인들이 정리하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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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맹자7편은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것을 망라하고, 만 가지 물류物類의 이치를 헤아려 서술하고, 인의도덕과 성명화복性命禍福이 찬연하게 실려 있지 아니한 바가 없다. 제왕 공후가 그것을 준수하면 융성과 화평을 가져와 종묘에서 그 덕을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경, 대부, 사가 그것을 실천하면 임금과 지아비를 높이고 충성과 신의를 세울 수 있을 것이고, 뜻을 지키고 지조에 힘쓰는 자가 이를 본받으면 높은 절개를 숭상하고 뜬구름과 같은 세상의 권력에 항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문장은 시인{風人}이 사물에 비유하여 대아大雅 소아小雅에 견줄만한 정아正雅한 말이 들어있다. 맹자야말로 곧으면서도 오만하지 않고, 휠 줄 알면서 굽히지 않으니, 이 세상에 그 이름 드높은 성인에 버금가는 위대한 인재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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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라包羅: 모든 것을 포함하여 망라함.
*규서揆敍: 헤아려 서술하다.
*성명性命:사람의 본성과 천명.『맹자』에서 논구되는 개념이다.
*수지려조守志厲操: 뜻을 지키고 지조를 단련하다.
*항부운抗浮雲: ‘뜬구름과 같이 허무한 세상의 권력과 부와 명예’에 항거하다. 『논어』「술이」15장에는 공자가 “의롭지 못하고서 부유하고 지위가 높은 것은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을 뿐이다.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라 하였다. *풍인지탁물風人之託物: 시인이 만물에 비유하여 시를 읊다. 풍인風人은 시인.
*이아二雅:『시경』의「소아小雅」「대아大雅」
*명세命世: 세상에 이름이 드높음. 명命은 명名의 뜻.
*아성亞聖: 성인聖人 공자 다음가는 성인. 조기는 맹자를 ‘아성’이라 하였는데, 이는 획기적인 일이다. 맹자는 당시 제자諸子 중의 한 사람일 뿐이었는데, 우리가 ‘공맹孔孟’이라고 부르는 것도 송대宋代이후에 생긴 것이다. 조기가 아성으로 호칭한 이래 원대元代에 맹자 존숭이 극대화 되면서 문종文宗때에 맹자에게 ‘아성亞聖’이라는 칭호가 부여되었다(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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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간 후에 음악이 바로잡혔고, 아雅와 송頌이 제자리를 잡았다. 그리고『시경』을 산정刪定하고『서경』을 교정校定하고, 『주역』에 해설을 붙이고,『춘추』를 지었다. 맹자는 제齊나라와 양梁나라를 물러나와 요임금과 순임금의 도를 풀이하여 책을 저작하였다. 이것은 위대한 현인이 성인의 뜻을 본받아서 저작한 것이다. 70인의 동아리들이 공부자가 말씀한 것을 두루 모아서『논어』를 만들었다.『논어』는 오경五經의 관건이고 육예六藝의 요체이다. 맹자의 책은 그것을 본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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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자위반노孔子自衛反魯, 연후악정然後樂正”은『논어』제9「자한」14장에 나오는 말이다. 위나라 영공에게서 아무런 희망적인 면모를 찾을 수 없자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왔다. 이는 노나라 애공哀公 11년(BC484) 겨울이었다. 이 때 공자는 68세였다.
*산시정서刪詩定書, 계주역繫周易, 작춘추作春秋: 공자가 시詩를 산정刪定(취사하여 정함)하고, 서書를 교정校定(대조하여 바로잡음)하고,『주역』에「계사繫辭」 상·하를 비롯한「십익十翼」을 달고『춘추』를 지었다.
*칠십자지주七十子之疇: 공자의 제자 가운데 육예에 통달한 자가 72인이라 했다. ‘주疇’는 ‘무리’라는 뜻인데, 지금 사용하는 ‘동아리’와 같다.
*관할錧鎋: 수레의 비녀장. 수레의 바퀴를 고정시킬 때 수레 끝에 꽂는 쇠. 사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나타내는 뜻으로 쓰인다. ‘관건關鍵’으로 풀었음.
*후금喉衿: 후喉는 목구멍, 금衿은 옷깃을 여미는 부분. 하나는 인체 내부의 요긴한 부분이고, 하나는 인체 외부의 요긴한 부분이다. 이를 합하여 ‘본령本領’ ‘요체要諦’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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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나라 영공이 공자에게 군대의 진법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공자는 예법의 조두俎豆의 일로써 대답했다. 양혜왕이 맹자에게 나라를 이롭게 하는 것을 물었다. 그런데 맹자는 인의仁義로써 대답했다. 송나라 환퇴가 공자를 죽이려 했을 때 공자는 하늘이 나에게 덕을 내려주셨다고 말했다. 노나라 장창이 맹자를 훼방하여 이간시키자, 맹자는 “장씨의 딸이 어찌 나로 하여금 임금을 만나지 못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공자와 맹자의 뜻이 일치하는데, 이러한 것이 한 둘이 아니다. 또 외서外書 4편이 있으니, 즉 성선性善, 변문辯文, 설효경說孝經, 위정爲政편이다. 그런데 그 글이 폭이 넓거나 뜻이 깊지 못하고, 내편과는 같지 않다. 맹자 본인이 쓴 진품이 아닌 듯하며, 후세의 사람들이 맹자를 모방하여 그 이름을 맹자에 기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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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공衛靈公이 공자께 군대의 진법陣法을 물었는데, 공자는 “조두俎豆에 관한 일은 일찍이 들은 바가 있으나, 군대에 대한 일은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라 하고 다음날 위나라를 떠났다. 이는 『논어』제15「위령공」1장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진법陳法은 ‘진법陣法’으로 군대의 일이고, 조두俎豆는 의례儀禮의 일이다. 공자는 위령공에게서 어떠한 희망적인 조짐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양혜왕이 나라를 이롭게 하는 일을 물었을 때, 맹자는 인의만이 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이 이야기는『맹자』「양혜왕장구 상」1장에 나온다.
*송나라의 환퇴가 공자를 위해하려고 한 이야기는『논어』제7「술이」22장에 보인다. “공자가 말했다. 하늘이 나에게 덕을 주셨는데, 환퇴 그가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 이는『사기』「공자세가」에도 보이는데, 애공哀公3년, 공자나이 60세 즈음의 일이라고 한다. 환퇴는 성이 상向이고 이름이 퇴魋다. 송나라 환공桓公의 후예이므로 환퇴라고 부른다.
장창臧倉은 맹자 당시 노魯 평공平公의 애첩이다. 평공이 맹자를 만나려 나가려고 할 때 장창이 나서서 맹자가 현량賢良한 인물이 아니라고 못나가게 말렸다는 것이다.「양혜왕 하」제16장에 나온다. ‘훼격毁鬲’은 헐뜯어 이간시키는 것이다. ‘격鬲’은 ‘격隔’과 같다.
*『맹자』7편 외에 〈외서外書〉4편이 존재했다. 반고班固의『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는 『맹자』11편이 저록著錄되어 있다. 그런데 조기는 이 〈외서〉를 배척했다. 그 글의 뜻이 깊지도 넓지도 못하여 내편에는 미치지 못하였다.〈외서〉4편은 ‘성선변·문설·효경·위정性善辯文說孝經爲政(正)’인데, 끊어 읽는 방법이 두 가지이다. 북송의 손석孫奭(962~1033)은 “성선변性善辯, 문설文說, 효경孝經, 위정爲政(正)”으로 끊었다. 왕충王充이 지은『논형論衡』「본성편本性篇」편에는 “맹자작성선지편孟子作性善之篇”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를 보면 맹자가 지은 「성선性善」이라는 편이 있다는 것이고, 그에 따라서 “성선性善, 변문辯文, 설효경說孝經, 위정爲政(正)”으로 끊어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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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가 세상을 뜬 후에는 대도大道는 마침내 버림을 받았다. 지금은 망해 없어진 진나라 때에 이르러 경술經術의 책을 태워 없애고 유생들을 생매장하여 죽여, 맹자의 도당은 자취가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맹자』라는 책은 제자諸子의 책으로 불리어졌기 때문에 그 편적篇籍이 없어져버리지 않는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한漢나라가 일어나자, 진나라의 포학한 금령들을 해제하고 도덕의 길을 열어 펼치게 되었다. 한 효문황제孝文皇帝(한문제)는 유학의 길을 넓혀주고자 논어, 효경, 맹자. 이아爾雅를 교수하는 박사를 두었다. 후에는 전기傳記박사를 폐지하고 오경五經에만 박사를 두었을 뿐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 경서의 뜻을 풀이하는 데에 맹자를 인용하여 고사를 밝힐 수 있으면 박학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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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지遞至:~에 이르러. 체遞는 ‘이르다’, 지至도 ‘이르다’는 뜻인데, 같은 뜻의 글자 둘을 합해서 한 낱말이 된 ‘복어複語’이다.
*분멸경술焚滅經術: 경전에 관한 학술 서적을 태워 없앤 것. 진시황秦始皇 34년(BC213) 이사李斯의 건의로 진秦나라의 기록과 의약, 복서卜筮, 종수種樹(나무심기)에 관한 것을 제외한 모든 책을 불살랐다.(『사기』「진시황본기」)
*갱육유생坑戮儒生:유생들을 산 채로 구덩이에 매장해 죽인 사건. 진시황35년에 유생 460여 사람을 잡아다가 함양咸陽(진의 수도.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장안현長安縣 서북쪽)에서 생매장 했다.
* “『맹자』라는 책은 제자諸子의 책으로 불리어졌기 때문에 그 편적篇籍이 없어져버리지 않는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반고班固의『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는『맹자』가 ‘제자서諸子書’에는 들어 있으나, 진나라의 분서焚書에 ‘제자서諸子書’가 제외 되었다는 전거典據는 알려진 게 없다. 조기가 당시에 무슨 근거로 제외 되었다고 했는지는 모른다.
*제진학금除秦虐禁:진에서 시행하였던 포학한 금지령을 해제했다. 금서禁書를 소지하면 처벌하였던 법령{협서령挾書令}을 해제 했다.
*개연開延: 길을 열어서 맞이함.
*『이아爾雅』: 13경의 하나로 가장 오래된 자서字書. 천문 지리 음악 기재器財 초목 조수 등에 관한 고금의 문자를 설명하였다. 저자 미상.
*박사博士: 관명官名. 박사를 둔 것은 진나라 때부터다. 한 문제文帝 때에는 그 범위를 넓혀 논어, 효경, 맹자, 이아 같은 전기傳記박사를 두었다. 그 후 한 무제武帝 건원建元 5년(BC136)에 전기박사는 폐지하고 오경박사(역易·시詩·서書·예禮·춘추春秋의 전공박사)만을 두었다. 이로써 ‘맹자박사’는 효문제 때부터 무제 때까지 약40년 간 존속되었다. 전기박사란 제자諸子·유가경전儒家經典·술수術數·방기方技 등 넓은 주제를 전공하는 박사를 이른다.
*흘혜訖兮: 지금에 이르기까지. 흘訖은 이르다, 곧 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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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는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데 장기가 있었고, 그 언사가 박절하지 않으면서 말하고자 하는 뜻이 읽는 사람에게 저절로 이르도록 하였다. 그의 말 가운데 “시詩를 해설하는 자는 한 글자의 뜻 때문에 시 전체의 뜻을 해치지 않고, 말 때문에 시인의 표현하고자 하는 뜻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 시를 읽는 자의 뜻을 가지고서 시를 지은 자의 뜻을 거스르지 않아야 시의 본뜻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은 후세의 사람들로 하여금 문장의 의도를 깊이 찾아서 그 글을 풀이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말은 비단 시를 해석하는 데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맹자』해설자들은 왕왕 여기저기서 부분적인 것을 주어모아서 해석하고, 또 그 해석이 일그러지고 이상하여 전후가 맞지 않는다. 맹자이후 5백여 년이 흘렀고,『맹자』를 해설하는 사람들도 이미 허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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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어비유長於譬喩: 비유를 들어 말하는 데 능란하다. ‘장長’은 동사.
*“설시자說詩者”운운한 말은 「만장 상」3장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말 중에 ‘이의역지以意逆志’는 ‘불이의역지不以意逆志’로 전구前句의 ‘불不’이 여기까지 걸리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시를 읽는 독자의 뜻을 가지고서, 시를 지은 자의 뜻을 거스르지 않아야한다”는 뜻이다.
*왕왕척취이설지往往摭取而說之: ‘척취摭取’는 ‘주어서 갖다’는 뜻. “시를 해설하는 자들이 가끔 여기저기서 부분적인 것을 주어모아서 해설한다.”는 뜻.
*기설우다괴이부동其說又多乖異不同: 그 해설이 또 어그러지고 이상하여 일관성이 없다.
*전지자傳之者: 『맹자』해설한 사람. ‘전傳’은 ‘풀이하다’ ‘해설하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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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조기는 서경西京에서 태어났는데, 세세로 천자의 지위地位를 더듬어 올라가다 보면 나의 집안의 내력을 거기에서 알 수 있다(대대로 큰 벼슬을 살아온 지가 오래 되었다. 조나라의 영왕靈王이 5대조다). 어려서는 올바른 교육을 받았고, 경전의 글도 배우게 되었다. 50이 되어서 하늘까지 닿을만한 슬픈 일에 얽히어 위난危難에 직면하게 되었다. 성姓을 바꾸고 몸을 숨겨가며 온 세상을 두루 헤매고 다닌 것이 10여 년이나 되었으니, 마음이 조이고 몸이 지친 것이 그보다 더할 수가 없었다. 북해군北海郡과 태산泰山 사이, 곧 안구安丘에서 짐을 풀어놓고 어깨를 편적이 있었는데, 우연히 온고지신溫故知新하는 아름다운 덕을 지닌 군자를 만났다. 내가 고생하는 것을 불쌍하게 여기고, 내 흰 머리를 보고는 온정을 베풀고, 찾아와 학문을 토론하며 옛 성인의 말씀을 상고하면서, 대도大道로써 나를 위로 하여 주었다. 그때 나는 곤궁 속에서 정신이 허공에 떠서 집중되지 않았으나, 부족하지만 그대로 글 쓰는 데에다 뜻을 붙여, 사념思念들을 다스리고 늙은 것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서경西京: 조기는 경조京兆 장릉長陵 사람이다. 경조京兆는 서한西漢(前漢)의 수도였으므로 서경西京이라 한 것이다.
*세심비조世尋丕祚: 세세로 더듬어 올라가면{世尋} 큰 벼슬{丕祚}을 하였다. ‘심尋’은 ‘역繹-찾다’이고, ‘조祚-자리(位)’는 ‘천자의 지위’를 뜻한다.
*소몽의방少蒙義方: 어려서는 올바른 법도(교육)을 받았다.
*훈섭전문訓涉典文: 훈육이 전문에까지 들어갔다. ‘훈訓’은 공부. ‘섭涉’은 ‘들어가다’
*지명지제知命之際: 지천명知天命의 해. 50세가 되던 때. “오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논어』제2「위정」4장)
*영척어천嬰戚於天, 구준이건遘屯離蹇: 하늘에 까지 닿을 만한 슬픔에 얽히어, 위난에 직면하게 되었다.(이 때 조기의 집안은 대소가가 모두 몰살을 당했다.) ‘영嬰’은 ‘당하다’ ‘얽히다-요繞’의 뜻. ‘구준遘屯’은 ‘어려움에 처하였다’는 뜻이다. ‘구遘’는 ‘만나다’는 뜻이고, ‘준屯’은 ‘어려움’이다. ‘이건離蹇’도 ‘난처함에 빠졌다’는 뜻이다. ‘이離’는 ‘이罹-걸리다’는 뜻이고, ‘건蹇’은 절름발이를 뜻하는 자로 ‘어려움에 처한 것’을 뜻한다.
*궤성詭姓: 성을 속여 바꾸어 말하다. ‘궤詭’는 ‘속이다’ ‘둔신遁身’은 몸을 숨기는 것임.
*경영팔굉지내經營八紘之內: 온 세상을 두루 헤매고 다님. ‘경영經營’은 ‘왔다 갔다 돌아다님’ ‘팔굉八紘’은 ‘중국 천지 끝에서 끝까지’ ‘굉紘’은 ‘넓다’
*심초형채心剿形瘵: 마음이 괴로워 피곤하고 몸이 지쳐서 앓다. ‘초剿’는 ‘초勦’와 같은 뜻으로 ‘마음이 괴로워 피곤한 것’. ‘채瘵’는 ‘앓는다.’
*하근여언何勤如焉: 무슨 어려움이 이와 같으랴? ‘근勤’은 ‘고苦-어려움’
*상식견이담嘗息肩弛擔: 일찍이 어깨를 쉬려고 짐을 내려놓았다. 이 때 조기는 시장에서 판을 메고 떡장수를 하면서 연명했다.
*해대지간海岱之間: 북해군北海郡과 태산泰山 사이. 조기를 구원해준 손숭孫嵩이 살던 안구安丘를 가리킨 말.
*혹유온고지신或有溫故知新: 우연히(때마침) ‘온고지신’하는 이, 곧 손숭孫嵩 을 만났다. ‘온고지신’은 『논어』제2「위정」11장에 나오는 말로, “옛것을 익히어 새 것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긍아구췌矜我劬瘁: 내가 매우 고생을 하는 것을 불쌍하게 여기다. ‘구劬’는 ‘수고롭다’ ‘애쓰다’는 뜻. ‘췌瘁’는 ‘애쓰다’ ‘근심하다’는 뜻.
*권아호수睠我皓首: 내 흰머리를 돌아보다.
*방론계고訪論稽古: 찾아와서 토론하고 옛것을 상고하였다. *여곤린지중余困吝之中: 나는 곤궁한 가운데 있었다.
*정신하표精神遐漂: 정신이 멀리 떠돌아다니다. 하遐; 멀 하. 표漂; 떠다닐 표 *미소제집靡所濟集: 정신이 안정하고 집중되지 않게 하다. 미靡는 금지하다, 멸滅하다 는 금지사.
*요욕계지어한묵聊欲係志於翰墨: 부족하지만 그대로 한묵翰墨(글 짓는 일과 글씨 쓰는 일) 에다 마음을 붙이려 했다. ‘료聊’는 ‘부족하지만 그대로’의 뜻. ‘계지係志’는 ‘마음을 붙들어 매다’, 곧 마음을 붙이다.
*난사유노亂思遺老: 생각을 다스리고 늙는 것을 잊게 되었다. ‘란亂’은 ‘치治’의 뜻.(『논어』제8「태백」20장에 ‘치治’로 쓰인 예例가 있다) ‘유遺’는 ‘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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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육경六經에 관한 학문은 선각先覺의 선비들이 풀이하고 분변한 것이 이미 상세하다. 유가에서는 오직『맹자』만이 웅대하고 심원하여 미묘하니 그 심오한 뜻을 알기 어려워 마땅히 조리 있게 해설하여야 할 과목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들어서 아는 것을 기술하고 경서와 경서를 해설한 주석들로써 그것을 증명하고, 장구章句를 만들어서 그것을 모두 본문에 실었다. 그리하여 각장마다 그것의 가리키는 뜻을 별기別記하고, 매편每篇을 상·하로 갈라 도합 14권이 되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이〈맹자장구〉는 학문을 통달한 분들에게는 감히 내놓을 수 없을 것이다. 초학자들에게 활용된다면 의심나는 곳을 깨치고 의혹을 분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나 역시도 아직 이 책의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고 있으므로, 후세의 명철한 분들이 그 잘못되고 빠트린 데를 바로잡아 준다면 또한 좋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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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적六籍: 육경六經. 시詩·서書·역易·예禮·악樂·춘추春秋
*굉원閎遠: 뜻이 크고 심원함.
*온오縕奧: 심오한 뜻. 온縕은 ‘솜옷’. 오奧는 ‘깊은 아랫목’
*조리지과條理之科: 조리 있게 해설해야할 부분.
*장구章句: 장章과 구句를 구별하여 읽고 이해하는데 편리하게 하는 것. 한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두점句讀點이 없이 연속되어 이해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주석을 할 때 장章과 구句를 구분하는 것은 이래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그래서 ‘장구章句’는 ‘주석註釋’이라는 뜻과 비슷한 뜻으로 쓰인다.
*오의변혹寤疑辯惑: 의심나는 점을 깨달아 의혹을 분변함. 오의변혹悟疑辨惑. *우愚: 어리석은 이 사람. 필자 자신을 지칭함.
*위궐違闕: 바른 뜻에 어긋나고, 해야 할 말이 빠짐.
*당儻: 만약에
*정저正諸: 이것을 바로잡음. ‘정지正之’와 같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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