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시사뉴스에서는 늘 독도문제를 다뤄왔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중점으로 알찬 내용을 독자여러분께 바르게 알리기 위해서 노력 하던 중 이번에 전 국민에게 애국심을 심기위해 새롭게 말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이런사람’을 통해서 애국자(독립운동가)를 소개해 나갈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첫 번째로 유관순 독립운동가의 정신을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유관순(柳寬順)은 1902년 11월 17일(음력) 충남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현재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梯) 사이의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집안에서 가장 먼저 개신교에 입문한 사람은 작은 할아버지 유빈기로 한글 성경을 파는 매서인이 되어 선교사를 이끌고 귀향했다고 합니다. 이후 숙부 유중무가 개신교를 받아들이면서 일가친척들도 개신교인이 되었습니다. 유관순은 조상과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는 유교적 문화도 받아들였고, 한편으로 교회에 다니며 자유와 평등의 기독교 사상의 영향도 받았던 것입니다. 숙부가 지령리 교회의 교사로 활동하면서 유관순도 5세를 전후해 개신교를 접하였고, 이후 유관순에게 교회가 배움터요,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유관순이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선진학문을 수용하며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키워 가던 시기에 우리 민족은 독립운동의 호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18년 1월 8일 연합국 측을 대표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전후 처리지침으로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천명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초 우리 민족은 이 같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독일 · 오스트리아 등 패전국 식민지에만 적용되고, 연합국 측의 일원으로 승전국인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한국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한국 민족이 이 기회에 대동단결하여 민족독립을 요구하면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하는 기대감 속에서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여 갔습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사정상 불참한 4인을 제외하고 태화관에 집결한 29인의 민족대표들은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습니다. 독립선언식은 민족대표들이 이종일이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돌려보고, 한용운의 연설에 이어 만세삼창을 하는 것으로 간단히 끝났습니다.
하지만 탑골공원에서는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이 모여 있다가 2시 30분경 독자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곧 시가지로 물밀듯 밀려나가 만세시위를 전개함으로써 3․1운동의 불꽃을 지폈습니다. 이날 서울의 만세시위는 날이 저물도록 시내 도처에서 전개되었습니다.
유관순 또한 이 같은 3․1운동 추진 계획을 이화학당 내의 비밀결사인 이문회(以文會) 선배들을 통하여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3월 5일 유관순은 5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서울에서 전개된 최대의 시위운동인 남대문역(서울역) 만세 시위운동에도 참여하였습니다. 3․1운동 학생 대표였던 강기덕과 김원벽 등이 주도한 이 날의 만세 시위운동에는 유관순을 비롯한 서울지역의 학생 거의 전부와 광무황제의 인산을 마치고 귀향하던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만여 명에 이른 시위행렬은 인력거를 타고 '대한독립기'를 앞세운 강기덕과 김원벽을 따라 한 갈래는 남대문 시장으로부터 한국은행을 거쳐 보신각에, 다른 한 갈래는 남대문으로부터 대한문 앞과 을지로 입구를 거쳐 보신각에 이르렀습니다. 유관순 또한 이 날의 만세 시위운동에 동참하여 민족 독립의 열기를 분출하며 항일 독립의지를 다져가고 있었습니다.
이같이 학생들이 3․1운동에 대거 참여하고, 학교가 만세 시위운동의 계획 추진 기지가 되어 가자 조선총독부는 3월 10일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대한 임시휴교령을 반포하였습니다. 이에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유관순은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고향에 전하고, 또 거기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하여 유관순은 3월 13일 사촌 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 가지고 귀향하여 본격적으로 고향에서의 만세 시위운동을 추진하여 갔습니다.
드디어 4월 1일 병천면 아우내 장날, 유관순은 장터 어귀에서 밤새 만든 태극기를 나누어 주면서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러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오후 1시 3천여 장꾼이 장거리를 뒤덮었습니다.
시위 대열이 아우내 장터 곳곳을 누비자 병천 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을 휘두르며 만세 시위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이들의 지원 요청으로 천안 일본군 헌병분대원들과 수비대원들이 도착하여 총검으로 시위 운동자들을 학살함에 따라 이 날 19명의 사망자와 30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이 "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느냐"라고 항의하다가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순국하였고, 이를 보고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고 달려들다가 유관순의 모친마저도 일본 헌병들에게 학살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유관순은 숙부인 유중무(柳重武)와 조인원 · 조병호(趙炳鎬) 부자, 김용이(金用伊) 등과 함께 군중들을 이끌고, 아버지의 시신을 둘러메고 병천 헌병주재소로 쇄도하여 항의 시위를 계속하였습니다.
헌병들은 재차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시위 군중들을 해산시킨 뒤, 그날 저녁 유관순과 유중무, 조인원 · 조병호 부자 등 시위 주동자들을 체포하여 천안헌병대로 압송하였습니다.
유관순은 천안헌병대에서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시위 주동자라고 말하면서 죄 없는 다른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호통 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공주감옥으로 이송될 때에는 군중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날 때마다 독립만세를 연이어 고창하여 불굴의 독립의지를 표출하기도 하였습니다.
유관순은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는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상고하지 않아 형이 확정되었습니다. 함께 재판받았던 아우내장터의 만세시위주도자들은 재판결과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9월 11일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유관순은 서대문 감옥에서의 온갖 탄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옥중 만세를 불렀습니다. 특히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을 맞이해서는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유관순은 지하 감방에 감금되어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유관순은 고문으로 인해 방광이 터지는 중상을 입었으나 치료하지 못한 채 고문의 후유증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경, 서대문감옥에서 18살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습니다.
10월 12일에서야 유관순의 시신을 이화학당에서 인수하였고,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라 조국은 빼앗기면 큰일이 납니다. 지금도 북한이 핵무기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군사력에 결코 게을리해서는 안 되고 나를 지키는 일에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조국 대한민국을 지키기에 애국심을 갖고 노력합시다. 이 조국을 더 아름답게 가꾸어 가며 열심히 노력합시다.
자료발췌
[네이버 지식백과] 유관순 [柳寬順]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제공처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