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요. 이건 아무 것도 아니죠
우리 성당에서는 매월 두 번째 토요일 10시 미사는 환우들을 위한 미사로 지낸다. 미사 끝에 환우들을 위한 강복기도가 있고, 이어서 신부님께서 환우들에게 안수를 주신다. 병중에 있는 환우가 앞자리에 미리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안수를 받는 경우도 있지만 미사에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성체 대열로 줄을 서서 안수를 받고 들어온다.
모두들 어디가 아프고 안 좋은 건가, 어느 정도 아파야 환우라고 할 수 있는가, 젊은 사람들도 저렇게 나가는데 나도 나가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시 들지만 나는 매번 그냥 자리에 남곤 한다. 대신 몇 몇 교우의 건강 상태와 그로 인한 고통을 알고 있기에 안수의 은총으로 그들이 치유 받기를 자리에서 기도한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하는 질문을 받을 때면 으레 “네, 좋아요.”라고 한다.
물론 혈압약을 먹고 있고, 정기적으로 신장기능을 체크하며, 과하게 움직일 때면 숨이 차거나 심장이 두근거리고 무릎도 뻣뻣해지곤 하기에 좋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를 그저 늙어 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생각하기에 그렇게 답한다.
못 견디게 아프거나 몸 저 누워있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살고 있던 중 뜻밖에 환자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齒) 한 개가 흔들려 치과를 찾아간 것이 계기였다. 어릴 적부터 이(齒)가 부실하여 겨우겨우 씹으며 살아왔기에 늦은 나이 임에도 용단을 내려 새로운 이를 갖기로 하고 전면치료에 들어간 것이다.
치조골 이식 수술의 통증도 힘들었지만 씹을 수 있는 이가 없다 보니 모든 음식을 갈아서 먹게 되는 시간이 예상보다 길어지게 되었다. 면역력이 떨어지면 안 되기에 맛은 몰라도 영양가 있는 재료를 골고루 먹으려 노력하니 다행히 기운이 떨어지지는 않아 생활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다.
그러나 먹을 것의 가치는 칼로리와 영양가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음식의 맛은 씹는 데서 온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넣고 조리를 해도 음식을 갈아서 먹는 것은 삼키는 것이지 먹는 것이 아니었다. 뇌는 음식을 씹을 때의 그 식감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그 많은 음식 중에 내가 먹을 수는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은 괴롭기도 했지만 처음으로 겪어 보는 새로운 경험이기도 했다.
이번 경험은 병중에 있는 지인들과 저 세상에 가 있는 부모 형제들을 부쩍 생각나게 해 주었다. 인후암 수술을 했던 오빠는 암은 성공적으로 제거가 됐는데 수술 후유증으로 식도 유착이 와서 옆구리를 뚫어 경관식을 섭취한 채 3년을 살았다. 거실에서 식탁에 둘러 앉아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동안 오빠는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가 주사기로 넣어주는 유동식으로 식사를 대신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인지력도 정상이고 입맛도 살아 있는 오빠에게 못할 짓을 하였다는 생각에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아파 봐야 아픈 사람을 이해하게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면서 그동안 나는 병중에 있거나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기억할게요. 함께 할게요.”라는 말을 너무 쉽게, 건성으로 하지 않았나 돌아보게 된다. 그래서 요즘에는 누가 아프다거나 고통 중에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잠시라도 눈을 감고 그가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느껴 보려고 한다.
치과 치료는 조만간 끝이 날 것이고 그동안 못 먹었던 음식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 날도 멀지 않았다. 이것은 병도 아니고 단기간에 끝을 보는 것이기에 지금의 나는 분명 아픈 사람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언젠가 정말로 병인(炳人)의 삶이 시작되는 날이 내게도 찾아올 것이다.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누구도 피하지 못하는 자연의 섭리이다. 그것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대신 해 줄 수 없는, 당사자 혼자서 지고 가야 하는 힘들고 외로운 길이다. 그때야말로 십자가 위의 예수님과 그 아래 계셨던 성모님과 동행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또한 나를 위해서도 일상의 수고를 바치고 기도로 도와 줄 누군가가 있을 거라는 믿음이 큰 위로와 힘이 될 것이다.
요즘도 만나는 사람들마다 하나같이 “아직도 치료가 끝나지 않았어요? 밥은 잘 먹고 있나요? 힘들어서 어떡하죠?”라고 걱정해 준다. 그러면 나는 매번 똑같은 말로 대답한다. “괜찮아요. 이건 아무 것도 아니죠...”
2020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