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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산악평론크럽 원문보기 글쓴이: 알타이
을 번역하다 힘이 달려 멈춘 것입니다. 역시 항목과 부합하지 않은 글이지만 그 어떤 책보다 알피니즘의 역사를 잘 갈파하고 있다고 여겨 올려보았습니다. 존경하는 클라이머 유학재씨한테 해외 벽등반을 떠나기 전 읽어보라고 메일을 보낸 것 외에는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회가 오면 번역을 완성한 뒤 스코트의 추천사를 붙여 출판하고 싶습니다.
거벽등반
Doug Scott
1. 크리스 보닝턴의 서문
등산가는 상충되는 두 가지 동기를 가지고있다. 하나는 모험의 욕구, 클라이머로서 그 위험한 놀이의 쾌감을 만끽하면서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자 하는 욕구고, 다른 하나는 자기방어라는 본능적 욕구다. 따라서 클라이밍의 가장 순수한 모습은 자일도 확보수단도 없이 산의 난관을 극복해나가는, 단독등반의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때 실수를 한다면 그는 추락을 면치 못하고, 그리고 그의 모든 것을 잃는 댓가를 치르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그 댓가를 순순히 수용하기보다는 만회할 기회를 노리는 바, 이것이 바로 클라이밍 기술이 수세기동안 발전해온 이유의 하나다. 그리하여 클라이머는 날이 갈수록, 보다 어려운 데서, 비할 수 없이 안전한 모험을 즐길 수 있게되었다.
클라이머들은 항상 등반윤리의 문제-보다 강파르고 보다 어려운 바위나 얼음벽을 무찌르는 것, 그리고 스스로에게 용인한 한도 내에서의 안전장치와 확보수단, 이 둘 사이의 미묘한 저울대 조절이라는 문제를 되씹어왔다. 이러한 현대등반의 기술과 윤리 문제를 토론에 붙이고 지식을 전파하는 데 있어서 더그 스코트의 기여는 지대한 것이었다. 이 책은 따라서, 여느 단순 기술서와는 사뭇 다르다.
이 책은 현대 클라이밍의 발전을 어느 나라 어느 책보다 완벽하게 고찰하고있다. 여러 산악지대의 여러 그룹, 산을 재미로 오른 인간들이 그 짧다 하면 짧은 기간에 이룩한 이 스포츠의 발전상을 절묘하게 비교하면서다. 이 기초 위에 스코트는, 클라이밍의 윤리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제시하고 2장의 클라이밍 기술로 나아갔다.
마지막 장에는 주요 클라이밍 대상지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망라되어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여러 가지가 하나로 뭉뚱그려진 셈이다.
이것은 아주 읽을 만한 책이다. 단단한 역사서면서 테크니컬 클라이밍의 핸드북으로서도 이전의 어느 책보다 쉽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책이 젊은 클라이머들에게 등산이라는 스포츠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사유의 양식(糧食)과, 기슭에서 꼭대기까지 오름에 있어 장비라는 기술 보조수단을 어느 정도까지 써야하는가에 대한 답도 주고있다는 점이다.
스코트는 이 책을 쓸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다. 그는 거벽등반에 매료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아프리카 북부의 아틀라스산맥(Atlas Mountains)과 티베스티(Tibesti)고원, 터키, 이란, 이라크 접경의 쿠르디스탄(Kurdistan), 북극해의 배핀섬(Baffin Island) 등 세계 주변부의 산들에 대해서도 항상 선구에 서왔다.
국내에서는 거벽에 그래도 가장 가까운, 헤브리디즈제도 스트론 울러데일(Strone Ulladale)의 콧등에 3개의 짭짤한 루트를 냈다. 세계에서 가장 멋진 바위 요세미테(Yosemite)의 살라테월을 영국인으로는 두번째로 올랐으며 라바레도(Lavaredo) 치마 오베스트(Cima Ovest) 북벽의 거대한 하늘벽(overhang)을 처음 오른 영국인이었다. 좀 큰 산으로는 힌두쿠쉬(Hindu Kush)산맥의 코에반다카(Koh-e-Bandaka 6858m) 남벽을 초등했으며 1972년 봄가을 에베레스트 원정에 다 참가했다.
강한, 그러면서 사려깊은 클라이머 더그 스코트는 등산의 미래에 심대한 영향을 끼칠 사람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책의 서문으로, 현대의 모든 진지한 클라이머들, 그리고 등산이라는 스포츠를 이해하는 모든 사람들이 서가에 꽂아두고 항상 참고할 책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써달라고 부탁받았을 때 아주 으쓱한 기분이었다.
2.저자의 일러두기
무엇보다도 이책은 이십여 년간의, 사하라의 티베스티에서 북극권 배핀섬의 산들에 이르는, 그 다양하고 아름다운 무대에서 얻은 여러 생각들에 대한 신테제(synthesis)다. 이 점에서 나는 레이, 댄, 클리브, 마이크, 피트, 스티브, 토니, 댄, 거이, 봅 등 노팅검 클라이머클라이머클럽 멤버들, 데즈, 너트, 터트, 폴, 패트, 데니스같은 내친구들, 그리고 돈, 두걸, 크리스, 로열, 피터처럼 강인한 이들에게 감사드린다. 이들은 산에 대한 열정을 나에게 물들여준 장본인들이다.
이 책에 사진을 쓰게해준 아래 사람들, 특히 고맙다.
켄 윌슨(Ken Wilson)은 그의 방대한 수집물을 이용할 수 있도록 했고 비토리오 버럴(Vittorio Varale)은 중병중임에도 어려운 격려편지를 보내주었을 뿐 아니라 그의 고서각에서, 우리 영국사람들로서는 알기도 힘든 전설적인 인물들의 수많은 사진을 쓸 수 있도록 해주었다. 헬무트 덤러(Helmut Dumler), 토니 히벨러(Tony Hiebeler), 세베리노 카사라(Severino Casara), 오토 비드만(Otto Wiedmann) 같은 이들도 사진을 보내주었다. 미국에서는 갤런 로웰(Galen Rowell), 에드 쿠퍼(Ed Cooper), 탐 프로스트(Tom Frost)와 존 에머트(John Amatt)가 훌륭한 사진들을 보내주었다. 영국에서는 레오 디킨슨(Leo Dickinson), 존 클리어(John Cleare), 크리스 보닝턴(Chris Bonington) 제씨가 주요 제공자였다.
사진을 빚졌다거나 감사드릴 분들은 이외에도 많다. 마샬포토숍(Marshall's the Photographers)의 바실 나이트(Basil Knight)는 이책을 위해 수많은 프린트를 뽑아주었는데 그 중에는 얼핏 봐도 대단한 것들이 꽤 있다.
고맙기는 그들의 시간을 쪼개 원고를 감수하고 내가 몰랐던 사실을 알려준 다음 분들도 마찬가지다. 오토 비드만, 폐터 하벨러(Peter Habeler), 라인홀트 메스너(Reinhold Messner), 헬무트 덤러, 안데를 헤크마이어(Anderl Hackmair), 갤런 로웰, 로열 로빈스(Royal Robbins), 더그 로빈슨(Doug Robinson), 스티브 로퍼(Steve Roper), 워런 하딩(Warren Harding), 아르네 랜더스 힌(Arne Randers Heen), 랄프 회이박(Ralph Hoibakk), 아르네 네스(Arne Naess), 오드 엘리어센(Odd Eliasen), 피터 크루(Peter Crew), 마이크 버크(Mick Burke), 폴 넌(Paul Nunn), 터트 브레이트웨이트(Tut Braithwaite), 데니스 그레이(Dennis Gray), 토니 호워드(Tony Howard), 팀 리위스(Tim Lewis), 낱 알렌(Nat Allen), 로빈 콜롬브(Robin Colomb), 켄 윌슨(Ken Wilson)이 그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저작중에 있거나 <마운틴>誌의 편집일을 보면서도 이 책에 대한 감수를 전반적으로 해주었다.
오드리 샐킬드(Audley Salkeld), 사이크(Sayke)여사, 앨런 해픈스톨(Alan Heppenstall), 콜린 테일러(Kolin Taylor)는 수많은 외국책들을 번역해주었다.
조안 윌슨(Joan Wilson), 베티 프렌티스(Betty Prentice), 잔 스코트(Jan Scott)는 타이핑하는 데 애써주었다. 편집을 맡았던 재크린 테일러(Jacqueline Taylor), 알렉스 맥코믹(Alex MacCormick)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댄과 매기 메도우스(Maggie Meadows)부부 또한 최종교정을 보느라 애를 썼다.
<알파인저널> 편집인 에드워드 피아트(Edward Pyatt)에게도 감사드린다. 그는 그 저널에 실린 많은 것들을 쓸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아울러 에릭 쉽튼(Eric Shipton), 아놀드 런(Arnold Lunn)경, 로널드 클라크(Ronald Clark)는 그들의 뛰어난 산문의 인용을 허락했다. 이 외에도 이책을 쓰는 데 있어서, 내가 빠뜨렸지만 잊을 수 없는 신세를 진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삽화를 거의 다 그려준 그레이엄 밀러(Graham Miller)에게도 감사 표시를 안할 수 없다. 그는 어떤 것은 언뜻 보고 그렸음에도 아주 잘 그렸다.
서문에서 과분한 칭찬을 해준 크리스 보닝턴에게는 어떻게 고마움을 표시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는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과 그 전의 남서벽에 대한 책을 마무리하느라 정신 없었을 것임에도 이 글을 써주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스탠리 피커드(Stanley Pickard)의 친절한 옛날 저작에 고마움을 표해야겠다. 하나가 끝나면 바로 다음것이 시작되는 해외원정들과 복잡한 집안일의 와중에서 이책을 쓰느라 그것을 빠뜨렸던 것이다. 그리고 나의 아내와 가족. 그들의 인내는 찬사받아 마땅하리라.
3. 서문
처음에 출판업자들은 나에게, 조프리 서튼(Geoffrey Sutton)이 근래 펴낸 ‘등산에 있어서 인공등반기술(artificial aids in mountaineering)’을 문고판으로 개작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고 물었다. 그러나 이후 5년의 시간과 네 번의 편집자 변동을 겪은 끝에 나는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야간 불어난 원고를 마침내 케이워드(Kaye & Ward)社에 넘기게 되었다.
인공등반(aid climbing)의 여러 측면들을 살펴보다 나는 곧, 어떤 주제에 대해 객관적인 정의같은 것(anything like a balanced assessment)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든든한 역사적 뒷받침이 있어야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패턴이 정해지고 이야기가 진전되면서는 거벽등반, 특히 고전적인 거벽등반 발전사가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이책이 내 개인적 취향에 치우치지 않았다고, 그 어떤 것보다 더 객관적이라고 자신할 수는 없다. 사람이란 경험과 취향에 따라 어느 부분의 길이나 중요도를 멋대로 재단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클라이머들은 때때로, 등산학교를 통해 등산에 입문하는 이들은 특히나, 클라이밍의 전통이나 윤리를 반추해보는(stress once again) 것이 좋다. 이것들은 실기교육(physical education)에 치중하는 학교에서는 소홀히 다루어지는 듯하다. 반면 전통있는 학교에서는 두 말 할 것 없이, 클라이밍의 제문제를 화두로 삼고(hold a dialogue) 내포된 미묘함을 납득시킨다.
등산윤리를 무시하고 싶은 충동이 들 때면 나는 언제나, 피트 크루가 클로기(Cloggy) 첫번째 볼트에서의 내 태도를 보고 한 말 “자네 고백성사 몇 번 해야 되겠군”을 떠올려본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처녀봉 앵글레시(Anglesey)를 오를 때 하켄을 수없이 박았다. 그렇게 성공을 하자 뭔가 구멍이 뚫린 느낌이었다.
‘이 놀이’의 퇴폐적 경향(despoiling influence)을 막아온 것은 확실히 고빗사위에 있어서의 비타협적인 웅얼거림(a rumble disapproval in the bar), 등산저널에서의 한 마디, 가이드북이나 산악계 모임에서의 지적들이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아니 어디서도 훈도위원회(disciplinary committe)를 둔다거나 간섭을 할 필요는 없다. 교육단체나 보험회사, 언론, 장비회사 등의 압박은 사실 클라이머들을 더욱 강력하게 그 놀이로 이끈다.
클라이머들은 정부관료들의 클라이밍 통제사태 이전에 이를 막을 조직을 스스로 만들으리라 여긴다. 인간의 자유가 안전이나 행정편의의 미명 아래 위협받을 때 클라이머들은 바위를 '초칠(polishing)'할 정도로, 헬멧을 꼭 쓰란다거나 오르는 루트에 걸맞는 실력이 있는가 확인하는 따위의 강화된 규정이 등장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나는 젊은 독자들이 여기서, 자기가 윔퍼(Whymper)나 프레우스(Preuss), 비나처(Vinatzer), 보나티(Bonatti) 등으로부터 얼마나 대단한 모험의 유산을 물려받았는지 알게 되었으면 한다.
우리의 선구자들은 클라이밍을 위해 죽었다. 그들이 보여주었듯 위험 없는 모험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험 요소를 줄이거나 한정시킬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없어지면 모험 없이 사는 일반인들에게 우리들이 하는 짓이 뭐라고 어필할 유일무이한 건덕지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나아가 나는 이 책이, 클라이밍에는 모험보다 훨씬 많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하는 지침이 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Dugg Scott December 1973
4.일러두기
거벽등반은 오늘날 등산가들이 하는 일곱 가지 클라이밍 중의 하나일 따름이다. 이 일곱 가지 클라이밍은 유명한 등산철학자 리토 테야다플로레스(Lito Tejada-Flores)가 1967년 어센트출판사에서 펴낸 <클라이머들이 하는 게임들 Games Climbers Play>의 정의에 따른 것이다.
이에 따르면 “클라이밍에는 층계가 있는데 각각은 규칙과 고유 영역이 있다.” 도전성이 적은 영역은 규칙을 까다롭게 해 그 제한조건(a handicap system)으로 클라이밍의 도전성을 높이고 히말라야처럼 혹독한 환경에서는 규칙이 너그럽다. 이것들은 고정자일, 하켄, 헬리콥터 등등을 쓰지 말라는 것처럼 “…하지마라”로 일관한다.
가장 겁 안나는 클라이밍은 ①볼더링(bouldering)인 바, 이는 대개는 현장도달(access)이 쉬워 날씨 때문에 심각한 상황에 처하지도 않고 고도감(exposure)도 대단치 않다. 일반적으로 클라이머는 그것을 혼자 하러 다니고 장비도 여타의 클라이밍과 달리 신과 옷뿐이다. 이 외의 것으로는 ②겔렌데클라이밍(Crag Climbing Game), ③여러피치 암벽등반(Continuous Rock Climbing Game), ④거벽등반(Big Wall Game), ⑤알파인클라이밍(Alpine Climbing Game), ⑥슈퍼알파인클라이밍(Super-Alpine Game), ⑦원정등반(Expedition Game)이 있다.
고산을 대상으로 하는 원정등반의 경우에는 규칙이 거의 없다. 그래서 줄사다리나 여나믄 셀파, 어마어마한 길이의 고정자일 사용도 그것이 위협적인 상황을 타개(cut back the formidable environmental odds)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어느 정도까지는 면죄를 받는다.
이 책에서는 가능한 한 거벽, 그것도 주로 바위로 된 거대한 벽의 등반에 대해서만 고찰해보려고 한다. 그럼에도 알프스나 히말라야라면 그 특징을 이루는 빙벽을 몇 구간에서 반드시 만날 것이다. 따라서 이 내용은 돌로미테(Dolomites), 롬스달(Romsdal), 요세미테 같은 데나 적합한 것이다.
벽에 붙어있는 기간이 길기 때문에 규칙은 너그럽다. 필요하다면 후등자는 선등자가 고정시킨 자일을 타고 프루지크로 올라도 된다. 그리고 대장쟁이(ironmongery)가 만든 모든 것을 쓸 수 있다. 그러나 그 연장들을 무분별하게 썼을 때, 예를 들어 자유등반 마디에서 썼다거나 초등할 때 볼트를 너무 많이 박았다면 규칙 위반으로 친다.
심리적 애로가 사라지고 기술이 진보하고 장비의 개선이 이루어지면 규칙은 바뀐다. 그래서 클라이머들이 거벽에서도 불안에 떨지 않게 된 요즘에는 선등자부터 바닥에까지 이르는 고정자일이 더이상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용납되는 거대암벽도 있다. 서부알프스나 커네이디언로키(Canadian Rocky), 배핀섬 같은 알프스적 환경, 그보다 기후조건이 혹심한 파타고니아(Patagonia), 그리고 히말라야나 힌두쿠쉬의 어마어마한 암벽에서다.
규칙은 대개 환경에 따라 정해진다. 그러나 고난을 추구하고 거기서 더 큰 성취를 느끼려는 이는 보다 저난도 게임의 규칙을 적용, 스스로를 엄격하게 다스린다. 하여 그들은 카라코람(Karakoram)이나 히말라야의 암탑에서조차 고정자일이나 공성법(siege climbing 일명 극지법)에 의존하지 않음으로써 성취감을 확실히 높인다. 이 이상은 독자들이 “클라이밍에 있어서의 생각과 대화의 프레임” 어쩌고 하는 간명한 말 속에서 찾아보기 바란다.
산에서의 이런 식 게임을 대다수 클라이머들이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몇몇 선구자들이) 하는 이유는 상당히 복잡한데 나의 경우는 모험의 동기가 솟구칠 때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에릭 쉽튼(Eric Shipton)이 그의 <산의 정복 Mountain Conquest>에서 명쾌하게 설파한 바 있다.
“인간은 모순된 존재다. 전 역사를 통해 안전과 편의, 풍요를 추구해온 것이 인간이지만 그것이 주어지면 그들은 이내 불안과 불만에 싸이곤 했다. 그들의 본성 저 깊은 곳에는 험하고 위태로운 길―자신의 기예(技藝)와 용기를 시험해볼 난관과 위험을 열망하는 본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 이런 도전과 맞닥뜨리면 그들의 혼은 일어나고 심장은 뛰면서 삶의 의미는 새로와지고 뿌듯해진다. 바다, 사막, 극지 그리고 우주에서 미지와 어려움, 미달(unattainable)에 직면하면 인간은 기민해지고 발랄해지는 것이다. 이를 알고 나면 인간이 산을 오르는 짓이 훨씬 덜 이상해보이리라.”
하지만 인간의 반응이 언제나 즉각적으로 기민․발랄해지는 것은 아니다.
1838년 존 머레이(John Murray)가 몽블랑 등정에 대해 쓴 <스위스 여행자들을 위한 핸드북 Handbook for Travellers in Switzerland and Savoy and Piedmont>에서는 “(신루트 개척에) 성공한 이들은 하나같이, 그곳은 해볼 데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재등에 성공하고 나면 그때는, 피로를 훨씬 웃도는 감사의 느낌이 몰려오더라고들 했다.” 더이상 약은 먹지 않겠다고 발버둥치던, 병에 취한 사람이 결국 약병으로 다가가듯 산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들을 끌어낸 것은 산이라는 무대(setting)뿐 아니라 모험도 기였다.
위대한 존 러스킨(John Ruskin)은 고난도 등산(difficult mountaineering)보다 야산오르기(mountain ramble)를 즐겨했지만 산의 위험과 그 위험의 회피할 수 없는 속성에 대해서는 잘 알고있었다.
“위험의 선악판단 문제는 아주 미묘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알아낸 바로는 위험상황에 처했다가 돌아왔을 때, 그것이 설사 정말로 옳고 현명한 처사였다 하더라도 인간의 성정은 실제로 약간 일그러져있다. 그만큼 약해지고 소심해지고 생기가 없어졌으며 차후 더 감정적이고 실수가 잦아진다. 그러나 위험을 극복했을 경우는, 그것이 분명 그릇되고 어리석은 행위였을지라도 인간은 보다 강해지고, 어떤 종류의 일이나 시련에도 적응할 수 있는 더욱 유능한 이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효과를 낳는 것은 위험밖에 없다.”
수없이 많은 등산가들이 자신의 모든 능력을 동원, 위험상황을 정복―이것이 이 스포츠의 핵심이다―해왔다. 이 위험이라는 요소가 어느 한 구석에 도사리고있지 않다면 등산은 필시 그것의 독보적인 영향력을 잃었을 것이다.
위대한 모험은 미지의 문제와 맞닥뜨림으로써만 탄생한다. 만일 그것이 오지의 완벽한 암벽이라면 모험성은 훨씬 높아진다.
대담한 등반을 끊임없이 해나가는 등반꾼은 필연적으로 희생, 그것도 정상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의 피해를 당하지 않을 수 없다. 완벽한 산에서 극한의 모험을 하다보면 가족이나 친구들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언제나 필요하지만 균형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그러면 이 스포츠도, 정상적인 생활도 모두 희생을 면치 못한다.
윈드롭 영(Winthrop Young)이 설파했듯 “인지가 발달하고 진보가 계속되어 기술과 그것의 영향을 받은 이데아가 완벽해지면 질수록 그만큼 인간의 원초적 영감은 줄어든다.” 세월은 또 등반꾼이 기업 같은 데서 ‘도움의 손’을 받아들이거나 강력한 민족주의적 충동의 희생이 될 경우―이 둘은 다 등산가를 원초적 영감으로부터 멀어지게하는 것들이다―그들로 하여금 청춘을 바치게했던 그 요인들을 상기시켜준다. 이 싯점이 되었을 때 또는 나이가 듦에 따라 과거의 강한 등산가는 산, 산의 여러 가지 면(mountain setting)들을 미학적으로 봄으로써 열락의 경지에 드는 원초적 영감으로 회귀한다. 이는 어빙(R. L. G. Irving)이 <산의 낭만 The Romance of Mountaineering>에서 갈파했듯 “알프스의 눈과 수없이 많은 리지와 우묵지들의 아름다움 가운데는 위험 이상의, 정신을 맑게 하는 무엇이 있기 때문”으로 위험을 회피하지 않는 반(反)이데올로기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는 세대교체와 함께 계속 이어지는 바 ‘젊은 에너지’는 개척되지 않은 바위에 계속 달라붙고 ‘늙은이’는 그들이 더 이상 그렇게 열정적인 국면으로 치달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안전을 추구한다.
그렇다고 아르네 네스(Arne Naess)처럼 “클라이머의 업적이 숫자나 속도, 어렵기 같은 피상적인 것으로만 평가된다”고 탄식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 같다. 이는 가진 것 하나 없는 이에게 “물질만능주의가 영혼을 타락시킨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쓸모없는 짓이다. 이 경우 가진 것 없는 이는 물질의 안락을 계속 추구할 것이고 젊은 클라이머들도 어느 정도는 항상 자기의 업적을 다른 사람들것과 대보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의 것은 실상 업적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난이도나 등반기술이 등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지만 역사가의 관심을 가장 끄는 것은 무엇보다 이런 것에 바탕해 튀어나오는 업적들, 끊임없이 새로 나타나는 업적들이기 때문이다. 앤터니 로링슨(Anthony Rawlingson)이 전후 등산사를 정리할 때 바로 이 관점에 입각했는 바, 이는 초창기 등산사에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국면은 이제 상당히 완만해졌지만 진보가 계속, 특히 바위에서는 이전보다 훨씬 고난도로 이루어져 소심한 클라이머들을 국외자로 만들고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초창기에는 이 방면에서 더할 나위 없는 발전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 책은 작은바위 오르기 기술을 거벽등반에 적용하는 것 그것은 물론, 그 변화를 선구한 사람, 그리하여 이루어진 이노베이션, 그리고 그 이면의 모티베이션에까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등산사 초기에는 끝이 없을 듯 많은 알프스의 봉우리들이 발견되고 그리고 등반되었다. 그렇지만 그런 ‘즐거움을 위한’ 등반을 몇해 하고난 1875년에 이르자 주요 봉우리들 중 등정 안 된 것이 거의 안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산맥의 새로운 봉우리를 찾아갈 의욕을 가진 클라이머들도, 방도도 없었다.
여기서 탐험의 본능이 강한 몇몇 클라이머들이 다른 방식으로 알프스를 오르는 데 진력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머머리(Mummery)로 하여금 진정한 등산가를 “이전에 누구도 간 적이 없는 곳에 서기를 좋아하는 사람, 이전에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바위를 그러잡고 오르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으로 정의하게 만들었다.
어빙도 같은 결론, “발견은 아직도, 아니 언제나 등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에 도달한 바 있다. 따라서 진정한 등산가란 아레뜨(arete) 즉 칼날능선들을 돌파하고 이전보다 훨씬 어려운 버트레스들을 올라 마침내 직벽을 극복하는 등 점점 더 어려운 등반을 이룸으로써 모든 자연의 길에 인간의 숨결을 불어넣는 사람인 것이다.
동부알프스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빠른 속도로 진척되어 자연스런 선은 손가락 한 마디에나 의지해야할 아주 가파르고 어려운 것만 남았다. 그러자 등반에 하켄이 동원되기 시작했다. 고전적인 대암벽등반의 황금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의 클래식한 등반라인들은 거개가 바닥에서 정상까지 아름다운 직선을 그으며 올라갔다. 모든 마디는 어려운 자유등반 기술을 요구했고 극도로 어려운 오버행 구간에서는 짧은 도구의존등반(aid climbing)이 행해지며 아무것도 없는 벽(blank wall)을 가로질러 자일이 나아갔다.
지역마다 나름의 황금시대가 있지만 동시적이지는 않다. 이는 사람들을 암벽등반으로 끌어들이는 사회적, 경제적, 지리적 상황들이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임을 보여준다. 어떤 한 시기, 어떤 지역에서 모든 조건들이 클라이밍과 맞아떨어졌을 때 비로소 초등이 쏟아져나왔기 때문이다.
20세기 초반 15년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는 젊은이들이 사회적 제약으로부터 탈출하기를 희구했다. 중산층에서는 경제적으로 이것이 가능했고 그래서 일부 젊은이들은 독일어가 공용어인 티롤지방으로 달려가 가파르고 단단한 석회암벽들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 루트들이 후일 플라이쉬방크(Fleischbank)의 뒬퍼(Dulper)루트나 쉬셀카르스피츠(Schusselkarspitze)의 피취틀․헤르초크(Phiechtl-Herzog)루트와 같은 고전루트가 된다.
돌로미테에서는 클라이밍이 1차대전을 치른 후부터 익기 시작, 소위 황금시대는 1925년의 솔레더(Solleder) 초등이나 30년대의 미켈루치(Micheluzzi), 코미치(Comici), 칼레쏘(Calesso), 솔다(Solda), 비나체르(Vinatzer)의 등장부터라고 단언되고 있다. 오스트리아인들이 1920년대에 역동적인 등반을 한 데 반해 이태리인들은 30년대의 돌로미테 처녀벽에 벌떼처럼 달라붙었던 것이다.
이무렵 서부알프스나 몽블랑산군에 대암벽루트를 낸 것 또한 이태리클라이머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보칼라테(Boccalatte), 제르바수티(Gervasutti), 카씬(Cassin), 에스포시토(Esposito), 티쪼니(Tizzoni), 그리고 위대한 프랑스클라이머 피에르 알랭(Pierre Allain)이 있다.
종일 등반해야하는 고전적 거벽들이 개척되면서 무섭게보이는 암벽들도 공격을 받기시작했다. 선구자의 기본적 본능 즉, 다음 모퉁이를 보고싶고 구석구석의 작은 비밀들을 풀어보고자하는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이 결국 인간을 연속적인 도구의존(continuous aid climbing)의 지경으로 몰았던 것이다. 지금 남아있는 모든 하늘벽(overhang)이나 돌출부로 난 루트들은 논리적으로 이렇게 볼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돌로미테의 코미치나 좀 뒤 몽블랑산군의 보나티가 수마디의 연속적인 도구의존으로써 그 ‘불가능한’ 루트들을 낸 이유가 설명되는 까닭이다.
지난 20년 몇몇 클라이머들은 자연이 만들어논 크랙이 아니라 그 사이의 아무것도 없는 데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논리적으로는 분명 일보전진이지만 다른 측면으로는 등산에 있어서 일보 후퇴임이 분명하다.
처음에 볼트는 끊어진 크랙을 연결하는 데만 쓰였다. 크랙을 넘어선 전진은 바위에 구멍을 뚫고 그것을 박음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위에 루트가 넘쳐나면서 후대의 선구적 클라이머들이 자연스런 루트를 낼 데가 없어지게되자 그들은 점점 볼트를 빈번하게, 그리고 무단으로 사용하면서 직바로, 계속 볼트에 의존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울러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줄사다리도 썼다. 이 도구는 물이나 음식을 땅바닥에서 끌어올릴 때 요긴했다.
그러나 진리는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볼트등반은 어떤 기술도 필요없으며 조심성 많은 클라이머라도 퇴각의 두려움 없이 어느 곳으로나 갈 수 있다. 그리하여 볼트작업은 등반의 전유물인 불확실성과 그 결과물인 도전성이라는 눈알을 빼버렸다. 이 이상한 방식을 거부하는 클라이머들은 싸지고 빨라진 교통수단의 덕을 보면서 처녀바위를 찾아 타지로 떠난다.
오늘날의 알파인클라이머가 쓸만한 등반을 하기 위해서는 이전보다 훨씬 부지런히 대상지를 찾아다녀야 한다. 아울러 그는 진보와 변혁의 대도도 추구해야하는 바 이전에 도구에 주로 의존해 하던 것을 그것을 조금만 쓰면서, 때로는 솔로로 하는 그런 것이다. 그러면 등반은 훨씬 재미있어질 것이고 시간도 단축될 것이다.
동계등반은 적잖은 스태미너가 필요하고 그래서 대륙클라이머들 사이에서 점점 인기를 끌고있다. 거기다, 유일하고 참된 올라운드 알파인클라이밍의 맛은 암빙이 뒤섞인 페이스등반에 있다는 것이 알파인클라이머들의 일반적 인식이다. 그것에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겨울산의 위험들, 눈 상태에 의해 좌우되는 루트의 변화무쌍함, 악천후가 야기할 수 있는 심각한 사태 등 등반을 대단한 행위로 만드는 불확실성의 요소들이 골고루 갖춰져있기 때문이다.
루트에 하켄을 남겨놓는 알프스에서는 2등이 초등보다 훨씬 쉽다. 아무래도 하켄은 추가되기 마련이라 3등은 더욱 쉬워진다. 볼트루트에서는 2등이나 그이후의 어려움이 초등에 비해 말할 수 없이 쉽다. 자유등반이라면 2등자들이 미지에서 오는 심리적 문제, 두려움은 물론 느끼지 않겠지만 육체적 문제는 초등자와 마찬가지로 겪게될 것이다. 볼트루트나 하켄에 전적으로 의존해 올라가는 루트는 이제 현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추세다. 그 격렬하고 죽살이치는 행위를 위해서 그들은 이전에 그런 사위를 마스터하고 고도감을 익히는 노력을 했다.
어처구니없게도 이제 도구의존(등반)이 등산기술의 주류자리를 차지하고있다. 그래 그것이 맹신주의자나 진정한 위험과 맞닥뜨리기를 두려워하는 자들의 전유물이라고 말해도 믿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돼버렸다. 그렇지만 하켄 몇개만 쓰면서 오르는 치베타와 마르몰라타 등반을 훌륭한 행위로 여기지 않을 사람은 없으리라. 열세개의 볼트만으로 엘캐피탄의 살라테월 같은 지상 최고의 록클라이밍을 하고 기쁨을 느끼지 않은 이는 없으리라.
보조도구의 이용은 등산기술발전의 각 단계에서 언제나 격렬한 논란의 대상이었다. 아이젠의 사용이 도마 위에 올라 재고되고 공격받기까지 했다. 자일의 사용도 그랬는데 나중에는 그것을 얼마나 썼느냐도 그랬다. 그 다음에는 카라비나와 하켄의 사용이 그랬다. 이러한 엄밀한 재심(再審)의 존재는 옳고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 놀이의 불문율들은 서서히, 그러나 심각하고 격렬한 논쟁 끝에 진화를 했다.
전통주의자들은 대체로 언제나 변혁을 마지못해 따르고 신기술을 자기기술의 바탕 위에서 받아들인다. 다음 장에서는 이런 변화를 구체적으로 검증하는 것으로 시작할 생각이다. 여기서 어떤 것들이 수용모드인가만 살펴보아도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리라. 다른 스포츠에는 규율판이 있어서 룰을 유지하고 벌을 부과하지만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등산가들은 어쩌면 무정부주의적이라고 할 수도 있는 정신 속에서 룰을 발전시켰다.
룰들은 지방의 소그룹 속에서 탄생했다. 누군가 전통적 방식을 벗어난 짓을 하는 것을 보다 그것을 배척할지 아니면 전통을 깨고 수용할지 공감대를 형성하면서였다. 그것이 안전의 한계치를 흡족한 수준으로 올리기 위해 룰을 우스운 것으로 만들 때는 배척했고 인간의 성취감을 높일 때는 받아들였다. 도입한 기술이 이러한 개념과 이상에 어긋난 것일 때는 클라이머들이 국외자들의 웃음꺼리가 되었다.
어떤 나라 어떤 그룹의 클라이머들은 보조기구의 사용을 불명예스럽게 여겼다. 영국이 그 좋은 예다. 대륙의 클라이머들이 하켄과 카라비너를 이용할 동안 영국클라이머들은 그것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양차대전 사이의 기간에 고전적인 대암벽루트에 접근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꺼렸고 그 결과 대륙의 등반발전에 동참하지 못했다. 영국인들이 하켄의 사용을 받아들이고 내부의 기회주의적 클라이머들이나 대륙에 있는 그들의 동료들이 이룩한 대암벽등반을 시작한 것은 겨우 1950년이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그런 대대적 혁명(sweeping generalization)이 일어났는가? 그 답은 다음의 몇몇 장에서 해볼 생각이다. 아울러 바바리아알프스에서 비롯해 돌로미테로, 그 다음 몽블랑산군으로 옮겨간 대암벽등반에 대해서도 언급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은 아니다. 대암벽등반은 근래 노르웨이의 롬스달골짜기, 캘리포니아의 요세미테골짜기 등지에서도 하고있고 파타고니아와 캐나다의 극지에서는 벌써부터 해왔다. 현재는 히말라야의 고소의 탑상침봉(towering spires)에도 그것이 계획되고있는 것으로 안다.
등산의 기원은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것이며 긴 세월 서책(書冊)의 주요 테마였다. 그 과거의 이해는 현재의 명징한 이해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 이해가 클라이밍에 있어서의 모험을, 바위라는 매개물 그것을 과연 보존할 수 있을지 우려스럽기만 하다.
제1장 거벽등반의 발전
1. 서론
산악지방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일반적으로 산이나 자연경관들을 사랑하기보다는 오히려 두려워한다. 노르웨이에서는 산이 트롤(거인)의, 알프스에서는 용과 그리핀(황금새)의 고향일 따름인 것이다. 산 위에 마귀나 악령이 날뛰고있다고 믿는 지방도 부지기수다. 그사람들은 산을 있는 그대로-소통의 장애며 산사태와 눈사태, 범람의 위험이 도사리고있는 곳으로만 받아들였다. 돌밭을 일궈 생계를 꾸리고 혹독한 겨울을 나면서 어렵사리 목숨을 이어왔다. 기도 레이(Guido Rey)는 여행이라는 것이 등장하기 한참 전에 마터호른 발치의 발뚜르낭쉬()에서 이런 삶을 재조명해보았던 사람이다.
“도시적 트러블이나 걱정은 산중에는 없다. 대신 일종의 무의식상태 같은 것, 미미하지만 헤어날 수 없는 간난이 있다. 여름은 금방 지나고 나머지는 모두 겨울, 산중사람들은 문을 닫아걸고 끈질기게 태양이 돌아올 때를 기다린다. 수확철이 짧아 추수가 고된 까닭에 노동의 즐거움 속에 유쾌히 살지 못하고 운명을 체념하며 하릴없이 인생을 꾸려간다.”(기도 레이의 The Matterhorn)
위의 글은 아마 알프스 어느 골짜기의 한 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문명화된’ 유럽인들은 이를 보고 그들만이 산의 경관을 즐길 수 있으며 고산의 종자들이란 것은 ‘산의 영혼’을 느낄 수 없었고, 없는 놈들이라고 오만하게 단정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 레이의 이 아름다운 산문(이는 일부일 따름이다)덕에, 산악환경이 낳은 궁핍 속에서 아직까지 옛날식으로 살아가는 유럽 이외의 전세계 산중사람들에 대한 시각을 옛날식으로 고정하게되었다. 그럼에도 이것은 산중사람들의 산에 대한 태도를 어느만큼은 조명하고있다고 하리라.
이런저런 이유로 고향을 등진 산중사람들이 야지나 도시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돌아온 예는 수없이 많다. 아마 신체의 화학변화가 자연 속에서 살자고 아우성쳐서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연의 위력을 항상 보며살기 때문에 정상정복은 말할 것도 없고 등산할 필요성도 의욕도 느끼지 못한다. 날랜 정신의 소유자들은 혹 나고 죽음, 폭풍의 하늘, 떠오르고 지는 태양을 보고 감동받았을 수도 있다. 살아있는 것들의 조화로움을 깨닫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한편에는 언제나, 쉽사리 그들의 삶의 질서를 흐트려버릴 수 있는 자연재앙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그들에게 자연은 외경의 대상이지만 그 공포를 수천 년의 전통 속에 길러진, 질서있는 삶으로 누그러뜨린다.
그들은 산의 단편적 미학들을 찾아내는 외부인을 약간은 흥미롭게, 약간은 측은한 마음으로 대한다. 외부인은 아직, 원주민들이 사철, 수년을 보아온 만큼 그산을 알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등산하기 위해 온 외부인이라 해도 등산 자체를 이유로 찾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산에서 과학탐사를 하는 중이라고만 했다. 1880년쯤의 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도블호프(J. Doblhof) 같은 이가 몽블랑 오르는 이유를 ‘레크레이션’이라고 하며 이렇게 웅얼거렸을 정도였다.
“초등한 지 93년이나 지났음에도 대개의 등반은 불행히도 여행자들의 순전한 모험이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측량, 기온과 기압측정, 맥박과 호흡수 세기(이런 것은 문외한도 할 수 있다) 대신 분명 등산의 필수요건일 샴페인과 브랜디병 비우기, 샤모니로 등정 알리기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주변산을 스케치했고 골짜기를 울리는 총성의 메아리 즐기기도 했다.”
머레이는 이미 1854년에 그의 <스위스 여행자들을 위한 핸드북>에서 몽블랑을 오르는 클라이머들을 ‘병적인’ 인간이라고 단정했다. 이런 강력한 비난도 있었지만 모든 초기등산가들이 같은 의견은 아니었다. 도블호프조차도 직업상의 긍지와 인습 때문에 그의 참마음을 숨겼지 않나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등산을 그 자체를 위하여 했던 예는 훨씬 전에도 있었다. 프란체스코 페트라르크(Francesco Petrarch)와 그의 동생 제랄도(Gerardo)는 1336년이라는 이른 시대에 딴 이유 없이 그저 정상에 도달할 목적으로 몽 벵뚜(Mont Ventoux)를 초등한 기록을 남겼던 것이다.
프란체스코 페트라르크는 알피니즘의 ‘정신적’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사람이다. 칼 구스타프 융(Karl Gustav Jung)은 페트라르크가, 인간이 자기를 둘러싼 세상을 처음으로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된 새 시대를 열었다고 했다.
1492년에는 프랑스 샤를르Ⅷ의 시종 앙뜨완느 드 빌(Antoine de Ville)이 왕명을 받고 그레노블(Grenoble) 근처의 몽떼귀(Mont Aiguille․2086m)를 오른 사건이 일어났다. 외관이 성채처럼 생기고 사방이 깎아지른 탑 모양의 산이다.
빌의 보고서에 의하면 그 ‘찾기 어렵고 난해한 정상으로의 길’은 사다리와 소브틸츠(sobtilz) 엔진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들이 어떻게 그것을 바위로 끌어올려 고정시켰는지는 불행히도 나와있지 않다. 그는 다만 그것이 그의 일생에서 가장 무시무시하고 위험한 여행이었다고만 썼다.
쮜리히 출신의 복 받은 박물학자 콘라드 게스너(Conrad Gesner)는 스포츠―복수인 이 낱말 단수에는 ‘재미’라는 뜻이 있다―를 목적으로 산을 다녔다. 그는 1555년 뤼쩨른 지방법원이 발행한 특별허가서를 가지고 사상 두번째로 필라투스(Pilatus)를 올랐다. 그전에 그 산을 오른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모두 당국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는 <경탄스런 산 De Admiratione Montium>으로 등산의 즐거움과 알프스의 아름다움을 그린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여기서 그는 “매년 온갖 꽃이 핀 계절에 하나의 혹은 여러 산을 오르는 뜻은 자신을 시험해보기 위함이기도 하고 몸에 좋은 운동이어서기도 하고 기쁨 때문이기도 하다”고 했다.
이후 기록은 1707년 스위스의 위대한 여행가 야콥 쇼이처(Jacob Scheuchzer 1672~1733)가 친구 루돌프 본 로센롤(Rudolf von Rosenroll)의 피츠 베베린(Piz Beverin) 등정보고서를 작성하기 전까지 변변한 것이 없다. 그 등반의 유일한 어려움은 “강풍이 부는 정상 근처에 잡고올라갈 나무가 없고 또 산이 그렇게 생긴 탓에 땅이 미끄러웠던 점”뿐이었다고 한다. 로센롤은 기압계를 가지고올라 기록을 했다.
쿨리지(W A B Coolidge)에 따르면 쇼이처는 1702년부터 1711년 사이에 전국 각지를 도는 여행을 아홉 번 한, 게스너의 정신적 상속자다. 자신이 몸소 산을 오른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그의 <알프스 여행 Itinera Alpina>이나 여타의 (여행)기술들은 등산의 묘미를 엄청나게 자극했다. 그는 수학적, 과학적인 장비를 가지고 스위스 전토를 최초로 측량, 1712년에 스위스 지도를 펴냈다.
1760년은 본격적인 등산이 시작되기로 운명지워진 듯한 해였다. 이해 제네바 출신의 부유한 학자며 ‘지리학의 아버지’인 호레이스 베네딕트 드 소쉬르(Horace Benedict de Saussure)가 처음으로 샤모니를 방문, 몽블랑 등정에 상금을 걸었다. 그는 되풀이되는 정상도달 시도에 계속 자금지원을 할 정도로 이 프로젝트에 열정적이었다. 과학탐구라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기는 했지만 마침내 1786년, 가이드 자끄 발마(Jacques Balmat)와 의사 미쉘 가브리엘 파카르(Mchel Gabriel Paccard)에 의해 초등은 이루어졌다. 이렇게 늦어진 이유는 두 샤모니사람의 탐욕과 애국적 이유 때문이었다.
이전에 누구도 해본 적이 없는 짓이었을 뿐 아니라 빙하가 하품을 하면서 사람들을 삼킨다고 당시 사람들이 믿었던 것을 감안하면 그 등반은 정말 용감한 행위였다.
두 클라이머는 정상에서 기압측정을 했다. 그러나 동상에 걸렸고 먹을것과 잠이 부족한 데다 고소증 때문에 눈금 읽기가 무슨 대수냐고 여겼다.
등반의 진짜 동기와 충동은 과학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파카르와 그의 가이드를 몽블랑 정상으로 올린 것은 아마 참된 모험정신이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불붙어 널리 퍼져 사람들이 알프스의 곳곳에서 등산이라는 것을 시작하게 하였다.
그로스 글로크너(Gross Glockner)는 1799년과 1800년에 등반되었다. 둘 다 프란츠 본 잘름(Franz von Salm)공작이 조직한 것이었는데 재등때에는 무려 예순두 명이 정상에 섰다. 1800년에서 1808년 사이에는 발렌틴 스타닉(Valentin Stanig)이라는 신학생이 종종 단독등반을 하면서 인상적인 기록을 남겼다. 그는 바츠만(Watzmann), 그리고 1808년에는 쥘리앙 알프스의 트리글라프(Triglav) 정상에 섰다.
1804년에는 조셉 피췰러(Josef Pichler)라는 산양사냥꾼이 질레르탈에서 온 동료 두명과 함께 파시에골짜기쪽에서 오르틀레(Ortler)를 올랐다. 융프라우(Jungfrau)는 1811년 아라우의 조안 루돌프 메이어(Johann Rudolf Meyer)와 혜로니무스 메이어(Hieronymus Meyer)에게 떨어졌다. 이때 산양사냥꾼 둘이 그들을 도왔는데 지역사정에 정통하고 몸이 날렵한 그들이야말로 산기슭에서 가장 유능한 인적자원임을 감안하면 산양사냥꾼이나 수정꾼들의 등산가이드 활약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점점 보편화되는 실정이었다.
또 한명의 박물학자 조셉 후기(Josef Hugi 1796~1855)는 여러 면에서 드 소쉬르의 계승자라 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특기할 만한 산을 오르지는 않았지만 말도 못하게 활동적이어서 1828년 산악지방 여행을 시작, 수많은 골짜기들을 탐험하고 융프라우 접근로를 포함, 다양한 지역의 자세한 지리학적, 빙하학적 기록과 개념도를 남겼다. 이 기록은 상당히 흥미있는 것으로서 원정에 필요한 것이라고 여긴 장비들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까지 있다.
이 시절 영국의 클라이머들은 몽블랑을 올랐다. 그렇지만 그것이 세(勢)가 된 것은 포브즈(J D Forbes)가 중요한 알프스 원정을 수차례 하면서부터였다. <알파인저널> 백주년호의 댕글러(Dangler)․블래크니(Blakeney) 리스트에서 이 시기를 찾아보면 1857년 이전에 영국인이 초등한 주요 봉우리는 미텔호른(Mittelhorn), 스트랄호른(Strahlhorn), 몬테로사(Monte Rosa), 몽블랑 뒤 따뀔(Mont Blanc du Tacul), 라퀸호른(Laquinhorn), 알라린호른(Allalinhorn)과 펠모(Pelmo)였다. 그러나 이는 메이어형제, 후기, 퓌조(Puiseux), 데서(Desor), 아가시즈(Agassiz), 울리히(Ulrich), 줌스타인(Zumstein), 벵상(Vincent), 니페티(Gnifetti), 스투데르(Studer), 돌퓌소세(Dollfus-Ausset) 등 대륙클라이머들이 초등한 것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그럼에도 댕글러와 블래크니는 “세계적으로 볼 때 이 사람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보고서를 쓴 경우에도 그것은 아주 기술적이고 전문적이었던 까닭에 독자들의 호응을 그다지 많이 얻지 못했다. 그러나 포브즈의 경우는 달라 아주 널리 읽혀졌다”고 덧붙였다. 포브즈는 산악문학의 선구자로서 그의 1843년 사보이알프스 여행, 이듬해의 전 알프스 여행은 많은 영국클라이머들로 하여금 그의 뒤를 따르게하였다.
앨버트 스미쓰(Albert Smith)도 등산의 기쁨을 독자들에게 전파하는 데 일조한 사람이었다. 쇼 흥행업자 기질이 있어 그가 이집트문학 소개 행사를 할 때는 여왕이 후원을 하기도 했다. 여러 이설들과 비판들을 수합하였는데 후일 그레이엄 브라운(Graham Brown) 같은 이는 “그가 몽블랑을 오른 것은 장삿속의 쇼가 목적이었다”고 꼬집었다. 명성이 높아지면서 3만 파운드의 거금을 모은 스미쓰는 그러나 몽블랑을 오르겠다는 일생일대의 욕망이 있었으며 돈이 유일한 목적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벌써 백 년 전에, 대중적 인기와 함께 비판도 받고있는 오늘날의 프로클라이머들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
알프스여행의 인기를 높인 또 한사람의 여행가는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이었다. 사람들에게 알프스의 아름다움을 전달코자했던 그는 “산들은 흡사 옛날에 그것의 학교나 교구들이 있어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인류를 위해 만들어논 듯 보인다. 학자에게는 진리의 불을 밝혀주는 필사본이요 노동자에게는 쉬운 설명처럼 친절하며 사색하는 이에게는 빛 바랜 주랑(柱廊)처럼 고요하고 숭배자에게는 신성함으로 빛나는 보고”라고 썼다. 산에 대한 이 로맨틱한 빅토리아시대 관점은 당대의 전형이 되었다.
앨프리드 윌즈(Alfred Wills)는 최초의 진짜 아마추어 알피니스트였다. 법률가에다 박물학자이기도 했지만 산에서 연구나 과학적인 데이타 기록을 하고싶은 생각을 손톱만큼도 갖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의 기록에서는 이전에 누구도 그리지 않았던 고산의 매력만 드러났다. 그는 독자들을 산으로 끌고들어가 클라이밍의 모험에 빠지도록 하는 능력이 있었다.
윌즈는 일찌기 1854년에 베터호른(Wetterhorn)을 올랐는데 근래에는 이것을 알피니즘 ‘황금시대’의 효시로 잡아야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연대설정 주장의 근거는 미스터리다. 그것은 베터호른의 초등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후 30년 동안 영국인들은 앞에 놓인 초등을 휩쓸었다. 쿨리지에 의하면 황금시대에 초등된 주요 봉우리 39개 중 31개가 영국클라이머들과 주로 스위스인들인 그들의 가이드들 손에 떨어졌다. 베터호른 등반부터 윔퍼가 마터호른 초등을 한 1865년 사이에 이전 세기에 이루어진 것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많은 등반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등산이 과학지식을 늘리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소일꺼리라고 여긴 이 빅토리아시대 클라이머들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었는가? 그들은 얼마만큼의 재산과 여유가 있는 법률가, 성직자, 교사, 과학자 등 전문직 종사자들이었다. 기질이 완강하면서 귀족티를 내는 사람들이었다.
비교적 숫자가 적은 이들 등산광들이 단결, 목적달성을 뒷받침하는 클럽을 만든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그래 1857년, 돌로미테에서 중요한 초등을 여럿 한 존 볼(John Ball)을 초대회장으로 한 알파인클럽(the Alpine Club)이 결성됐다.
아놀드런경(卿)은 그의 <등산 100년사 A Century of Mounteering>에서 멈(Mumm)의 알파인클럽 명단을 분석, 초기회원 281명 중 57명이 변호사, 23명이 사법서사, 34명은 성직자, 15명은 조교(don), 5명은 교사, 5명은 과학자, 4명은 전업작가, 4명은 화가, 2명은 건축가, 2명은 사서, 1명은 강사라고 밝혔다. 공무원은 12명이었고 육군은 일곱, 해군은 넷, 의사와 약사가 네 명씩이었다. 출판업자는 둘, 은행가는 여덟, 보험회사 직원이 넷, 철도회사 직원이 둘, 부동산회사 직원 둘, 주식 브로커 다섯, 상인은 열여덟, 직업정치인이 셋, 임대수입인(rentier)이 열셋, 향신(landed gentry)이 열아홉, 외국인이 넷, 그리고 일곱 명은 직업을 알 수 없는 이들이었다. 281명 중 적어도 세 명은 세습귀족이었으며 중산층이나 중상층이 지배적이었고 대부분이 도시거주자였다.
로널드 클락(Ronald Clark)은 이 시기를 다룬 그의 뛰어난 저작 <빅토리아시대의 등산가 The Victorian Mountaineer>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빅토리아시대의 경제적 여유는 …(중략)… 사람들로 하여금 푸른 하늘 아래에서의 역동적인 운동을 열망하게끔 했을 뿐 아니라 남들의 경탄을 자아내는 알프스로 손쉽게, 단기간에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들은 항상 의문을 품었고 그리고 올랐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의문을 풀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빅토리아시대사람들이 성큼성큼 걸어들어간 곳은 어제 이전 날의 궁벽한 세계였다. 그들은 반쯤은 정복자로서 반쯤은 순례자로서 그 대단한 시대를 걸어다닌 실례들이었다.”
알프스 클라이밍의 황금시대는 매력적인, 그리고 영국의 독서인들에게는 긍지의 시절이었다. 이 시대의 (산악)문학은 예외적으로 재미가 넘치며 현대의 독자들이 봐도 백년 전의 알피니스트들이 오늘날 클라이머들과 다름없는 문제에 직면했구나고 느낄 수 있다. 그들과 교유하다보면 현대 알피니즘, 특히 거벽등반의 발전과 그 역사가 분명한 통찰력 속에 아주 잘 이해된다. 그때를 읽는 것은 다른 여러 면에서도, 최소한 그것이 오염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라도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알프스로 달려가 선구자들이 산에서 느꼈던 열락을 경험해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에드워드 윔퍼(Edward Whymper)의 <알프스에서의 등반들 Scrammbles Amongst the Alps>이나 레즐리 스테픈(Leslie Stephen)의 <유럽의 운동장The Playground of Europe>, 쿨리지의 <알프스의 자연과 역사 The Alps in Nature and History>같은 책을 읽어볼 일이다.
여기서 등산의 기원을 잠깐만 떠올려보자. 이 광범한 문제를 고찰하려면 우리는 아무래도 촛점을 동부알프스에 있어서의 발전에 맞춰야하지 않을까 싶다. 그곳이 바로 대암벽등반의 탄생지였기 때문이다.
2. 1857~1875 동부알프스의 진보
동부알프스가 이 기사의 목적과 부합되기 위해서는 티롤은 물론 비엔나까지 연장되는 석회암질산맥, 돌로미테, 쥘리앙(Julian)알프스도 포함되어야할 것이다. 그렇지만 구분이나 범주라는 것은 언제나 단정적이기 마련이어서 동부알프스에서의 발전상도 어떤 한 시기에 국한하기가 아주 어렵다.
발전이라는 것은 흔히 어떤 특정지역에서 이루어져 다른 지역으로 빠르게 침투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는 처음 시작된 지역이 성했다. 다음, 클라이머들은 자기가 암벽등반의 방법론과 기술을 배운 지역을 떠나 서부알프스나 그 외 지역으로 갔다. 따라서 동부알프스지역 암벽등반의 발전도 오스트리아와 돌로미테를 포함시켜 연대기적으로 다루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알프스는 여러 산간소도시들 사이에 자리잡아 거기에 옛날부터 고갯길, 도로, 좀 뒤의 철도가 가로지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중요통로의 중심지에는 주요소도시와 마을들이 생겨나면서 자연스럽게, 지친 여행자들이 묵어갈 좋은 숙박시설들을 자랑했다. 그렇지만 백년 전에는, 특히 동부알프스지역에서는 원시적인 객주업 이상의 것이 필요없었다. 물론 인스브룩 같이 크고 번영된 예외도 없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도시들은 현지생산의 돌과 나무로 건설된 작은 것이었다.
지난 세기의 등산가들은 이런 산골, 이전에 외부인이 들어가본 적이 없는 지역들을 찾아가서도 지도의 공백을 메꿔나갈 수 있었다. 오늘날의 유럽등산가들은 11만2천km 떨어진 힌두쿠쉬나 가야 예전에 비길 만한 데를 발견할 수 있지만.
알프스로 여행자들이 점점 많이 오자 현지인들은 먹고살기 위해, 그들의 이상한 주문에 맞춰 전래의 직업을 바꿨다. 호텔들이 세워졌고 새로 도로와 케이블카들이 건설돼 방문자들을 산중 높은 곳으로 날랐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그런 시설이 없는 산골짜기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알파인클럽이 결성된 1857년 당시의 알프스여행은 오늘날 소규모원정대가 아시아 오지의 산으로 원정장도에 오르는 것만한 대접을 받았다.
1857년 암페쪼(Ampezzo) 그룹의 펠모를 오른 존 볼은 돌로미테의 그럴듯한 봉우리를 등반한 최초의 클라이머다. 이후 20년간 점점 많은 등산가들이 주요 봉우리들로 몰려들어 1877년에서 1900년에 이르자 선구자들은 조그만 주변봉이나 암봉에 공격을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아있는 미등봉은 그런 것밖에 없었던 것이다. 암벽등반은 이런 봉우리들의 가파른 사면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아직 우리의 중대관심사는 이 시대로 들어가기 전, 존 볼 시대 사람들에게 있다.
돌로미테는 오스트리아와 이태리를 잇는 주요 교통로에서 멀리 떨어진, 후미진 데 있어서 이 시대가 오기 전까지는 원정의욕을 불러일으킨 적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그래 원정은 여행자들에게 뚜렷이 보인 봉우리들, 중심지인 코티나(Cortina) 인근의 것들부터 시작됐다. 당시 <알프스의 자연과 역사>를 위한 자료수집 중이던 쿨리지는 다음과 같이, 그 시대 클라이머들이 기본적인 지리지식이 얼마나 결여되어있었던가를 기술하고있다.
“나는 돌로미테에 관한 중요한 내용을 담고있는 편지 한 통을 꼼꼼히 읽으면서 조금 옛날로 돌아갔다. 거기에는 코르티나에 오면 돌로미테에 대해 감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되어있었다…1876년 그 지역의 여행에서 나는 성급하게 출발했음에도 코르티나가 돌로미테의 전부며 여기저기 조사해봐도 그 이상은 없다고 느꼈다.”
존 볼의 일기는 그가 돌로미테의 산을 처음 등반한 사람인 위에 그 먼 옛날을 맛볼 수 있게 그려서 더욱 인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는 펠모 동남면을 산양사냥꾼 출신 가이드와 함께 오른 1857년 9월 19일 보르카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출발은 적당한 때, 다리에서 세점 치는 소리를 듣고 했다. 네시에 상당한 고도에 있는 안텔레오(사냥꾼)라는 바위 위에서 밝은 불빛을 보았다. 조금 있자 바위 뒤에서 금성이 솟았다. 검은 그늘을 집어던지고도 남을 만큼 밝았다. 수성은 머리 위에 있었고. 카세라에 다가가자 동이 서서히 트기 시작했다. 다섯시에는 내 구두의 나사들을 조이느라 오막에서 시간반 가량 있었다…” 여러가지 모험적인 암릉등반 끝에 그는 한 지점에 다다라 “진정한 오름이란…처음에는 쉬웠다. 그러나 턱(ledge) 위에 풀이 조금 있는 바위들을 지나면서 길고 지루한 퇴석지대가 나타났다. 눈에 덮여있기에 그리로 해서 끝까지 갔더니 조그만 뜀바위(platform)다. 건너뛸 수 있겠다던 가이드는 내가, 보이는 데만 80에서 100피트쯤 되어보이는 바위로 이어지는 릿지를 가리키자 거기는 위가 막힌 데라 가면 안 된다고 한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가보자고 했다…가이드는 진지하게, 그러지 말자고 했다…약간 조심스럽게 뾰족뾰족하나 불안한 바위 옹두라지들을 붙들고 릿지를 지났다. 어려움도, 위험도 없는 데를 200야드쯤 지나자 꼭대기, 의심할 수 없는 그것이 있었다”고 썼다.
볼과 버크벡(Birkbeck)은 1860년이라는 늦은 시기의 돌로미테여행에서 샤모니의 빅토르 테라즈(Victor Tairaz)와 함께 마르몰라타 디 로카(Marmolata di Rocca)를 초등했다. 그후 1868년, 볼은 <동부알프스 The Eastern Alps>라는 가이드북을 펴내 탐험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이시기에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한 클라이머는 1862년에 오스트리아 알파인클럽(Osterreichischen Alpenverein)을 창설한 파울 그로흐만(Paul Grohmann 1838~1908)이다. 이해 이 비엔나 클라이머는 마르몰라타 디 로카 2등을, 이듬해에는 안텔라오(Antelao)와 토파나 디 메쪼(Tofana di Mezzo)를, 1864년에는 토파나 디 로제스(Rozes)와 소라피스(Sorapiss)를 올랐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는 이후 사소룽고(Sassolungo), 트레 치메(Tre Cime), 크리스탈로(Cristallo) 등 수많은 등반을 했다.
길버트(J Gilbert)와 쳐칠(G C Churchill) 공저의 <돌로미테의 산들 The Dolomite Mountains>은 오늘날 봐도 재미있는, 19세기 돌로미테의 클라이밍 풍경을 엿볼 통찰력까지 주는 훌륭한 책이다. 이 두 위대한 여행가들은 클라이밍의 세계를 확신, “돌로미테 클라이밍은 어느것이든 훌륭한 향미를 지녔다”고 해 영국인들로 하여금 해가 갈수록 그곳을 찾는 숫자가 늘게끔 고무했다.
프란시스 폭스 터킷(Francis Fox Tuckett)은 돌로미테를 여러 번 여행했고 1867년에 멜시오르 안더렉(Melchior Anderegg), 보니파치오 니콜루시(Bonifacio Nicolussi)와 함께 오른 치마 토사(Cima Tosa) 등 주요봉을 여럿 등반했다. 1872년에는 마르몰라타 서릉을 신루트로 오른 다음 페다이아(Fedaia)로 내려왔다.
레즐리 스테픈은 당시 영국인에게는 예외적이었던 돌로미테파 트리오의 막내다. 1862년에 이미 몬테 디스그라지아(Monte Disgrazia)를, 이듬해에 쉬렉호른(Schreckhorn) 초등을 시도했다.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팔라(Pala)산군을 탐험했으며 1869년에는 그가 나중에 치마 디 발(Ball)과 치마 디 프라두스타(Fradusta)로 이름지은 두 산의 고지를 혼자서 여행했다.
비교적 외진 브렌타(Brenta)돌로미테는 인기지역들의 그늘에 가려 에드워드 콤프턴(Edward Compton)이 알베르 드 포크넬(Albert de Faulkner)과 가이드 니콜루시(Nicolussi)를 데리고 나타나기 전에는 20년동안 발전이 지지부진이었다. 1881년에서 1884년 사이에 이들은 토레 디 브렌타, 치마 브렌타 등 여러 치마들과 캄파닐레(Campanille)들을 올랐다.
브렌타지역을 제외한 돌로미테는 1875년까지, 올라갈 만한 산들의 센터라는 위치에 있었으며 모든 주요 봉우리들이 등반됐다. 이때 암벽등반은 등산과는 다른 개념으로서 수없이 많은 조그만 산이나 오를 때 필요한 짓이었다.
더글러스 밀너(Douglas Milner)는 그의 경탄할만한 저작 <돌로미테 The Dolomites>에서 19세기 후기 25년 동안의 발전을 가속시킨 특징적인 국면 세 가지를 들었다. 그 첫째는 독일과 조금 뒤의 오스트리아 및 이탈리아 알파인클럽의 급속 성장이다. 이는 증가하는 클라이머들을 회원으로 끌어들이는 데 제약요소가 거의 없었기 때문으로 많은 인원과 축적된 자금을 갖게된 클럽들은 ‘한 걸음 나아간 탐험의 본부’역할을 할 산막들을 세울 수 있었다. 둘째 요소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클라이머들이 가이드 없이 등산에 임하게된 점이다. 하여 그들은 전통적인 그 꼼꼼한 등산방식을 던져버리고 깎아지른 돌로미테 암벽에 맞는 스타일을 발전시킨다. 이런 이들로는 루트비히 푸르트쉘러(Ludwig Purtscheller), 지그몬티(Zsigmondy) 형제, 헤르만 본 바르트(Hermann von Barth)가 있다. 셋째로는 가이드들의 숫자가 그럼에도 모든 주요 등산지에서 증가하고 동부알프스에서는 풍부한 경험까지 축적하여 발전의 기반을 굳혔다는 점이다.
3. 1875~1900 동부알프스의 진보
비엔나사람 파울 그로만은 현지가이드들을 써 초등을 계속해나감으로써 서부알프스 출신의 유능한 가이드들을 고용한 영국인들을 압도해나갔다. 1869년은 그에게 특히 성공적인 해였는 바 그는 7월 18일 드라이슈스터슈피처(Dreischusterspitze)를 프란츠 이너코플러(Franz Innerkofler), 두 명의 가이드와 함께 영하 9도의 날씨 속에 초등했다. 그해 저물녘에는 사소룽고를 올랐고 치마 그란데 디 라바레도(Cima Grande di Lavaredo)를 네 시간만에 초등했는데 이는 앞장선 가이드 살춰(Salcher)의 기술과 속도 덕분이었다.
또 한 명의 독일 등산계의 아버지는 뮌헨 출신의 법률가 헤르만 본 바르트였다. 1845년 6월 5일 오베르바이에른(Oberbyern)의 슐롭 유라스부르크(Schlob Eurasburg)에서 태어난 그는 북티롤 전지역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더위잡기와 혼합등반이 유행하던 당시 전문적으로 바위만 탔으며 보통은 가이드 없이 혼자 산에 다녔다. 1868년에는 베르흐테스가덴(Berchtesgaden)을, 1868년에는 알게우(Allgau)알프스를, 1870년에는 카르벤델을 탐사했는데 카르벤델에서는 8월 21일 랄리데러(Laliderer)를 포함, 여러 산을 초등했다(그러나 그는 이 랄리데러 북면등반이 후일 논란의 대상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1871년과 1873에는 멀리 베텔스타인(Wetterstein)도 올랐다.
1964년 영국의 폴 넌과 올리버 울콕(Oliver Woolcock)은 베르흐테스가덴의 운테르스베르크(Untersberg)를 바르트 침니루트로 등반했다. 그리고 넌은 “나는 침니에서 내내, 1880년대에 이렇게 삼삼한 피치들을 혼자서 올랐던 헤르만 본 바르트의 담대성에 감명을 받았다. 그곳에는 자일 외에는 아무것도 안 쓴 듯, 간간이 중간확보용 하켄만 보일 따름이었다. 여기에 이르자 이 선구적 단독등반가를 정말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썼다.
본 바르트는 많은 글을 써 당대의 젊은 독일클라이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영국클라이머들 사이에서도 꽤 알려져 있었으며 자기의 동료가 추락한 뒤 한, “나와 함께 등반하는 자는 죽을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절규 ‘워크라이(war cry)’는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그는, 산의 정신에 물든 “클라이머라면 위험을 경애해야한다고 믿는 사람”으로 비쳤던 것 같다. 그의 태도나 수사적 표현은 좀 지나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같은 기조의, 그의 산에서의 업적에 대해서만큼은 경애하지 않을 수 없다.
본 바르트는 결국 유럽을 떠나 아프리카로 갔다. 지리적 조사를 위해서였다. 그리고는 1886년 포르투칼령의 서부아프리카에서 열병으로 죽었다.
파울 귀스펠트(Paul Gussfeldt)박사는 당시 또 한 명의 이채로운 독일클라이머였다. 베를린대학 교수로서 바바리안(Babarian)알프스를 처음 등반했고 1877년에 피츠 세레첸(Piz Scerecen)을 초등하면서 앙가딘(Engadine)지역을 밝힌 사람이었다. 이듬해에는 베르니나(Bernina)지역에 신루트를 냈고 그랑드 조라스(Grandes Jorasses)와 그랑 파라디소(Gran Patradiso)를 겨울에 올랐다. 1893년에는 몽블랑 푀테레이(Peuterey)릉을 초등함으로써 생애 최고의 영광을 안았다. 이때의 동료는 에밀 레이(Emile Rey), 크리스쳔 크루커(Christian Klucker), 세자르 올리에(Cesar Ollier)였고 총 등반시간은 85시간이었다.
귀스펠트는 독일어권과 영어권 클라이머들 간에 반목이 쌓여감에 대해 당대의 어떤 독일저술가보다 더 잘 알고있었다. “좋은 가이드들은 영국인들의 손아귀에 있었다. 당시 그들은 독일어를, 나는 영어를 몰랐다. 그러니 우리 사이에 의견교환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당시 영국의 선구자들은 교육도 꽤 받고 발도 너른 이들이었다. 그러나 천진스런 우리 독일학생들은 그들의 체크무늬옷과 두둑한 지갑밖에 본 게 없었으니 유감스런 일이었다.”(In den Hochalpen)
에밀 지그몬티(Emil Zsigmondy 1861-1885)라는 이름은 이시대 알파인클라이밍의 대명사였다. 비엔나에서 나 의사수업 중이던 그는 동생 오토(Otto)랑 돌로미테와 바바리안알프스에서 수많은 초등을 해냈다. 에밀은 가이드 없는 등반의 으뜸가는 해설자로서 독일인들에게, 어떤 젊은 학생도 불알 두쪽만으로 높은 산을 오를 수 있음을 과시했다. 1879년 그 형제는 칠레탈(Zillertal)알프스의 펠트콥(Feldkopf)을 올랐는데 그것은 당시 동부알프스에서 가이드 없이 한 것으로는 가장 어려운 등반이었다.
그는 <알프스의 위험 Die Gefahren der Alpen>이라는 유명한 책을 냈는데 거기에는 대개는 고약한 그의 일련의 경험들―낙석이나 눈사태, 세락을 맞았다든가 오리무중 속에서 고장난 나침반을 갖고 헤맸다든가 등등이 담겨있다. 산의 위험에 관해서는 이것보다 더 권위있는 책이 없을 듯하다! 아울러 그 책에는 초창기에 하켄을 이용해 어떻게 선후등자 빌레이를 보았는가 알 수 있는 그림도 있다.
책이 나온 직후 에밀은 동생 오토, 루드비히 푸르트쉘러를 데리고 도피네(Dauphine)알프스의 메이쥬(Meije) 중앙봉과 상봉을 넘는 횡단을 사상 처음으로 했다. 그러나 며칠 뒤 메이쥬 남면에서 추락,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이 젊은 비극적 죽음을 본 영국인들은 그러나, 가이드 없이 하는 등반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종래의 견해를 강화했을 뿐이었다. 그 남면은 1912년 발군의 돌로미테 가이드 안젤로 디보나(Angelo Dibona)가 올 때까지 미등으로 남아있었다.
율리우스 쿠기(Julius Kugy)는 이 시절 쥘리앙과 일리리안(Illyrian)알프스를 세상에 소개한 사람이다. 오스트리아 트리에스트(Trieste)에서 나 2차대전 때 이탈리아에서 죽었다. 쥘리앙알프스를 돌아다니며 등반에 열중할 때 그는 언제나 가이드 안드레아스 코막(Andreas Komac), 조셉 크룩스(Joseph Croux)를 동반했으며 간혹 동계등반도 했다. 쿠기의 팀이 오른 봉우리는 그러나 잘룩(Jalouc)과 카닌(Kanin) 뿐이다.
쿠기는 “언젠가 한 봉우리를 올랐는데 산이름이 대단히 마음에 들었다. 나는 잃어버린, 혹은 잊혀진 무엇을 찾듯 그 산에 사로잡혔다”고 한 트리글라브(Triglav)에 대해 점점 깊이 빠져갔다. 이 조사는 그를 그 산에서의 고도의 암벽등반으로까지 몰고가진 못했지만 ‘산의 혼’이라는 화두는 던져주었다. 그래선지 그는 <알프스 순례 Alpine Pilgrimage>라는 그의 저작 서문에 이렇게 썼다. “이 책은 스포츠에 관한 책도, 클라이머를 위한 가이드북도 아니다. 이는 산이라는 존재가 내 인생에 끼친 순기능을 기술하고자하는 노력일 따름이다.” 그는 이 시대 다른 위대한 대륙의 탐험가들 사이에 우뚝 선 사람이었다.
가장 많은 등반을 한 사람은 루드비히 푸르트쉘러(1849~1900)였다. 그는 1700개쯤의 봉우리를 올랐는데 그중 40개는 4천미터가 넘는 것이었다. 와츠만(Watzmann) 동면을 초등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것이었다. 가이드 없이 등반도 했으며 그의 폭넓은 지식을 동원, 1894년에 동부알프스 가이드북 <동부알프스 고지여행 Der Hochtourist der Ostalpen>을 펴내기도했다. 푸르트쉘러는 에귀 드 드뤼에서 추락하여 6개월 뒤 베른에서 죽었다. 그의 기록들은<암과 설의 위 Uber Fels und Firn>라는 제목으로 그의 사후 1901년에 출간됐다.
오스트리아와 독일클라이머들에 대해 영국인들이 점점 비동정적으로 되어가자 독․오클라이머들은 한 등반 한 등반에 더욱 자기의 수족과 생명을 거는 열광주의적 경향을 띠어갔다. 그러나 최고의 클라이머들이 30도 안되어 사라지곤 하는 비타협적 현상과 상대적으로 높은 사망률은 보수적인 알파인클럽 멤버들의 의구심을 굳혀갔을 뿐이었다. 저 불행한 민족적 라이벌의식은 이시기에 싹텄던 것이다.
영국의 클라이머들은 독일인들은 광적인 인간이라는 판에 박은 인식을 가지고있었고, 벨헬름 레흐너(Welhelm Lehner)의 것을 당시 독일인들의 전형적 견해로 본다면 독일인들도 같은 식으로 반응했다. 레흐너는 그의 <알프스의 정복 Die Eroberung der Alpen>에서 영국클라이머들이 자국클라이머들과 다른 이유를 이렇게 재미있게 설명했다.
“영국인들 사이에서 등산이라는 것은 거의 배타적으로, 유복한 이들의 전유물이었다. 이는 그들이 가이드 없이 등반하는 것에 무관심한 의심할 바 없는 이유로서 그들은 등산에 입문할 때부터 일급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 가이드 없이 등반하는 이들로서는 오랜 도제기간을 지나서나 가능한 일급산행을 했다. 반면 게르만인들의 산악계는 보다 민주적이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중산층의 스포츠였으며 무엇보다 젊은 대학생들의 것이었다. 게다가 게르만인들은 가이드를 고용할 만큼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가이드 없는 등반은 그만큼 빨리 발전했다. 돈이 없다는 것이 등산의 발전에 불리하게 작용하지만은 않은 것이다.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요소는 알프스를 찾는 영국인은 거의가 상당한 사회적 지위에 오른 사람들(fully-developed master men)-경제적으로 독립된, 자유의지로 개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 이들이었다는 점이다. 반면 게르만인들은 소집단을 통해 산악계에 입문, 그룹의 요구사항을 신명을 바쳐 따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완전인(a complete man)이 된다든가 자기 기호나 기질을 발전시킨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자면 당시의 젊은 게르만인들에게 산은 무엇보다도 현실적 제약으로부터의 탈출로였던 것 같다. 산에서 그들은 중산층의 일상에서는 불가능한, 자아발현을 추구했던 것이다. 앵글로색슨인들은 ‘신사(Herrentum)’라는 자부심이 강해 가이드에의 의존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수 있었다. 게르만인들은 가이드 없는 (독자)등반으로부터,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자유와 자기의 잠재적 주인의식을 발견했기 때문에 거기에 매료되었다(이 부분은 아놀드 런 경이 번역한 것으로 고맙게도 필자에게 게재를 허락했다).” 이 상당히 일반적인 흐름 속에도 얼마간 진실은 있었다. 북부도시들에서 알프스로 온 다수의 게르만 클라이머들은 중요한 등반을 할 때면 최고의 가이드들을 고용, 전통적인 방식(traditional school)을 따랐다. 반면 독자등반은 바바리아알프스나 티롤리안알프스에서 성했다. 그 지역 주민이나 인근도시에서 온 클라이머들은 서로간에 너무 잘 알아 시즌이 되면 함께 혹은 개인적으로 기술을 익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도는 약했지만 이런 경향은 돌로미테에도 있었다.
레흐너는 확실히 영국 본토의, 가이드를 전혀 쓰지 않는 암벽등반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던 것 같다. 또 촬스와 로렌스 필킹턴(Lawrence Pilkington) 형제, 프레드릭 가드너(Frederick Gardener) 등이 1878․1879․1881년에 달성한, 셀 수 없이 많은 독자등반들―그중에는 마터호른, 에크린스(Ecrins), 메이쥬(Meije), 핀스터라호른(Finsteraahorn), 찌날로트호른(Zinal Rothorn) 등반이 있으며 조금 이후에는 독자등반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린 저 유명한 머머리(Mummery)의 그것도 있다―에 대해서도 몰랐던 것 같다.(머머리의 업적에 대한 자세한 기술은 ‘서부알프스의 암벽등반 발전’에 나온다.) 이장의 나머지부분에서는 19세기말까지 활약했던 사람들 중 주연급만 들어보기로 하자.
마이클 이너포클러(1848~1888)는 이장에서는 유명한 이다. 그는 넓은 어깨와 새빨간 구렛나루의 섹스턴 돌로미테(Sexton Dolomite) 가이드였다. 주요 업적을 두개 들라면 1875년의 크로다 데이 토니(Croda dei Toni; Zwolferkofel)와 1878년의 운디치(Undici; Elferkofel) 초등을 꼽을 수 있는데 1880년에는 그로흐만슈피체(Grohmannspitze)도 올랐다.
이 서른두살 난 가이드는 솔로클라이밍의 주창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두 번의 실패―알레산드라 라체델리(Alessandra Lacedelli)는 손을 다쳐, 바론 외르뵈스(Baron Eorvos)는 탈진으로―를 맛본 이후 이너포클러는 계속 혼자 다니기 시작했다. 치마 피콜라 데 라바레도(Cima Piccola de Ravaredo)는 이슬러 디마이(Issler Dimai), 쇼르패스(Siorpaes)와 함께였지만 그것도 초등은 1881년에 남서벽(Ⅰ-Ⅱ)으로 그가 한 것이었다. 그것은 당대 최난의 암벽등반이었다. 그는 몬테 크리스탈로(Monte Cristallo)에서의 사고로 사십의 나이에 죽었다.
1880년대에 카티나치오(Catinaccio)에 남은 처녀봉은 바욜레타워(Vajolet Towers)뿐이었다. 그걸 올라보려고 별놈들이 별짓을 다해보았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이 유명한 암탑은 작가 귀도 레이(Guido Rey)에게 영감을 주어 주옥같은 산문을 낳게했다. 1910년 티타 피아쯔(Tita Piaz)와 그곳을 찾았던 그는 “기이하도다 저 산이여! 저 해골 같은 산이여! 환상적이고 괴이하고 야아, 무시무시하도다. 찬바람만 부는, 악마로다. 아아 저기엔 나의 산들과 마찬가지로 단정함과 웅장함이 없구나. 야만과 폭력, 공포도 없고 시간이 만든 황폐함 속에 페이소스만 남았구나. 경악스럽고녀! 내 생애 이만한 벼랑 수도없이 보았고 이보다 높은 것 한도없이 대했지만 이토록 매력적인 놈은 진실로 없었으니”라고 읊었다. “내 머리 바로 위에서, 공중으로 치솟은, 나 알프스 그만큼 돌아다녔으나 보지 못했던, 가늠할 수 없는 로케트바위여… 뉘라서 피 찬 이 있어 저 칼날 같은 능선에 매달릴 꿈 꿔보리? 저 뾰족한 정상에 서는 것을 상상하리? 아니, 섰다한들 감히 어떻게 내려오리?” 직유와 은유의 맥동은 돌로미테 숭배자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하는 그의 저작 <산과 벽 Peaks and Precipices>으로 계속된다.
온갖 첨탑들에 둘러싸인 매혹적인 라우린왕(King Laurin)의 궁전, 그리고 그의 장미정원(Rosengarten) 전설이 서린 이 카티나치오그룹에 처음 도전한 이는 영국인이었다. 두 높은 봉우리가 1872년(Kesselkogel)과 1874년(Rosengarten)에 떨어졌다. 다음에는 들러리들에게 공격이 가차없이 가해졌다.
바욜레타워는 여섯으로 되어있다. 근접이 어려운 셋 중 첫번째는 1887년 게오르그 윙클러(Georg Winkler 1870~1887)에게 떨어졌다. 그때 그는 Ⅳ급의 동쪽탑봉을 혼자서 올랐다.
그는 돼지도축업자 아버지를 둔 유복한 가정 출신이었다. 그러나 학교 동무들이 모두 그보다 컸다. 그는 클라이밍을 시작할 무렵 150㎝밖에 안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성공에 박차를 가하게한, 의문의 여지없는 요인이었다.
그는 암벽오르기야말로 자신을 세울 적당한 매체임을 이내 깨달았다. 곧 ‘바위의 마술사’가 되었고 대담한 단독등반을 즐겨 하는 이상한 놈이 되었다. 그는 자기의 왜소한 체구를 쇠징(iron claw)으로 극복했다. 얼마나 애용했던지 암릉에 그것이 꼭 찡겼을 때조차 바위에 줄을 묶고 양손으로 부여잡은 다음이 아니면 결코 벗지 않을 정도였다.
윙클러가 토텐세셀(Totensessel)과 토텐키르츨(Totenkirchl)을 올랐을 때는 그의 나이 겨우 열다섯이었다. 이듬해(1887)는 바욜레타워(Torre Winkler)를 남동벽의 어려운 크랙으로 해서 솔로로 올랐다. 다음 찌날로트호른을 오르고 그 이틀 뒤 바이스호른에 붙었다가 홀로 사라졌다. 그의 시신은 바이스호른빙하의 발치에서 1956년에야 비로소 발견되었다.
중앙타워는 5년 뒤 스태벌러(Stabeler)가 올랐다. 남은 하나는 1895년 델라고(Delago)가 윙클러식으로 해치웠다. 세 타워―토레 윙클러, 토레 스태벌러, 토레 델라고의 종주가 마침내 이루어진 것은 1899년, 한스 바쓰(Hans Barth)와 에두아르드 피츨(Eduard Pichl)에 의해서였다. 루트상의 피츨크랙은 언제 봐도 삼삼한데 지금은 수많은 하켄이 파리똥처럼 깔려있다. 귀도 레이가, 피아쯔를 따라 그 크랙을 올랐음에도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투를 한두 번도 아니고 수 차례 한 끝에 그 하늘길을 무찌를 수 있었다”고 했을 정도면 그곳이 얼마나 힘겨운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대의 또 다른 두 훌륭한 클라이머는 1890년 8월 8일 칭크 디타(Cinque Dita)를 초등한 오스트리아인 로베르트 한스 슈미트(Hans Schmitt)와 조안 산트너(Johann Santner)였다. 이들의 동벽 침니루트는 지금은 길이도 별로 길지 않은 고전이 되었지만 당시로서는 돌로미테에서 가장 어려운 루트였다. 슈미트는 그 전에 이미 카티나치오와 라테마르(Latemar) 산군에 초등루트를 여럿 내고있었다.
칭크 디타 여타루트의 길내기와 종주는 루드비히 노르만 네루다(Ludwig Norman Neruda 1864~1898)와 그의 친구들이 했다. 그는 1895년까지 그 봉우리를 여섯 번 올랐다.
네루다는 자기가 “하나의 봉우리를 한번 이상 오르는 것은 시간낭비며 등산이란 등정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서 한다고 믿고있던 사람들” 축에는 끼지 않을 것이라고 처음부터 마음먹은 이였다. 그는 “어려운 부분은 반드시 정복하고 말겠다는 클라이머의 오기(passion)와 힘든 문제를 해결했을 때 얻는 만족의 떨림(thrill)”을 타고났던 것이다.
1899년에 이르자 대부분의 명봉과 소소한 첨봉들은 거의 등정되었다. 그러나 캄파닐레 바소(Campanile Basso; Guglia di Brenta)만은 아직 홀로서기를 견지하고 있었다. 수많은 도전이 있었음에도 이 고도감 삼삼한 암탑은 그 고고한 정상을 내주지 않고있었던 것이다.
헌데 어느날 하켄 몇 개 챙긴 두 명의 인수브루크 대학생 오토 암페러(Otto Ampferer)와 칼 베르거(Karl Berger)가 재빨리, 이전 이탈리아인들의 최고지점에 도달했다. 거기 테라쪼 가르바리(Terrazzo Garbari)에서 그들은 아찔한 7.6m 트래버스를 감행, 북벽으로 진입했다. 그리고는 홀드 미세한 30m의 가파른 벽(암페러월)을 올라 생각보다 쉽게 정상에 닿았다. 가장 어려운―그전에 이탈리아인 가르바리와 타베르나로(Tavernaro)를 따라갔던 짐꾼이 풀리월(Pooli Wall)이라 불렀던 것으로 보이는 마디는 그러나 지금도 오스트리아인이 이룬 괄목할만한 업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큰 섬을 평이한 해안으로 들어가 정복했다. 그러나 우리가 정복한 섬은 작아도 긍지 높은 절벽이 안내하는 것이었다.” 오토 암페러가 등반 후에 쓴 글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클라이밍의 주요 동기가 미등봉 정복에 있었던 시절을 마감한다. 그러나 그것이 클라이밍하는 유일한 이유였다면 등산은 그쯤에서 멈추고 말았을 것이다. 저 부지런한 선구자들은 모든 산을 올라버렸다. 그러자 다음 세대들은 그것을 오르는 보다 어려운 루트들을 찾아냈다. 그것은 새로운 등산의 개념이었으며 이 스포츠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활력소였다.
4. 1900~1930 동부알프스의 진보
20세기의 첫 순년(decade),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클라이머들은 그들의 자유등반 역량이 바야흐로 그들이 붙어보려는 강파른 대암벽에는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이 자신의 몸을 산의 겉모습(configuration)에 맞추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진보는 자연히 인공수단(artificial aids)의 이용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클라이머들은 혹은 인공등반(direct aid)을 위해, 그렇지만 대개는 뒷배(belays)를 위한 보험(protection)용이나 앞장(leading climber)의 할부(running belays)용으로 쓰려고 바위에 하켄을 박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영국클라이머들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무지의 소산인 것이, 그들은 비교적 단단하고 할만한 경사에 높이도 얼마 안되며 뒷배턱(belay ledges)은 부지기수로 있는 영국바위 생각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돌로미테에서는 고도감 삼삼한 긴 마디의 끝에 앞장선 클라이머가 자신을 붙들어맬 숨돌릴 자리(assurance)가 있어야했다. 그런데 바위란 그런 좋은 뒷배턱(belay flakes)을 안 갖춰놓는 경우가 많은 것이어서 이곳에서는 종종 하켄이 유일한 대안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하켄을 근방에서 주운 돌로 박았다. 그러다 다음 순년이 되자 연장은 점점 정교해지기 시작했다.
1901년, 바바리아와 티롤의 벽들이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다음 점점 늘어나는 바위꾼떼들이 도시와 소읍근방에서부터 북쪽으로, 오스트리아 돌로미테의 암탑들을 더터가기 시작했다.
1901년 7월 27일에는 동부알프스에서 가장 세다고 알려진 다취스타인(Dachstein) 남벽이 에두아르드 피츨과 감스(E. Gams), 찜머(F. Zimmer)에게 떨어졌다. 이들은 다취스타인 숄더를 통해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듬해 7월 23일에는 게오르그 레취스(Georg Leuchs)와 슐츠(A. Schulz)가 토텐키르츨 동벽을 초등했고 1906년에는 쥴리앙알프스 트리글라브 북벽이 도메니히(K. Domenigg), 라이늘(H. Reinl), 쾌니히(F. Konig)에게 초등되었다. 이즈음 베텔스타인에 어려운 루트를 여럿 낸 안톤 슈미트(Anton Schmid)는 뮌헨 출신의 운동선수였다. 그는 1908년에는 안셀름 바르쓰(Anselm Barth)와 함께 오베르라인탈 타워(Oberreintal Tower) 북릉(Ⅳ)을 해치웠다. 1909년에는 친구 베렌트(Behrendt)와 드라이토르슈피체(Dreitorspitze) 서릉에 있었다. 그는 뒬퍼가 저 유명한 Ⅴ급등반을 하기 전에 벌써 Ⅴ급클라이머였던 것이다.
루돌프 페르만(Rudolf Fehrmann)은 1908년 올리버 페리스미쓰(Oliver Perry-Smith)와 더불어 브렌타 돌로미테 캄파닐레 바소의 깔끔한 450m짜리, 남서벽루트(Ⅴ)를 냈다. 1909년에는 고도감 삼삼한 트레 치메 치마 피콜라(Cima Piccola)의 북벽을 올랐다. 같은 해 9월 22일에는 람소(Ramsau)의 가이드 프란쯔(Franz)와 게오르그 스타이너(Georg Steiner)형제가 다취스타인 남벽(Ⅳ) 직등을 처음으로 해냈다. 이는 그 시대 또 하나의 극난루트였다. 이것을 해보면 대개의 오늘날 클라이머들도 어렵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더우기 당시 옛날사람들은 무거운 쇠징 박은 등산화(nailed boots)밖에 없었음에랴. 이외에 서른네 개의 초등을 더한 게오르그는 1972년에 여든여덟 살로 죽었다.
티타 피아쯔(1879~1948)
피아쯔는 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이탈리아에서 보기 드물었던, 어려운 신루트 개척자로 얼마나 대담한 등반을 했으면 ‘돌로미테의 악마’라는 별명이 붙어다닌 사람이었다. 종종 거친 행동을 했는데 특히 고객들에게 잘 그랬으니 확실히 ‘신사가이드’는 아니었던 것 같다. 반면 자애로운 면과 산에 대한 깊은 애정도 있어 혈기왕성한 인간성과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그의 클라이밍법은 때때로 파격적이었는 바 1906년 구글리아 에드몬도 드 아미치스(Guglia Edmondo de Amicis) 초등에 즈음하여 특히 그랬다. 당시 그는 푼타 미수리나(Punta Misurina)를 오르는 중이었는데 건너편에 구글리아가 보이자 정상 너머로 쇠공을 끝에 묶은 케이블을 던졌다. 다음 케이블을 당긴 그는 그 쇠공이 두개의 바윗덩이 사이에 단단히 찡겨있기를 바라면서 조금씩 조금씩 허공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나중에 뉘우친 것처럼, 사실 이보다 더 나은 방법으로 올라갈 수도 있었다.
그는 그가 초등한 루트들에 대해 대단한 긍지를 갖고있었다. 1900년에 한 푼타 엠마(Punta Emma) 초등을 특히 자랑스러워했는데 그것은 북벽 300미터를 단독으로 해치운, 비할 바 없는 것으로서 아직도 Ⅳ급의 자격을 유지하고있다.
그의 루트들은 대부분 돌로미테에 있으나 1908년에 그가 대규모 파티를 이끌고 오른 토텐키르츨 서벽(피아쯔루트)은 카이제르게비르게(Kaiserbebirge)에 있다. 이 450미터루트는 피아쯔월을 포함, 부분적으로는 아직도 Ⅳ급이다.
전해 그는 토레 에스트(Torre Est) 남동벽을 등반하러 갔던 참에 바욜레타워의, 바욜레산장에서 뚜렷이 보이는 크랙에도 등록을 했다. 귀도 레이와 같이 갔던 해 다음해인 1911년에는 클라서(I. Claser), 조리(F. Jori)와 함께 토레 델라고를 저 죽살이치는 남서벽을 통해 올랐다. 이 외에 카티나치오(Catinaccio)나 브렌타에도 수많은 초등루트가 있다. 50대가 되어서까지 클라이밍을 열심히, 잘 해 짧지만 어려운 Ⅵ급루트 토레 윙클러 북동벽을 초등하기도 했다.
안젤로 디보나(Angelo Dibona)
디보나는 이 시대 또 한 명의 위대한 돌로미테 가이드였다. 코르티나 출신으로 대개는 캄피텔로 디 파사(Campitello di Fassa) 출신의 가이드 루이기 리찌(Luigi Rizzi)와 함께 다녔는데 그의 고객들, 예를 들어 비엔나 출신의 귀도나 막스 메이어(Max Mayer) 같은 이들은 단골이었을 뿐 아니라 신의 두터운 동료이기도 했다.
1908년의 디보나는 로다 디 바엘(Roda di Vael)의 로트반드(Rotwand)에 관한 한 일등이었다. 브루메(E. A. Broome), 코닝(H. C. Corning), 베르찌(A. Verzi)와 더불어 400미터에 Ⅳ급의 루트를 올랐던 것이다. 이듬해에는 스퇴블러(E. Stubler)와 치마그란데 북동릉을 올랐다. 1910년에는 메이어형제와 다니기 시작, 게새우세(Gesause)산맥으로 가 로프와 하켄실험을 해보았다. 그리고는 루이기 리찌와 치마 우나(Cima Una; Einserkofel) 북벽, 800미터 Ⅴ급루트를 올랐다. 같은 해 그들은 Ⅴ+의 천미터벽 크로쯔 델 알티시모(Croz dell’Altissimo)을 해치웠다. 하켄 하나 없이 했는데 이후 그것은 돌로미테 최고루트로 꼽혔다. (이듬해에는 프레우스가 역시 하켄 없이 재등했고 1929년에는 루다티스가 4등을 했다. 그때도 하켄은 몇개 없었는데 그것은 스테거와 홀쯔너가 3등할 당시 박은 것이었다.) 1911년에는 메이어 형제, 리찌와 함께 랄리데레(Laliderer) 북벽(900m)을 올랐다. 이것은 디보나의 과업 중 가장 위대한 것으로 북부 석회암산맥지대에서는 분명한 이정표이기도 했다. 전체가 Ⅴ급인 이 루트는 오늘날에도 심각한 명제로 여겨진다.
전시대의 찌그몬디가 그랬듯 디보나도 프랑스알프스로 가 주목할만한 루트들을 냈다. 하여 1912년, 메이어 형제, 리찌와 함께 에밀 찌그몬디(Emil Zsigmondy)를 죽인 메이쥬 남벽을 초등했다.
당 뒤 레퀴엥(Dent du Requin) 동북동릉(메이어-디보나루트)은 우리 영국인들에게, 헤매기 쉬운 곳으로 잘 알려진 루트다(그래서 ‘영국인의 합숙소’라는 뜻의 le dortoir des Anglais라고도 한다). 귀도 메이어와 안젤로 디보나는 1913년 8월 22일 이 루트를 올랐다. 그 시즌 초에는, 지금은 에귀 디보나(Aiguille Dibona)로 불리는 도피네(Dauphine)의 첨봉을 올랐고 7월에는 엘르프루아드(Ailefroide) 중앙봉을, 북릉을 통해 올랐다. 이 루트들은 돌로미테 클라이머들이 기회가 닿을 때마다 훌륭한 길을 얼마든지 낼 수 있음을 과시한 예였다.
에드워드 데이빗슨(Edward Davidson) 경은 1913년 알파인클럽의 고별연설(Valedictory Address)에서 이에 대해 너무 잘 표현했다. 더우기 그 내용은 당시 영국 클라이밍계의 의견을 대변한 듯해 아주 흥미롭다.
“안젤로 디보나라는, 근래 발군의 기량을 선보이는 코르티나 출신 가이드가 있읍니다. 그는 바위와 얼음, 눈이 혼재된 저 위대한 스위스와 프랑스알프스 어떤 곳에 내놔도 금방 적응해버리는 자입니다. 얼마나 비범한지 그의 돌로미테 동료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읍니다. 이태리 미명기에 활약했던 그의 대선배, 저 유명한 이너포클러가 환생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여기, 귀도 레이 박사가 고맙게도 우리 <알파인저널>에 그의 등반기록들을 다소 자세히 써주신 것이 있읍니다. 돔 드 네즈 데 세크렝(Dome de Neige des Ecrins) 북서벽, 엘르프루아드 중앙봉 북릉, 에귀 뒤 플랑 남동릉, 그리고 당 뒤 레퀴엥 동북동릉이군요.
귀도 메이어 박사의 글에서는 에크렝 북서측 어렵기가, 저 각광받았던 카르벤델게비르게(Karwendelgebirge) 랄리데레봔트를 능가한다고 했읍니다. 1911년 메이어 형제에게 떨어진 것이지만 이것도 알고보면 앞장은 디보나가 선 것 아닙니까? 후크와 하켄만으로 올랐는데 그것도 박았다가는 빼고 뺐다가 다시 박고 해서 올랐다 했읍니다. 여기저기서, 특히 오스트리아인들은 그것이 벽등반의 최후 단어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우리는 홀로 간 원정에서 그처럼 성공적인 업적을 달성한 그의 대담성과 기량에 찬사를 아껴서는 안 되겠읍니다. 동시에, 이 주도면밀한 베테랑이 등산이라는 스포츠를 추구함에 있어서 등산선수(gymnastic rock-climbing) 같은 짓을 해 정당화될 수 있는 한계에 도달했다 해도 그것이 지나치지만 않았다면 용서해야할 것입니다.”
5. 인공수단들의 증가 1910~1915
1910년은 인공수단 클라이밍의 확산이라는 점에서 주목할만한 해였다. 그것은 선구자들의 도움이 필요했던 암벽등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이해 엑켄스타인(Eckenstein)은 배낭에 넣고다니다 바위와 얼음이 혼재된 사면이 나오면 꺼내쓸 수 있는 가벼운 아이젠을 만들었다. 아울러 짧은 피켈도 만들었는데 그것은 특히, 좁은 행동반경 내에서 발판을 깎아야하는 가파른 빙벽에 루트를 내고싶은 클라이머들의 관심을 끌었다. 하켄은 이미 전 동부알프스에서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좁은 의미의 인공등반, 많은 하켄과 카라비너를 쓰는 로프 이용 인공등반방식이 개발된 것은 1910년이었다.
<알피니스무스 Alpinismus> 편집인을 지낸 바 있었던 토니 히벨러(Toni Hiebeler)는 그때 카라비너의 진화에 천착, 아주 그럴듯한 사실을 발굴해낸 바 있었다. 그 글을 번역한 것을 여기 싣거니와 이는 <알파인저널> 74권 318쪽에 실렸던 것이다.
카라비너의 진화는 친구들에게 람보로 불렸던 오토 헬초크(Otto Herzog)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의 일생 자일파트너였던 구스타프 하버(Gustav Haber)에 의하면 이 아직도 우리 기억에 남아있는 뮌헨 클라이머는 “어느 날 소방대원들이 진화작업 하는 현장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때 그의 눈에 소방대원들이 벨트에 배(pear) 모양의, 카라비너라는 것을 차고있는 것이 들어왔다. 순간 그는 이 물건을 클라이밍에 이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생각을 발전시켜 실제등반에서 안전장치로 써보았다.”
베터스타인게비르게에 있는 오베르나인탈(Oberneintal)산장 관리인이었던 프란츨 피춰(Franzl Fischer)도 비슷한 목격을 했다며 다음과 같은 증언을 했다. “그들은 긴 바위하켄을 썼어요. 당신도 알다시피 긴 커튼막대기에 자일하고 슬링, 그리고 소방대원 카라비너를 달았죠. 람보와 하이니 슈나이더(Heini Schneider)는 가끔 우리에게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주기도 했읍니다. 그렇지만 나중에 쓰던 카라비너를 누가 만들었는지는 당신에게 말해줄 수 없군요. 나는 알고있지만 말입니다.” 젊은 시절 꽤 뛰어난 클라이머였던 하이니 슈나이더에게는 카라비너의 기원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누구보다 오토 헬초크가 발명했을 것이라고 했다.
헬초크의 조카인 뮌헨의 프란츠 호프만(Franz Hofmann)은 자기 아저씨가 그것들을 클라이밍에 쓴 것이 분명하다면서 그 일에 대해 직접 들은 적도 있다고 했다.
우리는 윌더 카이저(Wilder Kaiser)의 교황이라 불렸던 프란츠 니베를(Franz Nieberl)이 쿠프스타인(Kufstein)에서 보낸 편지에서는 색다른 면을 발견했다.
“나는 한스 뒬퍼(Hans Dulfer)를 처음 만났을 때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읍니다. 그때 뒬퍼U(토텐키르츨)를 막 오른 그는 산악계에서는 뉴스타였죠. 그는 카라비너를 이용한 뒷배법을 설명해주었읍니다. 초창기의 것 두개를 내보이며 기막힌 놈이라고 자랑했죠. 이때가 1910년, 아마 7월이었을 겁니다. 게다가 오토 헬초크도, 내게 플라이쉬방크(Fleischbank) 동벽에서 실험한 이야기를 해주었읍니다. 뒬퍼 전에요. 피츨은 아주 자신해요. 그자가 질러탈(Zillertal)산군으로 처음 원정갈 때였는데 카라비너 두개를 항상 가지고있었어요.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것만 있으면 될 듯이요.”
초창기의 사건들에 대한 모호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글은 그 신기술뿐 아니라 그것을 발명한 사람들에 대해서까지 훌륭하게 설명하고있다. 그러나 독자 여러분은 여기서, 오늘날 하켄은 카라비너와 불가분인데 도대체 카라비너 없이 어떻게 하켄을 사용할 수 있었을까 하고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
당시의 클라이머들은 짤막한 자일토막을 가지고다녔다. 앞장은 그것으로 하켄도 묶고 자일도 묶었다. 두번째 사람은 그 자일도막을 풀어 이후 죽 가지고있었다. 따라서 촬스 미드(Charles Meade)가 캄파닐레 바소의 신루트에 대해 쓸 때 언급한 것은 잘못된 인용이다.
1909년 8월 19일 미드와 그의 가이드, 본느발쉬라르크(Bonne-val-sur-Arc)의 피에르 블랑(Pierre Blanc)은 캄파닐레 남서측을 오르고있었다. 그런데 두 명의 오스트리아 클라이머들이 어느새 다가와 하켄을 박고있었다. 한 클라이머가 하켄을 박고나자마자 추락하더니 그들은 물러가버렸다. 피에르 블랑도 그 상황에 처했다. 그러나 그는 (하켄 하나 박지 않고) 삼삼한 고도감에도 불구하고 그림같이 나아갔다.
이어 미드는 서슴없이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악몽이 얼마나 계속될지… 말할 수 없이 어렵구나.” (말은 않했지만) 그들은 하켄을 써서야 성공할 수 있었다. 아울러 그것을 자일토막으로 묶지 않고 하켄고리에 통과시킨 자일로 묶었다. 그들은 소위 아레트 미드(Arete Meade)까지 계속 이런 변통을 발휘하며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