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03 예수님의 기도를 본받아(요12_27~30)
예수님의 기도를 본받아서, 그런 제목 하에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 우리 교회에서 지금 40일 새벽기도회를 하고 있는데,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이 기도를 많이 하시고 또 기도에 힘을 쓰시는 것 감사합니다마는 우리가 좀 더 서로가 격려해서 이 기도의 시간 많이 나오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헬라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보고자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두 가지 말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되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거니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겠다. 간단히 말씀하면 헬라사람이 찾아 왔다는 것은 조만간에 주님의 복음이, 진리가 이방세계에 전해질 것을 예수님이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영광이라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방 사람들이 복음을 받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죽어야 됩니다.
십자가 이후에 죽음과 부활이 있은 이후에 있어지기에 예수님께서 일면 기뻐하시면서 그리고 죽음을 이제 곧 맞이해야 되는 이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놓고 예수님께서 아주 번민하시더라. 그랬습니다. 번민하시고 괴로워하시면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가 27절 하반절에 말씀에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했지만은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해서 왔나이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할때 우뢰 같은 소리가 들려와서 그 기도를 응답하셨다. 그리고 그 말씀은 이런 응답은 예수님 자신보다도 우리를 위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씀이 되어있습니다.
제가 여기에서 한 몇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첫째로, 말씀드리는데 시국에 대해서 너무 지나친 반응을 보이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기도에 대한 말씀이 나왔기에 드립니다.
이번에 중동에 전쟁이 지난 17일날 오전 한국시간으로 한8시50분에 그리고 그쪽 현지는 밤 2시경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예상을 뒤엎는 전쟁을 시간이 그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는 것이지요.
그 전쟁을 수행하는 그 두 나라의 대통령 부시 대통령과 그리고 다음에는 사단 후세인의 그 얘기가 TV의 화면에도 나오고 신문의 화보로도 나왔습니다.
이 전쟁을 전후에서 미국의 저명한 부흥강사 빌리그레함 목사님을 모시고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기도를 하시고 또 당신 부인과 더불어 교회에 가서 기도를 드리는 장면을 볼수 있었습니다.
사단 후세인도 또 역시 마찬가지로 TV에 신문에 나온데 보면 아주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봤습니다.
서서 기도하다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엎으려서 기도하다가 그렇게 두 대통령이 열심히 전쟁을 하면서 수행해 가면서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은 대단히 인상적인 감이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은 이데올로기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결국은 인류 마지막의 종말에 아마겟돈 전쟁은 종교 전쟁이구나.
공산주의 그렇게 극성을 부리던 사회주의도 결국은 한낱 풀잎같이 사라지고 마는데 역시 사람에게는 근본적인 문제는 이 종교 문제가 인류 마지막에 승패를 겨루는 아마겟돈 전쟁으로 이어질라 카는 갑다. 이 종교문제 그런데 이제 여기에 대해서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인조를 합니다마는 분명 두 사람이 기도를 열심히 하시는데 하나는 기도가 잘못되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잠언서 28장9절에 다같이 받아합시다.
주의 말씀에 주의 계명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기도하는 자는 가증하다. 이 가증한 기도가 있어요.
하나님의 계명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그 드리는 기도는 가증하다. 심지어 시편 109편 7절에는 그 기도가 변하여서 죄가 되었나이다.
그 기도를 잘못하다가 망할 수 있다 이깁니다.
그 죄가 되었다 이깁니다.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수많은 사람을 학살하고 심지어 자기 사돈도 자기와의 뜻이 맞지 않다고 점심 대접을 잘하고 헬리콥터로 태워서 보내면서 시한폭탄을 장치했다가 공중에서 폭파해서 죽게 하고, 참모회의 하다가 자기 말 안 듣는다고 재판도 안하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권총으로 상대편의 대장을 쏘아 죽이고 그러면서 전쟁을 이기기 위해서 섰다가 앉았다가 무릎을 꿇었다가 엎드렸다가 기도하는 그 기도가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여호와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기도하는 자는 가증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에 그 철칙인 줄 압니다. 남을 해롭게 하고 죽이고 그리고 악에 받혀서 전쟁을 수행하면서 이기기를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자기 소유물로 자기 이용으로 그렇게 되지는 않지요.
내가 그 어떤 한 사람을 지목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그것은 한 예를 들어서 말하는 것 뿐 우리 모두에게 생각해볼 기도를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이깁니다.
그러나 미가서 10장 18절을 읽어봅니다.
주께서 죄악을 사하시며 그리고 나서는 넘어가서는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못 삽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못사는 것을 하나님 앞에 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기도할 수 있도록 우리 죄가 먼저 사함을 받아야 됩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에 말씀같이 너희가 병 낫기 위해서 죄를 서로 고하며, 죄를 서로 고하며 기도하라. 어찌 병뿐이리오.
우리가 모든 당하는 어려운 시련과 환난을 당할 때에 먼저 우리의 기도의 시작은 우리가 부족한 것을 회개하고 자복하고 용서를 빈 이후에 그 허물을 하나님이 사하심으로 그 기도를 들어신다. 이것입니다.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그 이유, 그렇게 기도의 맺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끝은 맺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사유하셔야 우리 기도가 응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장 19절에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도다.
내 집은 만인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도하는 그 집에 들어 갈 때에 구약시대에 그 마당에 있는 성전의 뜰에서 제사를 드리고 피를 보고 난 이후에 그 피를 들고 지성소에 들어가던 것처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고 우리의 사정을 하나님 앞에 아뢰올 때에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 그렇게 말씀했어요.
여호와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이고 여호와의 귀가 어둔해서 듣지 못하심도 아니고 너희와 나 사이에 죄가 가리워 있다. 너희는 예물을 제단에 드릴 때에 형제와 거리낀 것 생각나거든 먼저 사과하고 예물을 드리라.
영어 성경 어게인스터 적의를 품은 적이 있으면 형제와 등지고 적의를 품은 적이 있으면 먼저 그것을 사과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 그 기도를 들으시겠다.
요한복음 15장16절에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함이라 하나님은 우리 죄를 사하심을 받는 성도에게 그 드리는 기도는 무슨 내용이든지 다 그 기도를 들어 주시겠다.
그래서 구하라 주실것이요. 비로소 구하라 주실것이요. 찾으라 만날것이요. 두드리라 열어주실 것이라. 이런 기도의 두 세계가 있습니다.
그 기도가 가증한 기도가 되고 그 기도가 죄로 변하고 기도함으로 망하는 잘못된 기도드리면 망할 수 있다 이깁니다.
그러나 기도를 바로 함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고 구하는 것에 대한 응답을 하신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우뢰 같은 음성으로 응답했다는 말은 아주 그 시사하는 뜻이 깊습니다.
그 우뢰 같은 말은 우뢰라는 그 아주 그 말씀가운데는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성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서 드리는 그 기도를 하나님이 그 우뢰 같이 응답해 오시는 것을 말씀하면서 그러나 우뢰는 심판도 의미합니다.
우뢰는 기도를 잘못 드리면 기도 드려놓고 나서 우뢰같이 뇌성 벼락같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기도는 응답의 양면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이 기도의 교훈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말은 기도의 목적이 뭐냐 이깁니다.
기도의 목적,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한번 받아합시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왜 기도합니까?
나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드리는 기도입니까?
아니지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라틴말로 ‘솔라 데우 글로리에’ 하나님께 영광이 있을지어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하고 이 기도를 응답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상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되면은 내게도 영광이 되는 깁니다.
내가 너를 영광스럽게 하리라 그랬잖아.
아버지의 이름으로 영광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기를 원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나 소요리 문답에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이뇨.
하나님께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 그럽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항상 자기 뜻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데
잠언서 3장 6절에 너는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마라. 너는 네 욕심을 생각하지 마라. 이말도 있습니다. 너는 범사에 받아하세요. 너는 범사에 여호와을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응답이 올 때는 우뢰같이 절대로 가만히 미미하게 응답이 오는 것이 아니고, 우뢰같은 울려퍼지는 응답으로 우리에게 응답해 오시는 하나님을 찬양할찌어다.
우리 기도를 반성해 보는 깁니다.
우리 기도를 너희가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정욕으로 쓰려고 너희가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정욕으로 구하기 때문에 얻지 못한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존무상하시고 영원하시고 거룩한 곳에 계시는 자가 누구의 마음에 거할꼬. 마음이 상하고 받아합시다.
마음이 상하고 통회하고 겸손한 심령에 거하사 그 영혼을 그 사업을 그 가정을 그 민족을 소생케 하시리라. 믿습니까?
그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당신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나도 너를 영광스럽게 하겠다. 나도 너를 영광스럽게 하겠다.
잘 믿는 성도, 교회 안에서 때로는 성도들 사이에 오해도 받고 교회 안에서 때로는 매몰도 당하고 욕도 들어먹지마는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때가 되면 그를 높이 들어 올려서 영광을 받으시고, 괴롭히는 자들을 멀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첫째 말씀은 기도의 반성을 그만침 해봅니다.
다같이 받아 한번 하십시다.
누구든지 병들었으면 자기의 죄를 자백하고 자기의 죄를 자백하며 병이 낫기 위해서 기도하라.
각양의 모든 기도의 내용이 다 그렇게 됩니다.
기도 많이 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라며 은총과 받아하세요.
은총과 간구의 영을 부어주사 여러분 심령에 하나님께서 기도하고 싶은, 기도를 바라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하는 마음이 불붙기를 축언합니다.
두번째로 넘어갑니다.
우리는 일상적인 기도와 특별 기도가 있습니다.
두가지를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 첫째는 우리가 반성,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했느냐 자기 영광을 먼저 자기 영광을 먼저 생각했느냐 그 점을 반성하고, 두번째로는 예수님의 기도의 교훈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 두가지면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일상적인 기도, 습관적으로 좋은 습관, 일상적인 기도가 있습니다.
한번 받아합시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해뜨기 전에 사랑하시는 성도들 가운데 이 철야 이 새벽기도운동 5,500명 모이는 새벽운동을 하면서 첫째는 제가 제대로 못 지켜서 참 죄송하고 하나님 앞에 죄스럽습니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너무 멀어가지고 못나온다 그렇게 말합디다.
그 멀어서 못 나오는 분들은 또 우야겠습니까만 나올 수 있거든 이 새벽기도 교회 나오셔서 하시고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 본받는 생활에 예수님이 아침 일찌기 일어나서 해뜨기 전에 기도하시더라.
허드슨 테일러라는 분은 하는 말이 나는 해뜨는 전에 기도를 시작하였고 해가 뜨는 시간에 나는 기도를 마쳤다.
아주 그 그런 기도생활 이 새벽에 일어나가지고 동이 트기전에 이 동트기전에 일어나서 기도가 시작되었고 나는 동틀때 기도를 마치고 일어났다는 그런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5분 기도를 하든지 10분기도를 하든지 기도를 하고 하루 해를 시작하는 것과 기도를 하지 아니하고 하루를 시작하는 데는 많은 삶의 차이가 있더라 그랬어요.
기도가 없는 하루의 시작은 뭔가 탕자가 돼지 쥐엄열매를 먹고 연명을 하는거지 공허한 감을 가졌다는 깁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 29절에 나를 보내신이가 나와 함께 하시는 도다.
한번 받아합시다.
나를 보내신이가 나와 함께 하시는 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 나를 혼자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예 현대인의 고독이 현대인의 큰 병이 고독입니다.
산에서 느끼는 고독이 아닙니다.
이 도시한가운데 많은 사람 속에서 고독을 느끼는 고독입니다.
예드가 아람포라는 사람이 노인이라는 단편 소설을 썼습니다.
그 글을 그냥 읽어보면 그 무슨 말을 할려고 할런지 단편소설인데 정곡을 찌르는 노인에 고독에 대한 현대인의 고독을 그렇게 글로 썼는데 이 노인은 혼자는 못 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은 어디 가는가 하면은 시장 바닥에 갑니다.
특히 시장 바닥에 건어물 장사하는 곳에, 채소하는 곳에 사람이 많이 모이는 도매상 있는데 가가지고 왔다가 갔다가 분비고 거서 떡하나 사먹고 또 다음에는 마실것도 사먹고 거기에 서가지고 잡숫고 그 도매시장이니까 사람들이 물건을 사면 서서히 흩어져 가지고 중앙통으로 사람들이 분비니까 중앙통으로 왔다가 갔다가 종일 앉았다가 섰다가 삐끔이 들여다 보다가 이러다가 다음에는 저녁시간에 사람이 점점 사라져 가면 다음에는 어디로 가는가 하면 카바레로 술집으로 갔다가 기웃거리고 거를 들여다 보다가 노인 들어오면 “들어오지 마세요” 이래도 술한잔도 사먹지 않고 들어갔다 나갔다가하면서 사람들이 없어지면 또 어디로 가는가 도떼기 시장 아침 일찍 그 물건 사가지고 시골에서 도회지로 들어오는 차들이 완행하는 그 자리에 왔다가 갔다가 의자에 앉아서 눈을 잠시 붙이고 또 그라고 도떼기 시장으로 왔다가 갔다가 하더라 그거는 뭐냐하면 현대인들이 혼자 못있다고 그럽니다. 혼자는 견딜수 없다는 이 고독 노인의 세계의 고독 젊은 사람들의 고독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신이가 나와 함께 하시는 도다 내가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않는다. 제자들이 모두 떠나고 유대인들이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도 나를 혼자 두지 않더라는 그 비결은 예수님의 기도의 세계에서 찾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고독합니까? 믿는 사람이 고독합니까? 고독하거든 밀실을 찾아서 성경을 펴들고 성경 한두장을 읽고 무릎을 꿇어 보세요. 여러분의 심령에 어떤 신학자가 말하기를 “가드 세이브드 비이컴” 하나님을 우리마음에 모시는 진공이 있답니다. 여러분들의 심령속에 하나님이 계실수 있는 그 진공에 하나님이 와 계시면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 그 마음가운데 차고 넘치지 마는 그 분이 비어 버리면 돈을 많이 벌어도 애정생활을 해도 정치에 성공을 해도 공허해가고 외롭고 답답하고 절망스럽고 노인과 같이 사람 많은데 쫓아다니다가 그렇게 여생을 마치는 것과 같이 한사람도 없어도 아무도 따라오지 않아도 항상 내가 혼자 있지 않으면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 함께하심이라는 비결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그 무엇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달라하기 위해서 자기의 운명과 팔자를 고치기 위해서 기도를 드리는 것도 있지만 기도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고, 포도나무에 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나이다. 하나님 여호와와 더불어 함께하는 그 삶, 니체가 하나님이 죽었다하는 순간에 우리 자신도 죽었어요. 그러므로 기도의 일상적인 기도 가운데 예수님이 이른 새벽에 한적한 곳에 가셔셔 기도하시니라 여러분 산에 가보세요 산에 가보면 숲만 있고 아무것도 없지요 거기 기도하러 가 앉아 있으면 아무것도 없지만 한 두시간 세시간 앉아 있어도 아무것도 없잖아 누구를 만나나 그러나 서너시간쯤 앉아 있어 보세요. 설명할수 없는 영력이 오는 거예요 그거는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아는 거예요 영력과 세상에서 물질이 주는 세계가 아닌 만국의 기쁨과 즐거움과 그득함과 충만함을 그 진공상태에 있는 산에서 얻어 올때에 그 생애 하루가 얼마나 기쁘겠는가 그러나 예수님께서 일상적인 생활가운데 마태복음 14장 23절에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 저물매 예수님이 저물매 산에 저녁에 기도하러 올라가시는 겁니다. 어떤 신학자가 예수님은 하루의 모든 것을 마치시고 조용한 가운데 저물매 마지막 하루의 일을 마치고 주무시기 전에 예수님은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무슨 기도를 하셨을까 그러나 그 성경학자는 말하기를 그는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으로서 우리는 하루 일정을 지내면서 저녁에 눈감기 전에 하루를 주마등같이 반성해 볼 때, 남에게 이야기하다 거짓말하는 시간도 있었고, 누구하고 이야기 하다 그를 미워할 때도 있고, 누구하고 이야기 하다 내마음속에 깨끗지 못한 생각도 할때있고, 우리는 죄를 지었다 하루에 그래서 이 황혼의 시간은 반성의 시간입니다. 잠든다는 건 죽음입니다. 잠드는 중에 우리는 가는 겁니다. 칼빈이 말하길 준비 안하고 죽은 사람들 가놓고 보니 지옥 사랑방에 와 있더라 카더라 지옥사랑방에 가지 않기 위해 우리는 주무시기 전에 저녁에 주여 아무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주의 보혈로 성결케 하옵소서. 내가 마음으로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주의 보혈의 피로 성결케 하옵소서. 루터는 말하기를 잠들기 전에 말씀을 묵상하고 침상에 들어가거라. 그랬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일상적인 생활 가운데 기도에 대한 교훈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치 바다에 바람이 불기 전에 적은 파도가 와서 늘 우리에게 파도가 파장공세로 철썩 철썩 때리는 물결같이 우리는 일상생활에 이런일 저런일 큰일 적은일 두고 기도하지만 바다의 큰 파도가 와서 파도가 높을 때 와 있는 것 처럼 우리 인생에 한번씩 큰 어려움을 만날 때가 있어요. 그때는 그 시험을 이기는 것은 큰 기도가 필요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일상적인 기도 아침에도 기도를 드리시고 저녁에도 기도를 드리시는 중에 특별기도로 40일 기도한 것이 있어요. 그것이 마태복음 4장에 예수님께서 복음 전하기 초기에 큰 시험 40일 동안 기도하고 배가 고플때 마귀가 와서 시험했습니다. 세가지 시험을 했습니다. 돌이 변하여 떡이 되게하라. 하나님 아들다운 하나님 아들만 당하는 시험이예요. 누가 사람이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 수가 있어요. 마귀가 예수를 잘 알아요. 당신은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인거예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 내게 굴복하면 천하만국을 주겠다는 메시아가 되겠다는 이런 큰 시험을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신앙생활에서 큰 시험을 당할 때가 있어요. 우리가 사랑하는 자식을 잃었을때, 내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을때, 내가 어떤 준비한 문제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고 내가 먹고 마시고 문제로 인해 직장을 잃었을 때, 큰 시험을 당할 경우에 큰 기도가 필요하더라.
제가 1부예배때도 조금이야기 했습니다. 아담 하와가 범죄하는 것이 먹는 것 아닙니까. 먹는 것때문에 범죄했습니다. 둘째 아담으로 오신예수님도 결국에 먹는 것 가지고 마귀가 대들었는겁니다. 배고플 때 그래서 밀턴이 실락원을 썻고 복락원을 썻던 밀턴은 두가지 내용에서 인류 조상의 불순종이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음이요 그 치명적인 맛이 죽음과 함께 우리에게 임하였도다. 우리를 복된 자리로 옮겨 주시는 이가 올때까지 노래를 불러 봅시다. 그런데 우리를 복된 자리로 옮겨 주시는 그분이 오셔가 첫 시련이 40일 금식기도 가운데 빵문제입니다. 경제 문제입니다. 제가 서울신학교, 6.25사변때 신학교, 우리 손계웅목사님 대구에 그당시 신학하는 사람 서울신학을 갔고 우리 총신을 학교가 제대로 생기지 않아서 그랬어요 총신가기 싫어 않간거 아니고 매일 싸우고 그런데 이 총신 서울 신학교 복학해서 가보니까 교수 하나 남겨놓고 이북으로 납치 당했어요 그 주동 역할을 한 청년하나가 있었는데 그 당시 경성제대 영문과를 다니는 사감목사님의 아들입니다. 전에도 이야기했는지 모르지만 이 먹는 문제가 나오면 합니다. 아버지가 신사참배문제로 감옥에 들어갔는데, 신자들의 발걸음이 딱 떨어지더라 이겁니다. 그중에 팔거 다 팔아먹고 그래 놓고 아무것도 없고 해서 식구들이 굶어서 굶어가지고, 말이 그렇지 식구대로 일주일 가까이 굶었다하면 어려운 시험 아닙니까? 어려운 시험입니다. 일제시대 목사가정에 사람이 얼른도 못합니다. 그런 어려운 시험에 이 청년이 믿음이 깊지를 못해가지고 있는데 이 심령에 시험이 들었는데, 큰 시험이 들 징조가 있었는데 때가 가을이라 제가 다니던 서울신학교가 연대 이화여대 있는 그쪽입니다. 그 뒤에가 지금은 집이 다 들어 섰는데, 그때는 들판입니다. 뒤에 채전밭이 있었습니다. 무우 한접에 얼마 채소 한접에 얼마 이 청년이 누워서 허기진 배를 욺겨 지고 저분들이 가고 나면 이삭을 주워야지 그래도 양심이 있어가지고 남의 밭의 채소는 뽑아오지는 못하고 더듬더듬 캄캄히 어두운데 떨어진 이삭만 주워가지고 한 바가지를 주워갔다놓고 두 바구니째 주울라 하는데 새벽역이 와가지고 여명이 붉게 동이 뜨는것이 봤다 이겁니다. 그때 이 사람이 획가닥 했는겁니다. 어떻게 획가닥 했는가 하면 아무리 어두워도 빛 앞에는 어둠이 견디지 못하는구나 그렇지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빛인데 왜 이렇게 어두운 빛이 빛 속에서 빛 노릇을 하지 못하고 우리 아버지 누구를 위해서 감옥에 들어갔는데, 주님을 위해서 감옥에 들어갔는데, 이렇게 해야 되는데 누구를 위해 감옥에 들어갔는데, 교회를 위해서 감옥에 들어갔는데, 세상에서 사랑을 말한다는 장로나 집사님이 그림자도 없이 일곱식구가 굶어죽게 하느냐 말이다. 나는 그런 교회 “against” 반대한다. 나는 공산주의 되겠다. 진짜 공산주의는 교회 안에서 나옵니다. 빨갱이 계시를 받았는거예요. 공산주의자가 되었는거예요. 요즘 운동권 가운데 교회 성직자 자녀들이 많아요. 가난한 자녀들이 많아요. 그거 극복하지 못하고 마침내 이북사람이 되어 문화부장이 되어 교회 인사를 누가압니까? 그 청년이 전부 고발해서 다 납치하는 비극이 일어납니다. 이게 한국교회 비극이예요. 괴테가 말하기를 눈물을 흘리면서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을 모른다 했습니다. 배고프다 엘리야도 배가 고팠고, 예수님도 배가 고팠고, 우리는 배고픈 중에 갈림길이 놓이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런 시험을 우리에게 줘요 그런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어요. 그러나 분명히 저는 여기 성경을 두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이 우뢰와 같은 응답으로 오시는 줄 나는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을 때 맛나를 주시는 하나님이 맛나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무슨뜻입니까? 이것이 무엇인고 그 뜻이 아닙니까? 인간의 지혜로는 설명 할 수 없는데 이것이 무엇인고 하고 기적적으로 살길이 열리고 하나님이 직장을 허락하시고 삶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찬양 할지어다. 우리는 이제 종교전쟁에 맛들었습니다. 공산주의도 종교입니다. 먹는 문제 인류 최초의 조상이 불순종이요 먹지마라는 선악과를 따먹음이요 그 치명적인 맛이 우리에게 불행과 죽음이 왔도다. 이 회복하는 그이가 오셔서 우리를 회복하실 때 까지 우리는 기도하고 노래불러보세, 오늘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유대 광야에서 40일동안 금식기도 하시면서 마귀가 와서 시험할 때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하셔서 마침내 승리의 개과를 부르고 영광을 돌리신 그 신앙을 우리도 그 기도를 본받기를 축원 합니다. 여러분 없다고 자식들이 울고불고 할때 부정하는 그 훌륭한 남편두신분 좋은 남편두셨지 없어서 도둑질 못하고 속이지 못하고 얻어 먹는 아버지가 있다 합시다. 그 사람이 존경스럽습니다. 그사람 놀라운 사람입니다. 그것은 아무나 하는것 아닙니다. 얻어먹어도 못하는 사람 못합니다. 얻어먹어도 죄짓지못하는 사람 죄 짓지 못합니다. 신앙은 버리지 못합니다. 절대로 버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신앙 제일주의로 하나님 제일 주의로 나가면 하나님이 우뢰와 같은 음성으로 반드시 우리에게 다가 오시고 직장도 주시고 물질도 주시고 각양의 모든 축복을 그분이 주시는 줄을 믿습니다. 우리는 가끔가다가 그런 시련을 맞이 할때가 있습니다. 마지막에 큰기도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예수님죽을 때 소크라테스는 죽을 때 자연히 죽었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괴로워하고 슬퍼하셨는냐 그것은 이시간 주경을 멈추고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잘난사람도 죽음이 오면 벌벌 떨리고 죽음을 겁내고 그러나 평소에 큰 기도를 드려본 사람은 기도의 응답을 받아본 사람은 나는 자주 그럽니다. 웨스리 같은 성도는 아버지여 죽음이 오거든 죽음이 죽음답지 않기를 원합니다. 죽음이 기쁘기를 원합니다.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시는 것을 영광으로 알게하시고 그것이 주님과 더불어 결혼하는 순간인줄 알고 즐거워 하게 하옵소서 기뻐하게 하옵소서 그 기도를 잘 드려왔다 이겁니다. 큰 기도지 일생의 제목이지 그러나 임종때 과연 그 기도 응답하셔서 한주일동안 조금 아프시더니 돌아 가시는 날 교회 찬양대 불러 와가지고 찬양을 드리면서 이렇게 기쁜걸 감사합니다. 하고 기뻐하면서 떠날 수 있는데 어떤사람은 두려워하고 떨고 분노하고 괴로워하며, 그런 죽음 앞에서 예수님이 두려워하고 떨리는 죽음앞에 아버지의 영광을 아버지의 영광을 받으시고 죽음을 홀연히 맞이 할수 있도록 기도해서 죽음을 해결하는 이 진리를 이 기도의 진리를 배워서 이 죽음을 두럽지 않도록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니 세상이 주는 평광과 같지 않다는 그 평광을 누릴수 있는 죽음을 맞이하는 죽음을 우습게 볼수 있는 주님을 만나는 영광스러운 결혼의 날로 그렇게 믿어지는 기도의 응답을 받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