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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게 되는 경우는 둘 중 하나다. 시인이 살아 있을 때, 그리고 죽었을 때. “사실상 모든 시에는/‘순간’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다.”(<사실상 모든 시에는>)라는 시의 한 구절이 말하듯 전자의 경우에 시는 ‘순간’이 분명하다. 또한 우리에게도 주어진 ‘순간’이다. 시인과 같은 시간을 나눠 가졌다는 삶의 동질감이 이를 가능케 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시인과 나 사이 시간의 연대가 끝난다. 우리가 여전히 ‘순간’이라는 미망을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 시인은 죽음으로써 살아 있(었)음을 증명해내고 말았기 때문. 그때부터 시는 삶에 현존하기보다 죽음을 뒷받침한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에서 자살의 전조를 찾듯이. 《입 속의 검은 잎》을 요절한 시인의 그림자로 받아들이듯이. 살아 있는 나는 시인의 죽음을 이런 식으로밖에 치환하지 못한다.
이토록 편협한 독자에게도 두 번의 기회가 있었으니, 그 시인이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다. 그녀는 여든 넘어서도 시를 쓰며 “진정한 시인이라면 자기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나는 모르겠어’를 되풀이해야 합니다.”(<노벨문학상 수상 소감 연설문>)라고 말하는 시인이자 2012년 2월 1일 여든여덟 살의 나이로 타계한 고인이다. 생전과 사후에 각각 그녀의 시를 읽은 나는 시선집 《끝과 시작》 앞에서 삶과 죽음 모두를 떠올린다. “모차르트 음악같이 잘 다듬어진 구조에, 베토벤의 음악처럼 냉철한 사유 속에서 뜨겁게 폭발하는 무엇을 겸비했다.”라고 스웨덴 한림원이 그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발표하며 일렀듯 이 책에 수록된 170편의 시를 모차르트니 뭐니 하며 한 마디로 아우를 자신은 없다. 다만 내가 읽은 시 한 편 <극장 문을 나서며>를 꺼내어 본다.
새하얀 화폭 위로 깜빡이며 명멸하는 꿈 동화가 끝난 세상에는 검푸른 멍과 희뿌연 안개. 나 그대들에게 돌아가련다, 현실의 세계로,
1945년 작으로, 이후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한 세기를 넘길 때까지 시를 써 왔다. 그녀의 주된 화두는 “현실의 세계”였다. “외팔이 소년”이나 “공허한 눈빛의 소녀”와 같이 현실 속을 살아가는, 말하자면 죽어가는 존재들을 마주했다. 이것이 그녀에게 주어진 ‘순간’이었다. 2012년 2월 1일까지. 나는 한 시인의 죽음 이전에 극장 밖 온 삶을 애도하고자 한다. 그것이 독자의 일이다. 《끝과 시작》과 같은 시편을 남긴 것이 시인의 일이었듯이. 이로써 시인과 나 사이 시간의 연대는 끝났지만 시와 나 사이의 교감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hebong2000@bandinluni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