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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의 시 이론
이관희
(산문의 시 발견・이론 창안・계간 [산문의 시] 발행인・시인)
우리나라는 갑오개혁(1894)을 계기로 오랜 봉건시대를 마감하고 근대시민사회로 전환하게 되었다. 문학예술도 고전문학 시대에서 서구 현대문예사조에 의한 창조적 예술 활동을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다. 이를 현대미술, 현대음악, 현대무용 등의 이름으로 부르고, 문학도 <현대문학>이라고 부른다.
‘산문의 시’는 찰스 램에서 비롯된 ‘순문학적 산문(에세이)’([문학개론] 백철) 곧 <산문의 창작・창작적 변화(진화) 현상>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후 우리양식의 문학으로 뿌리내리게 된 대표적 양식이다.
<산문(에세이)의 창작(詩)적 변화(진화) 현상>에 대해서는 지난 1백 년 현대문학사를 통해서 산발적으로 진단되어 온 역사적 사실이다. 백철의 ‘순문학적 수필(에세이)을 처음으로 쓴 사람 찰스 램’ 외에 ‘수필(에세이)는 창작적 변화를 용인하는 일반산문의 대표적 양식’(조연현) ‘20세기에 들어와 informal 에세이는 서정시를 방불케 진화’(공정호) ‘찰스 램의 등장으로 수필도 문학 장르의 하나로’(윤오영) 등 외에도 ‘시적 산문’ 혹은 ‘시 같은 수필’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다만 그 같은 논의들이 체계 잡힌 산문론을 통해서 논의, 정리된 것이 아니고 개인적 단견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 학문적 결함이다.
이 같은 <산문(에세이)의 창작적 변화(진화) 현상>에 관한 연구논문이나 저술은 전무한 형편이다.
문학론의 ‘이론체계’ 절대 조건은 첫째,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발전하여 온 현대문학 이론에 근거한 이론 전개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두 번째, 특정 분야(장르) 문학론은 독자적 창작개념론과 작법개념론, 그리고 독자적 형식론을 전개하고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 필수조건은 모든 이론의 근거는 실제 작품분석과 해석에 근거한 이론 전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의 [창작에세이학 원론]은 이 같은 필수조건들을 부족하나마 모두 갖춘 ‘산문(에세이)의 창작적 변화 현상’에 관한 최초의 이론체계서다.
1. <일반산문>과 <창작산문>
지금까지 문학론에서 논의되어 온 산문개념은 몰톤의 (비창작)일반산문론이다. 그러나 백철교수는 1955년에 펴낸 문학개론서에 ‘순문학적 산문을 처음으로 쓴 사람은 찰스 램’이라는 ‘창작산문론’을 펴고 있다. ‘순문학적 산문’은 창작산문을 의미한다.
‘창작산문’은 새로운 것도, 낯선 것도 아니다. 에세이와 거의 동시대에 발흥한 현대소설은 창작산문 문학이다. 희곡산문, 동화산문, 시나리오산문, 드라마산문까지 모두 다 창작산문이다. 여기에 백철 교수의 ‘순문학적 산문’에서 비롯된 ‘시산문’이 보태지게 되었다.
그러나 ‘창작산문’이라는 용어는 물론 소설산문도 우리 문학론에서 일반화된 용어는 아니다. ‘시산문’이라는 용어는 필자가 처음 쓰는 용어다. ‘시적 산문’ 혹은 ‘산문적인 운문’이라는 용어는 발견 되지만,(이상섭 문학비평용어사전) ‘시산문’이라는 용어는 발견되지 않는다. 실체는 있는데 그에 관한 학문적 논의는 없는 것이다.
창작산문은 산문의 종류개념, 즉 일반산문에 반대되는 산문의 종류개념이고, 시산문, 소설산문은 창작산문의 하위 장르개념이다. 소설산문이 소설을 의미하듯 시산문은 산문의 시를 의미한다.
‘산문의 시’ 작품을 그 형식과 내용에 따라 분류하면 산문의 시, 소설체 산문의 시, 희곡체 산문의 시, 동화체 산문의 시 등 다양한 형식과 내용이 있을 수 있다.
2. <산문의 시> 출처와 발생 과정
<산문의 시> 출처는 운문시론에 있지 않다. 찰스 램에서 비롯된 ‘순문학적 산문’(백철)이 ‘시적 산문’(이상섭)을 거쳐 ‘서정시를 방불케하는 20세기 에세이’(공정호)로 변화(진화) 되면서 현대문학 초창기 최남선, 이양하, 한흑구 등과 현대의 적지 않은 ‘완전한 산문문장 형식’의 시 작가들을 거쳐 마침내 원고지 5장 내외의 <산문의 시>가 탄생하게 되었다.
현대문학 1백 년 사에 필자가 <산문의 시>라고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산문의 창작적 변화 현상을 처음 발견하고, 이를 이론서에 서술한 것은 2007년의 일이었다.(창작문예수필이론서 청어) 최초의 <산문의 시> 작품으로 최남선의 <가을>, 이양하의 <나무>, 한흑구의 <보리>, 그리고 <시산문> 작품으로는 방정환의 <어린이 예찬>, 피천득의 <인연>을 들수 있다. (창작문예수필이론서에 창작해설과 함께 게재)
그러나 아직 <산문의 시>를 주창할 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다. 필자의 문학이론에 관한 신념은 문학이론의 근거는 오직 작품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우리 현대문학사 안에 찰스 램의 ‘산문의 창작적 변화’ 현상의 결과 <산문의 시>라고 해석할 수 있는 새로운 양식의 시문학이 자생적으로 싹이 터 발전해 왔음을 발견해 놓고도 이를 주창하지 못한 까닭은 <산문의 시>라고 해석할 수 있는 작품들이 간혹 발견될 뿐 일군의 현역 작가들에 의하여 창작활동이 일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산문의 시>가 현역 작가들에 의하여 창작되고 있음이 발견된 것은 2018년 가을의 일이었다.
필자가 지도하여 온 <산문의 시 작법 교실>에서는 매월 10회 이상 <다섯 줄 문학일기>와 <이것저것 놀이>를 쓰도록 권장하여왔다. <다섯 줄 문학일기>는 문장연습이고, <이것저것놀이>는 비유창작 연습이다.
근 10년 동안 이 같은 ‘기본 작법 놀이’를 진행하여오는 동안 마치 아이들이 자라면 저절로 이성(異性)에 눈을 떠 저희들끼리 만나듯 가르치는 선생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다섯 줄 문학일기>와 <이것저것놀이>가 저희들끼리 만나 2백자 원고지 2장∼5장 내외 길이의 ‘산문의 시’ 양식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3. <산문의 시> 개념
산문의 시 창작개념은 ‘시적 발상의 산문적 형상화’이고, 작법개념은 ‘구성적 비유의 존재론적 형상화’, 형식론은 ‘허구적 사실의 소재 형식’이다.
‘시적 발상의 산문적 형상화’의 ‘산문’은 ‘완전한 산문문장 형식’을 의미한다. <산문의 시>는 ‘완전한 산문문장 형식’의 시문학이다. 쌀밥에 콩 몇 알을 넣으면 ‘쌀밥’이 아닌 ‘콩밥’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산문시’는 완전한 산문문장 형식의 시가 아니다. 산문체로 쓴 운문시일 뿐이다. 즉 쌀밥에 콩 몇 알을 넣은 ‘콩밥’인 것이다. 그러나 <산문의 시>는 처음부터 완전한 콩밥이고, 좁쌀밥이며, 오곡밥이다.
‘구성적 비유의 존재론적 형상화’의 ‘구성적 비유’는 ‘소재에 대한 비유창작’을 의미한다. <산문의 시> 기법 작법은 사실의 소재에 대한 비유창작에 있다.
‘허구적 사실의 소재 형식’의 ‘허구적 사실’이란 작가가 취하는 소재는 변질, 왜곡, 치환된 허구적 사실의 소재임을 의미한다.
운석은 지구에 속한 것이 아니다. 지구는 사실의 세계다. 지구 안에 있는 일체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실과 완전히 관계없는, 즉 우주에서 떨어진 운석과 같은 시, 소설, 희곡작품이란 없는 것이다. 일체의 예술작품은 제아무리 빼어난 창작작품이라도 사실의 탯줄조차 없는 허구, 즉 운석 같은 허구는 출생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소재가 아직 소재인 상태로 있을 때, 그것은 조잡함을 면치 못한다. 조잡하다는 것은 비현실화가 충분치 못하다는 뜻이다.”([문학에의 초대]齊藤勇 이철범 역)
사실의 소재와 창작 관계에 관한 조언인 이 말의 뜻은 소재의 허구化가 우주에서 떨어진 운석 같은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창작 이름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소재의 ‘비현실化’, 즉 ‘허구化 작법’이 창작 이름을 얻기에 ‘충분’ 조건을 갖추어야 된다는 뜻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허구’라는 용어의 대명사처럼 된 ‘소설’도 작가의 경험에 근거한다는 말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 정당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산문의 시>는 모든 예술은 사실과 허구 사이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곳에 놓여 있는 문학 양식이다. <산문의 시>의 ‘의’ 자가 이를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다. ‘의’ 자는 몽테뉴의 <사실의 토의 문학>인 에세이가 찰스 램을 만나 ‘순문학的 산문’으로 태어난 배꼽이다. 즉 ‘의’ 자는 ‘사실’에서 허구로 넘어오는 ‘허구化’ 다리이다.
4. <산문의 시>는 본질상 ‘이야기 시’ 문학이다.
현대시를 ‘서정시’라고 한다. ‘서정시’에 대한 국어사전의 뜻풀이는 다음과 같다.
작가의 감정이나 정서를 주관적으로 표현한, 길이가 비교적 짧고 이야기 줄거리가 없는 시. ▷서사시⋅극시(훈민정음국어사전)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정시는 서사시나 극시와는 달리 ‘이야기 줄거리가 없다’는 설명이다.
이상섭 교수는 서정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서정시는 본래 악기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 가사를 뜻했던 것이다.(중략) 개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짧은 시를 뜻하게 되었다.
노래는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중략)
노래시는 독창이든 합창이든 공중을 의식한 공개된 발언이다. 따라서 노래시는 극히 사사로운 일은 다루지 않는다.(중략) 많은 사람이 공통으로 느낄 수 있는 자연의 풍물, 인간 사이에 벌어지는 일, 그에 대한 보편적인 정서와 생각 등을 소재로 한다.(중략)
개인적인 짧은 시는 노래시와는 정반대로 작자가 최대한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중략) 시에 구현된 정서는 유일무이한 작가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낱말, 수사법, 소재 등이 새로 선택되고 개발되고 배열된다. 독자는 제한되며, 심한 경우에는 자기 자신밖에 독자가 없을 수도 있다.(이상섭 [문학용어사전])
이상섭 교수의 서정시 설명 핵심 결론은 서정시는 작가 개인만 알아먹을 수 있는 시라는 점이다.
산문의 시는 이에 대해서 즉각 묻는다! 그렇다면 왜 발표하는가? 발표는 만인의 공감을 얻고자 함이 아닌가? 자신도 무슨 소린지 모르는 소리를 써놓고 만인의 공감을 얻고자 하는 것은 문학을 빙자한 폭력이다.
산문은 본질상 사람 사는 이야기이다. 산문의 시가 ‘사람의 문학’이라는 뜻은 ‘사람 사는 이야기 문학’이라는 뜻이다. <산문의 시>는 본질적으로 이야기 문학이다. 독자들이 사랑하는 시는 모두가 이야기(산문)시다. 필자는 산문의 시 발견자⋅최초 이론 창안자로서 다음과 같은 점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한다.
<산문의 시는 무슨 소린지 알아먹을 수 없는, 작자 자신만 아는, 현대시에 대한 반성으로 일어났다!>
5. ‘시’와 ‘시작품’
흔히 ‘시’라고 하면 ‘시작품’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와 ‘시작품’은 다르다. 시는 삶 자체다.
사람은 사는(being) 존재다. 삶이 존재의 본질이다. 어찌 사람만이 being하는 존재이랴! 만물은 being하는 존재의 세계다. 시詩란 다른 것이 아니다. 먼지 한 알, 집채 같은 바위라도 being하는 존재로 불러내는 것이 문학이다.
그렇다면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이야기만 적어놓으면 다 시인가? 그것이 다 시인 것은 맞다. 그러나 ‘시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작품’으로 다듬어야 ‘작품’이 될 수 있다. 마치 들의 곡식이 곧바로 곡식인 것이 아니고, 꽁깍지는 벗겨야 되고, 벼는 도정해야 비로소 먹을 수 있는 곡식이 될 수 있는 것과 같다. 잘 다듬으면 좋은 알곡이 되고 서툴게 다듬으면 상품 가치가 없는 곡식이 되듯 문학작품도 ‘글을 잘 다듬은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잘 다듬었든 그렇지 않든 모두가 ‘시’인 것은 사실이다.
6. <산문의 시>의 ‘이야기 시’ 개념은 양식과 장르를 초월한다
<산문의 시>의 ‘이야기 시’ 개념은 문장 형식, 창작양식 및 장르를 초원하는 개념이다. 운문, 산문 따지지 않는다. 장르도 초월한다. <산문의 시>의 ‘이야기 시’ 개념은 어떤 문장 형식과 창작양식에도 매이지 않는다. <산문의 시>의 ‘이야기 시’ 개념은 소설 양식을 취할 수도 있고, 희곡, 동화 양식도 취할 수 있다. 심지어 일반산문 에세이 양식의 ‘이야기 시’ 창작도 가능할 수 있다. 영상 양식마저 수용할 수 없을까, 이것이 숙제다.
이야기는 인류의 자산목록 1호다. 정신문화의 본질이다. 이야기는 온 인류의 정신적 쌀이다. <산문의 시>는 다양한 ‘이야기 시’ 양식에 ‘완전한 산문 문장 형식의 이야기 시’라는 새로운 양식 하나를 더 보태는 것뿐이다. <산문의 시> 탄생과 존재 이유는 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인류의 ‘이야기 문학’에 한 작은 보탬이 되고자 할 뿐이다. <산문의 시>는 자기 양식만을 내세우고 고집하는 독선을 하지 않는다. 다만 각기 다른 문학 양식과 전통 및 장르 구분은 존중하여 보존한다. <산문의 시> 또한 새로운 장르로서 자신의 독자적 정체성을 엄격히 지켜갈 것이다. 그러나 <산문의 시>는 모든 가능한 양식의 ‘이야기 시’와 차별 없이 교류한다. 독자들이 사랑하는 명시(名詩)는 모두가 이야기시다. 이것이 산문의 시가 추구하고, 목적하는 시 세계다.
7. <산문의 시>와 리듬
만물 가운데 언어표현이 무수(無數)하게 가능한 언어는 오직 인간의 언어뿐이다. 그 무수한 언어표현은 음성으로 되어있고, 음성은 리듬으로 되어있다.
현대시는 정형률에서 벗어난 자유시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또한 정형률에서 벗어났다는 현대시가 정형률보다 더 구속적으로 보이는 리듬론을 펴고 있다는 사실도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 편에서는 정형시에서 자유시로 넘어오면서 현대시가 빠르게 리듬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 또한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그렇다면 현대시에 있어서 리듬의 진정한 의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시의 리듬은 리라(lyra)라는 악기에 유래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시는 악기와 전혀 관계가 없는 순문장예술이라는 사실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 아닌가?
필자는 현대시가 악기 소리로서의 리듬과 전혀 관계가 없는데도 운문형식을 고집하는 이유는 소리로서의 리듬보다 ‘시각적 리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현대시는 소리로서의 리듬을 잃어버리거나, 버리고 있는 대신 ‘시각적 리듬’으로 시의 리듬 명맥을 잇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말에 소리로서의 리듬이 있는 이유 중 빠질 수 없는 중요 이유는 뜻을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한 것 외에 말을 곱게 하기 위한 데에도 있다. <산문의 시>는 말의 문학이다. 문학은 고운 것(美)을 창조한다. 상소리도 곱게 하는 것이 시다. 새들도 말(노래)을 분명하고 곱게한다. 하물며 인간이랴. 산문의 시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곱게(리듬)’ 하고자 한다.
<산문의 시>는 현대시가 잃어버리고 있는, 혹은 의도적으로 벗어나고자 하는 시의 소리로서의 리듬을 되찾는 것을 창작의 필수조건으로 삼는다.
말할 것도 없이 <산문의 시> 리듬은 악기 소리로서의 리듬이 아닌 ‘삶의 희로애락의 이야기 소리’를 의미한다.
<산문의 시>는 낭송 문학이 첫 번째로 선택하는 문학이 되어야 한다.
8. <산문의 시> 명칭 구분
문학작품은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일정한 크기’가 필요조건이 되어 왔다.([詩學] 7장) 단편소설과 장편소설을 구분하는 첫 번째 조건은 작품의 길이에 있다. 서정시의 일반적 길이는 책 한 면에서 한 면 반 내외 분량이 대부분이다. 작품의 외형적 길이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➀<산문의 시> : 2백자 원고지 2장∼5장 내외.
➁<시산문> : 2백 자 원고지 10장 내외∼50장 내외.
(<시산문)은 그 길이에 따라 <(단) 시산문 : 2백 자 원고지 10장 내외>, <(중) 시산문 : 2백자 원고지 30장 내외>, <(장) 시산문 : 2백자 원고지 50장 내외>로 나눌 수도 있으나 이론적 논의 외에는 그 같은 구분이 필요 없다.) <산문의 시>는 <시산문>이고, <시산문>은 <산문의 시>이다.
9. <산문의 시> 대표적 작품창작 양식
2백자 원고지 2장∼5장 내외 ‘산문의 시’는 산문의 시 대표적 창작양식이다. 산문의 시 창작개념 ‘시적 발상의 산문적 형상화’ 개념의 정수(精髓)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발견되고 있는 ‘산문의 시’ 작품은 집중적으로 ‘소재에 대한 비유 창작’ 양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산문의 시’ 이전까지 발견된 산문의 시 대표적 창작양식은 <소재에 대한 비유(상징)창작 + 서사 구성법> 양식이다. 대부분 2백자 원고지 10매 내외 길이의 작품들이다. 2백자 원고지 2장∼5장 내외 ‘산문의 시’는 이보다 훨씬 짧은 시적 함축, 응축과 함께 시적 비유 창작을 집중적으로 보여 주는 창작양식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창조적 행위로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은유이다.([은유의 이해] 김진우)
‘카시러’라는 사람이 인간은 상징의 세계에 산다고 한 대로 인생은 비유다. 인생이 비유라면 문학(詩)은 곧 비유가 된다. 문학이 세상에 비출 수 있는 빛은 비유법의 지혜다. <산문의 시>는 소재에 대한 비유 창작 법의 문학이다. 비유를 창작하고 있으면 ‘산문의 시’이고, 비유가 없으면 일반산문이다. 가장 위대한 비유법은 ‘은유’와 ‘이야기(서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는 천재의 것’이라 하였다.
10. ‘산문의 시’와 전통 ‘운문시’의 다른 점
‘산문의 시’는 ‘완전한 산문문장 형식’의 시문학이다. ‘산문의 시’는 문장형식으로는 소설, 희곡, 동화 같은 산문형식의 문학이다. 이 점이 전통 운문시와 다른 점이다. 즉 전통 운문시와 ‘산문의 시’의 다른 점은 문장형식 뿐이다. 작품 내용은 전통 운문시와 똑같은 시창작 문학이다.
19세기 말에 등장한 보들레르의 <산문시>가 ‘완전한 산문문장 형식’의 시문학이냐의 문제는 연구과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산문시>는 모두가 알고 있는 대로 ‘완전한 산문문장 형식’의 시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산문시론> 자체가 없다. 우리의 <산문시론>은 운문시론에 포함되어 있는 ‘운문시의 산문체 변형’일 뿐이다.
문학(창작)의 언어 용법은 일상적 산문(비시언어) 용법과 같지 않다. 문학의 언어 용법은 창조(비유법)적 용법이다. 산문의 시 문장법은 비유법적 문장법이다. 산문의 시 창작개념 ‘시적 발상의 산문적 형상화’의 ‘시적 발상’이 이를 말해 주고 ‘산문적 형상화’는 산문 즉 ‘삶의 이야기를 시詩(창조⋅poetry)하는 산문형식의 문학’을 의미한다.
시詩가 시인 것은 그 문장 형식 때문이 아니고, 그 내용의 창조기능에 근거한다는 사실은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불변의 문학해석론이다.
호메로스는 풀롯을 만들었기 때문에 시인이고, 엠페도클레스는 그 철학사상을 단지 운문으로 서술한 까닭에 시인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문학 이론의 역사적 전개] 이상섭)
창작문학은 시에 속하는 문학으로서 그 문장형식 여하를 불구하고 <존재의 총계에 부가>하는 창조적인 문학이 된다.([문학개론] 조연현)
산문 형식도 시詩창작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 19세기 <산문시> 등장이다.
11. <산문의 시> ‘의’ 자 의미
본래 ‘운문’과 ‘산문’은 ‘창작’과 ‘비창작’이라는 기름과 물 같은 관계였다. 그러나 ‘산문시’라는 이름에는 운문과 산문 사이의 넘을 수 없는 벽을 어떻게 넘어서 단번에 ‘산문시’라는 이름을 취득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론적 해명이 없다. 적어도 필자가 읽은 한글로 된 시론에는 없다.
‘산문의 시’는 ‘산문’과 ‘시’ 사이에 ‘의’ 자 다리가 놓여 있다. ‘의’ 자는 산문의 시 출처와 본질과 존재 양식 및 형식을 분명하게 말해준다. 즉 ‘의’ 자는 산문과 운문을 잇는 다리인 것이다. 필자는 이 ‘의’ 자 다리가 산문과 운문의 문학적 융화를 창조해 가리라고 기대한다. ‘의’ 자 사전풀이는 다음과 같다.
의[조] : 체언에 붙어 그 체언이 다른 일이나 물건의 임자가 되게 하며, 그 일이나 물건의 뜻을 꾸미는 관형적 조사.(에센스국어사전)
의 : ‘무엇’의 성질에 비유하여 뒷말을 표하는 뜻을 나타낸다.
뒤에 나오는 말이 앞에 나온 ‘무엇’에 대한 것임을 나타낸다.
앞말이 뒷말이 나타내는 사물의 특성임을 뜻한다.‘(그러한 특성)을 지닌’의 뜻.([어미⋅조사 사전] 이희자 이종희)
처음 ‘산문의 시’를 말할 때 필자는 ‘산문의 시’는 ‘산문의 꽃’이라 하였다.(]창작문예수필] 2007)
12. ‘완전한 산문문장 형식’의 의미
12-1. ‘산문의 시’에는 ‘단일 문장’의 작품은 없다.
<산문의 시>는 ‘완전한 산문문장 형식’의 시문학이다. 산문의 본질은 말이다. 말은 대화다. 대화의 성립조건은 주고받는 두 개 이상의 말이 있어야 성립된다. ‘완전한 산문문장 형식’은 복수문장개념을 내포한다. ‘산문의 시’는 두 개 이상의 ‘복수문장형식’의 문학이다. 복수문장, 즉 대화(산문)는 창조를 낳는다.(‘우리의 모양대로’-창세기) 산문을 비창조 언어인 듯 서술하고 있는 문학론은 일부 수정되어야 한다.
단일 문장(단 한 개 문장)의 시창작은 운문시의 오랜 전통 중 하나다. <산문의 시>는 운문시의 전통을 존중한다.
12-2. ‘완전한 산문문장 형식’이라 함은 어순, 단문, 복문 및 문단과 각종 부호 등 일반산문 문법에 준한 문장을 써야 됨을 의미한다. 특별히 각종 부호는 글자의 하나로 여겨서 해당 작품의 창작방법상 예외적으로 필히 필요한 경우 이외에는 빠트려서는 안 된다.
‘산문의 시는 완전한 산문문장 형식’의 문학이라는 점이 전통 운문시의 산문체 변형인 ‘산문시’와 다른 점이다. ‘산문시’는 진정한 의미의 ‘산문’ 시가 아니다. 운문시의 불완전한, 변칙적 산문체 운문시일 뿐이다.
‘산문시’로 발표된 작품 중에 ‘완전한 산문문장 형식’의 시작품이 많다. 그 대표적 작품이 한용운의 <님의 침묵>과 서정주의 <新婦>다. 필자는 <님의 침묵>과 <新婦>를 ‘산문시’가 아닌 ‘산문의 시’라 한다.
‘산문시’와 ‘산문의 시’는 그 출생과 본질이 다르다. ‘산문시’는 운문시에서 나온 운문의 산문체 변형이고, ‘산문의 시’는 처음 출생부터 <산문의 창작적 변화(진화)>에서 나온 산문의 시적 진화(변화)이다.
그러나 <산문시>와 <산문의 시>는 문학의 진화라는 한 솥 안에서 만나 손을 잡게 된다. 필자는 반세기쯤 후에라도 필자가 쓰고 있는 ‘산문의 시론’이 ‘산문시’를 흡수하여 수정과보완 과정을 거치면서 ‘산문의 시’ 독립 장르로 발전하여 갈 수 있을 것이라 내다 본다.
13. 작품형식
13-1. ‘산문의 시’에는 <단독 운문형식>의 작품은 없다.
<산문의 시>는 하나의 문장을 두 개 이상으로 끊어서 줄 바꾸기를 하지 않는다. 하나의 문장을 두 개 이상으로 끊어서 운문형식을 만드는 작법은 운문 시의 오랜 문장법이다. 산문의 시는 <운문시> 전통을 존중한다.
‘<산문의 시>에는 <단독 운문형식>의 작품은 없다’는 뜻은 ‘운문형식으로만 된 산문의 시’ 작품은 없다는 뜻이다. 이는 첫째로 ‘산문의 시’는 ‘완전한 산문문장 형식의 문학’이라는 뜻이고, 둘째는 <운문시>의 오랜 전통을 존중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셋째는 ‘운문형식’에 기대어 문학작품인 체 행세하려는 비문학적 태도를 차단하기 위함이다. 현재 우리 문단에 시(poetry)가 아닌 ‘산문(prose)의 운문형식’ 표기로 시 행세를 하는 일이 부지기수임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다.
13-2 단, 위 규정은 <운문 + 산문> 형식의 작품일 경우에는 예외다. 산문을 중간에 끊어서 줄 바꾸기 하여 운문형식을 취할 것이라면 <운문시>를 창작하거나 <운문 + 산문> 형식의 작품을 창작한다.
14. <산문의 시>에 ‘비문학적 난해시’는 없다.
우리나라 문학은 갑오경장(1894) 이후 서구문예사조에 의한 창조적 문학을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다. 선배 문인들이 우리에게 소개해 준 서구문예사조의 창작개념은 ‘존재의 총계에 부가하는 창조’라는 것이다.(김동리⋅조연현) ‘존재의 총계’란 신적 창조를 의미한다. 신적 창조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서가 성서다. 성서는 만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고 적고 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한복음 1:1,2)
‘말씀(logos)’ 뜻에는 ‘하나님⋅예수’라는 뜻과 함께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다.’라는 뜻도 있다.
시라는 말의 한자 ‘詩’와 영어 ‘poetry’는 둘 다 ‘창작’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시론 문덕수)
시론에서 운문은 ‘정신의 응축 활동’이고 산문은 ‘정신의 분산 활동’이라고 한다.(H. Read) 그러므로 시란 창작을 의미하고 산문은 비창작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 같은 시론에 의하면 마치 산문 즉 일상어는 비창조 언어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一言重千金)’고 할 때의 ‘말 한마디’는 운문이 아닌 산문의 말이다.
‘말’은 본래 ‘하나님이 가라사대’에 근거하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 시어는 빠르게 시인 자신도 무슨 소린지 알지 못하는 ‘도깨비 말’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具常 현대시 창작입문) ‘알아들을 수 없는 시어’는 일찍이 플라톤도 시인 추방론 이유로 들었다. 시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책임은 독자의 무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플라톤이 무식한 독자였는가?
‘말’은 사람이 알아들어야 말이다. 새와 짐승들도 말을 하지만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말이 못 된다. 시는 사람이 알아들어야 시다. 사람이 알아듣는 말이 되기 위해서는 ‘이야기 말’을 해야된다. 말은 처음부터 이야기다.
시창작이란 태초에 타락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말의 뼈다귀’를 찾는 인간 정신활동이다.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보통 말 시어’를 찾는 것이 진정한 시작예술이다. ‘시’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라면 당연히 운문보다 먼저 산문 속에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 이야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산문의 시’ 탄생의 필연성이고 정당성이다.
15. 이야기 시어
산문의 시는 ‘이야기 시’ 문학이다. 따라서 산문의 시 시어는 ‘이야기 시어’이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이 시 작품의 시어 하나하나는 모두 ‘이야기 시어’다. ‘엄마’는 존재의 원천이다. ‘엄마’라는 어휘는 그 자체로 헤아릴 수 없는 이야기를 품고 있는 ‘이야기 시어’다. <산문의 시>는 이 같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이야기 시어’를 찾아내고, 조합하고, 만들어서 시 창작을 하는 문학이다.
16. <산문의 시>는 실험한다. 고로 존재한다.
창작은 곧 새로운 실험이다. 실험은 새로운 변화다. 산문의 시는 날마다가 새로운 창조의 아침이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창작이 아니다. 새롭지 않은 것은 문학이 아니다. 산문의 시와 무변화는 상극이다.
17. ‘산문의 시’는 ‘사람의 문학’이다.
글이 사람이 아니고, 사람이 글이다.
사람이 글이 되는 문학이 참 문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