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하늘이 준 세 가지 성공 비결의 은혜가 있습니다. 첫째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부지런히 일해야 살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달았고, 둘째로 약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건강의 소중함을 깨달아 90세까지 건강을 누릴 수 있었으며, 셋째로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스승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 마쓰시다 고노스케 (마쓰시다 전기산업, 파나소닉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
종신 고용과 '좋은 물건을 싸게 공급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한다'라는 경영철학, 기업의 사회적 환원을 강조한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전후 일본의 경제 성장 그 자체이자, 전 국민의 사랑을 받은 기업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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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신'이라는 말로 모든 것이 설명되는 사람, 전 국민적 사랑을 받으며 영웅으로 추앙받는 사람, 바로 마쓰시타 전기의 창립자 마쓰시타 고노스케이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기업의 이윤 창출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서슴지 않고 한다는 기존의 장사꾼적인 기업가에서 탈피해 사장, 종업원, 소비자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장사라고 주장했다. 그는 기업을 하나의 가족 공동체로 여기고, 종신 고용 방식을 만들고, 장사는 행복을 파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조하여 작은 가게의 심부름꾼에서 세계적인 기업의 창업자가 됐다. 이런 경영철학과 입지전적인 모습으로 그는 쇼와 시대의 번영을 상징하는 인물이자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1894년 11월 27일 와카야마 현에서 마쓰시타 마사쿠스와 무메노 도쿠에다 사이에서 3남 5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이었으나 다섯 살 무렵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결국 아홉 살 때 소학교를 중퇴하고 오사카로 상경해 화로 가게, 자전거 가게 등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해야 했다.
시골에서 상경해 상점에서 잔심부름을 하던 소년이 전기를 배운 것은 1910년 오사카 전등회사의 견습공이 되면서였다. 직공 생활을 어느 정도 한 후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그는 쌍소켓 개량에 착수해 이듬해 마쓰시타 전기기구 제작소를 차렸다. '물건을 만들기 전에 사람을 만든다'라는 기업철학처럼 그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지 생각하고 물건을 고안했다. 당시 일본의 전기료는 정액제여서 소켓 하나당 전기료가 책정되었기 때문에 한 소켓에 전등 두 개를 끼우면 더 밝게 생활하면서 비용은 덜 내니 일석이조라고 생각하여 쌍소켓을 개량한 것이었다. 이 제품은 큰 인기를 끌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불황이 시작되었다. 그는 다시 자전거 가게에서 일했던 경험을 살려 자전거용 전등을 생산해 대성공을 거두면서 불황을 헤쳐 나갔다. 1931년 마쓰시타 전기는 싼 가격으로 서민에게 보급할 수 있는 보급형 라디오를 대량 생산하면서 종합 전자제품 기업으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마쓰시타의 대표적인 경영철학인 종신 고용은 이때부터 드러난다. 그는 견습생 시절의 경험을 떠올려 일본만의 독창적인 경영 방식을 창출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정부의 긴축 재정 및 불황 타개책으로 직원들을 감축해야 한다는 주장에 그는 "오늘부터 생산량을 줄여 과잉 재고와 자금 부족을 해소한다. 직원은 감축하지 않고, 월급도 그대로 지급한다. 대신 모두 휴일에 재고품 판매에 힘쓴다."라며 상생의 길을 제시했다. 종신 고용은 견습공-중견 점원-점장-독립이라는 일본 상점의 기본 방식에서 착안한 것이다. 그는 말로만 '사람을 먼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직원의 인생을 책임짐으로써 최선의 결과를 끌어냈다. 노동자를 공장의 부품처럼 여기고, 해고에 대해 아무런 제재 조치가 없던 당시 공업 사회에서 사람을 먼저 키워야 기업이 큰다는 그의 생각은 획기적이 아닐 수 없다. 종신 고용 방식은 세계대전 이후 일본 기업의 기본 경영 방식으로 정착했다. 그는 세심한 관찰력과 실용적인 생각,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정신으로 창의력 있는 기술 개발자에서 '경영의 신'이라고 불리는 위대한 기업가로 거듭날 수 있었다.
1932년에는 사업부제를 도입하여 집단 의사결정 시스템을 만들었다. 사장이 전권을 휘두르는 독재 체제를 지양하고 조직 내의 권한을 분산시켜 책임감 있는 의사결정 조직을 만든 것이다. 그러면서도 최종 결정권은 마쓰시타 본인에게 있었다. 즉 제도적으로 권한을 분산시켜 직원의 주인의식을 높이면서 자신의 권위를 깎아내리지 않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것이다.
1932년 5월 5일 마쓰시타는 '좋은 물건을 싸게 공급하여 가난을 몰아내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한다'라는 사명을 정하고, 이날을 창립기념일로 지정했다. 그의 이런 관점은 훗날 PHP연구소를 만든 데서도 드러난다. PHP는 '번영을 통한 평화와 행복(Peace and Happiness Through Prosperity)'의 약어이다. PHP연구소를 통해 마쓰시타는 자신의 다양한 경영철학을 사회에 알렸고, 이 연구소는 오늘날 출판 및 연구 연수 기관으로 발전했다.
마쓰시타는 태평양 전쟁 당시 무선 기기, 레이더, 항공기 등 군수품을 생산한 이력 때문에 패전 후 국가로부터 재벌로 지정되어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1947년 마쓰시타 노조의 항의로 다시 사장직에 복귀했고, 마쓰시타 전기는 또 한 번의 도약을 맞이했다. 마쓰시타 전기는 흑백 텔레비전, 전기세탁기, 전기냉장고와 같은 가전제품 열풍을 일으키며 성장을 거듭했고, 수출망을 개발하여 세계적인 브랜드 파나소닉으로 발전했다.
마쓰시타 전기의 가장 큰 특색은 본사에서 직접 관리하는 판매 대리점 망이다. 이를 통해 마쓰시타 전기는 일본의 국민 전자제품으로 여겨지기에 이른다. 마쓰시타는 1949년부터 대리점을 전국 네트워크로 조직했는데, 이때 본사 직원들은 물론 마쓰시타 자신도 직접 뛰어들어 판매 대리점을 지도하고 교육했다. 대리점을 통해 판매했지만 판매 후의 관리에도 소홀하지 않고 소비자를 직접 책임진다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1973년, 고령을 이유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도 그는 쉬지 않았다. PHP연구소를 기반으로 자신의 경영철학을 널리 알리고, 1979년에는 차세대 리더를 양성하기 위해 사재 70억 엔을 들여 마쓰시타 정경의숙을 설립했다. 그의 나이 85세였다. 그는 "일본은 경제와 기술 분야에서 세계적인 국가로 떠올랐지만 인류의 번영과 공동체의 발전에 대한 관념은 부족하다. 경제력에 부합하는 사회적 영향력과 정치적 지도력을 갖추어야 일본은 물론 세계에도 보다 나은 미래가 다가올 것이다."라고 설립 취지를 밝혔다. 무엇보다 돈이 없어 공부를 하지 못한 인재들을 찾아내 뒤를 보살펴주겠다는 생각이 컸다. 마쓰시타 정경의숙은 22세부터 35세 이하의 청년들을 시험으로 선발하여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하면서 매월 20만 엔의 학비를 지급하여 공부에만 힘쓸 수 있게 했다. 전후 경제 성장에만 골몰하던 당시 일본 사회에서 기업의 사회적 환원을 강조한 그는 나이가 든 이후에도 누구보다 한발 앞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마쓰시타 정경의숙은 수많은 정치 지도자를 배출했다. 졸업생의 43퍼센트가 정치가가 되었으며, 현재 중의원 31명, 참의원 7명, 지자체장 10명, 지방 의원 24명을 배출하는 등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한다. 그리고 2011년 이곳 출신인 노다 요시히코가 제95대 일본 총리로 선출되기까지 했다.
만년까지 활발하게 활동하던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쇼와 시대가 끝난 지 4개월 후인 1989년 4월에 기관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끝없이 성장할 것 같던 일본 경제가 거품경제 붕괴를 겪고 장기 불황으로 진입하기 직전이었다. 평생 학교 한 번 제대로 다녀 보지 못한 견습생 소년은 동네 작은 공장에서 시작해 국민 기업 마쓰시타를 세우고, 재계의 신으로 추앙받으며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것을 바쳐 사회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의 일생은 전후 일본의 경제 성장 그 자체였다.
· 1918년 : 마쓰시타 전기기구 제작소를 설립하다. · 1931년 : 보급형 라디오를 대량 생산해 종합 전자제품 기업으로 성장하다. · 1979년 : 사재 70억 엔을 들여 마쓰시타 정경의숙을 설립하다.
첫댓글 최농경 재학생 읽어 보시고 인생을 살면서
자기 자신의 교훈으로 만들어 보자.
꼭 실천하는 최농경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