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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暹과 함께 떠나는 중국 漢詩 기행
-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를 중심으로
박동섬
涉江采芙蓉
涉江采芙蓉 섭강채부용 蘭澤多芳草 난택다방초
강 건너 연꽃을 따는데, 난초 자란 못 가에 향기로운 풀이 많구나
采之欲遺誰 채지욕유수 所思在遠道 소사재원도
꽃을 따면 누구에게 보낼 건가, 생각해보지만 그대는 먼 곳에 있고
還顧望舊鄕 환고망구향 長路漫浩浩 장로만호호
고개 돌려 옛 고향을 뒤돌아보니, 기나긴 길은 멀고 멀어 아득하기만 하네
同心而離居 동심이리거 憂傷以終老 우상이종노
마음은 하나지만 몸은 떨어져 지내니, 근심으로 괴로워 늙어만 간다
시간과 공간은 문학의 기본 구성 요소이며, 사랑과 이별은 문학의 영원한 주제이다. 이별의 시간이 길어지고 공간이 멀어질수록 애정도 식어버리지만(out of sight out of mind), 그리워하는 상념想念은 더욱더 강렬해진다. 중국이 문학의 나라로 발전한 배경은 대륙의 깊고深 넓은廣 시간과 공간, 제자백가 사상과도 관련이 있다. 현학玄學에서 그 근거를 찾아보면,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에 나오는 천장지구天長地久는 ‘애정이 하늘과 땅이 존재했던 시간만큼 길고 오래되어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것’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장자는 《장자·내편·소요유莊子·內篇·逍遙遊》에서 “북쪽 깊은 바다에 물고기가 있는데, 그 이름을 곤鯤이라 한다. 곤의 크기는 몇 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이 변해서 새가 되면 그 이름을 붕鵬이라 하는데, 붕의 등도 몇 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어서, 떨치고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도 같다. 붕새는 큰 바다 바람을 타고 남녘바다로 날아간다. 남녘바다는 하늘호수다. ……붕새가 남녘바다로 갈 때는 3천 리 파도를 일으키면서 회오리바람처럼 솟구쳐 9만 리 하늘을 올라 큰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北冥有魚, 其名為鯤. 鯤之大, 不知其幾千裏也. 化而為鳥, 其名為鵬. 鵬之背, 不知其幾千裏也; 怒而飛, 其翼若垂天之雲. 是鳥也, 海運則將徒于南冥. 南冥者, 天池也. ……鵬之徒于南冥也, 水擊三千裏, 專扶搖而上者九萬裏,……).”라고 말했다. 장자는 물고기 알 곤鯤이 9만 리를 나는 새 붕鵬이 되는 과정과 변화·생성을 그렸다. 그런 점에서 김상환 시인은 “오늘날의 시는 동일성과 존재be의 측면보다 차이와 생성become의 과정을 보다 중시할 필요가 있다. 그 차이-생성의 아름다움과 비밀은 ‘환한 어둠’으로서 현玄의 사유 이미지와 내연 관계에 있다.”라고 말한다(김상환, 「밝은 어둠: 현玄의 시학과 철학」, 2024년 상반기 통청通靑 인문학아카데미 공동강의). 장자는 《장자·내편·소요유莊子·內篇·逍遙遊》에서 도道는 크다[大]. 하여 하나의 대상이 다른 대상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한정형식은 이 경우 부정된다. 사물에 이름을 명명함으로써 범위를 한정하여 항상(恒常, 영원성)을 막고 무한대의 경계를 축소시켜, 사물의 내재적 본질과 실재(reality)를 보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난 현상(現象, appearance)에만 집착하도록 한다. ‘말할 수 있는 도道’는 현상으로서의 도道에 지나지 않게 된다. 시는 말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시의 내재적 본질은 규정할 수 없다. 이름을 붙이면 실재가 아니라 현상이 되어 버린다. 예를 들어, 하늘에 이름을 붙이면 한정형식이 들어가서 전체가 아니라 부분이 되고 만다. 하늘에는 경계가 없다(이태호, 「밝은 어둠: 현玄의 시학과 철학」, 2024년 통청通靑 인문학아카데미 공동강의). 그래서 노자는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 제1장에서 “도라고 생각하여 말할 수 있는 도는 항상의 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도라고 생각하여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름을 붙여야 하는데, 이름을 붙여 부를 수 있는 이름은 항상의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름 없음이 천지의 시작이고, 이름이 있음이 만물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늘 이름을 붙이고자 함이 없어야 그 대상의 오묘한 실재(實在, reality)를 보고, 늘 이름 붙이고자 함이 있어야 그 대상의 분명한 현상(現象, appearance)을 본다. 이 실재와 현상은 같은 곳에서 나왔으며 이름이 없고 있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양자는 만물들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더욱 분명해지겠지만, ‘같음’ 방향으로 나아가면 그 경계는 모호해진다. 모호하고 더욱 모호한 곳으로 나아가면 여러 오묘한 궁극적 실재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나온다.”(道可道, 非常道;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故常無欲, 以觀其妙, 常有欲, 以觀其徼.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고 말하였다.
실재는 경계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이름 붙일 수 없다. 그러나 현상은 경계 지을 수 있기 때문에 이름 지을 수 있다. 이름 붙이고자 함이 없어야 실재를 보고, 이름 붙이고자 함이 있어야 현상을 볼 수 있다. 사물을 구분하면서 이름을 계속 붙여 가면 만물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이름 있음이 만물의 어미이다. 이것에 비해 반대 방향으로 이름 없음 쪽으로 계속 나아가면 천지의 시작 지점(만물의 근원)에 이르게 된다. 실재(경계와 이름 없음)와 현상(경계와 이름 있음)이 ‘같음’을 일러 현玄이라 한다(이태호, 같은 글).
〈涉江采芙蓉〉은 공직의 직책을 얻지 못하고 방랑자가 되어 타향을 떠돌던 유사游士가 고향에 있는 아내를 그리워하는 감정을 토로한 문인오언시文人五言詩이다.
涉江采芙蓉 蘭澤多芳草 “강 건너 연꽃을 따는데, 난초 자란 못 가에는 향기로운 풀이 많구나.” 그 자연의 향기는 어디서 오는가? 무릇 자연의 성실하고 지극至極함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향기를 발한다면, 자연은 정신의 외화外化, 정신은 자연의 내(면)화가 된다.(김상환, 같은 글) 강과 꽃은 시에 자주 등장하는 상징물이다. 상징은 관념과 깊고 오묘한 이치를 전달할 목적으로 차용된다. 문학상징은 구체적인 사물을 빌려 특정 인물의 관념과 사물의 이치를 암시한다. 시인은 상징을 통해 감정과 의사를 우회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시는 내가 숨고 지워져야 사물의 진실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시는 겉으로 드러난 현상을 쓰는 것이 아니라, 사유이미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강江은 이곳과 저편 사이의 장애물이자 이승과 저승 간의 생사를 넘나드는 시공時空의 흐름을 상징한다. 이 시에서 유사游士와 아내의 관계를 연결하는 매개는 무엇인가? 시인은 시간과 공간, 연꽃과 난초, 그리고 정情을 매개로 설정하였다. 부용芙蓉은 연꽃으로서 하화荷花라고도 칭한다. 연꽃은 진창에서 나왔지만 오염되지 않는 순결한 꽃이다. 연꽃은 강인한 품격과 충성·신뢰, 난초는 꺾이지 않는 절개節介를 상징한다.
플라톤Platon은 유동流動과 부동不動 중에서 어느 것이 더 근원적인가에 대해서 부동不動이 더 근원적이고 실재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유동적인 것은 생성·소멸되어 허무해지기 때문이다. 부동不動적인 것이야 말로 불멸의 이데아idea이다. 이데아의 속성은 영원한 부동不動이면서 완전한 것이다. 눈에 보이는 현실·현상과 개별 하나하나의 사물은 이데아의 복제품에 불과하다. 플라톤Platon은 본질적이고 영원하며 완전한 원형原型의 이데아가 실재하며, 유동적으로 생성·소멸하는 것은 불완전하며 가짜라고 주장하였다. 실재實在는 내적으로 감추어져 있으며 인식이 불가능하다. 현상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으로서 인식이 가능하다(이태호, 같은 글). 연꽃과 난蘭이 아무리 시인의 마음을 표현하는 상징이라 한들, 유동流動이며 언젠가는 시들어져 사라지고 만다. 품격과 충성·신뢰, 절개節介 등 이런 실재에 의해서 관계가 출현하는 것이다. 정情이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푸른 소리’이다. 정情이 내적으로 감추어져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할지라도, 변치 않는 실재이며 영원한 이데아idea이다.
同心而離居 憂傷以終老 “마음은 하나지만 몸은 떨어져 지내니, 근심으로 괴로워 늙어만 간다.” 〈涉江采芙蓉〉 이 시가 나온 한漢나라 시대는 인간의 신체에 대해 높은 도덕성 가치를 부여하여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관념도 강하였다. 교통·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고대에는 공간거리가 멀어질수록 재회할 시간도 길어지므로 시간과 공간은 상호 비례적으로 작용했으며, 그리움도 그만큼 애틋했을 것이다. 견우와 직녀가 1년에 한 번 재회하는 칠월칠석에 눈물이 비가 되어 내린다는 전설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특수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시간과 공간과 질량은 속도라는 관계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변한다. 속도는 공간에 대한 시간의 비율이다. 통신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 사회에는 생활공간이 떨어져 있어도 실시간으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으므로, 공간이 시간에 종속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현대 중국인들은 견우직녀를 부러워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일 년에 딱 한 번만 만나니까. 불교에서 말하는 여덟 가지 고통 즉 팔고八苦 중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볼 수 없는 고통’ 애별리고愛別離苦도 있지만, ‘보기 싫은 사람을 만나고 봐야 하는 고통’ 원증회고怨憎會苦도 있다.
明月何皎皎
明月何皎皎 명월하교교 照我羅牀緯 조아라상위
밝은 달은 어찌 저리 새하얗고 밝은가? 내 침상 위 휘장을 비추네
憂愁不能寐 우수불능매 攬衣起徘徊 남의기배회
우수에 젖어 잠 못 이루다가, 옷을 걸치고 일어나 배회한다
客行雖云樂 객행수운락 不如早旋歸 불여조선귀
나그네 행로가 비록 즐겁다하지만, 일찍 돌아감 만하겠는가?
出戶獨彷徨 출호독방황 愁思當告誰 수사당고수
집을 나가 홀로 방황하는 신세, 집 생각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으리
引領還入房 인령환입방 淚下沾裳衣 누하첨상의
고개 떨구고 다시 방에 돌아오니,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시는구나
〈涉江采芙蓉〉이 객지에서 방랑하는 남편이 아내를 못내 그리워하는 심경을 그렸다면, 〈明月何皎皎〉의 화자는 먼 길 떠나 나그네로 떠돌며 돌아올 기약 없는 남편에 대한 상념想念에 젖어 있는 아내다.
明月何皎皎 照我羅牀緯 “밝은 달은 어찌 저리 새하얗고 밝은가? 내 침상 위 휘장을 비추네.” 달의 문학상징은 상념想念과 비수悲愁; 어찌할 도리가 없는 안타까운 심정; 시공時空의 영원성; 고결한 품격 등을 내포한다. 달은 가 닿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닿을 수 없는 ‘낭만적 아이러니’로서 그리움의 표상이다. 아내는 남편의 안위를 염려하며 비수悲愁에 잠겨 있다. 〈明月何皎皎〉의 화자는 고대가요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를 노래한 백수광부의 아내를 연상케 한다. 남편에 대한 애정은 근원적 정서로서 파토스pathos[느낌, 경험, 고통을 겪음, 열정, 연민 등]이자, 격조를 드러낸 것이다. 교교한 달빛으로서 현玄은 감정이 몰입되는 순간이다.
“시의 세계와 의미(특히, 감정과 뉘앙스)는 애매하고 모호한 것이어서 경계와 사이 공간을 통해 새로운 상상과 에너지가 요구된다. 빛에서 어둠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다가서며 서로 스며드는 영역은 시 특유의 분위기와 정서를 환기한다.”(김상환,『모든 것은 느낀다』, 2023 현대시연구공간 <알레프Aleph 녹> 강의록, p.70.) D. THOMAS가 『시월의 시(Poem in October)』에서 ‘해 안 비치는 곳에 빛은 터 오고(Light breaks where no shines)’라고 표현했는데, 어둠의 어둠인 현玄이 있기에 빛이 더욱 잘 드러나듯이 시인은 흑백의 대비를 통해 정서의 깊이를 확보하고 있다. “검은 빛invisible light으로서 현玄은 결코 단선적이지 않으며, 이러한 현玄을 중류中流로 하여 사물과 마음은 비로소 하나로 이어지는 것이다. (침상 위 휘장을 비추는 달빛) 그늘은 다른 빛의 공간이자 혼자 있는 방이다. ‘색조나 느낌 따위의 미묘한 차이에 의하여 드러나는 깊이와 정취’가 음영陰影이라면, 슬픔은 사이로서 바라보는 유현幽玄의 미학이다. 고요한 흐름이다(김상환,「밝은 어둠: 현玄의 시학과 철학」).
〈涉江采芙蓉〉·〈明月何皎皎〉 두 작품 모두 부부 간 애정愛情이 절절하다. 애정을 눈으로 볼 수 있는가? 애정은 눈에 보이질 않는다. 과학의 연구 대상은 보이는 것이며 눈에 보이는 것은 증명이 가능하다. 사회과학에는 애정의 개념이 없고, 문학과 철학에 애정의 개념이 있다. 사회과학에는 혼인이 연구 대상이 되며 애정은 연구 대상이 아니다. 애정과 혼인은 일치할 수도 있고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애정은 다원적일 수 있으나 혼인은 일원적이다. 다원적인 혼인은 없다. 혼인은 두 사람 간의 애정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니벨룽겐의 노래』는 ‘아무리 많은 영웅들이 그녀의 사랑을 구하려 해도 크림힐트는 내면적으로 한 남자를 사랑하는 것에 스스로 두려움을 느끼고서 뒤로 물러서곤 했지요. 훗날 그녀의 남편이 될 사람은 그녀에게는 아직 미지의 인물이었던 셈입니다.’라고 했을 정도로 『니벨룽겐의 노래』의 주인공 지그프리트의 아내 크림힐트는 애정마저 조심스럽고 진중하게 대하였다.
인간의 정신 활동에는 지知(인지認知), 의意(의식意識), 정情(감정感情) 이 세 가지의 과정이 있다. 인간人間을 눈으로 볼 수 있는가?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유는 추상적인 것은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사람은 추상적인 인간이 아니라, 구체적인 한국인·중국인 등일 뿐이다. 실재와 겉으로 드러난 현상은 분명히 다르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을 보고 실재를 말하면 안 된다. 유물주의자 엥겔스Engels는 “추상적 인간에 대한 숭배를 현실적인 인간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두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본다면 인간도 한낱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 인본주의는 인간을 철학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물질주의物質主義에서 인간중심으로 인식의 전환을 추구하였고, 인간이 자연과 우주의 근본 혹은 본질이라는 유심사관唯心史觀을 탄생시켰다. 〈涉江采芙蓉〉·〈明月何皎皎〉 작품 속의 부부처럼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모든 존재는 애틋한 정情으로 남을 것이다.
《시인부락》 2024년 여름 20. pp.262~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