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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아야 할 연평해전
청년지식인포럼 강연에 참가하여 주신 참석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우리는 ‘내가 사랑하는 대한민국 이야기’라는 주제로 제2연평해전에 대해 강연을 하고 있습니다. 앞서 이희완 소령님과 이소연님께서 [긴박했던 당시 연평해전], [북한에서 본 연평해전]이라는 내용으로 강연을 해주셨습니다.
저는 이 두 분의 강연에 이어서 [잊지 말아야 할 연평해전]이라는 주제로 제2연평해전을 기억해야하는 이유와 연평해전 소설을 쓰게 된 배경, 그리고 [NLL 연평해전] 영화를 제작하기에 이른 과정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기 계시는 여러분들 중에 혹시 2002년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기억하는 분이 계십니까?
대부분 ‘한일 월드컵 4강’을 떠올릴 것입니다. 2002년 5월 31일에서 6월 30일까지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구었던 한일 월드컵, 6월의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용광로와 같았습니다.
하지만 2002년도에 있었던 뜨거웠던 사건은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6월 13일에는 제3회 지방선거가 있었고, 같은 날에 경기도 양주군 광덕면에서 효순 양과 미선 양이 길을 가다가 미군 장갑차에 치여서 사망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6월 29일, 가슴 아픈 사건, 바로 제2연평해전이 발발했습니다. 그리고 12월 19일, 제16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이렇듯 2002년은 굵직한 사건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사람들은 ‘한일 월드컵 4강’ 만을 기억하거나 좀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은 효순 양, 미선 양 사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과연 제2연평해전은 우리가 그처럼 잊고 살아도 되는 하찮은 일에 지나지 않는 사건일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단코 잊고 살아도 되는 사건이 아니라, 이 나라 국민이라면 잊고 사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해야 하는 사건입니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또 우리를 반성하게 하는 제2연평해전이 발발한 이유와 사건의 진실이 과연 무엇인지를 집어보겠습니다.
제2연평해전은 단순하게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제1연평해전의 연장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1999년 6월 15일 발발했던 제1연평해전, 이 사건은 북한이 작심하여 계획하고 저지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대패를 하고 맙니다.
충격을 받은 김정일이 절치부심하면서 연형묵, 김윤심, 이명수 등에게 제1연평해전 보복작전을 지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김정일이 [서해교전 격침작전]이라고도 했다가 [6.15 격침작전]이라고 이름을 바꾼 제2연평해전입니다.
[서해교전]이라는 말에 숨겨져 있는 뜻을 알아야 사건의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오늘 제게 주어진 시간으로는 설명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제2연평해전을 설명하기에 앞서, 제1연평해전 발발 배경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북한은 1994년에서 1998년 사이 300만 명 이상의 인민이 굶주림으로 죽을 만큼 식량난이 매우 심각한 대기근의 시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김정일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고난의 행군’이라는 기치를 내세워 인민들을 닦달했지만 배를 곯은 인민들의 불만은 점점 커져갔고 급기야 군부까지 동요하는 등 상황이 심각했는데, 이때 김정일을 구해준 것은 모순되게도 다름 아닌 남한이었습니다.
1998년 4월 3일 영국을 방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런던 대학교에서 햇볕정책을 발표합니다. 그 후 김정일에게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남한과 국제사회의 물자지원이 이어집니다.
김정일은 그렇게 얻은 쌀가마니를 틀어쥐고 군의 강성대군을 부르짖고 군을 통치중심에 두는, 이른바 ‘선군정치’를 발표하고 군부의 서열을 상승시킵니다. 하지만 북한 인민들은 그들이 말하는 위대한 지도자 동지도 주지 못하는 쌀을, 반세기 이상 주적(主敵)으로 교육 받아 왔던 남한으로부터 받게 되자, 남한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기 시작하고 사상의 균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때에 김정일은 체제위협을 느끼고 햇볕정책을 대응할 방법을 찾으라는 지시를 내리는데, 이 지시에 따라 1999년 4월3일, 조선노동당의 대외 대남전략 부서가 모여 있는 모란봉구역 전승동 ‘3호청사’에서 이른바 [4.3조]를 결성하고 DMZ에서의 국지도발을 검토하지만, 당시 정주영 회장이 금강산 개발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어서 적절치 않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하여 착안한 것이 1991년에 합의한 남북기본합의서에 언급돼 있는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무너트릴 계략을 꾸민 것입니다. 이를 위해 사전에 많은 준비를 하고 도발한 것이 바로 1999년 6월 15일에 일어난 제1연평해전인 것입니다.
제1연평해전은 북한이 치밀한 준비를 하고 덤벼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패를 하고 말았지만, 김정일은 문책은커녕 잘 된 전투라고 치하를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당시 사상의 균열이 일어나고 있던 인민들에게 남한이 한쪽으로는 쌀을 주지만 다른 한쪽으로는 호시탐탐 북침을 노리고 있는 악랄한 괴뢰라고 선전하기에는 그만한 이벤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김정일식 체제유지 방법이며, 은혜를 갚는 김정일식 보은인 것입니다.
그러면 제2연평해전은 어떻게 일어났을까요?
제1연평해전이 있은 지 정확히 1년 후인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됩니다.
1999년 4월 3일에 결성된 [4.3조]도 그렇지만 남북공동선언일이 제1연평해전 발발일인 6월 15일과 중복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김정일이 남한과의 외교적 우위를 노린 술수였습니다.
남북공동선언문 하나로 남북기본합의서는 사문화되었고 남북불가침선언도 유명무실 되고 말았으니, 김정일로서는 박수를 치고 술판을 벌릴 만도 했습니다.
하지만 김정일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또 다른 음모를 꾸밉니다.
88올림픽을 앞두고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를 주관했던 김정일로서는 어떻게 하든지 제1연평해전 패배를 설욕하여 북한군 사기를 높이고, 남한에서 치르는 월드컵에 재를 뿌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2년 동안 준비한 것이 [6.15 격침작전] 즉, 제1연평해전 보복전으로서 2002년 6월 29일, 월드컵 3~4위전이 열리기로 되었던 날 오전에 연평도 해상을 기습적으로 공격을 감행해온 것이 바로 제2연평해전인 것입니다.
이 해전으로 남한 해군장병 6명이 전사하고 19명이 부상을 입은 커다란 피해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아픔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 보다 더 큰 아픔이란 무엇일까요?
내 자식이, 나의 전우가, 내 나라를 무력으로 침범한 적을 격퇴시키기 위해 전투를 하다가 장렬히 전사를 했는데, 그랬는데 말입니다. 국군통수권자로부터 버림을 받고 국민들로부터 외면 받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유가족들과 전사자들의 전우들 가슴에 박힌 대포알입니다.
제2연평해전은 6·25 동란 이후 한반도에서 벌어진 최대전투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정부는 전사자들을 햇볕정책의 걸림돌로 떨떠름하게 여기고, 국민이 조문할 기회를 주지 않고 사건이 있은 지 불과 3일 만에 쫓기듯이 후다닥 장례를 해치웁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당시 정부는 해군장이라는 이유로 해군참모총장 위 끗발들은 그 누구도 영결식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심지어 동급인 육군, 공군 참모총장조차도 참석하지 않습니다.
물론 대통령은 제2연평해전이 벌어진 다음 날인 6월 30일 월드컵 결승전에 참석한다고 일본으로 갔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대통령으로서 헌법 74조 1항을 위반한 중대한 직무유기에 해당되는 일로 실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후에 그 일에 대해 당시 정부가 해군장이었기 때문에 의전관례상 해군참모총장 윗선은 참석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궁색한 해명을 늘어놓았는데, 과연 그랬을까요?
그로부터 5년 뒤인 2007년 3월 5일 오전, 한 사람의 죽음을 두고 온 국민이 애도하는 정말이지 보기 드문 일이 벌어졌습니다. 여러분들도 고 윤장호 하사 장례식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당시에 유해가 안치된 분당 국군수도병원에는 정부와 군 고위인사, 정당의 지도자와 일반 국민의 문상이 줄을 이었습니다. 지상파 방송은 영결식을 앞 다투어 생중계를 했고 추모 촛불집회도 열었습니다.
고 윤장호 하사는 육군장도 아닌 그 아래의 단위 부대장인 특전사령부장으로 거행되었습니다. 이를 의전관례 대로 따르자면 소장 위의 계급장을 단 자는 아무도 참석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국방장관과 청와대, 합동참모본부, 각 정당 원내 대표, 각 군 수뇌부들이 대거 참석합니다. 뿐만이 아니라 보다 많은 조문객을 받아야한다면서 장례를 5일장으로 합니다.
고 윤장호 하사가 군복을 입어야 했던 이유나,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이 군복을 입어야 했던 이유는 똑같습니다. 나라를 수호하고 국토를 방위하기 위해 병역법이 존재한다면, 그로 인해 희생된 자들에게 예를 갖추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누구는 이렇게, 누구는 저렇게 하는 식의 차등을 두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고 윤장호 하사 장례와 제2연평해전 전사자 장례는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도 방아쇠를 놓지 않고 적을 향해 포탄을 발사하면서 북한 경비정을 격퇴시킨 숭고한 희생자인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은, 왜 고 윤장호 하사와 같은 예우를 받지 못하고 당시의 정권과 국민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해야만 했을까요?
이를 두고 어떤 이가 말하기를 두 죽음을 둘러싼 권력 코드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적절한 표현 같지 않습니까?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의 장례식이 있던 7월 1일은 광화문에서 대대적인 월드컵 뒤풀이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국민들은 월드컵 4강의 흥분과 열기를 쉽사리 누그러트릴 기미가 없었는데, 그것은 실로 엄청난 군중 에너지였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이 에너지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고 무슨 욕심을 냈을까요? 당연히 표심이었습니다.
당시 집권당은 국민적 열기를 대선의 표심으로 이어지도록 효순이 미선이 사건을 다시 우려먹을 궁리를 하고, 효순이 미선이 사진을 앞 세워 놓고 반미운동으로 몰아가면서 아킬레스건인 제2연평해전의 흔적을 지우려 안간힘을 쏟습니다.
그 덕분에 국민은 자신들도 모르게 선동에 이용당하고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 희생의 가치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이 국군통수권자로부터 버림을 받고 국민들로부터 외면 받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유가족들과 전우들 가슴에 대포알이 박혔다는 것은 바로 이런 까닭입니다.
뿐만이 아니라, 당시의 정권은 제2연평해전을 북한 군부의 강경세력이 일으킨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발표하고 절대 NLL 북쪽으로 가서 복수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에 김정일은 유감이라는 말로 답례를 해왔고, 당시 정부는 그것을 두고 북한이 사과했다면서 환영합니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통일부장관은 제2연평해전 반성론을 입에 담습니다. 이는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 된 일입니다.
지금까지 드린 말씀처럼 잘못 된 처사와 예우로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을 보낸 우리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그들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11년이 넘도록 해군 부사관으로 근무했는데, 제2연평해전이 있었던 연평도 해군고속정 전진기지가 저의 군생활 마지막 근무지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의 홀대가 남의 일 같지가 않았습니다.
만약, 제가 그곳에 그들과 함께 있다가 전사를 했다 하여도 나라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라는 생각에 이르자 가만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 잘못 된 것을 말하고 싶어서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2년여에 걸친 문학수업을 거쳐서 소설 연평해전 집필을 위해 본격적인 취재를 시작했고 마침내 완성시켰습니다. 이것이 소설 연평해전이 탄생된 배경입니다.
현재 제2연평해전을 주제로 영화제작을 하고 있습니다만, 영화제작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작과정 그 자체가 한편의 영화와도 같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 압니다.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3개의 영화사가 시나리오 작업을 마치고 배우 캐스팅까지 마쳤지만 촬영이 무산되기도 했으며, 2년 반 동안 지루한 법정투쟁도 있었으며, 영화 제작 투자자가 나타나지 않아 그야말로 힘든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웹사이트 ‘굿펀딩’을 통해 1억 원을 목표로 한 달 동안 제작비 모금을 시작하게 되었고, 뜻밖에 많은 네티즌들의 호응이 있어서 영화제작 열기를 불어 일으키는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돼지통장을 들고 와 건넨 사람도 있었고, 돈이 없어 용돈으로 후원한다는 고등학생도 있었고, 부디 영화가 성공적으로 만들어져 무참하게 희생된 장병들을 추모함과 동시에 북한을 올바로 알 수 있도록 해주었으면 좋겠다며 후원한 대학생도 있었고,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며 수억 원을 낸 젊은 기업가도 있었습니다.
후원자의 80%가 20, 30대의 젊은이여서 상당히 놀랍기도 했지만 무척 반가웠습니다. 그런 분들의 성원이 있었기에 영화 [NLL 연평해전]을 촬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김학순 감독님 이하 모든 제작진들은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좋은 영화로 보답하자는 결의를 다지면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습니다.
끝으로 지금까지 드렸던 말씀을 부연하자면,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은,
올바른 가치관과 조국애로 대한민국 국민의 생존권을 지켜내기 위하여 피를 뿌렸지만 국민들로부터 소외를 당했고,
국군이라는 이름으로 충성스럽게 통수권자로 받들었던 대통령에게 버림을 받았고,
가슴에 계급장을 달고 충실하게 명령을 따랐던 국방부장관에게 홀대를 당했던 용사들이었습니다.
앞으로 이 나라가 더 이상,
나라를 수호하다 전사한 군인을 국군통수권자가 버리는 나라,
국토방위를 위해 목숨을 던진 용사를 외면한 정부,
국민의 안녕을 지켜낸 용사들의 희생을 무관심으로 보답하는 국민이 살고 있는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강연자 : 소설가(연평해전 작가) 최 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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