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한의원. 인애가한방병원과의 인연(김기진선생님과의 인연)
우리 부부는 결혼한지 7년이 넘도록 아기가 없어서 국내 유명 불임센터를 다니며 아픈 세월을 보내고 있던중 불임클리닉 병원에서 만난 어느 임신부의 소개로 장수 한의원을 알게 되었다. 이 아주머니는 자신을 비롯, 몇명의 불임 부부도 그 한의원서 지어주는 약을 먹고 임신을 했으며 자궁외 임신으로 수술을 해야 했던 어느 환자도 그 원장님이 지어 준 약을 먹고 치료를 받은 후 정상적으로 아기를 분만 했다며 3대를 잇는 용한 곳이니 꼭 가보라며 우리에게 그 한의원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남기고 떠났다. 배불뚝이 아주머니가 떠나는 뒷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멍하니 바라보면서, 그 아주머니와 그분의 말이 심상치 않다는 생각을 했다. 하느님께서는 믿음으로 간구하는 자에게는 예상치 않은 사람을 통하여도 역사하신다는 믿음이 있었던 터라 천사대신 그 아주머니를 우리에게 보내 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수 년간을 양방에 의존하여 여러가지 시술과 처치로 불임을 극복해 보려 노력하면서 우리는 심신이 많이 지쳐 있는 상태였다. 그렇지만 흔히 아픈 사람들이 찾는 병원 주변에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하는 간절한 마음을 이용하여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여 조금의 걱정을 안할 수는 없었다.
신께서 우리 편이 되어 주시리라 믿기로 하고 떠난 초행길 영주는, 서울에서 제천을 거쳐 꼬불꼬불한 죽령을 넘어 왕복 10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머나먼 길이었으나 간절한 마음이 더 컸기에 하나도 멀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구비 구비 이어지는 죽령을 넘으며 아름다운 산촌 마을이 펼쳐졌는데 지금도 그 광경이 한폭의 그림처럼 눈에 선하다. 험준한 죽령을 넘고 풍기를 지나 드디어 영주에 도착은 하였으나 한의원을 찾기란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당시엔 네비게이션이 없던 시절이라서 차를 세워 놓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여러차례 문의하면서 간신히 찾아갔는데, 장수한의원은 뜻밖에도 작은 현판이 걸려 있는 평범한 시골집이었다. 우린 내심 놀라며 '서울까지 소문이 난 그집 맞아?'하며 조심조심 안마당으로 들어섰는데 하얀 한복을 차려 입은 인자해 보이시는 할아버지께서 우릴 안으로 안내해 주셨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분이 바로 김기진 선생님의 부친되시는 분으로 장수 한의원의 초대 원장을 지낸 김성환 선생님셨던 것이다. 대청 마루에는 많은 내원객들로 붐비었으며 한쪽에서는 여자분 두분이 처방전대로 약초를 분류하여 약봉에 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이런 모습을 보고서야 제대로 찾아왔구나하는 안도감이 들었는데 원장님으로 보이는 선생님께서는 특별한 진료실 없이 작은 책상 옆에 소박하고 검소한 모습으로 마루 바닥에 앉아 진료를 하고 계신 것이 그 당시 무척 인상적이었다. 서울에서 떠나올 때 전화를 드려서 당일치기로 왔다가 돌아 가야만 하는 사정을 미리 말씀드렸더니,선생님께서는 기다리고 계신 분들께 양해를 구하여 우선 진료를 해 주셨다. 마치 친척 어른께서 대해 주시듯 선생님은 먼길 떠나온 우리들의 식사 걱정도 해 주실 정도로 자상한 분이셨다. 그래서 한결 편안하게 우리의 답답함과 간절함을 다 말씀드리며 진맥을 받은 후 희망을 가져도 되겠냐고 걱정스레 여쭸더니 한마디로 냉장고 속에서 아기가 생산될 수야 없잖은가 라고 알기 쉽게 말씀하시며 부부가 함께 약을 처방받아 2-3재 정성껏 다려 마시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당시 아기가 없어서 주위로 부터 받은 냉대 때문에 우리 부부는 둘 다 몸과 마음이 지치고 위축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무엇보다 몸의 양기를 북돋우는 약을 위주로 하여 처방을 한다 하셨다. 용이 들어가므로 약값이 좀 나갈거라며 걱정을 하시기에 약값이 너무 비싸면 어쩌나 - 여기까지 와서 안 지어 갈 수도 없고- 당시, 우리처럼 절박한 사람들을 상대로하는 고가의 비방약이 있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그런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A급 시베리아산 녹용을 포함한 1재의 약값이 일반 탕약 보다 약 10만원 정도가 더 비쌌던 걸로 기억된다. 아주 귀한 약을 그다지 부담없는 가격으로 처방해 주시는 원장님이 너무 고마웠다. 거기다가 꼭 임신이 될거라며 용기까지 북돋아 주시니, 환자들의 아픈 마음까지도 치료해 주시는 선생님이 너무나 고마울 뿐이었다. 약봉지를 받아 들고 서울로 향하는 우리의 마음은 희망으로 가득 부풀어 있었다. 지금 생각컨데 독실한 크리스챤이신 선생님의 삶은 곧 신앙의 실천이셨던 것 같다.
약을 매일 탕기에 정성껏 다려서 2재반 정도를 복용하였을때(그해 여름 내내 더위와 씨름하며 탕기에 약을 다림) 정말 그렇게도 기다리던 임신의 징후가 보였고 , 꿈이 아닐까 반신반의하며 원장님께 이 소식을 알렸더니 축하를 해주시며 아기가 잘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는 약을 처방하여 우편으로 부쳐 주셨다. 산부인과 병원에서 임신중에는 절대로 한약을 복용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했으나 우리 부부는 선생님을 100% 신뢰하고 따랐다.
그 결과 1991년 5월에 간절히도 바라던 아기-건강한 딸아이를 순산하고 이 소식을 원장님께 알려 드렸더니 혈육만큼이나 진심으로 기뻐해 주셨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다음번에는 아들을 낳아야지"하시길래 "원장님도 저희도 모두 하느님을 믿는데 사람이 어떻게 태아의 성별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나요? 이건 불임 치료와는 또 다른 신앙상의 문제가 아닌가요?" 하고 의아한 마음에 질문을 했더니 원장님께서는 다 근거가 있는 방법이라며 다음번 임신을 원할 때 다시 연락하라고 말씀하셨다.
돌이 지난 아기를 안고 바람도 쐴겸해서 우리는 또다시 영주로 선생님을 찾아 갔고, 지어주신 녹용든 약과 임신되는 약을 처방 받아 가지고 와서 부부가 함께 정성껏 달여 먹던중 감사하게도 두번째아기를 또 갖게 되었다. 이왕이면 아들이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우리는 곧바로 원장님께 연락을 드렸고 원장님은 몇가지 지켜야 할 아래 사항을 알려 주시며 임신한 날로부터 7일안으로 바로 실행하라고 하셨는데, 신앙인으로서 갈등은 조금 있었지만 동의보감에도 나오는 거라 하시니 이번에도 믿고 따랐다.
1. 주물 단조로 된 도끼를 붉은 주머니에 든 붉은 돌가루( )와 함께 반드시 왼쪽(?)에 깔고 잘 것.
2. 수탉의 깃털을 구하여 같이 깔고 잘것.
당시 수탉 깃털은 구하기도 어렵고 아무래도 미신적 요소가 있어 다시 문의를 드리니 수탉의 깃털은 상징적 의미이나 나머지는 꼭 처방대로 하라 하시어서 그대로 실행하였다.
원장님이 처방하신 한약을 먹고 둘째를 갖고는 당시 집 근처의 유명하다는 박00 산부인과에 정기검진을 다녔고 문진 과정에서 그 곳의 선생님께 임신 경위를 다 말씀드렸다. 우리 부부가 오랫동안 불임으로 고생하다가 모한의원에서 지어 주신 한약을 먹고 첫째 아기를 낳았고, 또 둘째를 가졌는데 아들을 낳는 비방약을 먹었다며 검진을 의뢰하자, 여의사는 그런 황당한 얘기가 어디 있냐며 우리의 말을 무시?하는 듯 했다. 기분이 상한 우리는 실제로 체험한 일인데 믿고 안믿고는 선생님 자유라며 지금까지의 임산부 기록챠트를 달라해서 낙성대에 위치한 모태 산부인과로 정기 검진 병원을 옮겼다. 당시 모태 산부인과는 오픈한지 2-3개월된 불임전문 병원으로 백병원서 근무하시던 선생님이 원장님이셨는데, 이분은 그간의 경위를 들으시더니 대뜸 " 우리도 여러 불임치료와 시험관 아기 시술을 해 왔지만 한방과 합동으로 진료하면 확실한 성공을 가져 오는 결과를 여러번 보았다.. 이 경우도 꼭 연구하고 싶은 사례이다."하고 말씀하시며 그곳의 전화 번호를 좀 가르쳐 달라 하시기에 장수한의원 전화 번호를 알려 드렸고 초음파 검사후에 선생님은 딸 아들이 맞는다며 태중 아기가 아들임을 살짝 암시하여 주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물론 신앙인의 입장에서 이 모든 일이 다 하느님의 섭리요 은총임을 믿는다. 그렇지만 분명한건 원장님의 도움을 받아 불임을 극복했고 두 아이의 부모가 되게 해주셨음에 원장님께 무한한 감사의 말씀 올리며, 이 모든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린다.
1993년 4월 둘째로 아들을 낳았고 선생님의 처방전 중 빨강 주머니에 담긴( )는 이사하면서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지만 그때의 "도끼"는 지금도 잘 보관하고 있으며 그걸 볼때마다 자상했던 원장님을 떠올리곤 한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장수 한의원과 인연이 되어 그 후로도 1년에 한차례씩 가족 모두 보약을 지어 먹곤 했는데 원장님은 한달에 한두번씩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아들 병원엘 다니러 가니까 가까운데로 오라며 영생한의원의 위치와 전화번호를 알려 주셨다. 그래서 경상도 영주까지 안가고도 서울에서 몇차례 선생님을 더 만날 수 있었다. 아드님은 당시 경희대 교수와 경희대 한방병원 내과과장을 겸직하면서 한의원도 운영하고 계신 그 당시로도 아주 유명한 선생님이셨는데 부친을 닮아 자상하고소탈해 보이셨다. 애들이 조금 자라고 건강상 별다른 이상이 없어 몇년이 지난 후에 다시 송파에 있는 영생한의원을 찾아가게 되었는데, 이미 원장님은 별세하고 난 뒤였다.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지극한 효성을 다하며 부친의 병 구완을 하시느라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마음이 많이 아팠었다.
다시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2011년 12월경 지병인 당뇨가 악화되어 진료를 받기 위해 영생한의원을 찾았더니, 영생 한의원은 인애가 서울병원으로 장수한의원은 장수 한방병원과 요양원으로, 김덕호 박사님은 일맥의료재단 이사장으로 여러개의 양.한방 병원을 거느리고 계셨다. 병원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고 성공하신 것 같아 축하하는 마음이 들면서도 이사장님의 직접적인 진료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걱정을 했는데 기우였다. 작고 소박한 진료실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시는 박사님을 뵈었을 때 부친이신 김기진 선생님을 뵈는듯이 반가웠고, 김박사님도 우릴 통하여 아버님을 느끼려 함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선생님께서 이런 모습을 천국에서 흐뭇하게 바라보고 계실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수필가로 문단에 데뷔도 하고 의료 업가로도 성공하셔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분들이 갖는 권위 의식이 있을 만도 한데 김박사님은 환자 한분 한분에게 그간의 안부를 물어가며 편안한 마음으로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마음을 쓰고 계셨다. 그런 부분도 부친을 흡사하게 닮은 것 같아 훌륭한 가문의 정신은 계승되어지는구나 라고 생각하게큼 했다.
박사님은 남의 병을 돌보느라 정작 자신의 몸을 돌볼 틈이 없어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신 아버님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회고하시며,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일맥의료재단을 설립하였고 사회사업으로 요양원, 의료시설, 복지시설등을 운영하고 있다며, 부친의 정신과 삶의 흔적을 찾아 기리기 위해 책을 출간하고 싶다며 아버님의 진료를 받았던 우리의 이야기를 수기 형식으로 써 줄 것을 부탁하셨다. 그래서 지난 20여년간 우리 부부에게 잊지 못할 인연으로 도움을 주신ㅡ 진정 이 시대의 허준 선생님이신ㅡ 김기진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과 기억을 더듬어 사실을 그대로 기술하였으며, 지금은 김덕호 박사님께로 부터 많은 도움과 은혜를 입어 자칫 심각해 질 수 있었던 지병이 거의 완치 단계에 이르렀으니 감사 드리고, 2대에 걸쳐 명의이신 분들과 인연을 맺음으로 건강을 지키게 해 주시는 주님께도 감사드린다.
ㅡ병원의 앞날에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조금이나마 김기진 선생님의 책자 발간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ㅡ
2012. 2. 10 박 성 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