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9 당시 나는 3학년으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도호국단 운영위원회 (지금의 학생회) 부위원장 겸 총학생회 수석 부위원장장직을 맡고 있었다.
남산 필동에 소재한 아버님 소유 빈집 (필동 2가 3번지, 이곳이 그 후 우리의 아지트가 되었다) 으로 장소를 옮겨 밤늦께 까지 상의를 한 끝에 서울의 각 대학들과 연계하여 대규모 항의 데모를 벌이기로 결론을 냈다.
동지들을 더 규합하여 40명이 필동 집에 다시 모였다. 이때는 정치과 동기는 물론 정치과 외교과
당시 자유당 정권의 행태로 보아 한 번의 데모로는 별무효과라고 판단하고 장기전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여기서 나온 안이 파상적 데모 공세 전략이었다.
40명을 5인1조로 편성하여 각조마다 조장을 두고 우선 1조가 책임을 지고, 퇴학은 물론 모든 형사적 책임을 지고 교도소를 가고, 그 다음으로 2조가 책임을 지고 2차 데모로 이어 가서 총 8번의 데모로 장기전으로 돌입하기로 했다. 재미있는 것은 5인조 조직이었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누군가가 제안을 하길 3.15 부정선거에서 자유당이 5인1조로 당원을 조직해서 부정선거를 했으니 그 수법을 돌려주는 의미에서 우리도 5인조 하자는 것이었다. 즉각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정치학과 2학년 이청수 (해당 조는 아니었는데 몆가지 좋은 구호를 만들어 가지고 와서 내가 강력히 추천하여 채택이 된 기억을 갖고 있다)
1959년 경 부터 자유당은 마지막 발악으로 치닫게 되는데 이정재의 조직깡패들을 끌어드리면서 대학사회에 까지 손을 뻗쳐 왔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자유당을 지지하는 전국 구국 학생총연합회의 출현이다.
총위원장 일도 잘 하고 인물, 체격도 좋아서 나름 인기가 있었는데, 졸업 무렵 문제가 생기기 시작됐다. 그의 아버님이 자유당 정권의 장관으로 취임을 한 것이다. 그 후 그의 아버님 지시가 있었는지 아니면 그의 독자적 판단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하여튼 그가 중심이 되어 서울대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구국학생 총연맹을 결성하게 되면서 박하용 (당시 서울대 총학생위원장)을 필두로 여러 단과대 위원장들이 여기에 가세하였다.
4.19 당일 우리 문리대 캠퍼스에서는 전원이, 한명의 낙오자도 없이 다 같이 한마음 한 몸으로 동시에 우리의 혁명대열에 참여했었다는 사실을 강조해 천명하고져 한다.
각 조의 동지들이 열심히 각자 맡은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중 당혹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4.18 고대학생 피습사건! =1960년 4.18고려대학생들이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기위해 평화행진을 하다가 천일 백화점에서 신도환의 대한반공청년단 소속 폭력배들에게 피습된 사건이자 학생시위의 주역을 지방의 고교생으로부터 서울의 대학생으로 바꾸어 놓았다. 시위 목적도 부정선거 규탄에서 독재타도로 전환 시켰다는데 그 의의가 큰 사건이다.당시 학생들은 40명 취재한 기자는 6명 부상당했다고 함. 소수학생들이 구타를 당해 사망했다고 함. 그것이 4.19도화선이 되었다.
4.18 고대피습사건이 있었기에 4.19가 더욱 확실하게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이 모든 겻이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함춘원은 아주 완만한 경사의 산기슭이었는데 동지들은 몇 횡 대열로 자리를 잡았다. 나는 맨 앞 제일 낮은 위치에서 친구들을 올려다보는 상태에서 사회를 보았기 때문에 각자의 표정을 잘 볼 수 있었다. 하나같이 흥분한 상태에 비장한 표정들이었다. 이 모임의 결론은 이미 나와 있다는 느낌이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전원이 발언을 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는데 몇몇은 사양을 했고 그러나 대다수가 각자의 소신을 밝혔다.
격론 끝에 3가지 안으로 압축되었는데 그 첫째가 거사일을 4월 21일에서 25일 또는 26일로 연기하는 안, 둘째는 거사를 아예 무기 연기하고 사태를 관망해 보자는 안, 그리고 셋째는 고대 피습사건으로 인해 학원가는 물론 전 국민의 공분이 일고 있는 현 상황을 이용, 거사일을 오히려 앞당겨 내일 즉 4.19일 아침으로 하자는 안이 그 셋째이었다. 또 한 차례의 격론 끝에 제 3안 즉 4.19일로 거사가 확정되었다.
약 경찰이 종로 5가 쪽과 원남동 로터리 그리고 혜화동 로터리를 트럭으로 봉쇄하고 바리케이드를 친다면 우리는 완전히 독안의 든 쥐와 같은 상황이 될 것이다. 함춘원 회의를 마친 후 몇몇이 따로 대학다방에서 구수회의를 가졌다. 우선 서울 시내 경찰의 병력수를 알아보기로 했다. 파출소 요원까지 합쳐서 약 7,000명 정도로 추산이 나왔다. 시경으
<삼국지> <열국지>를 탐독하던 시절 이어서인지 그럴싸한 계책이 하나 나왔다. 동대문경찰서 형사들에게 역정보를 제공하자는 아이디어였다. 경찰은 이미 며칠 전 부터 우리들을 감시하고 있었고 나는 이틀째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신당동 백낙환 매부 (전 인제대학 이사장, 작고, 우리에게 많은 용기를 주시던 분이다) 집에서 잤다. 어차피 경찰에서는 19일에는 서울대에 움직임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을 터이니, 차라리 내일 서울대에서 데모가 확실히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흘리자는 것이다. 흘리되 시간을 오전 11시로 알려 주자. 11시라면 경찰 쪽에서도 그렬싸 하다고 판단 할 것 같았다.
4월 19일 당일.
전날 밤을 정종문, 권혁조 등과 함께 필동 아지트에서 거의 밤샘을 하고 새벽 5시경, 종로 5가 평화극장 뒷골목에서 해장국으로 요기를 하고 동숭동 교정에 도착하니 7시가 조금 넘었는데 전날 고대사건 이 궁금한 학생들이 일찍 부터 속속 모여들어 8시 30분 정도 되니 정확한 수자는 모르겠으나 6-700명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9시가 좀 지나면서 모두가 흥분한 상태가 되어 문리대 본관에서 부터 정문까지 대오를 갖추고 진군을 시작하려는데 갑자기 이양하 학장님이 나타나셔서 두 팔을 벌리시고 우리 앞을 막고 서시는 것이다( 정문은 이미 학장님의 지시로 수위들이 걸어 닫았다가 학생들이 거칠게 항의를 해서 9시 20분경에는 문을 다시 열은 상태였다). 영문학자로서의 명망은 말 할 것도 없고 조용한 성품에 참으로 인자하셨던 분이어서 그를 존경하지 않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자네들 지금 나가면 크게 다치게 되네!" 뒤쪽에서는 이 상황을 모른 채 밀고 나오 주셨고 훗날 졸업 때는 공로상이란 것도 주셨다). "선생님, 제발 좀 비켜주세요. 정말 시간이 없읍니다". 두 번 세 번 말씀을 드렸으나 선생님은 여전히 두 팔을 벌린 채 요지부동이셨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비켜". 돌변한 나의 태도에 깜작 놀라시며 튕기듯 옆으로 비켜나시었다.고 있었고, 우리는 어떻게 하든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종로 5가 까지는 도착하여야 하는데, 그래도 나는 가급적 조용히 말씀을 드렸다 (이양하학장님은 말썽꾸러기였던 나를 항상 비호해
노흥권 (처음부터 경무대, 지금의 청와대 앞까지 가장 선두에 서서 싸운 인물로 세계적 권위 잡지인 미국의 Life 지의 표지 전면 사진을 장식한 인물임. 미국 대통령도 한번 전면표지를 장식하기가 쉽지 않은 일)의 진술을 토대로 인용 소개를 해야겠다. 데모대가 경찰과 약 50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대치한 순간 갑자지 모든 동작이 멈춘 상태에서 십여 초 간 침묵 흘렀다고 한다.
4.19가 커진 것은 그날 서울대 학생들이 경찰에게 폭행을 당한다는 뉴스가 퍼져 나가면서 시내 각 대학 학생들이 뛰쳐나오고 시민들이 흥분해서 합세하면서 판이 커졌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랑 같지만 사실 타 대학들은 약간의 마찰은 있었으나 경찰과 치열한 전투를 하면서 국회까지 진출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반면 동숭동에서 출발한 서울대 팀은 수의과 대학 앞 전투로 시작해서 동대문 경찰서 (지금의 혜화경찰서) 앞 전투 (가장 치열했던 전투) 그리고 경찰이 최초로 최루탄을 발사한 파고다공원 앞 전투를 치르면서 의사당까지 진출에 성공을 했다
경찰과의 충돌은 계속 되면서 우리의 대오도 둘로 갈라지게 된다. 나를 포함한 일대는 원남동 로터리로, 윤식등 다른 일대는 종로 5가 쪽으로 진출하게 된다. 경찰은 자기들의 저지선이 무너지자 동대문서로 철수를 한것 같았다.
동숭동 전투보다 여기서 더 많은 부상자가 나왔고 윤식 등 여러 친구들이 체포, 연행되었다. 내 경우는 경찰 3,4명이 합세하여 곤봉으로 내려치는데 너무 다급해서 도망을 가야겠는데, 얼핏 보니 동대문서 바로 건너편에 전매청(구) 건물 마당이 훤하게 비어있는 것이 보였다. 무조건 그리로 뛰는데 이들은 나를 체포하는 것이 목적인듯 악착같이 쫒아 오는 것이 아닌가! 무작정 뛰다 보니 막다른 골목 우측에 돌 축대가 있고 그 위로 콘크리트 담장이 있는데 그 높이가 까맣게 보였다. 죽을힘을 다하여 몸을 날려 축대를 차고 계속해서 담장을 뛰어 넘었다 (후일 현장을 찾아 가보니 축대가 2미터, 콘크리트 담장 합쳐 약 4 미터 정도였다). 경찰들은 포기를 한 모양이다. 주
파고다공원 옆 파출소는 이미 파괴가 되어 있었다 이것이 그날 데모대가 벌인 최초의 폭력행사이었을 것이다. 평화적 시위대가 얻어맞고 또 맞다 보니 폭력적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후일 밝혀진 사실이지만 이때에는 벌써 학생들 이외에 과격한 시민들이 상당수 가세한 상태였다. 여기가 세 번째 전투였는데 좀 중요한 의미가 있어 그때 상황을 노흥권의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을 해 보겠다. 데모대가 파고다 공원에 가까이 이르러 보니 또 다른 경찰대원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최루탄을 쏴 대기시작 했다.
을지로 노선을 따라 시청을 지나 의사당으로 갔다. 이 그룹이 제일 먼저 의사당에 도착을 했다. 일단 선두그룹이 빠지니 거리가 생겨 데모대는 마음껏 돌을 던졌다. 모자라는 돌은 시민들 특히 아줌마들이 날라다 주었단다. 시민이 본격적으로 합류를 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야, 저기 법대 여학생도 나왔네" 법대의 홍일점 손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손양을 불렀다. 결국 역사적 4.19 선언문은 손양이 읽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나는 손양을 다시 본 일이 없고 사실 이름도 모른다.
이동복씨는 재학생신분으로 일찍이 한국일보 기자로 활약하고 있었는데, 이날 보도차량 한대를 갖고 나와서 종로에서 부터 데모대를 엄호하기 위해 애를 많이 쓰고 있었다. 누가 와서 이선배가 나를 찾는다고 해 잠시 연단에서 내려오니 이선배가 급히 다가와서 다짜고짜 내 팔을 이끌며 이곳을 잠시 피하라는 것이다. "당신은 오늘 경찰의 체포 대상 1호로 되어 있어 잡히면, 맞아 죽을 수도 있으니 일단 자리를 피하자" 라면서 내 팔을 잡아 이끈다. "어떻게 제가 이곳을 떠날 수 잇습니까?" 라는 나의 항변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기자완장을 찬 웃저고리를 벗어 나에게 입히는 것이다. 난감해 하고 있었는데 주변의 친구들도 그게 좋겠다면서 등을 떠밀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동지들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기자로 가장을 하고 성공회 뒷길로 도망(?)을 쳤다.
지금의 정부종합청사 정도에 다다랐을 때 탕 하는 소리를 시작으로 콩 볶는 듯 한 총소리가 경무대 방향으로 부터 들려오는 것이었다. 총소리에 그만 얼어 빠져 망연자실한 상태로 서 있는데 “와” 하는 소리와 함께 데모군중들이 중앙청 앞쪽으로 뒤돌아 달려오기 시작했다.
서울대가 8,000명 연고대가 3000명 정도 동대, 중대는 2000명 단과대학들은 1000명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데모군중의 수는 계속 불어나고 주로 동대생을 중심으로 보다 과격한 데모 대원들이 바리케이드를 뜯어내고 일부 시민 청소년들이 지프차 트레일러를 끌고 와 바리케이드를 부수자 시위대들이 그 안으로 쏟아져 들어가고 바리케이드 뒤편, 왼쪽 도로변에 위치한 국민대학 학생들이 뛰어 나오기 시작함으로서 당황한 경찰이 소방차 2대를 엔진을 켜 둔 채로 후퇴를 하고 시민 몇 이는 버려진 소방차를 몰고 최후 저지선(경호실소속 경찰, 군인으로 추정됨)으로 돌진한 순간 실탄 발포 명령이 내려지고 조준 사격이 시작되었다고 진술을 하고 있다.
다른 적당한 지면을 찾기가 어려워서, 이날 경무대 앞에서 순국한 우리 서울대 사망자 명단을 적어야겠다. 역시 서울대 학생들의 수자와 선두 위치 때문에 이 자리에서 7명이나 사망을 했다. 대학별로 보면 최다이다. 면면을 보면 문리대의 김치호, 미대의 고순자, 법대의 박동훈, 사범대의 손중근과 유재식, 상대의 안승준, 사대부중의 원일순(당시 14세) 등이고 그 다음으로 동국대에서는 1명의 사망자와 많은 부상자가 나왔다. 이들이 그날, 그순간 최전방에 서서 싸우던 가장 용감한 4.19혁명의 영웅들이다(타대학의 순국자들에 대한 기록은 이미 공지의 사항이라서 이 자라에서는 언급을 안켔다).
이 비극적인 순간에도 웃을 수 밖에 없는 미담(?)이 있어 소개한다. 우리 문리대에는 여학생들이 꽤 있었는데 김옥현이라는 멋을 부리던 불문과 여학생이 있었다. 엷은 화장에 항상 하이힐을 신고 다녔는데, 폭풍이 지나간 후 나를 좀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별장 다방에서 잠시 만났다. 그 멋쟁이 옥현양도 그날 경무대 앞에서 비교적 앞줄에 서서 악을 쓰고 있다 총격이 시작되자 도망을 쳤단다. 앞에 뛰는 남학생들을 따라 진명여고 쪽으로 정신없이 뛰다가 숨이 차서 잠간 섰는데, 어느 남학생이 다가 오더니 무엇을 불쑥 내 밀더란다. 가만히 보니, 자기의 하이힐 한 짝이었다. 자기는 뛰다가 한쪽 신발이 벗겨 진 줄도 모르고, 한 짝만 신고 뛰었는데, 한 문리대 남학생이 그 경황에서도 그 한 짝을 주워서, 돌려주려고 뒤쫓아 온 것이다. 기사도가 따로 없다! 그 학생을 찾아 달라는 부탁이었는데 결국 못 찾았다.
도망해 오는 서울대 학생들을 규합하여 (구) 한국일보 앞에 집결하여 대오를 갖추고 질서정연하게 동숭동 교정까지 행진을 하고 후일을 기약하며 일단 해산을 하였다
4월 25일 교수단데모
음은 교수단 대모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교수단 데모에 관한 사료가 많지 안타지만 사실은 서울대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1971년 유학을 마치고 돌아 온 후부터는 4.19와 관련해서는 거의 활동을 하지 않았고 50주년 때까지는 일체의 기고도 하지 않았다)
4.19 날 당일 학교 캠퍼스에서 해산을 한 후 일단 경찰체포를 우려해 나는 이강준, 김석산과 함께 노량진에 사는 4촌 누나의 집으로 일단 피신을 했다. 이틀이 지나니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어 전화가 있는 친
선언문, 결의문, 프라카드 인쇄 제작 까지는 문제가 없는데 당일 학생들의 호위가 필요하다는 말씀이었다. 이희승선생님을 비롯해서 연세가 높으신 분들이 많으시고, 또 숫자로도 세가 좀 부족할 것 같으니 될수록 많은 수의 학생들이 그날 참여 해 주길 바란다는 요지였다.
200 여명의 교수님들이 잔뜩 긴장 한 상태로 나오시더니 큰 프라카드를 펼치시는데 그 내용을 보고는 우리 모두는 아연실색 입이 딱 벌어졌다.
"이대통령은 즉시 물러가라"
3.15 부정선거 후, 마산으로부터 시작해서 서울의 4.19 까지 학생은 물론 과격시민들 까지도 (데모 중에 한 두사람 예외는 있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무도 공식적으로 이승만대통령 하야를 요구하거나 강하게 개인 이승만을 비난한 일은 없었다. 기껏해야 우리 서울대 선언문애서의 “백색독재 타도" 정도였다. 그만큼 국부로서의 이승만, 애국자 이승만의 카리스마 내지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그의 위치는 대한민국 국민들 속에 확고하게 자리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군중들의 수가 최소 3-4만 명 정도는 되어 보였다. 선언문 낭독과 교수 몇 분의 연설이 끝날 무렵에는 날이 이미 어두워 졌는데 군중들의 수는 계속 늘어나고 일부 시민들은 계엄군을 에워싸기도 하고 일부는 탱크에 올라가기도 했다. 그 당시 계엄군은 절대 중립을 지키고 표정들도 지지도 반대도 아닌 극히 무표정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희승선생님이 나를 부르시더니 혹시 일부 과격한 시민들과 계엄군 사이에 우발적인 충돌이라도 일어난다면 큰일이니 군중들을 해산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말씀이었다.
선생님께서 그 카랑카랑하신 목소리를 최대한 끌어 올려 "이승만은 물러가라"를 외치기 시작하시는 것이다. 일회성이 아니고 막걸리 한모금 안주로는 "이승만은 물러가라" 이었다. 시세말로 대책이 없었다. 겨우 모시고 나와 동숭동 댁 까지 모셔다 드렸다. 이상이 4월 25일 역사적 교수단 데모 날의 나의 일기다.
4 19 전국학생대책회의
마지막으로 4월 25일 이후 학생들의 활동을 내 경험만을 토대로, 내가 느끼고 본 것 중심으로 간략히 소개코자 한다. 교수단 데모가 끝난 후 26일 정확히 어떤 경로로 통고를 받았는지는 불분명한데 낙원동 소재 정치대학 (지금의 건국대학교 전신)에 서울에 위치한 종합대학교와 단과대학 학생대표들이 모였다
"여러분, 지금 하야하신 이승만 대통령께서 이화장으로 관용차를 탈 수 없다며 걸어가시고 있다. 우리 모두 나아가 환송을 해드리자" 라고 외치는 것이다. 회의장이 술렁거렸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이박사 문제에 개인적으로는 그리 각박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은 좀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박사의 퇴진은 우리의 주장이었고 불과 1 주일 전에 무려 200명 (그 때는 정확한 사망자 수자가 나오자 않고 있던 때) 이 바로 그 자리에서 꽃다운 목숨을 잃었는데 지금 우리가 나아가서 박수를 친다? 이것은 아니라는 취지의 반박을 해서 겨우 진정을 시켰다.
미국 측과의 협의 내지 메시지는 계엄군의 정치적 엄정중립과 군정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반면 자유당정권의 실세들의 입장에서는 송요찬 계엄군의 비호 내지 지원이 없이는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결론적으로는 미국의 개입이 자유당 정권의 몰락 내지 항복을 이끌어 냈다고 말해도 무방 할 듯 싶다. 그래서 김운용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자유당의 많은 실세들이 송장군에게 전화를
즉 4월 19일 데모대의 일부가 신문사 앞을 휩쓸고 지나가는데 일부 과격 학생 등이 이 빌딩에 불을 지르려했다. 그때 고대학생 몇몇이 나서서 말렸다는 것이다.
기억에 남는 모임은 미국대사관으로 점심 초대를 받은 자리였는데 당시 대리대사였던 Marshall Green (Groton고, Yale대 출신의 정통 국무성 관료)이 호스트를 했다. 이번에도 대책위 멤버 전원이 아니고 10명 정도만 참석했는데 이때는 이미 이박사 하야와 계엄사의 배후에는 미국이 있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 되어 있었다. 특히 월터 맥카나기대사와 이박사의 1시간여의 비밀회동에서 주요 사안 대부분이 이미 결판이 났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지금의 USIS 건물이 당시 미국대사관이었는데 그 1층 식당 같은데서 만났다.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정치적으로 특별한 내용은 없고 주로 민주주의와 사회질서의 중요성 같은 일반적인 이야기와 학생들이 이룩한 위대한 업적을 높이 평가한다는 외교적 수사가 전부였던 것 같다.
지금도 시청, 광화문, 청와대 앞을 지날 때마다 그 날의 감회에 젖기도 하는데, 그 때마다 180여명의 꽃다운 청춘들이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깊은 연민과 죄책감을 느끼곤 한다. 우리 주동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가운데 죽은 사람은 한명도 없는것 같아서.
– 끝 -
출처 : 대학신문(http://www.snu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