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효유(方孝孺)
1357년 - 1402년 / 향년 46세
중국 명나라 초기의 유학자. 절강성 영해현 대가하진 계상방촌(현 닝보시 의 일부) 출신으로 자는 희직(希直) 또는 희고(希古) 이고 호는 손지(遜志)이다. 별칭으로 구성선생(緱城先生), 정학선생(正學先生)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원말 명조에 활동한 송염의 문하로 들어가 뛰어난 재주를 널리 알리면서 유명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연왕 주체가 조카인 건문제의 황위를 찬탈하기 위해 정난의 변을 일으켰고, 쿠데타를 성공시킨 주체는 황제로 즉위한다. 정난의 변 이후 거대한 피바람이 몰아쳤는데 건문제의 최측근이던 황자징(黃子澄)은 영락제에게 욕을 얻어먹고 책형을 당했고 제태(齊泰), 철현(鐵鉉) 등 건문제 편을 들었던 많은 신하들이 사형을 당했다.
방효유도 이 때에 처형될 뻔했지만 영락제의 최측근인 요광효가 만류하면서 방효유를 불러들여 즉위조서를 쓰게 하려고 마음먹고 방효유를 불렀다. 도착한 방효유를 영락제가 달래면서 일을 진행시키려 했지만 올때부터 울상이었던 방효유는 전각의 섬돌을 걷어차 치워버렸다.
영락제는 주나라의 주공 단의 예를 들며 자신은 어진 정치를 행하겠다고 말했는데, 방효유는 눈물을 그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정난의 변 과정을 보면 알다시피 건문제는 남경이 함락된 후 궁궐이 불타면서 행방불명되었다. 방효유는 주공 단의 섭정 정치[4]을 비틀면서 영락제를 디스한것. 영락제는 당황했는지 불타서 죽었다고 대답했다. 훈훈한 일화가 조카를 불태워버린 패륜 일화가 된 순간(...)
이후 방효유는 성왕이 없으니 성왕의 자손, 하다못해 성왕의 형제를 옹립해야한다고 우회적으로 영락제를 디스했고 영락제는 집안 일이니 참견말라는 궁색한 변명을 하면서 빨리 조서나 쓰라고 방효유를 협박했다. 그러나 방효유는 연나라의 도적이 제위를 찬탈하다(燕賊纂位)라는 글만을 적어내어 영락제를 모욕했다. 이에 제대로 분노한 영락제는 방효유를 책형으로 처형시켰다. 향년 46세이다.
그리고 방효유의 일족도 이때 화를 입어 수백명의 방효유 친족들이 방효유가 보는 앞에서 주살당했다고 명사 방효유전에 기록되어 있다. 보통은 구족만을 멸하게 되어 있는데 분노한 영락제는 여기에 친구와 제자, 가까운 사람들을 합쳐 십족을 만들어 멸했다. 사실 영락제는 구족을 멸하겠다고 협박했는데, 방효유는 눈 까닥하지 않고 "구족이 아니라 십족이라도 좋다."라고 되받아쳤다.
그의 친족이 아니면서 가까운 사람들은 순전 방효유의 도발 때문에 죽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듯하다. 다만 이때 300명에 가까운(일설에는 267명) 명단이 작성되었는데 방효유와 꽤나 가깝게 지낸 사람이 이후로도 행적이 멀쩡히 남아있는 사람이 많아서 실제로 처형당한 사람은 가까운 친척등 소수였으며 십족이라는 말이 널리 퍼진 것은 다른 권신들에 대한 경고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중국 내에서는 기개와 절개, 충심이 대단한 선비라고 칭찬하거나 혹은 자신의 고집으로 인해 친족과 지인들이 무참히 처형되게 한 고지식한 선비라는 평이 있다. 다만 십족을 멸살했다는 이 에피소드에 대해서는 이론도 있다. 방효유를 처형한 것까지는 역사적 사실이 맞지만 가족까지 몰살시켰다는 것은 과장이라는 것이다.
십족 멸살에 대한 일화는 청나라 초기 장가화(張嘉和)가 쓴 황명통기직해(皇明通紀直解)라는 사찬사서에 보이는 정도이고, 정작 명 왕조의 정사인 명사 방효유전과 명실록, 작중지(酌中志) 등 명나라 관련 사료에서는 관련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아무리 역적이라지만 직계가 아니면 손대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고, 직계도 성인 남자만 사형. 나머지는 노비로 삼는 것으로 그쳤으며, 특히 명사는 명 왕조의 공식 역사 즉 정사인 동시에 명 왕조를 멸망시킨 정복왕조 청에서 편찬한 사서다.
대놓고 반역을 모의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황제의 심기를 거스른 죄로 한 사람의 일족이 몰살당한 흑역사가 있었다면 어떻게든 전 왕조의 흠결을 드러낼 필요성이 있었던 청 왕조에서 당연히 놓칠 리 없다. 때문에 현대에서는 방효유의 십족 멸족에 대한 일화를 부정하는 시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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