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에서 주위를 조망하는 짧은 동안에도 사람들이 계속 정상을 올라왔다. 일출을 기다렸다. 구름 속에서 갑자기 해가 나타나자 우리는 돌아섰다. 우리는 더 머물래야 더 머물 수가 없었다. 자리를 양보하듯 정상에서 내려와 하산을 시작한 것이 06시 20분이었다.
사진 41. 키나발루 정상 로우스 봉에서 일출을 기다리며 (촬영 : 전은순)
사진 42. 키나발루 정상 로우스 봉에서 일출을 보며 (촬영 : 김정호)
내려오는 길도 편하지가 않았다. 숨이 차거나 힘이 들어서가 아니다. 오를 때보다 사면이 더 급하게 느껴졌다. 큰 바위덩어리가 산재하는 너덜 지역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서기에 여간 위험하지가 않았다. 나는 기듯이 자세를 낮추고 앞 서 가는 일행을 애써 따라가려 하지 않았다. 이번 산행에서 나는 앞서 가는 일행을 애써 따라가지 않기로 작정한 것이다.
사진 43. 하산하며 세인트 존스 봉을 배경으로 (촬영 : 신현옥)
사진 44. 하산하면서 키나발루 정상 로우스 봉을 등지고 (촬영 : 미상의 외국인)
평평바위의 광활한 화강암반(花崗巖盤)이 나타났다. 플라토라고 한다. 밝은 눈에서 보는 광경은 지구가 아닌 어느 혹성의 세계 같은 착각을 할 정도였다. 부산에서 금정봉을 오른 적이 있는 사람은 금정봉에 다다르기 직전에 너럭바위를 지나간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런 너럭바위가 온 산을 덮고 있다 상상하면 된다. 멀리 시야를 옮기자 바다가 보였다. 남지나해이다. 짙은 파랑색이다. 내가 고교 시절에 입던 하계 교복 상의가 새파란 인디고 색이다. 바다가 바로 그 밝은 인디고 색으로 펼쳐져 있었다. 정상으로 가는 방향으로 일직선으로 암반 위를 달리는 밧줄을 따라 잰걸음으로 단숨에 내려 왔다.
사진 45. 하산 길에서 내려다 본 남지나해의 원경(촬영 : 김정호)
사진 46. 좌측의 정상으로 가는 길을 인도하는 밧줄(촬영 : 김정호)
사진 47. 화강 암반을 따라 하산하면서 (촬영 : 신현옥)
사진 48. 하산 길에 키나발루 남봉을 바라보며 (촬영 : 전은순)
07시 20분에 사얏사얏 체크포인터를 통과하였다. 사얏사얏 체크포인터에서 또 신고를 하였다. 07시 27분에 7KM 지점을 통과한 후 하산 길은 한층 경사도를 더했다. 낭떠러지에 당도하였다. 밤에 오를 때는 몰랐지만 조금 발을 헛디디면 낭떠러지로 자유낙하할 것 같았다. 오른 쪽에 밧줄을 잡고 왼쪽에 절벽 아래를 흘금흘금 보면서 통과하였다.
사진 49. 하산 길에서 위에서 내려다 본 사얏사얏 체크포인터(촬영 : 김정호)
사진 50. 하산 길에서 사얏사얏 체크포인터를 등지고 (촬영 : 신현옥)
군팅라가단에 귀환한 것이 08시 50분이었다. 숙소에서 정상까지는 불과 2.5KM를 조금 초과하는 거리이다. 지난밤에 등정하는 데 정확하게 3시간 18분 소요된 행로를 하산에는 2시간 30분이 걸렸다. 오를 때 어두워서 보지 못한 주변 경관을 구경하는 둥, 사진을 찍는 둥 여유를 부리며 내려온 탓도 있지만 하산이라 생각하여 이보다 빨리 내려올 수도 있었는데도 시간이 꽤 걸린 것은 암반으로 된 급사면이 위험하여 하산도 승산(昇山) 못지않게 힘들었기 때문이다. 산행 가이드가 일행 중에서 가장 연장자라고 염려한 때문인지 나에게 다가와서 웃으면서 “콘그레추레이션!” 하고 등정을 축하하여 주었다. 나는 빙긋이 웃으면서 V자 손가락을 흔들며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그리고 회장님과는 하이파이브로 살짝 자축하였다. 새벽에 등정을 포기한 일행이 세 명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 51. 하산 길에서 돌아본 군팅라가단의 등정 산행 입구(촬영 : 김정호)
군팅라가단에 도착하자 바로 짐을 꾸렸다. 군팅라가단에서 우리가 귀환하는 것을 지키고 있던 포터는 얼른 짐을 받아 같이 라반라타로 내려갔다. 라반라타에서는 이미 등정을 끝내고 온 사람들이 아침을 먹고 있었다. 우리는 어제 저녁을 먹었던 그 자리를 그대로 차지하였다. 메뉴는 기본이 어제와 별반 다름이 없었고, 계란 후라이, 콘프레이크, 우유가 추가되었다. 우리가 늦게 식사를 시작하여서인지 계란 후라이가 금방 동이 났다. 미리 계란 후라이를 챙기지 않은 나는 그로부터 식사가 끝날 무렵이어야 계란 후라이를 접할 수 있었다. 서둘러 익힌 탓인지 약간 탔다. 여성 동지가 또 김치 주머니를 풀었다.
식사를 마치고 틈을 내어 화장실에서 대충 세면을 하고 이를 닦았다. 하산을 앞두고 쉬는 동안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제법 빗줄기가 굵은 것이 창문을 때렸다. 비가 멎기를 기다렸다.
비가 개이자 09시 30분에 우리는 라반라타를 출발하였다. 우리가 하산을 서둘자 다른 곳에서 식사를 하였는지 안 보이던 포터가 바로 나타나서 배낭을 메었다. 10시 00분에 5.0KM 지점(해발 3,001M), 10시 13분에 4.5KM 지점(해발 2,898M), 10시 29분에 4.0KM 지점(해발 2,75M)에 도착하였다. 4.0KM 지점은 우리가 어제 산행한 메실라우 루트가 팀폰 루트와 합류하는 지점이다. 우리는 여기서 좌측으로 꺾지 않고 직진하였다. 팀폰 루트를 택한 것이다. 10시 50분에 3.5KM 지점(해발 2,634M), 11시 09분에 3.0KM 지점(해발 2,455M), 11시 19분에 2.5KM 지점(해발 2,350M), 11시 31분에 2.0KM 지점(해발 2,252M), 12시 06분에 1.0KM 지점(해발 2,039M), 12시 21분에 0.5KM 지점(해발 1,935M), 12시 30분에 팀폰 게이트(해발 1,866M)에 도착하여 나는 산행을 종료하였다. 라반라타를 출발하여 여기까지 오는 데 정확하게 3시간이 걸린 것이다.
포터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산 길을 동행하였다. 중간 중간에 설치된 쉼터 중 두 군데에서 짧게는 3분 길게는 12분을 휴식한 것을 제외하고 계속하여 직하(直下)하였다. 급사면의 계단 길이 계속되었다. 내려와서 들었지만 팀폰 게이트에 가까워서 여성 동지들이 몸길이 1m 정도의 뱀을 만나 혼비백산한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사건이 없었다. 등산객들이 계속 올라왔다. 말레이시아인이라고는 산행 가이드와 포터를 제외하고는 보이지 않았다. 하산은 급경사를 따라 계단길인 데다가 무엇보다도 너무 단조로웠다. 팀폰 게이트에 가까워서 우측에 조그마한 폭포가 유일한 변화이었다. 높은 고도인데도 시야가 전혀 확보되지 않아 지루하기만 하였다. 노고단 산장에 조금 못 미쳐 코재에서 구례 화엄사로 하산하는 길과 진배없었다. 우리가 당초에 계획한 팀폰 루트를 버리고 메실라우 루트를 따라 등반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음을 하산 길에서 알았다.
사진 52. 하산 길에서 본 작은 폭포(촬영 : 김정호)
급경사의 계단 길이 이어지는 하산에서 우리 일행은 선두와 후미 간에 상당한 격차가 났다. 팀폰 게이트에는 내가 일행 중에서 중간으로 도착하였다. 지난밤에 등정을 포기한 일행들 모두가 하산 길에서는 활발하였다. 고소 증세의 특징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팀폰 게이트에서 마지막 후미가 도착한 것은 12시 50분이었다.
사진 53 팀폰 게이트 입구에서 (촬영 : 신현옥)
후미를 기다리는 동안에 팀폰 게이트를 둘러보았다. 한 게시판에 키나발루 산악 마라톤의 경기 결과가 적혀 있었다. 매년 되풀이 되는 국제 행사인 것 같았다. 놀랍게도 팀폰 게이트를 출발하여 키나발루 정상에 갔다가 팀폰 게이트로 귀환한 기록을 보니까 선두가 2시간 50분대이었다. 가히 철인이었다.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놀라운 기록이었다.
사진 54. 키나발루 산악 마라톤 경기 결과(촬영 : 강용주)
후미가 도착하고 출입구 입산 관리소에 하산 완료 신고를 한 지 시간이 꽤 지나가건만 우리를 태우고 메실라우 산장으로 갈 차가 나타나지 않았다. 차를 기다리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조금 내리다가 말겠거니 생각하였으나 빗줄기가 제법 굵었다. 지붕 아래로 가서 비를 피하였다.
곧 그칠 것으로 여긴 비가 계속 내렸다. 이제부터는 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참말로 우리의 키나발루 등정은 그때마다 아슬아슬하게 비를 피한 것 같았다.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어라” 라는 소설을 보면 아내와 이별하는 날, 전투에 패하고 탈주하는 중에 포로가 된 전우가 총살을 당하는 날, 어렵게 만난 아내를 만나 전장을 탈출하여 스위스로 피신하는 날, 스위스에서 아내가 해산(解産) 중에 사망하는 날에 어김없이 비가 왔다. 이 소설에서 작가가 비를 상징적으로 사용한다는 비평을 읽은 적이 있다. 키나발루 등정에서는 비가 항상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녔지만 결코 나를 괴롭히지는 않았다. 이는 나의 고산등정사(高山登頂史)에서 무엇을 상징할까 생각하였다.
차를 기다리는데 관광객이 연신 도착하였다. 노인 부부들로만 구성된 외국인 단체도 보였다. 연간 20만명 가까이가 외국에서 이곳 키나발루 국립공원을 방문하고 그중에서 극히 일부만이 카나발루를 등정한다고 한다.
말레이인으로 보이는 세 명의 청춘남녀가 자가용을 타고 나타난 것이 유달리 나의 관심을 끌었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 하나에 여자 둘이었다. 한 여자는 가슴과 배꼽을 들어내고 무릎 위를 한참이나 올라간 치마를 입었다. 우리 남정네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게 아슬아슬하였다. 나는 이를 보고는 내가 이제 속세로 돌아왔다고 생각하였다. 동행한 다른 여자는 히잡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이슬람교가 성하면서도 자유로운 말레이시아의 한 단면을 본 것 같아 흥미롭게 두 여인이 떠날 때까지 계속하여 이들을 지켜보았다. 이들이 떠날 때 그 아슬아슬한 여성이 조수석에 자리 잡고 히잡의 여성이 뒷 자석에 앉는 것까지도 나에게는 의미심장하였다. 우리 일행에서 여성 동지 한 명이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 남정네들을 빈정대었다. 나는 작년에 백두산을 함께 등정한 여성 동지에게 저런 나이에 저런 몸매를 하지 않았느냐고 변명하듯이 물었다.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수긍하였다.
12시 55분에 두 대의 승용차에 분승하여 메실라우 산장을 향해 팀폰 게이트를 떠났다. 메실라우 산장에서부터 계속 동행한 현지 산행 가이드가 별도의 차편으로 가다가 도중에 팀폰 국립공원 사무실에 들려 키나발루 등정 증명서를 가지고 왔다. 뒤에 호텔에 돌아가서 차두리 군으로부터 수령하였다. 내 이름과 일자가 명시되어 있었다. 등정에 성공한 사람과 그러하지 아니 한 사람과는 색깔이 다르다 한다. 등정을 하지 못한 사람은 실제로 산행한 최고 높이의 지점을 명시한다. 이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나는 차마 보여 달라고 하지 못하였다.
사진 55. 키나발루 등정 증명서
메실라우 산장에 도착한 것이 14시 05분이었다. 우리 보다 조금 뒤에 포터가 도착하였다. 포터에게 짐을 맡긴 일행들이 의논을 하였다. 그 동안의 포터들이 보인 순박함과 성실함과 책임감을 우리는 외면할 수 없었다. 차두리 군의 조언을 따라 배낭을 받으면서 사례(謝禮)를 하였다. 나는 10링기트를 썼다. 포터는 감사해 하며 정중하게 받았다. 참말로 성실한 청년이었다. 조금도 나를 불편하게 한 적이 없었다. 항상 나와 같이 동행하면서 나의 상태를 살폈고 내가 필요한 시간에 그리고 편리한 장소에 배낭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짐을 건네받으면서 사례를 한 것은 결코 한국 가이드의 조언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감사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제 아침에 산행을 시작하면서 메실라우 산장에 맡겼던 짐을 찾았다. 어제 아침부터 우리를 인도한 현지 산행 가이드와 작별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산장을 출발한 것은 14시 15분이었다. 그때까지도 포터는 기다렸다가 버스가 출발하자 손을 흔들었다. 나도 차창을 통해 미소로 손을 흔들며 답례하였다.
버스는 숲 속의 능선 길을 따라 달렸다. 엊그제 공항에서 오던 길 같지는 않았다. 계속하여 고도가 내려갔다. 오는 도중 13시 30분에 중국 식당에서 점심을 하였다. 등정을 완수하였다는 성취감에 우리는 즐겁게 그리고 여유를 부리면서 식사를 하였다. 내가 기분이 좋아 계획에 없던 맥주를 사서 일행들에게 돌렸다. 우리나라에서 한 때 나돌던 칼스버그 맥주였다. 단숨에 잔을 비운 것은 목이 말라서만이 아니었다. 여느 때처럼 여성 동지들이 김치를 푼 것은 물론이다.
코타키나발루 해변 가의 호텔에 도착한 것이 15시 정각이었다. 무더웠다. 샹그리라 호텔이었다. 버스가 멈춘 차도(車道)와 호텔 입구 간에 계단이 있어 버스에서 풀은 짐을 옮기기가 거북하였다. 호텔 종업원이 얼른 카터를 가지고 와서 우리의 짐을 모두 실어 옮겼다. 나에게는 혼자 방이 배정되었다. 방에 들어서자 거리낌 없이 산행의 땀에 절인 옷을 홀랑 벗고 샤워를 하였다. 그제야 나는 산행을 끝냈다는 기분이 들었다.
사진 56. 마지막 밤을 보낸 샹그리라 호텔 (촬영 : 김정호)
여름철 복장을 하고 가볍게 호텔을 나섰다. 16시 20분이었다. 저녁 식사를 하기에는 좀 이른 시간이었지만 마냥 침대에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텔을 나오면서 나는 인천국제공항 면세점에서 산 양주를 들고 나왔다. 21년산 양주이다. 내 딴에는 기분을 낸 것이다. 우리가 안내된 곳은 옥호(屋號)가 아리랑인 한국 식당이었다. 두 테이블에 나누어 자리를 잡은 우리는 말레이시아에서 처음 받는 한국음식상에 입을 맡겼다. 내가 가져간 양주를 다 마시고도 모자라 회장님이 한국에서 가져온 소주를 건드려야 하였다. 물론 여기서도 여성 동지들이 가져 온 김치를 즐겼다. 식당에서도 김치가 나왔다. 맛이라고는 없었다. 젓갈의 풍미(風味)가 전혀 없었다.
사진 57. 아리랑 식당에서 등정 성공을 자축하며 (촬영 : 신현옥)
식사를 마치고 야시장에 들려 말레이시아의 풍물을 구경하였다. 생선 가게도 있었다. 가다랭이를 토막 내어 팔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 왔다. 해양생물은 내 전공이지만 일부러 관심을 주지 않기로 하였다. 한국과는 다른 다양한 해산물이 판매대에 진열되어 있었지만 건성으로 지나쳤다. 나의 목적은 말레이시아의 해양생물상(海洋生物相)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코타키나발루를 떠나기 직전에 사바 주립대학의 해양박물관을 들렸을 때도 그러하였다. 나는 속계(俗界)의 일상(日常)을 떠나온 것이다.
국내에서도 내가 산행하는 날에는 항상 그러하다. 면도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핸드폰마저도 끊어버린다. 속계(俗界)와 선계(仙界)를 분명히 구별하는 것이 내 신조이다. 높은 곳에는 뫼(山)가 있고 낮은 곳에는 골짜기(谷)가 있다. 산은 높아도 여전히 산이지만 골짜기는 넓어지면 평야가 되고 평야에는 마을이 형성된다. 산에 있는 사람은 선(仙, 뫼 山에 사람 人 변)이고 골짜기에 있는 사람은 속(俗, 골짜기 谷에 사람 人 변)이다. 내가 산행을 즐기는 것은 잠시라도 좋으니 속계를 벗어나 선계에서 마음을 비우고 싶어서이다.
호텔로 돌아와서도 우리 남성 동지들은 회장님의 방에서 남편과 같이 온 두 분의 부인이 동석하는 자리를 마련하여 술을 계속하였다. 술은 자정을 지나 새벽 1시에야 끝났다. 나는 평소에 비해 좀 과음하였다.
2007.01.16(화)
아침에 호텔에서 조식을 마치고 우리는 09시에 사피라는 섬에 갔다. 해수욕을 즐기면서 시간을 보내고 14시에 호텔로 돌아왔다. 샤워를 하고 바로 호텔을 나섰다. 시내를 돌며 관광을 하면서 귀국 길에 오르는 비행기를 탈 때까지 시간을 매웠다
사진 58. 사피 섬으로 가는 쾌속 보트에서 좌청룡 우백호와 함께 (촬영 : 신현옥)
샹그리라 호텔을 나와 사피라는 섬으로 가는 쾌속 보트에서 나는 멀리 키나발루의 원경(遠景)을 보았다. 산군(山群)이 실루엣처럼 펼쳐지는 곳에서 키나발루가 사다리꼴 모양으로 우뚝 솟아 있었다. 발군(拔群)의 높이이었다. 산의 정상부는 구름에 덮여 보이지 않았다. 차두리 군에 의하면 구름의 상태로 보아 지금 정상부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다. 나는 카메라에 담을 수 있을까 긴가민가하면서 샤터를 눌렀다. 보트가 심히 흔들려 제대로 초점을 잡았는지 염려가 되었다. 그래서 세 번이나 찍었다. 이것이 말레이시아에서 내가 본 키나발루의 마지막 모습이 될 줄 몰랐다. 사피 섬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열심히 찾았지만 산의 모습은 구름에 완전히 매몰되어 있었다. 있는 곳의 방향조차도 가늠할 수 없었다. 이렇게 나는 키타발루와 헤어졌다.
사진 59. 사피 섬으로 가는 바다에서 바라본 키나발루 원경 1 (촬영 : 강용주)
사진 60. 사피 섬으로 가는 바다에서 바라본 키나발루 원경 2 (촬영 : 김정호)
2007.01.19(수)
귀국의 비행기는 코타키나발루를 00시 55분에 이륙하여 새벽 07시 13분에 인천국제공항에 안착하였다. 그러나 짙은 농무(濃霧)로 부산으로 가는 항공편에 정시에 환승(換乘)하지 못하고 발이 묶이기를 네 시간 끝에야 비행기가 이륙하여 14시 40분에 김해공항에 도착하였다. 귀국하는 항공기 안에서 날자가 변경되는 바람에 3박 5일만의 귀향이 되었다. 키나발루를 등정하는 데 성공하여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였으니 인천에서의 네 시간의 체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위로하였지만 키나발루 등정이 의외로 수월하였던 만큼 늦은 귀향이 약간은 짜증스러웠다.
밤에 나는 잠을 청하면서 생각하였다. 키나발루는 힘들어 하는 나를 마냥 안아 주었다. 나의 나이를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내가 염려한 것이 부질없는 기우(杞憂)임을 막상 만난 그녀는 깨닫게 하였다. 내가 움직이는 동안에는 비를 그리고 바람을 그리고 추위를 자제하였다. 내가 이제 좀 쉬고 싶다 할 때에 물과 휴식을 주었다. 그녀는 내가 내 발로 이국(異國)에서 처음으로 등정한 고산이다. 그런 점에서 키나발루는 나의 고산 등정의 첫사랑이다.
키나발루는 4,000m급의 산이다. 이제 나는 5,000M 급의 고산을 찾는다. 그리움은 벌서 킬리만자로로 날라 가서 정상에 머물고 있다. 나는 킬리만자로의 정상에서 헤밍웨이가 그토록 찾던 표범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금년 여름에 기필코 볼 것이다. 끝.
4. 짐꾸리기
첫댓글 3년전 백두산 서파-북파종주의 감흥이 아직도 선합니다..이제 저도 계획을 잘 짜 보아야겠습니다.. 우선 3월에 일본 구주산 다녀오고요ㅛ..
회장님, 졸문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작년 여름에 백두산을 갔다 온 감흥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매우 울적하였습니다. 지금은 남의 나라가 차지하고 있는 땅을 통해서 몽매에도 그리던 백두산을 간다는 현실이 가슴 아픈데다가 압록강을 따라 이어지는 우리 고대사의 흔적들이 너무도 한스러워 몰래 눈물을 감추어야 하였습니다. 백두산 등정기를 쓰다가 미완으로 두었습니다. 통일이 되거나 통일까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남과 북이 한 마음이 된다면 당당하게 등정하려고 합니다. 그때는, 항선 아우님, 같이 또 갑시다.
배낭 꾸리기 장난 아니네요..저 많은것을 어떻게 다 가지고 가셨는지..등정 증명서 신기합니다..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좌청룡 우백호"가 가장 인상적입니다.....좋으셨겠습니다.. 근데 사모님께 혼좀 나시겠는데요
키나발루보다 이 사진이 더 인상적이란 말씀이십니까? 혼은 꺼리낀 적이 없습니다. 내 나이에 이것이 애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굉장하십니다.
완주하신 강고문님의 열정에 8기의 정열을....
^^배꼽은 완벽하게 처리하셨네요 큰형님. 멋진 모습, 아름다운 자연 잘 보았습니다. 건강하고 무사시 등정을 마치신것 다시한번드립니다.
밤이 늦었는데도 전화를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동하면 용천지맥이나 영축지맥을 같이 산행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