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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6:1-3(1261) 여호와께 돌아가자 2025.1.5
2025년 이 한해를 시작하면서 교회 표어로 정한 말씀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자'입니다. 성도는 때와 상황과 환경과 처해 있는 여건에 구애 받지 말고 항상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도 같은 맥락입니다. 아울러 성도는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또한 성령 하나님이 이끄시는 인도함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돌아간다는 것은 목표가 정해져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가야할 방향을 알고 정확하게 움직이는 것이 올바르게 돌아가는 모습입니다.
술에 만취한 사람이 갈지자 걸음을 걸으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성도는 여기저기 갈지자 걸음을 걸으면서 하나님에게 나아가고 돌아가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목적을 두고 돌아가는 모습이 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는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어리저런 세상이지만,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에게만 돌아가는 이 한해의 모든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조현병이라 불리는 질병이 있습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정신분열증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조현병(調鉉病)’이란 용어는 2011년에 정신분열병(정신분열증)이란 병명이 바뀐 것입니다. 정신분열병(정신분열증)이란 병명이 사회적인 이질감과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편견을 없애기 위하여 개명된 것입니다.
온전한 사고방식을 가지지 못하고, 정신이 분열된 사람들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정신과 전문 의사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와 비슷한 말을 많이 합니다. ‘이상하게도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환자들은 모두가 매우 심각한 자기중심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정신병 환자가‘나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병실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니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병실에 입원해 있던 다른 정신병 환자가 ‘네가 어째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냐? 넌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이 바른 말을 한 것이지요.
이 상황을 지켜보며 깜짝 놀란 간호사가 바른 말을 한 환자에게 ‘왜 저 사람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아니라고 생각하느냐?’라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올바른 말을 한 이 사람이 같은 병실에 누워 있는 다른 사람을 가리키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누워 있는 저 사람이 이 사람을 대통령이라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누워있는 환자는 아무런 인지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기에, 순식간에 간호사들이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정신분열증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자신이 대통령이라 말하면서 고래고함을 지르는 사람도 비정상입니다. ‘너는 대통령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나름 정상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이 대통령으로 인정을 안했으니 나도 안하겠다는 무논리적인 모습으로 이 사람도 비정상입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정상적인 사고 판단을 하지 못하니 정신병동에 갇혀서 치료를 받는 신세인 것입니다.
그냥 정신병동에서 치료 받고 있는 정신 나간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무시할 수도 있지만, 이 이야기에서 한 가지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저마다 잘난 것입니다. 정신병자는 자기 지식이 언제나 옳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정상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주장을 내세울 때도 있지만,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경청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어린 아이일수록, 철이 없는 아이일수록, 자신의 말만하고 자신의 주장만 내세웁니다. 부모님의 말을 따르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에 관철되지 않으면 때를 쓰면서 행패를 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두가 어린아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인은 달라야 합니다. 다 큰 성인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지 못했다고 해서 바닥에 드러누워 뒹굴면서 생떼를 부리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과연 우리들은 하나님을 믿는다 말 하면서 지금 어떠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또한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내 마음대로 생각하며, 하나님이라면 이런 하나님이여야 한다’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내 좁은 생각과 판단 속에 가두어 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면 참으로 큰 문제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면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 갈 수 없습니다. 설령 하나님이 나에게 다가와 내 안에 내주하신다고 하더라도, 내 고약한 습성과 심성을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고역이 될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범죄한 아담이 에덴 동산에 숨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찾아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찾아 질문을 던집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숨어 있는 아담을 찾지 못하여서 ‘아담아 너가 어디에 숨어 있느냐?’라고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너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말씀을 하자, 아담이 어떻게 대답할까요?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아담이 내뱉은 이 말은 올바른 답변이 아닙니다. 지금 아담은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먹고 숨어 있는 상태입니다. ‘내가 두려워서 숨어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답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듣고 싶어 하는 답변은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이 대답을 듣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내가 여기 숨었나이다’라는 말로 자신의 범죄에 대해 변명만 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끝입니다. 여기에는 구원의 길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용서받을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복 받을 길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나라 속담 중에‘길이 아니면 가지를 마라(非路不走)’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때에 사용하는 말인가요? 이 속담이 주는 의미는 ‘옳지 않은 일에 가담하거나 귀 기울이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젊은 시절 인생에 대해서 잘 모를 때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에 넘어가, 나쁜 친구들을 사귀어서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청소년들이 종종 있습니다.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잘못된 길이라고 판단이 되어 진다면, 그 길에서 바로 돌아서 나와야 합니다.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잘못된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돌아서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그 길로 간다면, 그 길의 끝에는 패망 밖에 없습니다.
신앙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길이 아닌 곳으로 내가 잘못 가고 있다고 성령께서 깨우쳐 주신다면, 조금도 망설이지 말고 되돌아서야 합니다. 그렇게 돌아서서 하나님이 원하는 길로 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살 수 있으며, 그렇게 하나님에게 돌아가야만 암울한 인생이라 하더라도 희망이 있는 법입니다.
1. 돌아가야 하는 목적지는 하나님 뿐입니다.
1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1절의 말씀은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살아가는 인생의 행동에 대해 잘 설명해 주고 있는 매우 귀한 말씀입니다. 인생이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인생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매우 명쾌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어디로 돌아가자고 성경은 말하나요?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에게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라고 말할 때, 앞에 반드시 붙어야 되는 수식어가 <반드시>라는 단어입니다.
따라서‘반드시 하나님께로만 돌아가자’입니다. ‘여기저기 목적과 방향을 여러 개 만들어 놓고,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그러다가 안 되면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된다’라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인생이 시작되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고 출발해야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에도 하나님께만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오로지 하나님께로만 돌아갈 때에 성공하는 인생을 살아 갈 수 있다는 점을 절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기저기 목적 없이 헤매이면서 들쑤시고 다니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생물학자들은 개미 연구를 하면서 흥미로운 점을 밝혔다고 합니다. 산이나 들판에 나가면 매우 분잡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수많은 개미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개미들이 집을 나와서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다니는 동선을 보면, 여기저기 마구잡이로 움직이는 것 같아서 매우 혼잡하고 불규칙적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먹이를 발견한 개미를 여기저기를 헤매지이지 않고 바로 개미굴로 나아가는데, 이때 먹이를 찾은 개미의 동선은 똑바로 나아가는 직선이라는 것입니다. 오로지 자신이 나온 개미집으로 일직선으로 갑니다. 그렇게 똑바로 돌아가서 다른 동료 개미들을 몰고 와서 먹이를 집으로 옮긴다는 점입니다.
헬라어로 떠돌이 또는 방황을 의미하는 단어가 알레티사(αλητισσα)라고 합니다.
헬라어로 진리를 말할 때, 알레테이아(ἀλήθεια)라고 합니다. 여기저기 헤매고 돌아다니는 방황과 진리의 차이가 있다면, ‘돌아갈 곳이 있느냐? 없으냐?’의 차이점입니다. 돌아갈 곳이 없으면 아무리 똑바로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그 모습은 방황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모든 성도는 천국이라는 돌아갈 집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여기저기 헤매이거나 방황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내가 믿고 따라가야 하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세사랑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여러 해 전에 있었던 실화라고 합니다. 미국 마이애미 해변에서 호화 요트 한 척이 갑자기 침몰하면서 해안 구조대에 SOS 구조 신호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 때 구조대 통신원이 긴급 구조요청 전화를 받으면서 현재의 위치를 알려달라고 말을 합니다. 영어로는 ‘What is your position?’라는 말을 합니다. 몇 번이고 ‘What is your position?’말을 하였지만, 분초가 급한데 답변이 바로 오지 않습니다.
조금 있다가 답이 오기를 어눌한 영어로‘나는 도쿄에 있는 일본 은행의 지점장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계속해서 구조대는 ‘What is your position?’라는 말을 하였지만, 무전기 속의 남자는 자신이 일본에 있는 은행 Boss라는 말만 하였고, 결국 회신이 끊어져 버립니다.
결국 이 배는 물속으로 가라 앉아 버렸고, 배에서 조난 신호를 보낸 사람은 구조되지 못했습니다.‘What is your position?’에서 position(위치, 자리) 이 말을 잘못 알아들은 까닭입니다. 배가 난파됐으면 ‘내가 지금 어디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은행장’이라는 지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해난 구조대는 ‘당신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를 물었는데, 영어가 짧은 일본인은 자신의 직업만 이야기 하였습니다. 죽음 앞에 그의 지위가 무슨 상관이 있고, 그의 재산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나는 지금 구조가 필요합니다. ‘여기는 어디입니다.’바로 이것을 말해야 했습니다. 정말 기가 막힌 사건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5년도의 첫 주일 예배입니다. 2025년도 모든 시간 속에서 여러분들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목적을 두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려워도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힘들어도 나의 위로가 되시는 하나님께로만 돌아가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나의 모든 문제는 사라지고, 나의 눈물은 씻어질 것이며, 하나님이 이끌어 주시는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2절,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이 구절을 살 필 때에 이틀 후에 살리고 삼일에 일으킨다는 날자를 중요시하면 안 됩니다.이틀이나 삼일의 날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 나오는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라는 문장입니다. 내가 힘들어하고 내가 아파하고, 내가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 며칠이 되던지,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기만 한다면, 우리는 살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정한 때가 되면 나를 반드시 살리신다는 약속입니다.
세상으로 나가지 말고 하나님께로만 돌아가서 은혜누리는 2025년도가 되길 축원합니다.
2.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이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여기서 ‘여호와를 알자’라는 말이 두 번이나 등장합니다. 안다는 단어는 히브리어‘야다’라는 말인데,‘야다’는 체험적으로 깨달아 알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우리의 지식은 추상적, 그러니까 그냥 생각하거나 들어서 아는 지식이 있고, 직접 해봐서 아는 경험적 지식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날카로운 칼이 있습니다. 칼에 손을 베이면 아프거나 부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지식으로 하는 깨달음이 있고, 내가 직접 칼을 잘못 사용하여 손을 베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한번 칼에 베여 손을 다치게 되면, 평생 칼은 위험한 도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럴 때 사용하는 단어가 바로 야다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압니다. 하나님의 주변적 이야기에 대해서 많이 압니다.
교회에 조금 출석한 분이라면 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설교 말씀 등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습니다. 이렇게 여러 번 듣고서 아는 것은 하나님을 참되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깨달아 알게 되는 믿음은 내가 단순하게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하나님을 내 삶의 실체적 모습으로서 깨달아 알 때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습니다. 내가 위기의 순간에 처해 있을 때에 하나님이 도우심으로 내가 위기의 순간을 벗어 날 때가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시도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내가 깨닫고 감격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깨달음의 믿음 하나 하나가 나를 든든한 반석위에 세우게 하는 믿음이 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지금 이런 깨달음의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머리로만 하나님을 알지 말고, 내 생활 속에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어 알라야 된다고 말합니다. 이런 깨달아 알게 되는 믿음을 성도들이 가지게 될 때, 새벽빛 같이 어김없이 아침을 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시간 구분은 있지만, 나에게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가족이 여름 물놀이를 하기 위해 계곡을 찾았습니다. 가족들 모두가 시원한 물놀이에 몰두 하던 중, 다섯 살 막내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됩니다. 아이를 찾아 나섰으나 워낙 많은 사람이 붐빈지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막막해진 부부는 ‘하나님! 잃은 아이를 찾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면서 여기 저기 정신 나간 사람처럼 돌아다닙니다.
그런데 곧이어 계곡에 설치된 재난 안내 방송 스피커에서 방송이 나옵니다. ‘다섯 살 난 최예림 여자 아이를 계곡 입구 사무실에서 보호하고 있으니 보호자는 사무실을 방문해 주십시오.’급히 달려가 아이를 찾게 되었습니다.
길 잃고 우는 아이를 안전요원이 발견하고 사무실로 데려간 뒤 어린 아이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아빠와 엄마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아이가 똑바로 아빠와 엄마의 이름을 알고, 또 자기 이름도 똑바로 이야기 하니까 바로 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험한 세상을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끔 길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지 이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는지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안개가 천지 사방에 퍼져 있어서 내가 어떻게 뚫고 나아가야 되는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이며,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시기 때문에 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속해있습니까?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해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2025년 이 한 해 동안 우리 덕민 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께로만 우리들의 발걸음을 옮기면서 하나님께 돌아가는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갑시다. 그러나 나도 살고 흔들리는 대한민국도 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