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하박국2:1-4
[1] 믿음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이 당신의 뜻대로 살아가라고 계명을 주셨습니다. 고대의 어떤 랍비는 그의 계명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모세 오경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통해서는 총 613개의 계명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편 15편에서는 11개의 계명으로 함축되어졌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고/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고/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그리고 이사야 33장 15-16절에서는 다시 여섯 개로 함축되어졌습니다. “오직 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 보장이 되며 그 양식이 공급되고 그 물이 끊치지 아니하리라”
또 다시 미가는 세 개로 축약했다고 합니다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이것들이 이사야 56:1에서는 다시 두 가지로 축약되었다?합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살피는 하박국 선지자는 단 한 가지로 소개를 하였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런 의견은 단지 고대의 한 랍비가 구약을 오랫동안 연구하다가 나름대로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박국이 말한 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구절이 구약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가장 중요한 구절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틴 루터에게 묻는다면 그는 단연코 이 구절을 말했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484년하고도 4일전, 그러니까 1517년 10월 31일에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조로 된 선언문을 게시함으로 종교개혁은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 선언문에는 돈으로 면죄부를 산다고 사람의 죄가 용서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조항 등 당시의 부패한 카톨릭 교회의 잘못들을 지적했습니다만 그 근본적인 출발은 사람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바로 이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종교개혁기념주일에 이 말씀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 깊은 일입니다.
이 구절이 너무나 중요한 구절이기에 신약의 세 책에 인용되어 그리스도인의 구원과 삶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17).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갈3:11).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고 구원받는가에 대한 성경의 대답이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신 그 사실을 알고 그 사랑을 의지하는 그 믿음으로 사람은 구원 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2)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히10:36-38). 의인은 어렵고 힘든 가운데서도 오직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면서 주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누립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오직 믿음으로 가능하고, 그 하나님의 자녀가 사는 방식도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 기독교인인가 확인할 때에 신앙생활 (믿음의 생활) 하느냐고 묻는데 적당한 말인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한 마디로 믿음의 생활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고, 그리고 성경을 믿고 사는 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다양한 의견들이 나올 것입니다. 사랑, 거룩함, 순종, 헌신, 경건, 정의, 긍휼… 그래서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성경에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것 중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은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순종, 공부 잘하는 것, 부모님 사랑, 효도…그러나 늘 우리는 자녀들에게 가장 바라는 것이 사실은 믿음입니다. 부모로서 그 자식에 대한 사랑과 애정과 관심, 그리고 도와주고 잘 양육하고자 하는 마음 등을 자식이 믿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어지면 나머지의 순종, 효도, 사랑, 공부 잘해서 출세하는 것, 모두가 헛된 것입니다. 저희 자식들이 “우리 부모님은 날 사랑하고 계시고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셔” 하는 믿음을 가진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의 자녀들인 우리들에게 당신에 대한 믿음을 갖기를 가장 원하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 그에게 나아가는 자는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상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한다”
저는 오늘 그리스도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말하는 믿음을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만 우리가 꼭 가져야 할 믿음의 중요한 요소들을 본문을 통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하박국이 “하나님 우리 유다 백성이 죄악 속에 빠져 있습니다만 어찌하여 우리보다 더 악한 바벨론 사람들을 이용하여서 우리를 징계하십니까?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히 있을 수 있습니까?” 하는 두 번째 질문을 하나님께 던진 이후의 모습입니다. 이제 하박국이 그 대답을 기다리는 모습과 하나님의 대답 (본격적인 대답은 5-20절: 다음 주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속에서 우리는 믿음의 삶이란 어떤 모습인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2] 믿음-만남과 들음: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오고 갈 때 자기의 주장만 이야기 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세게 항의를 하고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돌아서 가버립니다. 당신을 더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그러지 아니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 거세게 항의를 하지만 그렇다고 그분을 무시하거나 떠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에게 나아갔습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하박국은 하나님의 행사와 응답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여전히 그를 믿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박국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첫번째 믿음의 삶의 모습입니다.
참된 믿음은 어떤 경우에도 믿는 그분을 떠나거나 무시하지 않고, 그를 만나고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피해버리거나 듣지 않는 것은 불신의 표현입니다. 자녀들이 그 부모의 얼굴을 피하거나 말씀을 듣지 않으려 한다면 이미 부모에 대한 그 자녀의 믿음이 깨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 의견이 다르고 오해가 있더라도 여전히 만나려 하고 들으려 한다면 거기에는 참된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분 앞에 설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믿음의 첫걸음입니다. 그분을 듣는 것 말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한 바울의 말을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을 홀로 만나 그분의 말씀을 듣는 법을 배우고 또한 그런 시간을 날마다 갖는다면 우리의 삶에 큰 변화가 올 것입니다. 많은 문제들이 우리를 억누르는 단순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과 홀로 만나는 시간을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갖지 않고는 세상의 죄를 이기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감당할 고난 속에 인내하고 사명을 완수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간이 나에게는 있는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비밀한 장소가 나에게는 있는가? 물론 우리는 어떤 시간에도 급하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도 쏜살같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그분과의 깊은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우리의 주의를 끌게 하는 수 없는 시끄러운 아우성이 들려옵니다.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밤낮없이 라디오와 텔레비전 소리가 울려댑니다. 더군다나 이제는 인터넷을 통하여 하루종일을 투자해도 다 보지 못할 정보들이 홍수처럼 밀려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그 모든 소리에 귀를 막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진지한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들려오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 마음은 밝혀지며, 분노와 미움은 녹아지고, 염려와 근심은 사라지고, 새로운 소망과 용기가 솟아나고, 기쁨과 사랑이 타오릅니다.
성경의 한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한 마을에 들어갔을 때 마르다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들였다. 그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주님 앞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다는 여러 가지를 준비하느라고 마음이 산란하였다. 마르다가 예수께 와서 ‘주님, 내 동생이 모든 일을 나 혼자 하도록 내버려두고 있는데도 그냥 보고만 계십니까? 나를 좀 도와주라고 하십시오’ 하자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꼭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했으니 아무에게도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주님은 마르다가 식사 준비 등 손님접대하고 집안일을 하는 것이 필요 없다 하거나 혹은 책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다른 일들을 비교해 본다면 당신의 말씀을 듣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꼭 필요한 일 한가지만 고르라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그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단순한 말씀을 그대로 우리 예배 생활에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당장 급하고 소중해 보이는 일로 인하여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을 제쳐 두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는 착각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예배에 한 번 참석하지 않더라도 하나도 달라질 것이 없고, 당장 하지 않는 일은 급하게 서둘지 않으면 낭패를 당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저의 말이 아니라) 정말 필요한 것은 한가지다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다급한 일이 있어도 놓치지 말 것 그것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그의 말씀을 듣는 그 일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교회에 오는 손님을 예배 후에 대접을 하거나 혹은 교회의 봉사를 위해서 쉽게 예배를 건너 뛰거나 예배 도중에 나갑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것은 빼앗기지 않아야 될 것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에 있어서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능한 가족들의 생활에 방해가 되지 않는 시간대에 개인적인 경건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시간만을 기다리다 보면 전혀 가질 수 없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빼앗기지 않아야 될 것을 늘 빼앗기며 사는 것이고 꼭 필요한 그것, 심지어 필요한 단 한가지의 것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됩니다. 먼저 챙길 것을 챙기시기 바랍니다. 다른 가족들, 특히 배우자에 대해서도 우리는 배려를 해 주어야 합니다. 혹, 아내나 남편이 기도하고 말씀 본다고 홀로 시간을 가질 때 집안일 등으로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짜증내거나 방해하지 마십시오. 잠시 불편은 있으나 배우자가 바로 그 시간을 가짐으로 우리 가정에 정말 필요한 봉사를 하고 있고 또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생활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파수대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루로 올라가는 생활입니다. 마르다에게 말씀하신 주님이 오늘 믿음의 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아, 이 사람아 네가 여러 가지 일로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꼭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 좋은 것을 택하라. 그것은 빼앗겨서는 안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그리고 매일 우리에게 필요한 것 한가지는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박국이 파수하는 곳에 선 것처럼 여러분도 파수해야 하는 것 그곳에 서 계시기 바랍니다.
[3] 믿음-삶의 의탁: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실는지 보리라”
하박국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으로 올라가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을 믿었기에 그의 문제를 그에게 내려 놓고 그가 처리하실 것을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하박국의 삶에서 보는 두 번째의 믿음의 모습입니다.
믿음은 믿는 그분에게 나를 나의 삶을, 삶의 문제와 근심 걱정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를 믿기에 자신들의 문제를 갖다 맡깁니다. 믿지 못한다면 맡기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 우리의 삶의 문제를 맡기는 것입니다. 삶을 의탁한다는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일단 하나님께 문제를 맡기면 우리 자신이 문제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루는 침입해 오는 적을 재빨리 알아 차릴 수 있도록 먼 곳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곳입니다. 하박국이 성내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문제들로부터 떠나 높은 성루에 올라간 것은 이제 그의 시선을 하박국이 겪고 있는 복잡한 문제들로부터 옮겨서 하나님께만 집중시키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겠다” 이것은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사는 데에 중요한 원칙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문제를 만나면 처음부터 기도하거나 혹은 스스로 힘으로 닥친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하다가 결국 해결책을 얻지 못하면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내 힘으로 할 수 없으니 전능하신 당신께서 해결해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이 문제를 우리가 해결할 능력이 없고, 이 문제를 이해할 능력도 없으니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고 하나님의 길을 보여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여기까지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잘 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를 마치는 순간 우리는 또다시 그 문제를 가지고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다면 하나님께 그 문제를 맡긴 것이 아닙니다.
한국에는 새벽기도가 있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이 새벽이 되면 근심 보따리를 하나씩 들고 교회로 모입니다. 그리고는 그 근심 보따리를 풀어놓고 하나씩 꺼내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 남편이 직장에서… 우리 딸이 결혼을 해야 하는데… 우리 아들이 진학을 해야 하는데… 저희 동생이 사업을 하는데… 제가 몸이 아픈데… 허가가 나와야 하는데…” 20-30분에 걸쳐서 눈물로 한숨으로 그 근심 걱정을 다 풀어 놓습니다. 이제 기도를 마치고 돌아갈 때가 되었습니다. 주섬주섬 꺼내놓았던 것들을 모아서 보따리에 싸서 집으로 가져갑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그 보따리를 옆에 끼고 근심 걱정합니다. 다음 날 새벽이 되면 다시 그 보따리를 끼고 교회로 나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그 문제를 처리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내가 그것을 가지고 걱정할 권리가 없습니다. 일단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내 능력이 한계에 이르렀으므로 주님께 맡깁니다”라고 기도했으면 이제 하나님께 처분을 맡기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의 걱정 근심 거리가 어떤 문제이든지 간에 우리의 삶을 주님께 의탁합시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4:6-7).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빌4:19). 우리가 문젯거리에서만 헤매지 말고 우리의 눈을 돌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봅시다. 거기에 풍성한 공급이 있습니다. 거기에 빛이 있습니다. 거기에 평강이 있습니다.
[4] 믿음-하나님의 예언을 믿음 (3,4절)
이러한 믿음의 태도를 가진 하박국에게 하나님은 신실하게 응답을 하십니다. 본격적인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 이전에 하나님 당신이 하시는 예언의 본질에 관하여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예언은 비단 본문의 예언 뿐 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모든 예언의 말씀,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모두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예언,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을 잘 알아야 바른 믿음에 설 수 있습니다.
(1) 예언은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라”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싫어합니다. 예언은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에게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단지 구약의 선지자들이 워낙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감각이 뛰어난 사람들이기에 예측을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박국이 특별한 재능을 지녔기에 앞일을 예측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경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입니다. 성경의 모든 예언, 약속의 말씀은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한 성경기자의 개인적인 해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시하신 진리입니다.
(2) 물론 예언은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한 예고입니다. 이미 말씀 드린 대로 단지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시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계시로 예시하시는 것은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갈대아 사람들이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국제 사회에서 최강국으로 군림한다는 것과 둘째는 갑작스럽게 그들이 패망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3)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 집니다. “이 묵시는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정녕 응하리라” 전혀 이루어질 것 같지 않게 보일 지 모르지만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4) 정해진 시기에 실현이 됩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지체되지 않고” 하나님은 예언이 정확하게 실현될 시간표를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더디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정해진 그 시간에는 1초도 늦지 않게 실현됩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홍수를 예언하셨습니다. 120년이 지나도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실현될 것을 믿고 기다리는 노아를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정해진 때가 되자 그 예언은 실현이 되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도 마찬가지 입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고 예언하셨는데 그 뒤 정확하게 그 일이 성취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70년 동안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사로잡혀갔다고 마침내 돌아올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는데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하박국에게 예언된 대로 갈대아가 유다를 포함한 근동세계의 정복하지만 갑작스럽게 멸망하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예언도 어김없이 이루어졌습니다.
구약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예언은 메시야가 올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여자의 몸, 그것도 처녀의 몸을 통하여 오시겠다는 예언,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겠다는 예언, 고난 받는 종으로 오셔서 우리 죄를 대속할 것이라는 예언 등 이 모든 메시야 예언이 다 성취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이제 성취되어야 할 중요한 예언 하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 오르기까지 너희는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벧후1:19).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그를 믿는 자들이 들어가며, 언젠가 그 분이 이 땅에 재림하면 정의와 사랑이 지배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히 이 땅 위에 서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하나님의 예언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정해진 시간에 반드시 실현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거룩하며 진리이며 우리의 생명과 삶에 가장 선하고 좋은 말씀으로 믿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라”
[5] 두 갈래 길-믿음과 교만(그리고 부정직):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우리가 살피는 본문의 마지막 구절인 4절은 인생이 취하여야만 하는 두 종류의 삶의 방식을 소개합니다. 먼저 교만과 부정직의 삶의 방식입니다. 사람들은 타락해가고 사회와 국가는 종교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파멸해 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힘이 있고 돈이 있는 사람들은 욕심을 더 크게 부리며, 사치하고 방탕하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였습니다. 이런 순간에 사람들은 시대에 편승하여 조금이라도 더 권력이나 돈을 잡으려 하거나, 그 경쟁에서 밀려났다고 느끼는 사람은 깊은 절망감 속에 빠질 것입니다. 움켜쥐는 것 아니면 다 잃어버리는 것, 교만이 아니면 비굴, 부정직이 아니면 위선이 거의 모든 사람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착취와 속임과 권력행세와 내 뜻을 성취해야 한다는 교만만이 살길인 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줍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세상 기류에 편승하여 한 개라도 더 움켜지는 삶의 방식도 아닙니다. 자포자기하고 실망과 체념에 늪에 빠져 지내는 삶의 방식도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바람이 불 때 닭과 독수리가 하는 행동이 다릅니다. 닭은 자신의 몸을 날개 속의 넣고 잔뜩 움츠리고는 움직이지도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그 바람에 날개를 활짝 펴고는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날아갑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독수리와 같이 세상과 역사의 부조리 앞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몰려오는 인생의 비바람 속에서 믿음의 날개를 사용합니다. 하나님을 들으니 다른 사람들은 움츠리는 그 고난 속에서 오히려 높이 솟아오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니 다른 사람들은 꼼짝 못할 그 세찬 인생의 바람 속에서 가고 싶은 곳으로 속히 날아갑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다른 사람들은 캄캄한 무지 속에서 자기 감옥에 갇히어 있을 때 그는 인생과 역사의 목적을 향하여 마음껏 비행합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이 소동할 때 하나님의 사람은 고요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나아갑니다. 하나님 그분을 만나는 것을 인생의 오직 한 가지 필요한 일처럼 여깁니다. 모든 사람들이 권력에 줄을 대고 돈에 미래를 맡길 때, 혹은 절망하여 포기할 때, 그는 하나님께 인생의 문제를 맡깁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을 때, 그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이 진리이며 성취될 것을 믿습니다. 그 믿음으로 그는 인생이 만나는 폭풍우를 헤쳐 나갑니다. 그 믿음으로 세상의 불합리에 낙담하지 않습니다. 그 믿음으로 역사의 부조리에 함몰하지 않습니다. 그 믿음으로 불의에 타협하지도 패배하지도 않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날개를 펴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높이 솟아 인생을 역사를 세상을 새롭게 보시고, 불어오는 폭풍의 힘을 오히려 에너지로 삼아, 삶의 목적인 하나님을 즐거워 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 곳을 향하여 힘차게 비행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