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 성도의 모범
오늘 본문에 보면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사도 바울이 극진히 칭찬하고 그들로 인해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기도가 있습니다. 골로새 성도들이 복음에 근거하여 믿음과 사랑과 하늘의 소망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들은 바울은 이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더욱 바로 깨닫고 주께 합당한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했습니다. 골로새 성도의 모범된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지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골로새 교회 성도의 모범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 안에서 사는 신자들이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4절) 참 신앙이란 예수 안에 사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신앙은 바로 예수 안에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4에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안'에 있다는 말과 '밖'에 있다는 말은 삶과 죽음의 차이요, 축복과 저주의 차이요, 하나님의 선민과 이방인의 차이로서 여러 가지로 교훈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 안마당에 있는 위치에 있었고, 이방사람은 성전 바깥마당에 있었습니다. 이 안마당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은총이 있지만 바깥마당에 있는 이방인들에게는 아무런 주의 긍휼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5:7에도 보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예수 안에' 있다는 이 말은 대단히 귀한 것입니다. 이 귀한 사실을 깨닫고 평생토록 예수 안에서 사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생이 사노라면 위기도 옵니다. 괴로울 때도 있습니다. 대적들도 있습니다. 실패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가 실패로 끝나는 것은 이방사람들의 결론이지만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실패도 성공으로 될 수 있습니다. 위험도 안전으로 하나님의 보장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모든 사경을 헤매는 데서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생명의 약동을 부여해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이 대적이 쳐들어오는 그 순간에도 '저들을 이길 수 있는 병력이나 무기와 요새지가 어떻게 구축되어 있는가를 생각하기 전에, 내가 지금 이 순간에 예수 안에 있는가'를 생각했다는 글을 읽고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신학은 항상 '예수 안에' 이것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빌립보서 4:13에 보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를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6:10에도 보면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우리가 예수 안에 있으면 강건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제일 약자는 예수를 떠나는 사람입니다. 예수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제일 강한 자는 바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 있을 때 나라도 잘되고 가정도 잘되고 기업도 잘됩니다.
골로새 교회 성도들은 그들의 모습이 언제나 예수 안에 있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누가 여러분을 보더라도 '저 분은 예수 믿는 사람이구나' 이렇게 보여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믿음 위에 세워진 신자들이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4절) 골로새 성도들은 그들의 믿음에 대한 소문이 났습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세운 집의 결과(마 7:24∼27)를 예수님이 비유로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마는 믿음 위에 세워진 성도는 하나님이 보장해주십니다. 믿음을 통하여 온갖 하나님의 기적과 역사가 함께 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강한 믿음은 강한 사람을 만듭니다.
세계를 움직인 위대한 사람은 주먹의 힘이 아니고, 머리의 지혜가 아니며, 가슴의 정열도 아니었습니다. 육체의 뼈와 살의 튼튼한 체력이 아니라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세계를 다스리고 통치할 수가 있었습니다. 믿음의 역사는 달려가도 곤비함이 없고, 걸어가도 피곤치 않습니다. 샘솟듯 솟아나는 새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사 40:31).
영국의 대선교사 리빙스톤은 아프리카 대륙의 위험속에 다니면서도 그는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는 주의 능력을 의지했기 때문에 어떠한 일에도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낙심을 잘하는 사람은 신앙의 병이 들었든지 성격상으로 병이 든 사람입니다. 비록 성격상으로 약점과 단점이 있어도 신앙이 강건하면 어떤 절망에서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안전이나 완전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믿음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보장이 이루어지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4:20에 보면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은혜와 복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①믿음은 구원을 가져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구원은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②믿음은 기적을 가져옵니다. 안되는 것이 되는 것, 없는 것이 있게 되는 것은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안 보이는 것이 보여지고, 귀에 들려지고 만져질 수 있도록 현실적으로 불가능이 가능하도록 믿음을 통한 이런 기적을 우리에게 체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③믿음은 소망을 가져다 줍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바로 이 믿음이 있을 때 소망이 이루어지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 축구대표팀 히딩크 감독이 대화하는 것을 제가 유심히 봅니다. 이 분은 대화 속에 부정된 말이 없습니다. 상대방을 낮추거나 욕하고 저주하는 말이 한마디도 없습니다. 언제나 상대방의 실력을 평가하면서 '그러나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해낼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믿음을 통한 역사가 바로 이와 같은 좋은 역사를 나타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말은 헬라어에 보면 '받아들이고, 맡기고, 기대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그 사람의 가문이나 족보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교육 수준이 높아지자 학력을 가지고 평가했습니다. 요즘에는 가문이나 족보, 학벌을 가지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아, 그분 좋은 사람입니다'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좋은 여건을 가지고도 나쁜 사람이 있고, 여건이 나빠도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귀한 말은 '아, 그분 참 믿음이 좋은 분이십니다'라는 말입니다. 좋은 사람이라는 말도 좋지만 믿음이 좋은 분이라는 말은 더 귀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 앞에 '아, 저 분 같으면, 저렇게 예수 믿는 사람이 본이 된다면 나도 예수 믿을 마음이 생긴다'라고 말할 정도로 이방 사람들에게까지도 그러한 반응이 되어지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사랑이 넘치는 신자들이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4절) 골로새 성도들은 사랑이 넘친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인간 공동체 속에서 참 생명처럼 귀한 것이 사랑입니다. '산다는 것은 곧 사랑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인생은 향기없는 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사랑이 없으면 삶의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은 지옥이요 감옥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해주기를 기대하지 말고, 내가 사랑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지 않고 받으려고만 하면 언제나 고독합니다. 받는 것은 관심없고 주기를 좋아하면 언제나 행복한 사람이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참 사랑은 주는데 있습니다. 아마추어 사랑은 받는데 있지만 프로의 사랑은 주는데 있습니다.
이 '사랑'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에 보면 '서로 함께 결합시킨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은 연합을 가져옵니다. 사랑이 식어지면 분열을 가져옵니다. 사랑이 없으면 멀어지지만, 사랑이 있으면 가까워집니다. 쇠가 용광로에 들어가면 녹아서 한데 엉켜지듯이 우리는 사랑의 불로 함께 녹여져서 '너와 나'라는 것이 없어지고, 다 내 몸같이 사랑하고 아끼고, 내 몸같이 존경스럽고 귀히 여겨지는 이런 사랑이 오늘 이 땅에 필요합니다.
인간은 점점 번창해짐에 따라서 그리고 고도로 발달된 과학 문명과 지식을 통해서 생활에 편리한 모든 것들이 다 발명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치열한 경쟁시대입니다. '산업 경쟁' '생존경쟁'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이런 경쟁을 하다가 보니까 경쟁구조가 극대화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함께 파생되는 것은 사랑의 구조가 파괴되고 있습니다. 오늘 이런 시대일수록 경쟁구조는 파괴되어도 사랑의 구조가 파괴되어서는 안됩니다. 사랑을 잃으면 그 자신에게도 삶의 의미를 상실합니다. '산다는 것은 곧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이 말이 참 귀합니다.
TV를 보다가 소름이 끼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아주 어린 소녀가 철망 안에 들어가 호랑이를 끌고 와서 손도 들게 하고 발도 들게 하면서 나중에는 자기 다리를 호랑이 입에 물리는 것이었습니다. 호랑이로 말하면 자기 밥인데 먹지 않고 입만 벌리고 있었습니다. 호랑이가 무슨 절제의 은사가 있습니까, 분별의 은사가 있습니까? 배고프니까 그냥 먹으면 그만이지요. 그런데 나중에 사회자가 질문하기를 '맹수를 훈련시켰는가 아니면 새끼를 길러서 훈련시켰는가?' 하고 물었더니 맹수를 훈련시켰다는 것입니다. 일반 호랑이를 데려다가 훈련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또 묻기를 그 다리를 입에 넣었을 때 무섭지 않았느냐고 하니까 '내가 호랑이를 사랑하는 줄을 호랑이가 알고, 호랑이가 나를 사랑하는 줄을 내가 알기 때문에 무섭지 않습니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이 말에 참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소녀의 말은 순간적으로 대답한 것인데도 이것이 곧 진리입니다. 자기 현실 생활 속에 체험하고 있는 것을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내가 호랑이를 사랑하는 것을 호랑이가 안다는 것입니다. 사랑 관계 속에 얼마나 행복이 있습니까? 만일 옆의 사람이나 뒤의 사람 중에 미운 사람이 있다면 사랑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것입니다. 다 서로 이해가 되고, 존경스럽고, 사랑하고, 가까이하고 싶고, 곁에 있고 싶고, 대화하고 싶고, 마음을 서로 주고 받고 있다면 사랑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골로새 교인들은 바로 이런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저들의 모습이 아름다운 모습이었고, 이 소문이 사방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사랑을 보통 친구간의 사랑, 이성간의 사랑, 가족간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누게 됩니다. 가족간의 사랑은 '스톨게'라고 말하고, 이성간의 사랑은 '에로스'라고 말하며, 친구간의 사랑은 '필리아'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랑은 누구나 다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랑은 '아가페' 즉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국경이 없는 사랑입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차별이 없습니다.
넷째, 소망이 넘치는 신자들이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5절) 얼마나 골로새 성도들은 소망을 많이 쌓아놓았으면 하늘에 소망을 쌓아두었다고 했을까요?
일본의 미끼 기오시가 '저무는 해 뒤에는 떠오르는 별이 있다. 소망 중에 사는 사람은 언제나 젊다.'라고 한 이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안되는 일도 언젠가 되는 주의 약속이 되어져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실망하고 좌절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상실했다는 증거입니다. 골로새 성도들은 땅위에 있는 것을 보고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하고 찬송하면서 아름다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소망의 불이 꺼지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기적과 축복을 안겨주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