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레몬강해(1) 교회의 사람들 / 몬 1:1 ~ 3
빌레몬서 1:1 ~ 1:3
빌레몬강해(1) 교회의 사람들
임세일(한무리교회 목사)
교회의 사람들이라고 하면 교회의 일원으로 예배를 드리고, 교회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교회 사람들의 외형적인 모습으로, 내면적인 실제 모습이 가시화된 결과여야 합니다. 만일 외형적으로는 그럴싸하게 교회 사람의 흉내를 낸다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나라의 삶의 스타일을 배워가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실제로는 교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교회 사람들의 모습을 확연하게 잘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빌레몬의 종으로 있다가 도망친 오네시모를 다시 빌레몬에게 보내면서 한 통의 편지를 전하는데 그것이 오늘부터 우리가 공부할 빌레몬서입니다. 그러니까 빌레몬서는 개인에게 보내는 사적인 편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편지에는 수신인이 여러 사람으로 명시되어 있고,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2절)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교회를 언급하면서 여러 사람의 이름을 거론한 것은 그 사람들과 교회의 연관성이 매우 밀접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를 교회 차원에서 풀어야 할 문제로 생각한 듯합니다.
빌레몬은 자신의 판단으로 오네시모를 용서하든지 아니면 그의 잘못을 추궁하여 엄히 벌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한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러한 문제를 교회 사람들에게 알게 함으로써 이 문제가 단순히 한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고 교회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문제로 이끌어 내어 빌레몬의 결단을 믿음 안에서 생각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바울의 삶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빌 1:20).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한 부분을 자신이 메꿀 의무로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그에게 맡기고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자신의 욕심이 전제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외형적 환경여건으로 신앙의 위치를 평가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사람이지만 그는 감옥에 갇힌 자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매우 불행한 입장에 있습니다. 이것이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감옥으로부터 해방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감옥에서 나가는 것에 그의 생각이 집중되지 않습니다. 그는 어떠한 형편과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자신의 역할에 힘쓰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감옥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자랑이 아닙니다. 빌레몬서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갇힌 것을 5번씩이나 강조합니다. 이러한 강조는 자신의 현실을 하소연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사랑과 용서와 화합을 가르치기 위한 의도가 깊이 내제되어 있습니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빌레몬의 마음을 향해 활을 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차적으로는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용서와 화합의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것은 또한 교회의 구성원들에게도 매우 중시되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사실 오늘 분문에 나오는 사람들의 배경이 조금씩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히브리 사람으로 유대인에 속합니다. 그러나 빌레몬은 이방인입니다. 빌레몬이 주인이라면 오네시모는 종입니다. 바울과 빌레몬이 남자라면 압비아는 여자입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신분과 국적이 다르다 하더라도 교회의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동역자요, 형제요, 자매요, 함께 군사된 자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서로에게 은혜와 평강을 전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쫓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회 사람들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빌레몬강해(2) 믿음의 교제 / 몬 1:4 ~ 7
- 임세일(한무리교회 목사)
성도들에게 '믿음의 교제'는 필연적인 현상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의무 조건으로 강제적인 요구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만일 이러한 현상이 성도에게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1인칭)과 빌레몬(2인칭)과 모든 성도(3인칭)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믿음의 교제'를 통해서 교회 사람들의 영적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바울의 기도에서 우리는 그의 교제의 대상이 하나님이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말합니다.' 그런 후에 빌레몬을("너를 말함은")언급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교제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인간 빌레몬이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제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항상")이면서도 개인적인("내가, 내 하나님께")관계를 유지합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교회에서 보여주는 성도의 아름다운 믿음의 교제에 대하여 기뻐하며 그에게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습니다. 교회 내에서 좋은 성도를 시샘하는 오늘날의 풍토와 매우 대조적입니다.
둘째, 빌레몬의 생활에서 드러나는 하나하나의 행동들은 오늘날 성도들간의 '믿음의 교제'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의 '믿음의 교제'는 '사랑과 믿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믿음은 인위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진리와 하나님의 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이것은 가식적이거나 위선적일 수 없습니다.
특별히 그의 이러한 사랑과 믿음이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이라는 말에 연결된 것을 유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앞에서 지적했듯이 다양한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비슷한 생각과 행동양식에 맞는 사람들끼리 당파를 이루어서 편견에 따른 인간관계를 맺기 쉽습니다. 그러나 빌레몬은 이런 편견이 가능한 다양성의 특성을 뛰어넘는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에 근거해서 믿음의 교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교제'는 사랑과 믿음에 근거할 때 진정한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과 믿음에 근거하지 않은 교제는 단순한 인간의 친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 교제는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 즐기는 것 이상일 수는 없습니다. 교회라는 이름 아래서 성도가 만나는 그 자체가 곧 믿음의 교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교제의 본질을 외면한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빌레몬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마음이 평안함을 얻고, 빌레몬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줄 수 있는 것은 그 교제가 사랑과 믿음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믿음의 교제는 그 열매가 있기 마련입니다. 첫째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둘째 믿음의 교제가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할 뿐 아니라, 셋째 다른 성도에게 본이 되어 그들을 평안하게 하며, 넷째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사랑으로 인하여 기쁨과 위로를 줍니다.
사랑의 간구 / 몬 1:8 ~ 12
: 임세일 목사
- 설교 : 임세일(한무리교회 목사)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그를 교회의 형제로 받아들이라고 부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 당시 사회 제도가 주인과 노예를 구별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은 주인과 노예의 신분을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들은 진정 사랑과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며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많은 담력을 가지고, 마땅한 일로 여기며 이 사건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단지 사도 바울이 나이가 많고, 빌레몬에게 복음을 알게한 사람이기 때문에 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닌 듯 싶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명할 수 있는 이유는 두 사람의 친분 관계를 넘어 이 사건이 영적인 측면에서 서로 영적으로 납득될 수 있는 문제이기에 담대히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려는 것은 그같은 당연한 수준을 뛰어넘는 고차원의 교회 사람들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인하여"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당연함을 명하지 않고 "도리어("이러므로"와 대조) 간구합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당연함을 뛰어넘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을 인하여" "이러므로"가 "도리어"로 "명할 수 있으나"가 "간구하노니"로 전환됩니다. "전에는"이 "이제는", "무익"은 "유익"으로 변화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사랑으로 만들어진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유산입니다.
물론 사랑 자체가 항상 낭만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사랑을 인하여" 간구하는 바울이 여전히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감옥에 있으며, 오네시모의 입장에서는 바울의 심복으로 잘 있다가 다시 옛 주인의 곁으로 돌아가야 하는 현실적인 부담과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러한 불편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믿음의 표현이며, 무익에서 유익으로 전환되는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간구"에는 당연히 명령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간구하며,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며, 삶의 새로운 변화를 주며,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며 교회 사람들의 한 지체를 중시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교회 사람들의 행동 양식입니다. 이러한 행동 양식이 있기에 오네시모는 주인의 돈을 훔치고 도망친 무익한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빌레몬과 바울에게는 물론 교회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한 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으로 만들어진 교회 사람들의 위대한 작품입니다.
빌레몬 1:11 ~ 1:14
빌레몬강해(4) 사랑의 실천
임세일(한무리교회 목사)
빌레몬서는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의 잘못을 용서하고 형제로 받아들이라는 바울의 간곡한 내용의 편지이지만 그 분위기는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도의 진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레몬서는 "사랑과 믿음, 사랑을 인하여"라는 말들이 핵심을 이룹니다. 오늘 본문도 사랑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속 내용은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오네시모에 대한 사랑, 복음에 대한 사랑, 빌레몬에 대한 바울의 사랑'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보십시오.
첫째, 오네시모에 대한 사랑은 "저는 내 심복이라"는 말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은 그와 함께 있는 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네시모의 과거를 보면 그는 결코 사도 바울의 일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인의 물건을 훔친 사람은 단순히 물건을 훔치는 수준을 넘어 양심을 훔친 사람이며, 누구로부터 인정을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변화된 모습에 기뻐합니다. 그는 복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저가 전에는 빌레몬에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빌레몬은 물론 자신에게 유익한 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 보냅니다.
둘째, 복음에 대한 사랑은 바울의 삶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에 대한 사랑에 대하여 굳이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성경의 기본 사상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쓰인 '복음을 위하여'라는 말 속에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오네시모를 자기에게 머물게 하는 것이 복음을 위하여 유익할 뿐만 아니라 오네시모가 바울을 돕는다면 그것은 곧 빌레몬이 바울을 돕는 것이기 때문에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특별히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는 그를 도울 헌신된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복음을 위해 유익한 일입니다. 하지만 빌레몬의 승낙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라는 바울의 말은 복음을 위한 일이라는 명분이 있다고 해서 모든 일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목적이 선하면 무조건 해도 된다는 일반 사람들의 생각과 큰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셋째, 빌레몬에 대한 사랑은 그의 "선한 일" 즉 오네시모를 용서하는 일이 억지로 되어서는 안된다는 바울의 마음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 보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빌레몬은 그것을 용납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의 일방적인 결정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승낙하게 될 빌레몬의 입장을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말하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무조건 선한 일 그 자체가 곧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입체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의 사랑은 오네시모에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복음과 빌레몬 그리고 교회의 모든 성도들에 대한 사랑이 입체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실천은 여러가지 종합적인 상황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상황의 몇 가지를 나열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은 잘못을 인정한다(무익하므로).
사랑은 성숙이 따른다(유익하므로).
사랑은 덕을 세운다(네 승낙이 없이는).
사랑은 공동체적인 의식 속에서 이루어진다(나와 네게).
사랑은 무조건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사랑은 자의적인 것이다(자의로 되게).
사랑은 입체적인 것이다(저가, 네게, 나와, 저를, 너의 등).
사랑은 진실하다(선한 일).
사랑은 희생을 감수한다(돌려 보내노니).
관련성경구절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빌레몬 1장 11 절 ~ 1장 14 절 )
사랑의 용서 / 몬 1:15 ~ 19
오네시모의 용서를 구하는 바울의 마음에는 단순히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빌레몬과 오네시모를 생각하기 때문에 그의 말은 매우 치밀하고 다각적이면서도, 복음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이 말하는 용서란 단순히 상대방의 잘못을 그냥 덮어두고 용서하겠다는 말 한마디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요구하는 용서란 높은 차원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용서의 본질에 관하여 말합니다. 용서의 본질은 하나님 나라가 기준입니다.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라는 말씀 속에 잘 나타나듯이 용서는 영원한 나라 즉 복음의 바탕 위에서 그를 사랑과 믿음으로 한 형제된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물론 용서라는 말이 나오기까지는 용서를 받아야 할 잘못이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를 하는 자는 의로운 위치에서 죄인된 사람에게 아량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다시 한 번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어떻게 용서하셨습니까?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하나님이신 그가 친히 인간의 수준으로 낮아지셔서 인간이 치루어야 할 죄의 대가를 친히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용서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란 감상적으로 미화되는 곳이 아니고 죽음의 현장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죽음의 현장을 친히 택하신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용서의 의미를 바로 알게 될 것입니다.
둘째, 용서의 성격에 관하여 말합니다. 용서는 사회적인 신분이나 명예나 부의 정도가 높다고 하여 그가 곧 용서의 주체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같은 직장에서 다른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근본적인 위치는 주 안에서 형제입니다. 물론 같은 주 안에서 형제라하여 자신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돌아온다고 하여 그가 빌레몬과 똑같은 위치에서 같은 수준의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는 주종관계가 아니며 사랑받는 형제이며 동무입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나에게 대하듯 하라는 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셋째, 용서의 행동을 말합니다. 용서에는 자기 잘못을 뉘우치는 진정한 회개가 따라야 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회개의 본을 행동으로 가르칩니다. 본문에 나오는 "회개하라, 갚으려니와"라는 말을 유심히 새겨보십시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이 편지를 친필로 썼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오네시모의 용서를 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동원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용서가 행동화될 때 나타난 현상입니다. 죄의 대가를 치루지 않고 그냥 그 순간을 넘기려는 자세는 용서를 모르는 행위입니다.
관련성경구절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빌레몬 1장 15 절 ~ 1장 19 절 )
교회사람들의 기쁨과 평안 / 몬 1:20 ~ 25
- 설교 : 임세일(한무리교회 목사)
오늘 본문에는 바울과 빌레몬 외에도 에바브라,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등장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등장하는 경우는 첫 번째 설교 "교회의 사람들"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따라서 빌레몬서를 단순히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문제를 풀어가려는 바울의 편지라고 단정해 버리면 빌레몬서가 쓰여진 의도가 축소됩니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쓰면서 많은 사람들을 등장시키고 특별히 2절에서 "교회에게 편지하노니"라는 말과 오늘 본문에 "너희 기도로"라는 말을 써서 이 편지의 수신자가 빌레몬 한 사람이 아니라 교회의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내용임을 상기시키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빌레몬서는 빌레몬과 오네시모 두 사람만의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라 교회가 풀어야 할 교회 사람들의 관계를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깊이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교회 사람들이란 어떤 사람들입니까? 본문에 나오는 "형제, 주 안에서, 너로 인하여, 기쁨과 평안, 순종, 기도, 갇힌 자, 동역자, 문안, 은혜"라는 말들을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 사람들이란 주 안에서 형제된 자로서 수직으로는 하나님을 따르는 자이며, 수평적으로는 동역자로서 서로 기도하며, 어려움을 함께 풀어가며, 서로 문안하며,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의 아름다움을 보며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믿음의 교제는 이러한 사람들이 나누는 생활 양식입니다. 기쁨과 평안은 이러한 생활 양식에서 나오는 열매입니다. 물론 이러한 생활 양식을 벗어나서도 기쁨과 평안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임시적이며 엄격히 말하면 기쁨과 평안이 아닙니다. 진정한 기쁨과 평안은 교회 사람들만이 누리는 복이며, 이것이 교회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이유는 슬픔과 불안의 원인이 되는 죄의 문제를 그리스도의 은혜로써 해결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사람은 관계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방법으로 인간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믿음의 교제입니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형제로 받아들이는 것도 하나님이 우리 죄인을 용서하고 자녀로 삼아주신 은혜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자의 가치관의 뿌리는 "주 안에"있으며 그의 행동 양식은 "순종"("순종함을 확신함으로")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 순종의 형태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스타일을 따릅니다. 그 스타일에는 기도가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행동이 있습니다. 기쁨과 평안은 이러한 행동의 원인이며 결과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