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 초록이네요~ 신선함?, 신비로움? 봄의 아름다움인 듯 합니다.
오늘도 신선함으로 기쁨과 감사함의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빌레몬서는 바울 서신 중에서 가장 짧은 서신이며 바울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로 묘사되는 빌레몬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서신을 보낸 이유는 빌레몬의 종이었던 오네시모가 자신의 곁에 머물게 하여 복음 사역을 위하여 자기를 섬기도록 허락을 받는 것과 오네시모가 골로새로 돌아갔을 때 그를 ‘사랑받는 형제’로 맞아 줄 것을 부탁하기 위함입니다.
오네시모라는 종이 그리스도인인 주인 빌레몬에게 잘못을 범해 골로새에서 도망친 것으로 보통 추정합니다. 그렇게 떠돌다가 로마의 죄수로 갇히게 되면서 거기서 우연히 죄수로 갇혀있는 바울을 만난 것 같은데, 바울을 통해서 오네시모가 회심하게 된 것 같습니다(10절).
1-3절에서 바울은 수신자를 언급하고 인사말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로마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은 빌레몬과 그의 그리스도인 성도들이 그들이 서 있는 토대가 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서 있기를, 그리고 주의 평강 가운데 거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 바울은 4-7절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빌레몬을 위해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골로새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빌레몬의 ‘믿음’과 ‘사랑’ 때문에 기쁨과 위로를 얻었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빌레몬의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사랑으로 더욱 충만함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듯 합니다(즉, 바울은 빌레몬의 너그러움으로 인하여 오네시모와의 관계에서도 긍정적이고 효과적인 결과가 일어나기를 바랬을 것으로 보입니다).
8-20절에서 바울은 본격적으로 오네시모를 위하여 빌레몬에게 간청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사도로서 빌레몬에게 ‘간청’이 아닌, 명할 수도 있었지만, 빌레몬의 ‘사랑’과 ‘관대함’에 의지해서 편지를 쓰는 구체적인 목적을 말합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 회심하여 지극히 사랑받는 자가 된 사람 곧 오네시모를 위해 호소하고 있습니다(8-10절). 오네시모는 이전에(회심 전) 빌레몬에게 ‘무익’(오네시모는 브루기아인 노예였는데, 브르기아인 노예들은 신뢰할 수 없고 성실하지 않은 것으로 소문났었다고 함)하였습니다. 그러나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이 강력한 변화가 그리스도를 믿는 오네시모의 회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그의 이름에 걸맞게 ‘유익하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고, 사랑받는 자로서 빌레몬에게 보내지게 되었습니다(11-12절).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기 곁에 머물게 하고자 하는 소원을 표시합니다. 그러나 빌레몬의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이는 지극히 사소한 것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인의 사귐에 틈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강요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그의 결정에 간섭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자의로’, 곧 빌레몬이 강요에 못 이겨서 특별한 조치를 취하게 되는 어떤 외부적 압력도 바울이 삼간 것을 보여 줍니다. 결정은 전적으로 빌레몬의 몫이라는 것입니다(13-14절/15절은 바울이 오네시모를 붙들지 않기로 결정한 이유를 덧붙여 설명). 16절에서 바울은 단어를 신중하게 쓰고 있습니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더 이상 종이 아닌 자유인으로 다시 영접하여야 한다거나, 오네시모가 돌아가는 즉시 그를 자유롭게 해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네시모가 종으로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를 사랑받는 형제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바울은 여기서 노예 제도 자체의 문제나 노예 제도의 문제 해결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여기서 형제 사랑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이 부분도 학자들에 의해서 해석이 좀 갈리기도 합니다. 바울의 뜻이 오네시모를 노예에서 해방시켜 제도적으로 자유인이 되게 하라고 한 것으로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제 개인적 생각은 바울이 노예 해방을 추구는 하였으나 당시 노예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사회에 굉장한 물의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돌아오더라도 비록 신분은 노예일지라도 사랑받는 형제처럼 관계를 유지하라는 쪽의 학자들 견해에 동의함). 중요한 것은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10절에서 오네시모를 위해 언급한 것을 17절에서 자세히 말을 합니다. 바울은 빌레몬을 동역자로 여기고 있다고 합니다. 즉, 이 사귐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이고, 이를 위해 둘 다 부름을 받아서 함께 모여서 공동으로 활동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도로서 빌레몬에게 상하 관계로 얘기하지 않고, 또 선후배의 관계로도 얘기하지 않는 모습은 엄청난 겸손인 듯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하여 간구할 뿐 아니라 그와 자신 또한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기쁘게 영접하는 일에 장애가 없도록 신중을 기하고 있습니다(18-19절/혹, 보상에 대한 요구로 화해가 깨지는 것을 원치 않았음). 그러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빌레몬으로 인하여 기쁨을 얻기를 바란다는 말로 자신의 요청을 끝맺고 있습니다(20절).
그런 다음 바울은 빌레몬에게 그가 바른 처신을 하리라는 자기 확신을 분명히 말한 다음에 그를 방문할 계획을 이야기합니다(21-22절). 몇몇 사람의 이름을 열거하여 함께 인사하고(23-24절) 축도로써 서신을 끝맺고 있습니다(25절).
오늘도 예수로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첫댓글 오네시모가 도망갔다기보다는 잠시 떠났다고 표현합니다. 바울은 그가 빚진것이 있다면 자신이 책임질 것이며, 빌레몬이 자신이 요청한 것보다 더 행할 것을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사랑으로 간구한다는 바울의 말처럼 편지 곳곳에 조심스런 말투가 묻어납니다.(1:8-9,15,19,21)
바울이 도망한 종 오네시모를 예수 안에서 한 형제로 받아들인 일은 노예제도가 당연했던 그 당시에 참으로 주위를 놀라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다는 사실에 부합한 행동이며 실제로 죽을 운명이었던 우리가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일과도 비슷해보입니다. 직접적인 전도는 아니지만 이 일은 세상에 간접적으로 복음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는 듯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처럼 공동체에 엄하게 말하기도 하고, 빌레몬에게처럼 개인적으로 부드럽게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도 사회의 부조리에 소리높이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때론 허용된 범위안에서 내가 바꿀수있는 작은 행동 하나가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성도라는 이름에 걸맞게, 상황과 때를 잘 분별하고 복음에 합당하게 행동할수 있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행동할 수 있는 지혜' 아멘입니다.
이 지혜로 늘 승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잘 분별하며 합당하게 행하는 지혜를 저도 바라며 선한 일에 자의로 되기를 바랍니다 선한 지혜를 간구합니딘
네, 아멘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사 '선한 지혜'를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형제됨이 신분을 초월하나 또한 각자의 위치에 서서 갖추고 실천해야될 그리스도인의 태도와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강요가 아닌 사랑하는 마음과 권면으로 보여주고 있네요.
바울과 빌레몬과 오네시모간의 관계에서 우리사회의 갈등을 풀어나갈수 있는 사랑과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네~ 맞습니다. 강요가 아닌, '사랑하는 마음과 권면' 너무나 중요한 부분인 듯 합니다. 빌레몬을 대하는 바울을 통해 귀한 것을 배우게 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