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어려운 히브리서를 대하게 되었네요~
어렵더라도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한 자 한 자 읽어가다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에 조금씩 접근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1-4장을 왕으로서의 아들 (그리스도), 5-10장을 제사장으로서의 아들, 11-12장을 믿음으로 반응, 13장을 결론 부분으로 본다고 할 때, 우리가 살펴볼 1-2장은 크게 두 개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천사보다 뛰어나신 분(1:4-14), 또 하나는 천사보다 잠시 낮아지신 분(2:5-18)입니다. 1:1-3은 도입이고, 2:1-4은 그 중간에 삽입된, 히브리서에 등장하는 다섯 개의 경고 가운데 첫번째 경고입니다.
하루에 묵상하기에는 분량이 많다 보니 읽다가 어려움을 느낄 수 있는 부분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장 3절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만물을 붙드신다’는 것은 ‘만물을 보존/보호하다’는 의미입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말씀으로’ 그 천지를 보존하신다는 측면에서 ‘말씀’의 무게감이 더해집니다.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격식과 위엄을 나타냅니다. 또한 친밀함과 하나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만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예수님 우편에 앉으신 예가 그것을 말해줍니다(시 110:5).
4절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여기에서의 ‘아름다운’은 ‘뛰어난’으로 보는 것이 보다 적절합니다. 전체적으로, ‘그들보다 더욱 뛰어난 이름을 상속받으셨으니/물려받으셨으니’가 됩니다. 현재완료 동사입니다.
6절 또 그가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개역개정의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는 ‘맏아들이 들어온 적이 있고 다시 들어온다는 말인가?’와 같은 혼동을 야기합니다. 여기에서 ‘다시’를 가리키는 ‘팔린 (πάλιν)’은 바로 앞의 ‘데 (δὲ)’와 더불어 앞의 말을 잇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고 다시 (말을 덧붙이자면)’ 이런 표현입니다. 따라서 ‘그(하나님)가 맏아들을 세상에 들어오게 하실 때에’로 보는 것이 무난합니다. 이 부분에 ‘다시’가 들어가면 앞서 지적한 것처럼 혼란스러워집니다.
9절 즐거움의 기름을 주께 부어 주를 동류들보다 뛰어나게 하셨도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아들에게 기름을 부으신 것은 그가 동료들(companions)보다 뛰어나기 때문인가 아니면 기름 부음을 받아 뛰어나게 되셨는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헬라어는 ‘하나님이 당신의 동료들 위에(above) 당신에게 즐거움의 기름을 부으셨다’고 단순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아들도 하나님이시므로 그에게 기름을 붓는다든가 등의 행위/예식을 통해 그를 ‘더 뛰어나게’ 하실 일은 없고, 그를 구별하기 위해서 기름을 부으셨다고 보아야 합니다. 현재의 개역개정은 다소 인위적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12절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당신은 동일하고(the same), 당신의 연대는 다함이 없을 것입니다’의 의미를 갖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 동일하신 아들의 하나님으로서의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13절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발등상’은 ‘(앉아 있을 때) 발을 얹는 받침’을 말합니다. 본문에 사용된 ‘도 (θῶ)’라는 동사는 보통의 경우 ‘놓다(place)’는 의미를 갖지만 여기에서는 ‘경험이나 조건에서 변화를 겪게/경험하게 하다, 처하게 만들다’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이 주도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기까지’를 가리키는 ‘헤오스 (ἕως)’는 한시적인 기간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그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2:1-4은 히브리서에 등장하는 다섯 개의 경고 중 첫번째 경고입니다.
2장 1절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떠내려가지 않도록’은 ‘확실한 도달 범위에 있는 정박지를 지나쳐 떠내려가지 않도록’이라는 의미입니다. 모두에게 위험한 상황임을 보여주는 생생한 그림 언어요 비유입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들은 말씀에 ‘집중/유의/유념해야’ 합니다.
3절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헬라어로는 관용구처럼 쓰이던 표현으로, 그 의미는 ‘이 구원은 주를 통하여 말씀되기 시작하였고’입니다. ‘이같이 큰 구원’이라고 할 때 ‘이같이 큰’을 가리키는 형용사 ‘텔리카우테스 (τηλικαύτης)’는 ‘매우 큰, 중요한, 강력한’ 등을 의미하며, 믿는 자들이 받은 구원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일깨워줍니다.
4절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이므로 성령의 선물을 가리킵니다.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에 이어지는 여격 명사로서 하나님이 구원을 증거하시는 방편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 선물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결정하시고 성령을 통해 나누어 주십니다.
6절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여기에서 ‘인자’는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자주 사용하시던 칭호와 다릅니다. 둘 다 우리 말로는 ‘인자’로 번역되지만 여기에서는 메시아적 칭호가 아닙니다. ‘돌보시나이까’는 ‘돌보다, 돕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다’ 등을 의미하는 동사에서 온 표현입니다. 복음서(마 25:36, 43)에서 예수님이 ‘병 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 돌보았다’는 등의 말씀을 하실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8절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아무것도 그에게 독립적인 것이/복종하지 않는 것이 허용되지 않아야겠으나’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당위성을 말하는 것이고,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9절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함이라
‘맛보다’는 ‘알게 되다, 무언가를 인식적으로 또는 감정적으로 경험하다’ 등을 의미하며, 결국 ‘경험하게 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대신하여(ὑπὲρ) 짊어지신 고난이요 죽음이었습니다. 전치사 ‘휘페르 (ὑπὲρ)’에는 ‘~을 위하여’와 ‘~를 대신하여’ 두 가지 의미가 다 들어 있습니다. 이 ‘대신’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묵상은 그분께 영광과 존귀를 돌리게 만듭니다.
10절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온전하게 하다’는 ‘반대할 것이 없는 사람에 의해 불완전한 상태를 극복하거나 대체하는’ 것을 말합니다. ‘끝내다, 마치다, 목표/성취로 이끌다’ 등의 의미도 있습니다. 자칫 구원의 창시자를 온전하게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으나 그는 이미 온전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더 이상 온전하게 할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영광에 들어가기에는 장애물들이 많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들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구원의 창시자의 고난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고난을 통하여’가 여기에서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1절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나왔다는 것은 구원의 창시자의 고난을 통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고난이 없이는 죄인들이 거룩해질 수 없었습니다. 그 ‘고난’을 통해 거룩하지 못한 자들을 거룩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하다고 부르십니다. 나아가 형제라고 부르십니다.
14절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멸하시며’는 ‘끝장내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하다, 쓸어버리다’ 등을 의미합니다. 마귀가 그렇게 되게끔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성육신을 통한 주님의 ‘죽음을 통해서’였습니다.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의 기원은 바울이 아닌 주님이셨습니다. 마귀는 주님 생전에 그를 죽이려고 발버둥쳤지만 그의 죽음이 자신들을 멸망으로 이끌 수 있음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 안에서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은 가장 약해지는 것 같으나 실은 가장 강해지는 비결입니다.
15절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일평생(διὰ παντὸς τοῦ ζῆν) 종으로 지배되는 모든 사람을 놓아주려 한다’는 의미입니다. 성육신의 또 다른 목적입니다. ‘죽음에 종 노릇 하는 모든 사람’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그 사람들을 자유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의 피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그리스도의 피는 강력합니다. 다만 그 피를 자발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17절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죄로 인해 가로막힌 하나님과의 소통의 창구가 열리기 위해서는 먼저 죄를 제거해야 합니다. 그렇게 죄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은 흠과 티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뿐입니다. 자기 힘/능력으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말하는 대속/속죄는 중요합니다.
18절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현재의 개역개정 번역은 상당히 애매모호합니다. 헬라어로 볼 때, 이 부분은 ‘그 자신이 고난을 당하실 때(in that which He has suffered) 시험을 받으셨으므로’라고 한 NASB의 번역이 가장 적절해 보입니다. 시험을 받으신 것을 마치 주님께서 고난 앞에서 갈등하신 것처럼 이해하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주님은 고난 받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평생 그것을 준비하셨고, 마침내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의 고민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그것은 삼위 하나님 의 단절에 관한 것이었습니다(존 스토트).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십자가 고난을 경험하신 주님이 우리가 유사한 시험을 당할 때 능히 도우실 수 있다는 그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와 공감하실 수 있는 주님이 오늘도 동행해 주실 것을 믿으며 확신에 찬 발걸음을 내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첫댓글 예수님이 하늘의 천사보다도 훨씬 뛰어난 하나님의 아들이자 세상을 지으시고 구원하신 분임을 유념하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의 반짝거리는 속임수와 시류에 금세 휩쓸려 떠내려가 버릴 것입니다.(1:1-2:1)
또한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큰’ 구원인지 제대로 알지 못할때도 죄의 심각성과 예수의 성육신과 고난, 죽음, 부활의 이해에서 오는 유익을 다 놓치게 됩니다. 예수님도 시험받고 고난당하심으로 우리가 겪는 어려움을 아시고 능히 도우실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좌절하지 않고 예수님을 더욱 굳세게 붙들게 합니다.(2:18)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때문에 시험받으신 예수님과 다르게 우리의 시험은 정욕에 의한 것일 때가 많은것 같습니다. 욕심을 따를때 우리가 겪는 것은 고난이 아니라 그 상태에 계속 빠져있고 싶은 만족감일 것입니다. 시험과 고난의 유무보다는 내가 받는 시험과 고난의 이유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살펴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받은 ‘큰’ 구원보다 훨씬 못한 가치를 가진 것에 집중하느라 우리를 아들이라 형제라 부르신 하나님께 내어드릴 내 마음과 힘과 능력을 허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1:14, 2:10-13)
정말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실로 '큰' 구원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평안과 안식을 누리고 싶은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겪어야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십자가 고난을 겪으신 주님의 은혜와 내가 겪으며 살아가는 시험과 고난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나의 죄로 인해 겪을 멸망의 고난을 대신 지신 주님의 은혜와 그로 인해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게된 나의 삶의 행태를 비교해 봅니다.
부끄러운 나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부르시고 구원해 주신 은혜에 다시 한번 감격해 봅니다.
고난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불편한 동반자와 같지만, 주님을 더욱 의지하게 하는 순기능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십자가 고난을 경험하신 주님이 우리가 어떠한 상황을 당할 때도 능히 도우실 수 있다는 것에 소망을 갖게 됩니다.^^
우리보다 더 깊이 인생을 경험하신 우리 주님께 모든 짐을 내려 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