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이서] 진리안에서 행하는 기쁨 (요이 1:1- 6)
본문- 요한이서 1: 1- 6
제목- 진리 안에서 행하는 기쁨
오늘 말씀 ‘진리 안에서 행하는 기쁨’이라는 제목입니다. 조금 전에 우리가 불렀던 찬송도 우리가 주안에서의 기쁨을 고백한 그런 찬송입니다만은 주님과 함께 신앙의 길과 가는 여러분들, 그 길이 언제나 편안하거나 형통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것은 내게 기쁨이 여전히 있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하는 주님과의 동행의 확신이 평생토록 여러분을 기쁨으로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요한일서에 이어서 요한이서는 내용과 배경은 요한일서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 중에 한 장으로 되어있는 성경 중에 하나이고, 아주 짧지만, 아주 중요한 말씀이 담겨져 있습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이단 사상이나 성도들을 부도덕한 생활, 그것을 방종으로 이끌어가는, 미혹하는 적그리스도를 경계하기 위해서 요한이서를 기록하였습니다.
1절에 보면 발신자가 장로로 되어 있습니다.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에게, 또는 그의 자녀에게 편지한다. 수신자는 택하심을 입은 성도, 여성들, 교회 여성들입니다. 그런데 이 장로가 누구일까? 하는 부분은 여러 이야기들이 있지만, 전통적인 해석은 사도요한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다. 요한삼서에 가보면 장로는 사랑하는 가이오에게 편지한다라고 자신을 또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장로하고 하는 표현은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장로하고 하는 의미와는 조금 다른 그런 의미입니다. 요즘 같으면 목사와 장로를 통합한 대단히 권위 있고, 폭넓은 그런 의미에서의 장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이렇게 분명한 수신자, 편지를 받는 사람을 지칭하면서 1절에서 3절까지는 인사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인사말 속에는 전형적인 사도요한의 언어가 담겨져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편지를 쓰시면 여러분 나름대로의 틀, 어떤 형식이 있을 것입니다. 저도 편지를 쓰면 저 나름대로 쓰는 그런 형식이 있습니다. 시작하는 것도 틀이 있고, 마치는 것도 나름대로의 틀이 있습니다.
일반 성도에게 편지할 때는 이런 식으로 하지요. 만약에 나경원집사님에게 제가 편지를 쓴다면 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 안에서 한 형제가 된 나경원집사님, 주 안에서 동역자가 된 나집사님, 이런 식으로 시작합니다. 상대방이 그 첫마디 문장만 보아도 굉장히 마음이 푸근해지고, 또 상당히 기분이 상승한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지요.
왜냐하면 그 한마디에 상대방이 나를 대하는, 나를 생각하는 배려가 충분히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목회자끼리도 동역자, 파트너쉽이라는 말을 쓴 것에 대해서 감격한 사람이 너무나 많아요. 그 말은 우리 사회가 너무나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일이 적다라고 하는 일이 우리가 잘 표현해 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요한의 언어 속에는 그가 잘 쓰는 단어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 진리, 지식, 거함, 이런 단어들은 전형적인 사도요한의 언어들입니다. 이런 언어들을 통해서 사도요한은 교회 일치에 대한 깊은 확신을 그 단어를 통해서 사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속성이나 우리의 인격이나 혹은 그 사람의 지식의 수준이나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신앙적인 관심이 무엇인가를 잘 대변해 주는 것입니다.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알 수 있지요. 제가 지금 여러분들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저 분은 오늘 아침에 싸우고 왔구나’ ‘저 분은 굉장히 가정이 온통 주일 예배 준비로 아주 정말 감격과 기대 속에 왔구나’ ‘저 사람은 오늘 별로 오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그냥 눈도장 찍으러 왔나보다’ 얼굴 속에 마음의 표현이 다 담겨져 있어요.
슬픔과 기쁨이 표현되고, 기대와 실망이 표현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모함과 그리고 별 관심없는 지루함도 표현이 됩니다. 우리의 그 얼굴은 우리 마음의 모든 상태를 표현해 주는 거예요. 그 얼굴 속에서도 그 마음의 창이라고 하는 게 바로 눈입니다. 눈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 깊히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은 다른 이야기를 할 것이 없는 거예요.
어떤 분은 설교 시간만 되면 성경을 읽습니다. 예배와 성경읽기, 굉장히 근사치 같고, 가까운 것 같은데 이것은 천국과 지옥처럼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말씀을 들어야 할 시간에 눈을 마주치지 않고, 나는 성경을 읽을 테니까 당신은 떠들어라. 그러고 있는 거지요. 이것은 교회 오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더 악랄한 아주 좋지 않은 태도입니다.
제가 먼저 교회 있을 때, 아버님이 설교를 하기 시작하면 권사님 한 분이 성경을 읽기 시작해요. 그래서 아버님이 늘 고민을 하셨어요. 그 분은 왜 말씀만 시작되면 성경을 읽을까? 아버님이 고민고민 하다가 그 댁에 심방을 갔어요. 아니 권사님은 왜 설교시간만 되면 성경을 읽습니까?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렇게 헌신적이고, 신앙적으로 열정을 가진 그 분이 어떤 분이 어느 날 누가 어디로 가면 참 좋다고 철야기도 한 번만 참석해 보라고, 성경공부 한 번만 해 보라고 그래서 순수한 마음으로 따라갔다가, 점점 자주 출입하게 되고, 자주 출입하게 되면서 바른 신앙생활에서 곁길로 가게 되었어요. 아무도 몰라요. 그 몇몇 비밀리 다니는 사람만 알게 되었어요. 그런 이후에 달라진 태도는 목사님의 설교시간에 설교를 듣지 않고, 그 자리에 있어야 하니까 차선의 방법으로 성경을 읽기 시작한 것입니다. 병이 들어도 아주 깊이 병이 든거지요.
그래서 심방을 통해서 그 상황을 파악하고, 다시 그 분을 돌이키는 일에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결국 그 분은 여자 장로까지 되는, 다시 신앙의 길을 회복하고, 헌신의 길을 갔지만, 참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우리의 예배의 태도라고 하는 것은 내 마음을 표현하는 거예요. 마음은 말씀은 사모하는데, 내 눈은 성경을 봅니다. 이건 말이 되지 않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우리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언어를 통해서 내 마음의 상태, 내 신앙의 상태, 그 모든 관심이 언어를 통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의 언어는 우리의 교회가 하나 되는 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해서 하나되는 일을 위해서 그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지식을 이야기하고, 예수 안에 거함을 이야기 하는 줄로 믿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한 가지만 선택을 하라고 하면 진리라고 하는 단어가 오늘의 키워드입니다. 오늘 1절에서 6절 가운데 진리라고 하는 말씀을 우리가 잘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곁길로 가기가 쉽지요?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이 성경말씀이 말씀하고자 하는 의도가 뭔가, 그것을 위해서 때때로 주님은 비유를 들기도 하고, 주님은 예를 들기도 하지만, 결국은 중심은 하나인데, 잘 못하면 예를 든 것으로 중심으로 빠질 수도 있고, 비유 든 것으로 빠질 수도 있어요. 중심이 있어야합니다.
오늘 말씀의 중심적인 단어는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오늘 2절말씀과 4절말씀에서 진리에 대한 그 의미를 잘 구별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2절을 보면 진리에 대한 중요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 진리는 우리 안에 영원히 거할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히 거할 진리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 진리는 우리와 함께 할 진리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진리라도 그것이 나와 상관이 없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성령이 능력이요, 진리요, 큰 열매를 맺는다고 한들 그 성령이 나와 상관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성령이 우리 어머니의 충만함, 우리 배우자의 충만함, 우리 성도의 충만함일 뿐만 아니라 내가 성령의 충만해야 바로 성령과 나와의 하나됨을 맛 볼 줄로 믿습니다.
진리는 또다시 두 가지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상대적인 진리입니다. 이 말은 진리가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환경이 변함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예를 들어서 73년도 가을에 대학입학시험을 보았습니다. 그 때 국사시험에 우리 나라 구석기시대는 몇 년까지로 볼 수 있느냐? ① 3만년전 ② 4만년전 ③ 3-5만년전 ④ 6만년전 그 때 국사 시간에 배운 게 3만년전이라면 우리는 무조건 ①번을 동그라미 쳐야 컴퓨터는 맞다고 응답을 합니다.
그게 73년도의 진리입니다. 고고학자들이, 국사학자들이 결론을 낸 그런 대답입니다. 저는 12일날 새로운 뉴스를 들었습니다. 충청북도 진천 송두리라고 하는 지역에 도로공사를 하는 중에 구석기 유물을 발견했는데, 주먹도끼, 주먹대패, 이런 것들을 무려 80여점이나 발견을 했습니다. 문화재청에서 발표하기를 출토지층을 조사한 결과 5만년 전에 구석기 시대에 유물이라고 발표를 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중부내륙지역에 구석기 문화가 존재했음을, 그것도 5만년전에 존재했음을 알려준다는 의미에서 대단히 학술적으로 의미가 있는 발굴이다라는 발표를 했어요.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제 우리나라의 구석기 문화에 대한 연대가 5만년전으로 올라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73년도의 구석기시대의 연대는 이제는 틀린 것이 되지요. 내년도 입학시험을 볼 학생들은 이번에 발표된 것을 근거로 해서 답을 써야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 전의 사람들에 진리를 규정한 학자들을 우리가 비판하거나 책망할 수는 없어요. 왜? 그것이 상대적 진리에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달라지고, 새로운 발견과 새로운 발명에 의해서 그 진리는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진리는 상대적인 진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빌라도에게 고소를 당해서 빌라도 법정에 서셨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직접 심문합니다. ‘니가 유대인의 왕이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두 번째 빌라도가 묻습니다. ‘사람들이 니가 진리라고 말하는데 그러면 진리란 무엇이냐?’ 빌라도가 예수님을 향해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빌라도는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입니다. 당시에 헬라철학을 그대로 인수한 로마제국, 로마제국에서 로마의 군사, 특히 로마의 장교가 된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영광입니다. 최고의 학문을 겸비한 사람들입니다. 그가 진리를 모를 까닭이 없습니다. 주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철학적 관심 때문이 아니지요. 우리는 흔히 말합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 지금 빌라도가 예수님을 향해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학문적 관심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지요.
지금 빌라도 머릿속에 진리라고 하는 개념은 지금 시대가 로마제국시대가 아니냐? 다시 말하면 로마제국처럼 힘을 가지고 지배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냐? 그런데 지금 네가 나한테 고소당해서 죄인의 몸으로 내게 와 있는 주제에 무슨 진리 타령이냐? 그 이야기지요.
그런데 그를 향해서 우리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얼마나 당당하신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절대적인 진리는 세월이 변해도 우리의 환경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인 줄 믿습니다.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는 과거나 오늘이나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진리에 대한 확신은 이래야 합니다. 그 진리를 알 뿐만 아니라 이제 그 진리를 행한다 함을 들으니 내가 기쁘도다.
목회자의 기쁨은 이것입니다.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살 때, 성도들이 말씀 안에서 살 때,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과 제도 속에서도 주의 자녀로써, 그리스도의 자녀로써 살려고 몸부림 치는 모습을 볼 때 기쁨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6절에서는 진리에 대한 기쁨을 실천하고 있는 성도들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수신자인 택하심을 입은 부녀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정의를 하시면서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는 이 계명을 쫓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을 수 있지요? 대답합니다.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결국 계명과 사랑이란 하나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 그것이 계명을 지키는 일이요,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요, 그것이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이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의 계명 안에서 행하는 것인데, 그것은 마치 예수께서 행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행하는 것, 주님이 모델이 되고, 주님이 모범이 되어서 그 주님을 따라서 사는 것, 그것이 사랑이요, 그것이 사랑을 지키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여러분을 바라보시면서 기뻐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스바냐서는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기쁨을 이기지를 못하신다. 왜? 잘 하고 있기 때문에......
견디기 힘든 환경 속에서, 견디기 어려운 시련 속에서 주님의 말씀, 주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생명을 거는 이들을 보면서 주님은 그 기쁨을 이기지 못 하신다. 찬송합니다. 고백합니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사랑하는 성도의 삶이 언제나 진리 안에서 행하는 기쁨 안에서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주님의 기쁨 되기 위해서 어떤 삶의 환경과 조건이 여러분들에게 다가와도 주님을 향한 그 삶, 기쁨이 되기를 원하는 여러분의 삶의 목표와 그 의지가 꺾이지 아니하고, 진리 안에서의 기쁨의 삶이 늘 여러분들을 통해서 표현되고 증거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세상이 바뀌고, 환경이 바뀌어도, 진리이신 주님이 변할 수 없듯이 우리 역시 주님을 바라보며 진리 안에서 행하는 기쁨을 온전히 누리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기쁨이 되기를 위하여 오늘도 주님의 자녀로써, 주님의 계명을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행하기를 원합니다. 실천적인 삶, 구체적으로 행하는 평안의 성도들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