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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1:1 <엘리야와 아하시야 왕>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
왕하1:2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왕하1:3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왕하1:4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
왕하1:5 사자들이 왕에게 돌아오니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돌아왔느냐 하니
왕하1:6 그들이 말하되 한 사람이 올라와서 우리를 만나 이르되 너희는 너희를 보낸 왕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고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네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고 보내느냐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더이다
왕하1:7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올라와서 너희를 만나 이 말을 너희에게 한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더냐
왕하1:8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왕하1:9 이에 오십부장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매 그가 엘리야에게로 올라가 본즉 산 꼭대기에 앉아 있는지라 그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왕하1:10 엘리야가 오십부장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너의 오십 명을 사를지로다 하매 불이 곧 하늘에서 내려와 그와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살랐더라
왕하1:11 왕이 다시 다른 오십부장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니 그가 엘리야에게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속히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하니
왕하1:12 엘리야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너의 오십 명을 사를지로다 하매 하나님의 불이 곧 하늘에서 내려와 그와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살랐더라
왕하1:13 왕이 세 번째 오십부장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보낸지라 셋째 오십부장이 올라가서 엘리야 앞에 이르러 그의 무릎을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하건대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 명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왕하1:14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전번의 오십부장 둘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살랐거니와 나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하매
왕하1:15 여호와의 사자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고 함께 내려가라 하신지라 엘리야가 곧 일어나 그와 함께 내려와 왕에게 이르러
왕하1:16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사자를 보내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 하니 이스라엘에 그의 말을 물을 만한 하나님이 안 계심이냐 그러므로 네가 그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니라
왕하1:17 왕이 엘리야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죽고 그가 아들이 없으므로 여호람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니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둘째 해였더라
왕하1:18 아하시야가 행한 그 남은 사적은 모두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1:1
본절은 이스라엘 역사의 새로운 국면을 시사하는 것으로서 당시의 배경과 이스라엘의
역사적 정황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묘사하고 있다. 첫째, 북이스라엘이 창건된 이래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오므리 왕가(왕상 16:15-29)가 아합 왕의 죽음(왕상
22:29-40)으로 그 세력이 급격히 약화 되었음을 보여 준다. 앗수르 왕 살만에셀
(Shalmaneser)이 남긴 기록을 보면 당시 아합 왕은 2,000대의 전차와 10,000명의 군사
를 지휘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아합 왕의 막강함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둘째, 이 막강한 아합 왕의 죽음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약해지자 모압이 반기
를 들었음을 보여 준다. 모압 왕 메사(Mesha)가 남긴것으로 전해지는 모압 비문
(Moab's epitaph)에 보면 모압이 이스라엘 왕국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 것은 오므리의
아들 때부터라고 한다. 그런데 오므리의 아들은 곧 아합 왕을 말한다(왕상 16:28). 결
국 모압은 다윗에 의하여 정복을 당한 뒤(삼하 8:2) 계속 이스라엘의 속국이 되어 조
공을 바쳐오다가 아합 왕 때부터 서서히 반기를 들기 시작하여 아합 왕이 죽은 후에는
완전히 이스라엘을 배반한 것이다(Keil & Delitzsch, Wycliffe, Pulpit Commentary).
한편 모압이 이스라엘을 반역한 기사는 3:4-27에 다시 나온다. 그러니 보다 상세한 내
용은 그곳 주석을 참조하라.
=====1:2
다락 난간 - 팔레스틴 지방의 다락은 대개 평평한 지붕 위에 꾸민 방으로 보통 방
으로 보통 방에 비해 크다(눅 22:12;행 1:13;9:37;20:8). 그리고 그곳을 오르내리는
계단은 건물밖에 있다. 대하 33:1-11 강해, '히브리인의 주거 형태' 참조. 한편 다락
방에는 하나의 창문이 있는데 창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창살이 나 있고 그 창살
은 격자무늬로 되어 있다. 본절의 '난간'에 해당하는 원어 '사바크'(* )도 그 원
의(原義)는 '창살'이다. 이 다락에서는 멀리까지도 조망할 수 있었는데 아하시야 왕은
바로 이곳 창문에서 밖을 내려다 보다가 그만 체중을 못이겨 밖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떨어져 병들매 - 높은 곳에서 떨어져 심한 타박상 및 골절(骨折)을 입은 것을 가리
킨다. 거기에다 합병증까지 발생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에그론 - 에그론(Ekron)은 블레셋 평원에 있는 다섯 성읍 중에 하나(수 13:3)로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다. 따라서 이스라엘과는 상대적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도
시이다. 오늘날 이곳은 아키르(Akir)로 불리우고 있는데 옛날 폐허의 자취를 아직도
지니고 있다. 여호수아 13:3 주석 참조.
바알세붑 - '바알세붑'(Baal-zebub)에서 '바알'(* )은 '주'(Lord), '소유주',
'남편' 등을 의미하며, '세붑'(* , 제붑)은 '파리, 날벌레'라는 뜻이다(사
7:18;전 10:1). 그러므로 '바알세붑'은 '파리의 주', '날벌레의 주'라는 뜻이 된다.
혹자(G. Rawlinson)는 '바알세붑'을 '베엘 사멘'(Beel-Samen)과 동일한 신으로도 보았
다. '바엘 사멘'은 베니게인(Phoenician)들이 섬기던 '하늘의 주'이다(Pulpit
Commintary). 그러나 이것은 어원적인 자료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그런데 70인역
(LXX)은 '바알세붑'을 '바알 뮈안'(* ) 또는 '데온 뮈안'(*
)으로 번역하였다. 이와 관련해 혹자는 '데온 뮈안'을 파리 형상으로 된
신으로서 질병을 보내기도 하고 파리로부터 오는 질병을 지켜 주기도 하는 신이라고
주장하였다(Starke). 한편 신약에서는 '제붑'이 '제불'(Zebul)로 읽혀지고 있는데(마
10:25), '제불'은 '왕'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은 '바알세불', 즉 '바알 왕'이라는
칭호가 '바알세붑'의 본래의 칭호라는 간접적인 증거가 된다. 또한 바알세붑은 후대
랍비들에 의하여 '바알세벧'(Ball-Zebel)이라고 불리워지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분토
(糞土)의 왕'이라는 뜻이다. 이것으로 보아 왕이라는 뜻의 '세불'이 점차 '세붑', '세
벧' 등으로 불리워진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우상에 대하여 나쁜 인상을 심어 주려 한
탓으로 짐작된다(Keil & Delitzsch Commintary, Vol. , p.285). 따라서 후에 '바알세
불'은 여호와의 적대자인 사단의 칭호로도 쓰이게 되었다(마 10:25;막 3:22;눅
11:15).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 아하시야의 어리석음이 잘 나타나 있는 말이다. 그는
우상에게 자신의 쾌차(快差) 여부를 묻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병을 치유하기 위한 갖
은 노력을 다 기울였어야 마땅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겸손히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
하여야 했다. 왜냐하면 그의 사고와 질병을 계속 아비와 어미,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
는 죄악(왕상 22:51-53)을 깨닫게 하여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하
나님의 징계의 채찍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하시야는 계속 우상의 마술적 신탁
(oracle)에만 의지하였으니 결국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은 심판의 채찍으로 화(化)하고
말았다(4, 16, 17절).
=====1:3
여호와의 사자 - 역사에는 '여호와의 사자'(the angel of the Lord)라는 문구가 흔
하지 않다(K.Koch).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편집자에 의한 삽입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Hobbs). 왜냐하면 엘리야와 관계된 기사들 속에서 '여호와의 사자'의 역할은 대
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왕상 19:7). 특히 본장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아하시야 왕이
보낸 '왕의 사자'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될것이다. 한편
당시 엘리야가 만난 '여호와의 사자'는 천사가 아니라 여호와 자신이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사실 성경 가운데는 '여호와의 사자'라는 말이 화육(化肉, incarnation)하시기
전의 그리스도, 즉 구약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용어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본절에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도 구약의 그리스도라고 봄이 타당할 것 같다. 특히 구
약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 민족의 보호자로 직접 나타나심과 같이(출 23:20, 21;사
63:9) 본절의 '여호와의 사자'도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해 나타났다
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사자'라는 표현은 엘리야의 사역과
관련하여 세번 밖에 언급되지 않았으며(왕상 19:7, 15;왕하 1:3) 그 이외에는 하나님
의 계시를 가리켜 주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16절),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다'(왕
상 17:2;9:9)라고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표현 역시 본절의 '여호와의 사자'가
삼위의 하나님 중 한 분인 구약의 그리스도라는 증거가 된다. 이와 관련한 보다 자세
한 내용은 창 16:7-16 강해, '여호와의 사자'를 참조하라.
디셉 사람 엘리야 - '엘리야'(* )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
이시다'라는 뜻이다. 구약에서는 엘리야라는 이름이 대단히 많이 언급되어 있는데(대
상 8:27;스10:21,26) 대개 히브리인들의 '여호와 신앙'의 반영(反映)이다. 한편 디셉
(Tishbe)은 요단 동편의 길르앗 지경에 위치한 한 성읍으로(왕상 17:1) 오늘날 길르앗
북쪽의 산악 지대인 리스딥(Listib)과 동일한 성읍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물으러 가느냐 - 강한 역설적 표현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즉 산 자의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 전 역
사를 통해 나타나신 바된 능력의 하나님이시다(출 3:15;마 22:32). 뿐만 아니라 그분
은 자기가 택한 백성 이스라엘과 항상 함께 계시면서 그들을 보호하셨던 하나님이시
다. 그러한 증표로서 하나님은 솔로몬으로 하여금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도록 하셨으
며(삼하 7:13; 왕상 6:1 이하) 끊임없이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
심을 나타내셨다. 따라서 이상과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아하시야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이방인의 우상인 바알세붑을 찾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배반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오늘날 극도로 문명이 발달되고 이기주의가 판치는 세상에
사는 성도들에게는 주변의 모든 것이 우상이 되기 쉽다. 그러므로 더욱더 경성함으로
행여 하나님보다 다른 무엇을 더 의지하는 잘못을 범치 말아야 할 것이다(마 10:37;요
일5:21).
=====1:4
그러므로 - 여기서 '그러므로'(therefore)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라켄'(* )
으로서 결과를 나타내는 부사이다. 즉 이는 이제 아하시야의 우상 숭배죄 때문에 그에
게 죽음의 심판이 임하였음을 보여 준다(Pulpit Commentary).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심
판에는 항상 분명한 이유가 있으니 우리가 그 이유를 분명히 알 때 하나님의 징계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게 될 것이다(약 1:13, 14).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 - 이처럼 엘리야는 아하시야가 반드시 죽으리라는 엄청난 소
식을 듣고서도 그 소식을 아하시야의 사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지체없이 길을 떠났
다. 이것은 엘리야의 위대한 신앙의 모습일뿐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즉각적인 순종의
자세인 것이다. 왜냐하면 일국(一國)의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왕에게, 더군다나
악하기로 소문나 있는 아하시야(왕상 22:52)에게 그의 죽음 소식을 알린다는 것은 웬
만한 신앙과 용기가 아니고서는 행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즉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의 위험도 무릅쓴 신앙의 용장이었던 것이다.
=====1:5
사자들이...돌아오니 - 그렇게 짧은 시간으로는 분명 에그론에 다녀올 수 없었는데
왕의 사자들이 돌아온 시간은 의외로 빨랐다. 아하시야 왕이 '어찌하여'라고 놀람을
표현한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왕의 사자들은 엘리야를 만난 후 왕에게
로 즉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첫째, 엘리야가 갑자기 왕의 사자들을
찾아와서 책망을 하며 놀라운 심판을 선언했기 때문이다(6절). 엘리야는 왕의 사자들
이 무엇때문에 에그론으로 가는지 전혀 묻지도 않았으면서 그 이유를 이미 다 알고 있
었던 것이다. 둘째, 엘리야의 외모에서 풍겨 오는 신적 권위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왕의 사자들은 엘리야의 외모를 자세히 살펴본 것 같다. 이는 그들이 왕에게 보고하는
장면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8절).
=====1:6
한 사람이 올라와서 - 왕의 사자들 중 그 누구도 당시에 널리 알려져 있던 선지자
엘리야를 보고 못알아 보았을리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엘리야를
가리켜 '한 사람' 이라고 표현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첫
째, 엘리야를 보호해 주려는 의도 때문이다. 그들이 처음 엘리야를 만났을 때 그의 신
적 권위에 압도되었다는 사실이 이런 주장을 유력하게 해준다. 둘째, 자신들의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이다. 즉 그들은 엘리야로부터 저주의 말을 듣고서도 엘리야를
그냥 놓아준 일로 인해 아하시야로부터 노여움을 살까봐 두려워하였던 것이다(왕상
18:7-15).
=====1:7
모양이 어떠하더냐 - '모양'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미쉬파트'(* )
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특별한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본래 '미쉬파트'는 법적인 용
어로서 '심판', '공의'라는 뜻이다. 그래서 70인역(LXX)은 이것을 '심판이 무엇이냐'
(* , 티스 헤 크리시스)로 번역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
서 '미쉬파트'는 일개인의 '특징'이나 '습관' 그리고 '생김새'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KJV는 이를 '외양이 어떠하냐'(What was the appearance)로, RSV는 '어떤 종류의 사람
이더냐'(What kind of man was he)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Living Bible은 '어떻게
생겼느냐'(What did he look like)로, 공동 번역은 '어떻게 차린 사람이더냐'로 각기
번역하고 있다. 이로 보아 아하시야는 엘리야의 외모 뿐만 아니라 그의 습관이나 특징
등을 모두 포함하여 그가 누구인가를 충분히 판단할 수 있는 상세한 답변을 요구하였
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아하시야가 사자들로부터 엄청난 소식을 듣자 이처럼 제일
먼저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어한 까닭은 무엇이겠는가? 아마도 첫째,
그사람이 정말로 죽음을 예언할 만큼 권위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거짓 예언자나 미친
사람에 불과한지를 알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자신의 생사(生死)와
관련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둘째, 혹 그가 바로 자기 부친 아합에게 저주를 선포했던
엘리야(왕상 21:20-22)가 아닌가 하고 추측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아하시야는 사자들
의 보고를 접한 순간 엘리야가 또다시 활동하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을 수 있다
(Wycliffe, Pulpit Commintary).
=====1:8
털이 많은 사람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바알 사아르'(* )로서
'어떤 털의 소유자'(a certain possessor of hair)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만으로는
그 정확한 뜻이 모호한데 대개 다음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첫째, '머리털이 많이
난 사람'이라는 뜻이다. 혹자는 엘이야의 특징이 바로 그 머리털에 있었다고 한다
(Hobbs). 70인역(LXX)도 이같은 견해를 따라 본절을 '머리털이 많은 사람'(*
, 아네르 다쉬스)으로 번역하고 있다. 둘째, '털옷을 입은 사람'이라는 뜻
이다. 이에 따라 RSV는 본절을 '그가 털로 만든 겉옷을 입었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혹자는 당시 엘리야가 무두질하지 않은 털가죽 옷을 입고 머리는 어깨 위로 길게 늘어
뜨린 채 다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Dake, Rawlinson). 그런데 이상의 두 견해 중 보다
보편적인 주장은 후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 세례 요한이 약대 털옷을 입었던 점
(마 3:4)이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 해 주기 때문이다. 특히 거짓 선지자들 조차 사람의
눈을 속이기 위하여 털로 된 겉옷을 입고 다녔던 점(슥 13:4)으로 보아 당시 선지자들
에게 있어서의 털옷은 '사명자의 표시'임과 동시에 '권위'를 상징했던 듯하다.
허리에 가죽띠를 띠었더이다 - 여기서 '허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트나임'(*
)은 두 가지 뜻이 있다. 1)띠나 속옷으로 둘러싸는 곳으로 '요부'(腰部) 전체
를 가리킨다. 2)신체의 한 가운데 부분으로 인체의 힘이 집중되어 있는 '허리'를 가리
킨다. 다음으로 '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에조르'(* )로서 '마트나임'을
둘러싸는 천이나 혁대를 가리킨다. 공동 번역은 이를 '아랫도리를 가린 것'으로 번역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죽띠가 아닌 무명이나 면 같은 천으로 만
든 띠를 두르고 다녔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 p. 286). 그리고 대제
사장이 매는 띠는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 그리고 가늘게 꼰 베실로 만든 세마포 띠
였다(출 28:8). 그 반면에 가죽띠는 매우 거칠어 착용하기 불편하였으므로 주로 가난
한 사람들과 고행자들이 착용하였다(Pulpit Commentary). 따라서 엘리야의 옷차림은
대부분의 사람들과 아주 대조적인 것으로서 죄악된 세상으로부터의 분리와 죄악된 세
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 것으로 보여진다(Keil, Rawlinson).
왕이 가로되 그는...엘리야로다 - 이처럼 아하시야가 사자들로부터 외양적인 설명
만을 듣고서도 그가 엘리야라는 사실을 안 것으로 보아 아하시야는 평소 엘리야에 대
하여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아하시야가 평소 엘리야를 알고 있었다는 것은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과 그가 전한 말도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하시야가 자신의 죄악을 뉘우치지 않고 도
리어 엘리야를 체포하려 했던 것(9-13절)은 그가 얼마나 강퍅한 인간이었는가를 잘 보
여 준다.
=====1:9
오십부장과 그 오십 인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매 - 각 부장 제도는 모세의 장인 이드
로의 충고에 따라 모세가 처음으로 세운 이스라엘의 준(準)군사 체제이자 행정 조직이
다(출 18:21-25). 이때 세움받은 부장들은 곧 십부장, 오십부장, 백부장, 천부장인데
이러한 군대 조직의 체계는 고대 근동에 있어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였다(참고;H. W.
F. Saggs, The Greatness That Was Babylon, p. 254). 한편 아하시야 왕이 오십부장과
그 오십인을 엘리야에게로 보낸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첫째, 엘리야가 순순
히 따라오지 않을 경우, 강제로 끌고 오기 위해서이다. 그렇지 않고 아하시야가 선의
(善意)를 가지고 있었다면 한 사람의 사자만 보냈어도 충분하였을 것이다. 둘째, 하나
님의 사람 엘리야의 초인적인 능력을 의식했기 때문이다(요 18:3). 이처럼 아하시야는
선지자 엘리야에 대한 강한 적의를 품었을 뿐만아니라 의식적으로 하나님께 당돌하게
대항하려고 했던 것이다.
산 꼭대기에 앉았는지라 - 여기서 '산'이란 뜻의 '하르'(* )에는 어떤 특정한
대상을 가리키는 정관사 '하'(* )가 붙어있다. 이것은 본절의 '산'이 앞서 엘리야가
왕의 사자들과 만났던 바로 그 산(3절)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은 엘리야가 여호와
의 사자의 명령대로 시행한 후(3,4절) 도망하지 않고 아하시야가 취할 다음 단계의 행
동을 조용하고 냉정하게 기다리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Dake). 한편 분명하지는 않으나
일부 학자들은 엘리야가 앉아 있던 산이 갈멜 산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Baker, Delitzsch). 사실 갈멜 산은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과 싸우던 곳으로서(왕
상 18장) 본장의 주제와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 주체는 바로 하나님의 사자와
왕의 사자 간의 싸움인데 그 싸움의 승패를 결정짓는 심판자는 앞서의 경우와 마찬가
지로(왕상 18:38)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불이었다(10, 12절).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내려오라 하셨나이다 - 여기서 '내려오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레다'(* )로서 '싸우려 산에서 내려오다', 또는 '홍수처럼 급히 내
려오다'라는 뜻의 동사 '야라드'(* )의 능동태 명령형이다. 따라서 이는 아하시야
가 일국의 왕으로서 엘리야에게 명령하고 있는 말임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하나님
의 사람이여'는 선지자를 부를 때 흔히 쓰는 호칭이다(삼상 2:27;9:6,10). 그러나 아
하시야가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여기서는 엘리야
를 빈정대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즉 엘리야를 향하여 명령을 내리는 아하시야 왕의 태
도는 존경보다는 경멸에 가까운 것이었다. 한편 '이르되'로 번역된 히브리어 '예다베
르'(* )는 피엘형(Piel;강조형 능동)으로서 '거듭거듭 말한다'라는 뜻이다. 이
처럼 동일한 말을 두번 세번 반복함으로써 엘리야의 감정을 자극한 것으로 보아 오십
부장 역시 아하시야의 명령을 전달함에 있어서 동일한 경멸의 자세를 취하였음이 분명
하다.
=====1:10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 이말은 자신의 권위를 실제로 증명해 보이겠다는
일종의 선포이다.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제 엘리야는 왕의 권위보다 더 큰 하나
님의 권위를 그들에게 증명해 보이겠다는 말인 것이다. 한편 이러한 권위 증명의 문제
는 신약 시대 당시 예수께서도 서기관과 제사장들에 의해서 제기받은 적이 있으시다
(막 11:27-33).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 '불'을 뜻하는 히브리어 '에쉬'(* )는 문자적으로 자
연적인 불을 의미한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며
(출 3:2;13:21,22;19:18) 비유적으로는 '진노의 심판'을 나타낸다(계 20:14,15). 소돔
과 고모라는 여호와께서 내리신 '유황과 불'로 멸망했고(창 19:24), 예수께서도 "아름
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마 7:19)고 심판의 말
씀을 선포하셨다. 따라서 엘리야가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이라고 한 가정적인
표현의 말은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신적 권위가 증명된
것이다. 한편 이처럼 엘리야가 아하시야의 오십부장에게 불심판을 선고한 까닭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는 오십부장의 불손한 태도를 징치(懲治)하기 위함이며, 둘째
는 아하시야왕의 완악함을 경고하기 위함이다.
=====1:11
왕이 다시...보내니 - 아하시야가 왕이라는 공직자의 위치에서 두 번이나 같은 행
위를 시행했다는 것은 이미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 국가적인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그 배후에는 아하시야의 행위를 막을 만한 신하들이 없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엘리야에 대한 아하시야 왕의 도전적인 태도는 더욱더 완강해져 갔다.
이는 곧 어리석음과 완악함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속히 내려오라 - '속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메헤라'(* )로서 '서둘러
서', '빨리'라는 뜻이다. 이것은 '내려오라'는 말을 더욱 강조해 주는 것으로서 권위
주의 의식(意識)이 잔뜩 배어 있는 말이다. 사실 왕이 사자를 보낼 때는 공식적인 용
어를 쓰기 마련이다. 따라서 본절에 나타난 이러한 용어는 선지자 엘리야의 권위에 대
한 경멸과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보여진다. 즉 아하시야는 하늘로부터
불이 임하는 심판을 당하고서도(10절)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더 교만한 자세로 엘
리야와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다(Keil, Matthew Henry, Wycliffe).
=====1:12
릿 완강해진 왕의 거만한 태도에 비해 엘리야 선지자의 태도는 어떠한가? 엘리야는
처음과 동일하게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선지자의 권위를 나타낼 뿐이다. 이러한 본
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1)엘리야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
된 태도를 취함으로써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신분을 잘 지켰다는 점이다. 이런 점은 과
거 모세가 크게 한번 실수하므로서(민 20:11)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과는 대조
적이다. 2)엘리야는 더욱더 거만해진 두번째 오십부장의 불손함을 잘 견딤으로써 하나
님의 사람으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종'된 자로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함과 일관된 자세를 잘 유지하는 것은 현대의 사역자들에게
도 요청되는 필수적인 기본 덕목이다.
=====1:13
올라가서 엘리야의 앞에...엎드려 간구하여 가로되 - 여기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앞의 두 오십부장(9,11절)과 다른 세번째 오십부장의 겸손한 태도이다. 특히
이는 두번째 오십부장의 태도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즉 두번째 오십부장은 전임
자가 징벌을 받은 사실을 알면서도 산 아래에서 엘리야에게 내려오라고 큰 소리쳤었
다. 그러나 세번째 오십부장은 두 전임자를 교훈삼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도로 엘리
야에게 공손한 태도를 표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 여기서 '귀히 보소서'란 말은 히브리어 '티카
르'(* )를 번역한 것이다. 이 단어는 '귀하게 여기다', '존중하다'라는 뜻의
동사 '야카르'(* )의 미완료 변형으로서 어떻게든 긍휼을 베풀어 달라는 간절한
청원이다. 그런데 세번째 오십 부장의 이러한 간구와 겸손함은 아하시야왕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아하시야는 두 차례에 걸친 하나님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9-12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채 또다시 엘리야를 체포하러 세번째 군사들을 파
송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번째 오십부장은 엘리야의 권위와 하나님의 권능을 깨닫고
선 아하시야의 명령과 상관없이 엘리야의 발 앞에 무릎꿇은 것이다(Matthew Henry's
Commintary, Vol. p. 709).
=====1:14
불이...살랐거니와 - 본절은 세번째 오십부장이 두 전임자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징벌을 자신의 교훈으로 삼았음을 보여 주고있다. 이것은 계속되는 하나님의 징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더욱 완악해져가는 아하시야 왕의 태도와 좋은 대조
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고 두려워하는 자는 반드시 구원을
얻기 마련이다(15절;시 149:4).
=====1:15
여호와의 사자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 3절에서 언급되었던 '여호와의 사자'가 본절
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바로 지금까지 엘리야를 보호하고 계셨
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그의 권위를 지탱해 주셨음을 의미한다.
저를 두려워 말고 함께 내려가라 - 여기서 '저'가 가리키는 사람은 아하시야 왕이
다. 그리고 '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미파나이우'(* )로서 '그의 면전
에'라는 뜻이다. 즉,여호와의 사자는 엘리야로 하여금 아하시야 왕 앞에 나아가는 것
을 두려워 말라고 권고하시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두 번의 징벌을 내리
시고 난 후 지금에 와서야 엘리야를 아하시야 앞에 보내시는 걸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다. 첫째, 이제는 아하시야에게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에
있어 방해가 되는 외적인 장애물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이제는 하나님의 심판
에 대해 백성들이나 신하들이 모두 분명하게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즉, 두차례에 걸친
심판으로 인해(9-12절) 이제는 백성들이나 신하들 가운데 세번째 오십부장과 같이 하
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당신의 심
판을 행하심에 있어서 단지 징벌만을 하지 않으신다. 그 심판 속에는 후대의 하나님의
백성들 뿐만 아니라 당대의 백성들에게 주는 귀한 교훈이 담겨 있는 것이다.
=====1:16
본절은 3,4절의 반복일 뿐만 아니라 왕의 사자들에 의해 왕에게 전달된 동일한 말이다
(6절). 그러나 이제 아하시야 왕 앞에서 엘리야 선지자가 이 말씀을 직접 선포한 것은
대단히 의미가 깊다. 즉 엘리야는 우상을 섬기는 포악한 아하시야 왕을 향해서 그의
불신앙을 선포함으로써 어떠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
도 변경함이 없이 담대히 외쳤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의
참된 용기와 담대함을 발견하게 된다(고후 5:6).
=====1:17
엘리야의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 여기서 '대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전치사
'케'(* )로서 '...와 동일하게', '...처럼'이라는 뜻이다. 즉 이는 엘리야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도 틀림없이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가리킨다. 이와같이 열왕기서
에 기술된 역사의 전반을 살펴볼 때 선지자가 선포한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은 곧
하나님께서 그 선지자의 권위를 보증해 주고 계신다는 분명한 증거가 된다(왕상
14:18; 22:13;왕하 2:22; 10:17; 24:2).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 70인역(LXX)과 수리아역(Peshitta)과 라틴어 역본
(Vulgate)에는 '여호람'(Jehoram)이란 말 뒤에 '그의 형제'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다.
그리고 공동 번역, Living Bible, RSV 등도 이것을 옳은 것으로 보고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러나 맛소라 히브리 본문에는 이 말이 생략되어 있다. 아마도 맛소라 본문이
그렇게 한 것은 '여호람'이 '아하시야'의 형제라는 사실을 당대에는 누구나 다 아는
일반적인 상식에 속한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70인역(LXX)등이 '그의 형
제'라는 단어를 삽입해 주므로서 오늘날의 우리들에겐 많은 유익이 되고 있다. 즉, 이
는 당시 아하시야에게 아들이 없었다는 사실과 여호람이 그의 형제라는 사실을 동시에
보여 주는 주석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유다 왕...여호람의 제 이 년이었더라 - 본절과 달리 3:1에서는 유다 왕 여호사밧
(Jehoshaphat)의 제 18년에 이스라엘왕 여호람이 왕위에 오른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반면 8:16에는 유다 왕 여호람이 왕위에 오른 해가 이스라엘 왕 여호람의 제 5년이었
다고 되어 있다. 즉 한 곳에서는 이스라엘 왕 여호람이 유다 왕 여호람보다 약 4년 먼
저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약 1년 늦게 왕위에 올랐다고 서
로 모순되게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이처럼 서로 엇갈리는 연대 기록은 성경 기자들의
기록상의 오류로 인한 것이 아니다. 대신 그 원인은 근복적으로 이스라엘의 섭정 제도
(regency)에 있다. 즉 성경의 연대 기록은 어떤 왕의 섭정 개시 년도부터 계산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정식으로 등극한 해부터 계산되기도 한다. 따라서 아하시야의 형제
여호람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른 연대를 계산함에 있어서도 본절에서는 유다 왕 여호
람이 섭정을 시작한 해를 기준으로 계산한 반면, 8:16에서는 유다 왕 여호람이 정식
등극한 해를 기준으로 계산한 것으로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된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 , pp. 288f).
=====1:18
아하시야의 남은 사적은...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 성경에는 아하시야의 사적이
엘리야와 관련해서 죄를 범했다는 본장의 기록밖에 없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되지 않
은 많은 사건이 이스라엘 왕 역대 지략에 기록되었고 본서가 기록될 당시 사람들은 아
하시야의 여타 사적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성경의 기록에서 분명
히 알 수 있는 사실은 그가 심히 악을 행하였다는 것이다(대하 20:35).
이스라엘 왕 역대 지략 - 이 책(the book of the chronicles of the kings of
Israel)은 신구약 성경 66권 중의 한 권인 역대기(歷代記)가 아니다. 대신 이는 본서
저자가 활용한 자료들 중의 하나인 이스라엘 왕들의 국정 일지(國政日誌)를 가리킨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왕상 14:19 주석을 참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