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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후강해(1)
동역자를 세우라
본문 : 살후1:1-2
멕시코에 사는 “아나블렙스(anableps)”라는
물고기가 있습니다.
이 물고기의 별명은 네눈박이입니다.
위로 툭 튀어나온 눈은 두 개인데,
반쯤 잠겨서 위쪽으로는 물밖에 있는
눈으로는 곤충을 보고(잡아먹고),
물 아래쪽으로 다른 큰 물고기의
공격을 방어합니다.
망막이 4개라서 물 밖과 안을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물고기는 눈에 눈물샘이 없어서
오랜 시간 물 밖에 있으면
눈이 쉽게 메말라 버립니다.
뻑뻑하고 건조한 눈으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기 때문에
아나블렙스는 주기적으로 물속에 잠겨야 합니다.
메마른 눈을 충분히 적셔야
시력을 유지하고 계속해서
앞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더 이상
앞을 볼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눈을 적셔야 할 순간입니다.
메마른 세상에서 세상이 안보이고,
미래가 안보이고, 이웃이 안 보여 …
막막할 때 그때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눈물로 눈을 적셔야 할 때입니다.
매 주일 예배는 우리의 영적인 눈을
적시는 시간입니다.
주기적으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의 영혼을 정화하지 않으면
세상을 온전하게 살아내기 힘이 듭니다.
오늘도 저와 성도님들이 예배하는 동안
우리의 메말랐던 영혼이 성령의 단비로
촉촉이 적셔지고, 치유 받고 새 힘을 얻어,
이번 한 주간도 주안에서 용기 있게
살아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주 오후 3부 예배를 통해
데살로니가전서 강해를 마쳤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정말 좋은 교회입니다.
우리교회의 모델이 될 만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오후예배에 참석하는 분이
제한적이어서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생각 끝에 데살로니가후서 강해는
주일 예배 때 하려고하다가
다시 오후 3부때에합니다.
<데살로니가에 복음이 전해진 배경>........
먼저 데살로니가에 복음이 전해진 배경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실라와 함께 2차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1차 전도여행 때 수리아, 길리기아,
갈라디아 등지에 세운 교회들을 다시 방문하고
‘드로아’라는 항구도시에 이르렀습니다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나 동행).
그 때 거기서(드로아) 환상을 보았습니다.
<행16:9-10>
9절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절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아시아로 가려했던 자신의 계획을 접고
순종하기로 합니다.
이것이 유럽에 복음이 들어가게 된 배경입니다.
그래서 유럽에 첫 발을 내딛은 곳이 마게도냐의 빌립보입니다.
강변의 기도처에서 최초의 회심자를 얻었습니다.
바로 자주장사 루디아입니다.
그러나 귀신들려 점을 치는 여종을
고쳐준 것이 빌미가 되어
송사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여종의 주인은 점으로 큰 이익을 보는 자였기 때문).
결국 무참히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맙니다.
그러나 그날 밤에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리고
매인 것이 풀리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행16:25-26).
그러나 간수를 생각하여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간수와
그의 집에 세례를 주는 감동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
계속 머무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도착하였습니다.
간단히 기록되어 있지만 무려 160Km나 되는
먼 거리입니다.
성치 않은 몸으로 데살로니가로 가는 여정은
매우 힘겨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 또 복음을 전했습니다(행17:1-3).
유대인의 회당에서 3주간 동안(세 안식일)
복음을 전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바울의 전도를 통해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있었고,
약간의 유대인들도 바울의 가르침에
관심을 가졌습니다(4절).
<데살로니가를 떠나는 바울 –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함>..
그 일은 유대인들의 반발을 불렀습니다.
그래서 회당에서 가르치지 못하고...
야손이란 사람의 집에서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인들의 반발은
생각보다 깊었습니다.
불량한 사람들을 동원하여
야손의 집을 침입하여 바울의 일행을
잡으려고 한 것입니다.
다행히 정보를 미리 알고 몸을 피할 수 있었지만,
대신 야손과 몇몇 성도들이
잡혀 읍장 앞으로 끌려갔습니다.
결국 야손 일행은 구속되지는 않았지만
보석금을 내고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행17:5-9).
이 사건으로 바울과 실라는
더 이상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후 바울의 일행은 밤에 베뢰아로
가게 되었습니다(행 17장).
베뢰아에 도착한 바울은 또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행히 베뢰아 사람들은 너 그러워서(신사적)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행17:11-12).
그런데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바울이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까지 좇아와서 훼방을 놓았습니다.
결국 바울은 혼자서 베뢰아를 떠나
아덴으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디모데와 합류했습니다.
<아덴에서 디모데를 파송>
아덴에 도착한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이제 막 형성된 어린 교회를
핍박 앞에 놓아두고 떠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하여 몹시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떻게든 다시
데살로니가를 방문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기회가 되질 않았습니다(살전 2:17-18).
왜 길이 막혔는지 구체적인 언급은 없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다”고 극단적 표현을
쓰는 것으로 보아 매우 절망적인 상황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결국 바울은 대신 디모데를 보냅니다.
자신이 없는 동안에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서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디모데를 데살로니가 교회로 파송한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고린도를 향해 갔는데
여기에서 클라우디오 칙령으로 인해
로마에서 추방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게 됩니다(행18:2)
(로마의 4대 황제 클라우디오 칙령,
“모든 유대인은 로마에서 떠나라”는 것. B.C. 49년).
바울은 이 부부의 도움으로 천막을 지으며
고린도 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에서의 바울의 마음은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매우 궁핍한 상태였고,
지금까지 했던 모든 선교활동이
허사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몹시 괴로운 상태였습니다.
이 때 데살로니가로 갔던 디모데가 돌아와
그에게 좋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의 마음이
살전3:7-9절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살전3:7-9>
7절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8절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9절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그가 처해 있던
‘고난’(궁핍)과 그를 짓눌렀던 ‘역경’(환난)에서
해방되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제야 말로 다시 사는 보람을
느꼈다”(우리가 이제는 살리라)는 것입니다.
진실한 목회자의 심정이
잘 묻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선한 목자는 양떼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이 두려워한 것은 자기가 당하는
어려움이 아니었습니다.
믿는 이들이 낙심하고 배교하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돌보는 양떼들에 대한
바울의 뜨거운 사랑에 감동을 받습니다.
이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쓴
편지가 바로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A.D. 51년경,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된 책).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 대한
권면과 경계도 들어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향한
기쁨과 칭찬, 감사와 애정이
듬뿍 담겨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를 쓰게 된 배경>
그리고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얼마 뒤에 두 번째 편지를 썼습니다.
이때는 바울의 흥분된 마음도
가라앉은 상태였습니다.
바울이 이 두 번째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첫 번째 편지와는 달리 ....
데살로니가 교회에 뚜렷한 경계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
재림에 대한 지나친 열망으로 말미암아
아예 일을 하지 않거나,
규모 없는 생활을 하거나,
게으르며 여기저기 다니며
소란을 피우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경향에 대한 경계는
첫 번째 편지에서도 어느 정도
언급하였지만,.
두 번째 편지에서는 이에 대해
좀 더 분명히 지적하고 경계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동역자를 세우라>......
우선 1절에서 이 편지를 쓰는 자가
누구인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1절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주어가 복수입니다.
물론 이 세 사람(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은
한 팀을 이루어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한 사람들입니다.
저는 바울이 바울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체험적인 믿음(다메섹 도상)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유를 들자면 그를 돕는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주변에서 늘 그를 돕는 동역자들이 있었기에
그 어려운 여정 중에도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고린도에서 함께 있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도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바울을 도왔습니다.
바울 자신도 “해산하는 수고”를 하였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수고만으로
모든 사역의 열매가 맺혔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요,
둘째는 동역자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편지를 쓸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수고한 동역자들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빼놓지 않고 있습니다(롬16장).
사실, 알고 보면 동역자를 통해서
일하는 것은 주님의 방법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사역을 하실 때
홀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를 세우시고 그들과 함께 일하셨습니다.
그들을 자신의 동역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실 때도
둘씩 보내셨습니다.
동역자를 붙여서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내가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시겠노라고 말씀하시면서
주님이 우리와 함께 동역자가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동역자를 세워야 합니다.
훗날 제자들도 집사들을 세워
자신의 동역자로 삼았습니다.
일을 분담하여 봉사하는 일을 하게하고,
사도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였습니다(행6장).
오늘날도 교회의 직분을 세우는 것은
‘동역자’를 세우는 것입니다.
목회자를 중심으로 한 팀이 되어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일,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혼자 독불장군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각자 역할을 나누어야 합니다.
믿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협력해야 합니다.
한 순간도 우리가 동역자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축구나 야구선수들이 게임이 끝나면
인터뷰를 합니다.
보통 최고의 플레이를 보여준 선수들을 인터뷰합니다.
그 때 제일 마음에 드는 멘트가 있습니다.
“제가 잘한 것보다 우리 팀이
승리한 것이 더 기쁩니다.
우리 팀에 보탬이 되었다는 것이 기쁩니다.”
그러면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개인의 기록(연봉)보다는
팀의 승리를 더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 팀워크가 생기고...
팀워크가 좋은 팀이 이기기 마련입니다.
‘내가’.... ‘나요 나’하다가
함께 실패하는 것입니다.
거위 두 마리가 추위를 피해
남쪽 지방을 향해 여행하려고 할 때였습니다.
개구리 한 마리가 달려와서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하자,
거위는 방법만 있으면 데려가겠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개구리는 연못가의 풀을 뽑아
기다란 줄기를 만들어 양끝을
거위들에게 물게 하고는
자기는 줄기 가운데를 입으로 물고
매달렸습니다.
이렇게 그 셋은 여행을 떠났습니다.
어느 정도 지났을까,
마침 그 아래를 지나가던 농부들이
이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광경을 본 사람이 있으십니까?
이런 현상을 무슨 현상이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아주 보기 드문 현상이라고 합니다.
농부들은 이 기막힌 여행 방법을 보고 칭찬했습니다.
“허, 참 누가 생각해 냈는지 꽤 똑똑하구만.”
그때 허영심에 들뜬 개구리가
이 말을 듣고 으쓱해져서 저도 모르게
“나야 나”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순간 개구리는 그만 줄을 놓치고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우리”라고 발음하면 입을 다물게 되지만,
“나”라고 발음하면 입이 벌어집니다.
혼자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나 혼자 다하겠다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나 없으면 일이 안될 것이라는 교만도
버려야 합니다.
함께 하는 동역자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믿음의 동역자를 만드십시오.
아니 먼저 성도님들이 믿음의 동역자가
되어 주십시오.
또한 교회의 여러 성도들이
동역자임을 믿으십시오.
옆 사람과 인사하십시다.
“함께 신앙생활하게 돼서 큰 힘이 됩니다.”
“저도 힘이 되어 드릴께요.”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님들 !
바울이 자신들의 소개를 마치고
2절에서 이렇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2절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여기서 ‘은혜와 평강’의 근원을 밝힙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은혜와 평강’의
근원이심을 사도 바울은 선포합니다.
또한 ‘은혜와 평강’이라는 말은
순서가 바뀌면 안 되는 말입니다.
평강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서로 주안에서
하나가 되어 동역하는 가운데....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늘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