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내동(城內洞)...
영천대교를 건너자마자 왼편으로
300 여m 정도만 가면 잔존성벽이 있는 성내동이다. -
- 성내동(城內洞) 골목길...
이곳 골목길로 들어서면 성돌들을 모아 쌓은 듯한 축대들이 곳곳에 보인다. -
- 영천읍성의 흔적...
파란 창고문짝에서 부터 이어지는 영천 읍성의 흔적들 -
- 반대편에서 본 민간 축대 ...
빨간색 부분이 최근 확인된 영천읍성 유일의 잔존 성벽이다. -
- 옛 읍성의 흔적에서 한 컷 !
성돌 틈새를 시멘트로 회칠하여 훼손(?)된 부분이 보인다 -
- 이웃 골목길 축대...
이곳 축대도 옛읍성의 채움돌을 가져다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
- 영천 중앙초등학교...
영천읍성과 관련하여 유일하게 안내되어 있는 '영천읍성지' 표시석
- 영천읍성지(永川邑城址)...
표석 뒤엔 임란 당시 영천성전투 소략과 함께
1995년 '영천향토사 연구회'에서 이 표석을 세웠음을 밝히고 있다.
-영천초등학교 서편 담장...
성벽은 이곳 초등학교 담장을 따라 북문 방향으로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1910 년대의 남문...
영어와 병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홍보자료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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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공성전(攻城戰) 첫 승전지로 기록된
영천읍성(永川邑城 )
탐방 : 2024.10. 15(화)
지 정 : - 없 음 -
(경북 영천시 성내동, 문내동·동·과전동 일원 추정)
[바다에 한산대첩이 있다면 육지엔 영천(永川)대첩이 있다]
임진왜란 전투와 관한 한 영천인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바로 1592년(선조 25) 7월 26일부터 7월 28일까지 벌어진 영천성 탈환 전투를 말함이다.
당시 제2 번대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좌로를 선택하여 4월 19일에는 언양, 21일에는 경주를 점령했고, 22일에는 영천으로 진격했다. 왜군이 나타나자 영천성을 지키던 군수 김윤국(金潤國)은 그 기세에 눌려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그렇게 무혈입성(無血入城)한 왜군은 성에 1,000여 명의 군사를 남겨두고, 주력부대는 충주 방향으로 북진하였다. 이후 영천에 주둔한 왜군은 이곳을 거점으로 온갖 약탈과 방화, 살육을 자행하였고 그 참상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영천지역 의병들이 일어났다. 영천의 유학자 정세아(鄭世雅)·정대임(鄭大任), 그리고 무인 권응수(權應銖)가 중심이 되어 주변의 여러 지역 의병장들과 연합전선을 형성했다. 규모는 관군을 합하여 총 3500여 명 이었다.
7월 26일에 전투가 시작되었고, 이튿날 주력 부대는 동문과 남문을, 권응수와 박의 장군은 서문과 북문을 공략하여 온 종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그리고 때맞춰 불어온 서북풍을 이용한 화공을 대대적으로 펼치니 마침내 왜군은 완전 섬멸되고 성(城) 을 되찾았다. 이른바 영천성 복성(復城)전투다. 과연 바다의 한산대첩과 견주어 육지의 영천대첩이라 할만하다.
당시 이 전투의 승리로 왜군은 경주·영천·안동을 잇는 보급로가 차단되었고, 이후 영남 좌도에 주둔하던 왜군들은 상주 지방으로 철수하였다.
이렇듯 영천복성 전투는 임진왜란 발발 초기, 조선군에게 첫번째 승리를 안겨진 중요한 전투로서 영남의 거성인 경주읍성 탈환에도 큰 자극을 주었다. 뿐만아니라 이 전투의 승리로 영천 지역은 물론 경상좌도의 여러 읍을 보존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니, 이 전투 과정은 '실록'에도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특히 실록에서는 권응수 장군의 공로에 크게 주목하고 있으니 구체적인 장군의 활약상을 상세히 열거한 후
'.....권응수는 용맹스러운 장수로 과감히 싸우는 것은 여러 장수들이 따르지 못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상으로 통정대부에 가자되고 방어사가 되었으며 ....' 라 하였으니 바로 이 부분이다. (선조 수정실록 선조 25년 8월1일자)
[영천읍성]은
영천읍성은 임란직전인 1591년(선조 24)에 축성된 성(城)이다. 그러나 이듬해 임진왜란의 전화(戰禍)를 입어 크게 파괴되었다. 이후 축성과 관련된 기록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철저히 파괴되어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지금은 고문헌의 기록과 고지도, 현장 확인 등을 통해 그 대충의 범위만을 추정할 뿐이다.
영천읍성에 대한 관련 자료에 의하면
‘서쪽은 호연정에서 충혼탑에 이르는 곳에 이르고, 동쪽은 중앙초등학교의 동측 계곡[도수장골]을 이용하여 성벽을 축성하였다. 남쪽은 남천의 자연 암반을 이용하여 축조했으며, 북쪽은 마현산(馬峴山)의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방형(方形)형태의 평산성(平山城)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고 하였다.
또 그 규모는
‘둘레가 1,902척으로 우물이 세 개가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성벽의 높이나 치성(雉城), 여장(女墻)에 대한 언급은 없다. 둘레 1,902척은 조선 시대 성벽 축조에 일반적으로 사용된 척도인 포백척(布帛尺)[46.7cm]을 적용하면 약 897m 정도이다.’라고 하였다. (출저 : 디지털영천문화대전- 영천읍성편 참조)
[탐방 후기 : 영천읍성의 흔적을 찾아서]
‘임진왜란의 육지전 첫 승전지로 기록된 영천성의 성벽 1곳이 최초로 확인됐다’는 발표가 경북문화재연구원 공식 확인을 통해 최근 ‘매일 신문’에 보도되었다. 그동안 영천읍성은 왜란과 일제강점기인 1910년 읍성 철폐령 등으로 철처하게 파괴되어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는데 지금 바로 그 영천성벽의 일부가 발견되었다니...
완전히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영천읍성...
그곳은 바로 늘 함께하던 골목길, 영천시 조밭골길(성내동) 6-23에 위치한 민간 축대에서다.
최근 영천읍성의 남문 복원작업과 관련하여 온 시민이 읍성 복원에 관심을 진작시키고 있는 영천시로서는 말 그대로 최고의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일단은 그곳 잔존 성벽이 있다는 민간 축대를 찾아 보기로 한다.
길은 영천역에서 영천대교를 건너자 마자 왼편의 성내동(城內洞) 방향이다.
이름 그대로 성내동(城內洞)이어서 그럴까. 동네 입구로 들어서니 골목 곳곳마다 오래된 민간 축대들이 눈에 띈다. 얼핏 보아도 돌 하나하나가 당시 축성에 사용되었던 성돌들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진자료에서 본 문제의 그 민간 축대 찾기는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인근 골목길을 40 여분 정도 헤메었을까. 하지만 드디어 찾았다.
바로 조그마한 파란색 문짝 앞에서 시작한 총 길이 10 여m의 민간 축대다. 바로 사진에서 보던 '영천읍성의 잔존 성벽'이다.
참으로 반갑다.
잠시 숨을 고른 후 찬찬히 살펴본다. 총 40 여개의 성돌이다.
예측되는 잔존 규모는 길이 4-5m, 높이 3m 남짓의 성벽, 아래의 기단석 배치도 뚜렷하다. 축성방식은 자연석을 대충 다듬어 맞춘 허튼층쌓기로 축성됐다. 일정하지는 않으나 대체적으로 7-9단 정도 가 남아 있다.
성돌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길이 40-50cm, 높이 40cm 정도가 많고, 길이가 1m 이상도 되는 큰 성돌들도 5-6개 정도 보인다. 수백년 세월을 견디며 어찌 그리 잘 숨어 있었을까. 성돌 하나하나가 참으로 대견하고도 소중하게 느껴진다.
성벽 양옆으로는 후대 민가가 들어서면서 새로이 자연석을 쌓아 축대를 이어 조성했다. 물론 그 돌들도 옛 성벽의 돌들로 보인다. 축대 관리때문일까 성돌의 각 틈새마다 시멘트를 사용하여 마구 회칠을 해 놓은 것이 보인다. 안타깝긴 하지만 누가 뭐라 하겠는가. 지금은 다만 그네들의 재산인 것을..
임진왜란의 육지전 첫 승전지로 기록된 영천읍성(永川邑城 )... 이제 서서히 그 실체가 보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