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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평화의 길 1코스 제1부
강화평화전망대-철곶고개-철산삼거리-
산이포평화공원-석우교차로-덕하천-
고려천도공원-다송천소우교-숭뢰리
20241113
1.코스 소개(두루누비)
1)코스개요
- 강화 평화전망대에서 출발해 연미정을 지나 김포 문수산성 남문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 강화도의 북동쪽 해안선을 따라 걸으며 휴전선에 해당하는 한강하구 중립수역과 북한을 조망할 수 있다.
- 조선 시대 한성 방어의 최전선이었던 강화도의 역사 유적지도 함께 둘러보면 좋다.
2)관광포인트
- 북한의 생활상을 가까이에서 조망할 수 있는 강화평화전망대
- 잘 보존된 한강하구 중립수역을 한눈에 둘러볼 수 있는 연미정
- 6.25전쟁에 참전한 용사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6.25참전용사기념공원
- 조선 시대 강화해협을 지키는 요새였던 문수산성
3)여행정보(주의사항)
- 강화 평화전망대에서 6.25 참전용사기념공원까지는 민간인 통제구역이므로 신분증을 지참해야 한다.
- 강화군에서는 서울에서 출발하여 강화 DMZ 평화쉼터-연미정-평화전망대를 왕복하는 ‘DMZ 평화의 길 강화이야기‘ 여행상품을 운영 중에 있으며 사전예약을 통해 이용 가능하다.
- 주요 경로 : 강화평화전망대 3.6Km 고려천도공원 5.9Km 연미정(월곶돈대) 4.5Km 진해루 1.9Km 문수산성남문
- 시점 : 강화평화전망대 주차장, 인천시 강화군 양사면 전망대로 795
대중교통) 강화터미널에서 26번 버스 이용, 강화평화전망대 하차
- 종점 :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문수산로 8
대중교통) 김포골드라인 걸포북변역에서 3000번 버스 이용, 성동검문소 하차
2.고려천도공원에서 찬란한 고려문화를 배우다
제1부 : 3주만에 강화평화전망대에 다시 왔다. 3주 전에는 서해랑길 103코스를 역방향으로 탐방하기 위하였으며, 이번에는DMZ 평화의 길 1코스를 정방향으로 탐방하기 위함이다. 평화전망대 입구의 검문소에서 문제가 생겨서 50여 분 지체하여 강화평화전망대 주차장으로 올라갔다. 3주 전 길고 길었던 코리아둘레길 서해랑길을 장엄하게 완주하였다. 가슴이 벅차도록 감격하였다. 그로부터 3주 뒤 새로운 길, 코리아둘레길 DMZ 평화의 길 탐방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분단 조국의 현실에서 민족의 평화를 열어가는 새로운 길의 첫 탐방이 무한한 설렘으로 가슴을 달군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윤동주의 '새로운 길' 전문. 1938년) 이 길은 이미 걸어왔고, 걸어가고 있으며, 걸어가야 할 당연한 길이지만, 언제나 새로운 길이며, 명명된 DMZ 평화의 길에 담긴 겨레의 비원이 가슴을 무겁게 억누른다. 가자, 고난의 길, 두려움의 길, 그러나 희망의 길, 그 길의 첫걸음 내딛기가 어렵다.
DMZ 평화의 길 1코스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철산리 강화평화전망대 주차장에서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 문수산성 남문까지 16.9km 거리이다. 거쳐가는 행정구역은 강화군 양사면 철산리, 송해면 당산리와 숭뢰리, 강화읍 대산리, 월곶리, 옥림리, 용정리, 갑곶리, 경기도 김포시 포내리 지역이다. DMZ 평화의 길 1코스 중 강화읍 월곶리 연미정 검문소까지는 민간인 통제구역을 통과하는 구간이다. 조강(祖江) 해안을 따라 설치된 철책선이 이어지며 군사시설물이 설치되어 있어 군시설물 사진 촬영을 삼가며 경로를 따라 탐방했다.
강화평화전망대 주차장에서 철산고개까지 안내도보여행팀 버스를 타고 철산리 철곶을 통과한다. 철산리 철곶해안에 철책선이 철곶초소로 이어지는 모습을 살폈다. 전망대로의 철곶고개에 도착, 버스에서 내려 탐방길을 출발한다. 고개에서 내려보면 철산리 산이포 들녘이 펼쳐지고, 철곶고개 왼쪽에서 조강 해안선이 남쪽으로 길게 이어진다.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선생은 1906년 강화도 지역을 순례하고 강화기행시집 <심도(沁都)기행>을 남겼다. 그는 철곶마을을 칠언율시로 이렇게 읊었다. "그 당시 철곶에는 진관(鎭關)이 있었으나, 지금은 하나의 작은 봉우리뿐이구나. 그 곳 주민 배 부리는 법 훤히 꿰고 있었기에, 푸른 물 파도 소리 속에 마음대로 오고 갔네. 鐵串當年設鎭關(철곶당년설진관) 砥今唯指一拳山(지금유지일권산) 居人慣識行船法(거인관식행선법) 碧水聲中任去還(벽수성중임거환) - '철곶동(鐵串洞)'" 그리고나서 철곶 지역을 이렇게 소개한다. "철곶동(鐵串洞)에는 예전에 수군첨사(水軍僉使)를 두었는데 유수 서필원(徐必遠)이 아뢰어서 수군을 풍덕으로 옮기고 별장(別將)을 두었다. 유수 김휘(金徽)가 도로 첨사를 두었다. 숙종 임진년(1712)에 유수 조태로(趙泰老)가 아뢰어서 주문도로 옮겼다가 다시 별장을 두었으나 지금은 폐지되었다. 거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어업으로 생활한다." 화남 선생 시대의 철곶 마을 풍경이 그려진다.
철곶고갯길은 황금조팝&능소화길이 조성되어 있고, 고갯길 남쪽 자락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안내판에는 정원디자이너 진경아씨가 "쭉쭉 뻗은 길, 휘어진 길, 가파른 길, 길 위에서 풍경을 보는 시간, 마음도 속도도 느슨하게 달려요."라는 문구를 적어 놓았다. 감히 마음과 속도를 느슨하게 걸을 수 있을까? 이렇게 걷고 싶어도, 북에서 들려오는 대남방송과 철책선이 주는 두려움, 안내판의 경고문에 마음과 속도는 초조와 조바심으로 달린다.
철곶고개를 내려가면 넓은 조강이 탁 트여 잘 보인다. 조강(祖江) 중앙을 군사분계선이 지나고 남쪽의 산이포와 북쪽의 해창포가 마주하고 있다. 남과 북의 가장 짧은 거리에 자리하는 산이포와 해창포는 직선거리 1.8km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 거리를 남북 주민들은 자유로이 왕래하지 못하고, 새들만이 조강(祖江) 위를 유유히 날아가고 날아올 뿐이다. 포촌동(浦村洞)이라고도 불렸던 산이포(山伊浦)는 서울과 개성, 해창포 등을 오가는 배들이 머물던 포구였다. 남북이 분단되기 전에는 해창포와 산이포 사이의 왕래가 빈번했고, 산이포에는 상점과 주막들이 빼곡했는데, 70년대 들어서 해안을 따라 철조망이 설치되고, 산이포의 주민들은 강제로 이주되어 지금은 산이포에 집 한 채 없다. 지난 시절의 흥성했던 산이포를 상상하며 철산삼거리에 이르렀다
철산삼거리에는 산이포 평화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입구에는 '산이포 평화공원'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2019년 6월에 조성한 '산이포 평화공원' 안내판에는, 철곶고개 '황금조팝&능소화길' 안내판처럼 정원디자이너 진경아씨의 문구가 적혀 있다. "그리움은 늙지 않아요. 뜨거운 눈시울 날이 새어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 다시는 헤어지지 말아요, 우리." 조국 통일이 이루어진 그날의 감격을 그리움으로 표현하였다. 통일의 그날, 분단 조국의 아픈 이야기를 끝없이 늘어 놓을지라도 우리 더 이상 헤어지지 말자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깊은 고통과 서러움의 이야기를 지금도 끝없이 이어갈 수 있다. 이제 그 이야기를 끝내야 한다.
"산이포동(山里浦洞)은 강화부의 서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고기잡이의 배로 생업을 잇고 있다." 1906년 봄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선생은 한 필의 말을 타고 산이포 마을을 지나며 이곳을 이렇게 소개하며, 칠언절구 한 수를 남겼다. "산이포 앞쪽은 바닷물에 닿아 있어, 오고가는 배에서 고기잡이 노래곡조. 집집마다 그물 걸고 집집마다 술 담그니, '연평길은 재화의 샘'이라고 웃으며 말하네. 山里浦前水色連(산리포전수색련) 漁歌一曲去來船(어가일곡거래선) 家家揭網家家酒(가가게망가가주) 笑道延坪是貨泉(소도연평시화천)" - 고재형의 '산이포동 (山里浦洞)'. 산이포 북쪽 조강(祖江)이 역사의 흔 적을 물결에 새기며 산이포(山伊浦)와 해창포(海 倉浦) 사이를 유유히 흐르고, 군사분계선이 조강의 중앙을 남북으로 가른다. 앞으로 산이포가 어떻게 변화할까? 뱃길이 열릴 그날의 환상이 철책선 너머로 날아가는 새들을 따라간다.
산이포 평화공원에서 전망대로를 따라 조금 더 이어가면 석우교차로, 전망대로는 직진하여 덕하천의 철산교를 건너 송해면사무소로 이어지고, 평화의 길은 왼쪽 해안북로를 따라 고려천도공원으로 이어간다. 그런데 예전의 산이포는 덕하천이 서해 바다로 유입되는 덕하천 하구 지역이었을 것 같다. 덕하천의 예전 물길은 지금과 같지 않고, 이 지역이 간척되면서 예전 물길이 바뀌었을 것이다. 덕하천 하구를 중심으로 산이포가 자리하고 포구에 상점들이 형성되고 그 안쪽에 민가들이 조성되었을 것 같다. 탐방객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예전의 덕하천 하구를 그리며, 양사면 철산리 산이포 지역에서 덕하천을 건너 송해면 당산리로 넘어갔다.
송해면(松海面) 당산리(堂山里) 지역은 넓은 들녘을 이루고 마을은 해안의 들녘 안쪽에 편안하게 자리한다. 들녘의 해안 쪽으로 수로가 흐르고 수로변에는 물억새와 갈대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동쪽 조강 해안의 철책선과 서쪽 당산리 들녘, 봉천산과 고려산을 살피며 해안북로를 따라간다. 화남 고재형 선생은 당산리(堂山里) 지역을 이렇게 소개한다. "당산동(堂山洞)은 강화부 관아의 서북쪽 15리 지점에 있으며, 승천포(昇天浦)에 이른다. 홍주(洪州) 이씨인 진사 이윤중(李允中)의 증손 이현필(李賢弼)과 강진 안씨와 양천 허씨 그리고 권관 반남 박씨 진사 박제형 (朴齊衡)의 자손들이 이 마을에 살고 있다." 그가 읊은 칠언절구 '당산동(堂山洞)'을 알아본다. "당산리에 이르니 저녁노을 퍼져 있고, 이씨 안씨 허씨 박씨네 집들이 즐비하네. 한 갈래 긴 길은 승천부로 이어지고, 절반은 푸른 소나무 절반은 꽃이로다. 須到堂山披晚霞(수도당산피만하) 李安許朴櫛比家(이안허박즐비가) 一條長路昇天府(일조장로승천부) 半是蒼松半是花(반시창송반시화)"
송해면 당산리 해안북로를 따라 내려가면 화남 선생의 말대로 곧바로 승천포에 이르고 고려천도공원이 나온다. 고려천도공원은 승천포(昇天浦)에 조성되어 있다. 강화 승천포는 고려 때 개경으로 건너가던 나루터, 승천진((昇天津)이 있었으며, 고려 고종이 1232년 강화로 천도할 때 건너편 황해도 개풍군 승천부에서 강화 승천포로 건너왔다고 한다. 그리고 승천부에서 몽골 사신과 회담이 열렸다고 한다. 개풍군의 승천부(昇天府)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승천부(承天府)라고 표기하였는데 현재는 승천부(昇天府)로 한자가 바뀌었다.
고려천도공원으로 들어갔다. 고려천도공원은 민통선 북방마을의 관광자원을 개발하여 역사환경 자원을 연결하는 관광코스를 관광객들에게 제공하여 쾌적한 볼거리와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코자 2019년 11월 개장하였다고 한다. 공원 가장 뒤쪽에 있는 고려고종사적비 및 기억의 벽부터 차례로 살피며 천도문으로 나왔다. 팔만대장경 상징탑, 천도광장, 배 조형물 전망대, 천도문광장을 거쳐오며 공원의 조형물과 전시된 게시판의 내용을 살폈다. 비록 국난에 처해 있었지만 고려는 강화도(江華都)로 천도하여 고려의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강화 천도기 최고의 명작은 팔만대장경 제작일 것이다. 선원사에서 판각된 팔만대장경은 조선 태조 때 대장경판이 한양의 지천사로 옮겨졌으며, 현재는 합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다. 찬란한 문화의 뒤쪽에 패망한 삼별초의 슬픈 항몽 역사가 강화에 새겨져 있다. 배중손과 김통정이 강화, 진도, 제주도로 옮겨가며 몽골에 저항한 비극이 마니산 서쪽 해로에 물결친다.
고려천도공원 옆에는 효종 8년(1657년)에 신설되었던 승천보(昇天堡)가 있었다고 하며, 나무뎈 계단을 통해 전망대에 오르면 확인할 수 있는데 오르지 못했다. 문헌에 따르면, 승천보(昇天堡)에는 동헌과 내사, 삼문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는데, 종9품의 별장과 군관 25명에 토졸 16명을 배치시켰으며, 휘하에 석우, 빙현, 소우, 숙룡, 낙성돈대 등 모두 5개의 돈대를 관할하였다고 한다. 소우돈대는 다송천이 서해 바다로 유입되는 하구의 구릉에 있다.
천도문을 나오면 주차장이다. 대남 방송이 괴성을 지른다. 양사면 철산리 지역에서는 소리들이 미미했는데, 송해면 당산리 승천포 지역에서는 이상야릇한 소리들이 고막을 때린다. 왜 서로 이런 짓을 할까? 당산리 주민들이 설치한 알림막의 호소문 "대남방송, 대북방송, 둘다 안 돼!" 그렇다. 평화의 길이 분쟁의 길이 되어서는 안 된다. 평화는 이념이 아니라 사랑이며, 그 실천이 우선이다. 사랑하는 겨레여, 목터지게 외쳐도 사랑은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듯, 사랑의 실천에서 평화는 솟아오른다.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선생은 1906년 봄날 승천포(昇天浦)에서 이렇게 읊었다. "승천포 나루에서 돌아가는 배 물어보니, 어떤 것은 개성이요 어떤 것은 한강을 가리키네. 옛적에 태조께서 두 장수 거느리고, 왜구를 소탕한 곳이 바로 이 나룻가네. 昇天浦口問歸船(승천포구문귀선) 或指開城或漢川(혹지개성혹한천) 念昔高皇麾二將(염석고황위이장) 倭氛掃盡此津邊(왜분소진차진변)" 승천포 앞바다의 평화로운 풍경이 그려진다. 어느 배는 개경으로 가기 위해 예성강으로 내려가고, 어느 배는 한양으로 가기 위해 한강으로 올라간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인가. 그런데 고려 우왕 4년(1378년)에 왜구들이 승천포를 침략했었다. 고려 장수 이성계(李成桂)와 최영(崔瑩), 양백연(楊伯淵)이 승천포(昇天浦)에서 왜병(倭兵)을 크게 격파하였으니, 이 얼마나 통쾌한가. 화남 선생의 마음이 승천포에 울려퍼진다.
3.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6.5km
전체 소요 시간 : 4시간 7분
강화평화전망대 매표소 입구 오른쪽 소형차 주차장 끝에 서해랑길 103코스&DMZ 평화의길 1코스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DMZ 평화의길 1코스는 거리 16.9km, 소요시간 5시간 30분, 난도 쉬움이라고 적혀 있다.
남북 1.8 평화센터는, 1층 카페와 복합전시공간, 2층 북한음식 전문식당, 옥상 쉼터와 전망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2022년 3월 개관하였다. '남북 1.8 평화센터'는 남한과 북한 사이의 가장 가까운 거리인,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산이포와 북녘땅 황해도 개풍군 해창포와의 직선 거리 1.8㎞를 작명의 모티브로 삼았다고 한다. DMZ 평화의길 종주대원들이 장대한 출발을 기념한다.
강화평화전망대 대형차 주차장 아래쪽에 조강(祖江)이 흐르고, 조강 너머 북쪽은 북녘 땅 황해도 개풍군 지역이다.
강화평화전망대 주차장에서 내려가며 조강(祖江)과 조강으로 돌출한 철곶(鐵串)을 조망한다.
전망대로가 강화평화전망대 입구에서 왼쪽 뒤 철곶고개로 이어진다.
평화전망대 버스정류소 위쪽에 '제적대로(制赤大 路)' 표석이 세워져 있다. 이제 도로명은 '전망대로'로 바뀌었다. "전투 지휘와 전장 감시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 전술도로를 개척, 이를 제적대로라 명명함. 1982. 6. 6. 해군 해병 제9927부대장"
평화누리길 이정목에 평화전망대에서 강화대교까지 13.85km 거리라고 적혀 있다. 'DMZ 평화의길' 1코스이다.
철산리 들녘 북쪽에 조강(祖江)이 흐르고 그 가운데로 군사분계선이 지나며 그 북쪽 중앙은 황해도 개풍군 해창포이다.
서해랑길은 전망대로에서 오른쪽 철산교회 방향으로 이어가고, DMZ 평화의길은 전망대로를 따라 철곶고개로 이어간다.
강화평화전망대에서 철곶고개까지 버스로 이동하였다. 철곶고개에서 DMZ 평화의길 1코스 탐방을 출발한다.
전망대로 철곶고개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목적지인 문수산이 정면에 보인다. 1코스는 문수산성 남문까지 이어간다.
DMZ 평화의길 종주대원들이 철곶고개에서 전망대로를 따라 내려오고 있다.
쭉쭉 뻗은 길, 휘어진 길, 가파른 길, 길 위에서 풍경을 보는 시간, 마음도 속도도 느슨하게 달려요 - 정원디자이너 진경아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철산리 산이포에서 건너편 황해도 개풍군 해창포 사이의 직선 거리는 1.8km라고 한다.
철산리 해안에 산이포(山伊浦) 들녘이 펼쳐진다. 전망대로를 따라 철산삼거리 방향으로 이어간다.
양사면(兩寺面) 철산리(鐵山里)는 조선시대 철곶보(鐵串堡)가 있던 지역으로 철곶(鐵串)이라 부르고 있다. 포구(浦口) 마을인 산이포(山伊浦)와 합하여 철산리라 칭하게 되었다. 산이포(山伊浦)는 철산리 동남쪽 해변에 있는 포구 마을이라 예전에 포촌동이라 불러왔으며, 예전에는 면사무소, 시장, 학교, 경찰지서 등이 있었다. - 인천광역시사
전망대로를 따라 철산리 산이포(山伊浦) 들녘을 지나간다.
철곶고개에서 전망대로를 따라 왼쪽 양사면 철산리 철산마을을 지나왔다.
전망대로 철산삼거리에서 서쪽 덕하로를 따라 양사면 덕하리로 이어갈 수 있다. 평화의 길은 직진한다.
철산삼거리에서 뒤돌아보면, 철곶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남쪽에 철산리마을이 평화롭게 자리한다.
철산삼거리에서 바다로 돌출한 철곶(鐵串)을 돌아본다. 조선시대 철곶보(鐵串堡)가 저곳에 있었을 것이다.
오른쪽 길은 양사면 덕하리로 이어지는 덕하로이다. 문수산성 남문 13.9km, 강화평화전망대 1.7km 지점이다.
덕하로 바로 앞 전신주 오른쪽 뒤에 성덕산이 가늠되고, 그 왼쪽 자락에 덕하마을이 보이며 그 왼쪽 뒤에 별립산이 솟아 있다.
전망대로 오른쪽에 산이포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길가에는 풍접초들이 피어 있다.
그리움은 늙지 않아요. 뜨거운 눈시울 날이 새어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 다시는 헤어지지 말아요, 우리. - 정원디자이너 진경아
산이포 평화공원에서 포토존에 들어오는 덕하마을과 별립산을 바라본다. 그 오른쪽 전신주 뒤에 성덕산이 가늠된다.
맨 왼쪽에 덕하천이 흐르고 오른쪽에 산이포 들녘이 펼쳐진다. 성덕산과 덕하마을, 별립산을 확인한다.
산이포 평화공원 남쪽 텃밭에서 산이포 평화공원을 뒤돌아본다.
풍접초 흐드러지게 핀 전망대로를 따라 덕하천 하구 산이포를 향해 가며 왼쪽 맨 뒤의 문수산을 조망한다.
왼쪽 뒤 철산리 마을, 중앙 앞 철산삼거리의 산이포 평화공원, 오른쪽 뒤 철곶을 돌아본다.
산이포 들녘을 지나며 조강(祖江) 너머 황해도 개풍군 해창포를 가늠한다.
직진하면 전망대로를 따라 송해면사무소, 왼쪽은 해안북로를 따라 고려천도공원과 월곶리로 이어진다.
전망대로가 덕하천을 가로지르고, 철산교 건너편에 시설 공사가 진행 중이며 '내일을 여는 희망의 양사' 홍보문구가 보인다.
해안북로를 따라 고려천도공원으로 이어간다.월곶리 7km, 강화읍 11km 지점이다. 오른쪽에 덕하천이 흐른다.
양사면 철산리 지역을 지나 송해면 당산리 지역으로 넘어왔다. 왼쪽 뒤의 산봉은 별악봉인 듯. 중앙 맨 뒤에 강화평화전망대 흰 건물이 보이며, 철곶고개를 넘어 철산리마을과 철산삼거리, 산이포 평화공원을 지나 석우교차로에서 해안북로로 진입하였다.
덕하천 왼쪽 위로 전망대로 지난다. 중앙 뒤의 산봉은 별악봉인 듯하고, 오른쪽에 양사면 철산리 철산마을이 보인다.
덕하천(德下川)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덕하리 봉천산에서 발원하여 황해로 유입하는 하천이다. 봉천산 항곡마을에서 시작하여 덕하리 오촌동과 양천을 경유하여 널다리 돈대 옆의 철산배수갑문을 통과하여 황해로 유입한다. 남쪽으로 봉천산, 북쪽으로 별악봉, 서쪽으로 덕고개가 유역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덕하천 하구는 강화군 양사면과 송해면을 경계한다. 송해면 당산리 지역으로 넘어가 해안북로 자전거도로를 따라간다.
조강(祖江) 너머 북녘땅 황해군 개풍군의 고려 시대 지명 승천부(承天府)를 어림한다. 몽골의 침략을 받아 고종이 강화로 천도할 때 승천부에서 강화 승천포로 넘어왔으며, 고려 정부는 승천부에서 몽골 사신과 회담하였다고 한다.
해안북로의 자전거도로를 따라 강화군 송해면 당산리 지역을 걸어오고 있다. 중앙 맨 끝에 강화평화전망대가 보인다.
강화군 송해면 당산리 들녁 앞을 수로가 흐르고 그 뒤에 들녘이 펼쳐져 있으며, 맨 뒤에 고려산이 솟아 있다.
당산리 마을이 낮은 구릉 남쪽에 자리하고 그 앞에 들녘이 펼쳐져 있다. 하얀 곤포사일리지들이 군데군데 모여 있다.
송해면 당산리 농로 입구에 평화의길 이정목이 세워져 있고, 농로 건너편에 수문이 있으며, 그 뒤에 고려천도공원이 있다.
당산리(堂山里)의 이 하천 이름이 무엇일까? 수로 끝에 수문이 있다.
가로등 뒤 소나무들이 솟아 있는 곳에 고려천도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그 오른쪽 구릉에 승천보(昇天堡)가 있었다고 한다.
고려천도공원으로 들어와 고려고종사적비 앞으로 왔다. 고려고종사적비부터 살피며 고려천도공원 천도문으로 내려간다. 고려고종사적비 뒤에는 '기억의 벽'이라는 일월도 병풍 모양의 석벽화 네 개가 세워져 있다.
몽고 태조 징기스칸이 서역을 정벌하고 서하를 치려는 때에 서기1224년 고종11년 11월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착고여(着古與)가 자국으로 귀국하던 도중 압록강 건너에서 도적의 기습으로 피살된 사건에 대하여 몽고 조정에서는 고려를 의심함으로써 양국간에 외교적 마찰이 빚어졌다. 1227년 고종 14년 징기스칸이 서하를 침공하다가 전장에서 죽으니 2년 후 징기스칸의 세째 아들 와활태(窩闊台)가 태종으로 즉위한 후 착고여 사건을 빌미로 몽장 살리타이(撒里台)에게 고려를 정벌하도록 명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반세기에 가깝도록 몽고의 침공을 받기 시작했으며 살리타이의 제2차 침공계획이 전해지자 고려 조정에서는 몽고군이 수전에 약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실권자 최이(崔怡:瑀우)의 집무실에서 재추회의(宰樞會議)를 열어 천도(遷都)문제를 논의한 결과 천연요새인 강화도를 천도지(遷都地)로 결정했다. 1232년 7월 6일 고종은 최이의 안내로 개경(開京)을 출발, 천도길에 올랐으며 개경과 강화도 간의 중요 통로였던 개풍군의 승천부(昇天府)와 강화군 송해면 당산리 승천포(昇天浦) 사이 뱃길을 통해 다음날인 7일 강화 땅에 당도하셨다. 몽고군의 재침 소식으로 불안한 가운데 억수 같은 빗방울(霖雨)이 쏟아지는 악천후에 천도행렬을 뒤따르는 군중들 중에는 인마(人馬)의 발이 진흙에 빠져 쓰러지는 사람이 많아 사방에서 비명과 울음소리가 처절하였으니 강화 천도의 길은 실로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다. 그러나 고종은 강도항몽(江都抗蒙) 기간(39년)에 몽고군의 끈질긴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싸우는 한편으로 금속활자(金屬活字) 발명,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再雕), 유리기와(靑瓦) 제조 등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워 놓고 애통하게도 재위(在位) 46년(1259년) 6월에 승하하시어 고려산 동록에 잠드셨다. 고종이 승하하신 후 우리나라 금수강산이 몽고군의 말발굽 아래 초토화되었던 쓰라린 역사를 되새기면서 우리 후손들은 자손만대에 이르도록 고종의 항몽 호국정신(護國精神)과 빛나는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고종께서 강화 땅에 첫발을 내려놓으신 자리에 이 사적비를 세운다. - 사적비 뒷면의 비문
고려 고종 사적비, 강화도에서 고종이 피워낸 찬란한 문화업적 : 1232년(고종19년), 계속되는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군사적, 지리적 요충지인 강화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천도 후, 강화도에 고려궁을 짓고 39년간 몽골에 대항해 싸웠으며, 이 시기에 금속활자와 팔만대장경 등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남겼다. 사적비에는 몽골 침입과 강화 천도 배경, 역사, 강화도에서 고종이 피워낸 찬란한 문화업적 등이 담겨 있다.
'강화지도' 18세기 후반 이후, '강화부전도' 1872년, '강화지도' 19세기 후반 등 세 종류 복사본이 게시되어 있다. 강화외성과 진(鎭), 보(堡), 돈대(墩臺) 등과, 강화도 주변 해로, 도로망 등을 확인할 수 있다고 안내한다.
고려시대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1232년(고종 19년) 6월부터 개경으로 환도한 1270년(원종 11년)까지 사용하였던 궁궐터다. 고려 조정은 이곳에서 대몽항쟁을 이어갔으며, 몽골과의 화친 후 개경으로 환도하게 되자 몽골의 요구에 의해 궁궐과 성곽을 모두 파괴하였다.
강화외성은 고려 1232년(고종 19년)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한 뒤 해안 방어를 위해 적북돈대부터 초지진까지 23km에 걸쳐 쌓은 성이다. 이 성은 강화도 동쪽 해안을 따라 쌓았는데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중요한 방어시설이었다. 조선시대에도 강화외성은 중요 군사시설로 무너진 구간을 보수하는 등 개축을 거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고려고종사적비 앞에 사적비 안내판이 있고, 오른쪽에 화계(花階) 포토존이 있다.
(강화=연합뉴스) 김창선기자 = 몽고 침입에 대항, 수도를 서울에서 강화도로 옮겨서 싸우는 과정에 많은 문화유산을 남긴 고려 고종을 기리는 `사적비'가 1999년 12월 18일 인천시 강화군 송해면 당산리 승천포에 세워졌다. 강화군은 고종이 개경에서 바다를 건너 처음 도착한 강화 승천포에서 이날 최기선 인천시장과 김선흥 강화군수, 군민 2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사적비 제막식을 가졌다. 군(郡)은 고종이 강화로 천도, 고려궁을 짓고 39년간 몽고에 대항해 싸운 호국정신과 팔만대장경 등 많은 문화 유산을 남긴 것을 기리기 위해 사적비를 건립했다. 높이 5m40㎝, 폭 90㎝의 사적비에는 몽고 침입과 강화 천도 배경, 39년간에 걸친 강화 항몽의 역사, 외침(外侵)의 와중에서도 금속활자 발명과 팔만대장경 조판을 비롯한 고종의 문화업적 등이 담겨 있다.
국난극복 팔만대장경 : 옛날 현종 2년(1011)에 거란주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고려를 침입하자 국왕은 남쪽으로 피난했는데 거란 군은 오히려 송악성에 주둔한 뒤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현종은 신하들과 함께 더할 수 없는 큰 서원을 하여 대장경을 판각하여 완성하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거란 군사는 스스로 물러갔습니다. - 동국이상국집 권 25. 대장경 대장각판 군신기고문
국난극복 : 고려는 몽골의 침략에 맞서 지속적인 항쟁을 이어나가며, 국난극복의 의지를 모아 팔만대장경을 판각하여 완성하였습니다. 이 상징탑은 팔만대장경의 의미와 고구려의 정통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어둠 속에서 빛을 잃지 않은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팔만대장경 상징탑 뒤에 삼별초 대몽항쟁 설명안내판이 전시되어 있다.
1270년 개경 환도가 임박하자 삼별초는 몽골과 결탁한 왕에게 운명을 맡길 수 없다며 내부에서 동요하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원종은 삼별초에게 해산하라 하였고 그들의 명단을 거둬오도록 지시했다. 이 연명부가 몽골군의 수중에 넘어가면 삼별초는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삼별초 내에서 이에 대한 반감이 컸다. 삼별초는 왕족 '승화후 왕온'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고, 강화도의 거의 모든 재산과 사람들을 태운 대선단을 이끌고 진도로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강화도의 대부분의 시설은 불태워졌다. 진도에 도착한 삼별초는 '용장사'라는 절을 임시 궁궐로 삼았다. 그리고 용장사 주변에 산성을 쌓고 관아도 세웠으며, 이를 기반으로 진도는 제법 도읍지의 면모를 갖추었다. 조정의 진압군은 속수무책이었던 반면, 이들은 남해안 일대를 석권하고 해상력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를 건설한다. 그들은 또 고려의 정통 정부임을 자처하면서 일본에 사절을 교환하는 등의 외교활동도 하였다. 1270년 음력 11월에 이르러 삼별초는 제주도까지 점령하였다.
별초(別抄)는 몽골의 침입 이전부터 등장하는데, 기존의 정규 군사 조직 이외의 새로이 편성된 군대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후 별초는 지역별 별초, 신분별 별초 등으로 변하게 되는데, 이는 고려 전기의 군사 조직을 대체하는 새로운 군사 조직의 등장을 의미한다. 첫 등장은 무신정권 초반기에 발생한 '조위총'이 일으킨 반란 때부터이다. 대몽항쟁과 관련해서는 야별초 등이 주로 언급되지만, 지역이나 신분별 별초군 또한 대몽항쟁기에 활동한 모습이 확인된다. 삼별초는 처음에 최우가 도둑을 막기 위해 설치한 야별초(夜別抄) 에서 유래한다. 야별초는 1219년 최우가 권력 보호를 위해 조직한 사병이었는데, 뒤에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는 정규군으로 편성되었으며, 도방의 직할 부대의 성격을 띠게 된다. 그에 따라 야별초는 다시 좌별초, 우별초로 나뉘었으며,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오거나 탈출한 이들로 이루어진 신의군을 포함하여 삼별초라 불렀다. 삼별초는 주로 경찰과 군사 등의 공적 임무를 띠었으나 무인 정권기의 특성상, 실질적으로는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에 가까운 조직이었다.
몽골의 침입과 문화재 피해 및 삼별초의 이동 경로가 표시되어 있다.
삼별초는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 집단이었고, 군부 독재를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몽골이 고려를 침입해 오자, 최씨 무신정권은 1232년에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후 몽골의 침략에 맞섰지만 잦은 반란에 직면하게 된다. 이로서 최씨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고려는 몽골 제국에 항복하였다. 몽골의 지원을 받은 원종은 1270년 삼별초를 해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배중손이 이끄는 강화도의 삼별초는 원종의 고려 정부에 반기를 들고 봉기하였다. 삼별초는 서해안 요지를 공략하며 남행하여 진도에 이르렀다. 그곳에 항구적인 근거지를 두고 용장사를 행궁으로 삼고 주변에 산성을 쌓고 관아도 세워 도읍지의 면모를 갖추고 움직였다. 세곡으로 운반되는 식량과 자금을 빼앗아 자체 군량으로 쓰는 동시에 개경 정부를 압박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1271년 상장군 김방경과 흔도가 지휘하는 여몽 연합군이 세 방향에서 진도를 향해 공격했고 9개월 만에 진도는 함락당하였다. 삼별초는 무너졌고, 배중손은 남도석성에서 전사했다.
김통정이 남은 무리를 이끌고 제주로 들어왔고 남해도에 있던 유존혁도 80척의 선단을 이끌고 들어와 합류한다. 이렇게 해서 제주를 새로운 발판으로 삼은 삼별초는 항전 활동을 재정비하게 된다. 제주에 들어온 삼별초가 먼저 주력했던 일은 방어 시설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환해장성(環海長城)을 쌓고 내성과 외성에 이중으로 된 항파두리성을 쌓았고, 항파두리성과 가까운 포구이자 삼별초 수군의 거점이었던 애월포에 애월목성(涯月木城)을 쌓았다. 나무로 쌓은 성이었던 애월목성은 조선 초기까지 절반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1.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최초 대장경판 조성시기 : 고려 1011년(현종2년)에서 1029년(현종20년)까지 18년 동안 조성 •초조 고려대장경(初雕高麗大藏經)은 주로 북송의 관판대장경 토대로 조성 •대구 팔공산 부인사에 봉안했으나 1232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소실
2.초조대장경 보완 및 고려속장경(續藏經) •고려는 초조 고려대장경에 만족하지 않고 완벽하고 주체적인 대장경 조성 시도 •문종 때 대각국사 의천(義大)스님은 흥왕사에서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불교 역사상 최초의 창조적 대장경 조성 사업에 착수 •송나라, 요(遼)나라와 일본까지 경전 조사 수집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출간 - 이른바 고려 속장경이라 불림 •그러나 지금은 북방 외적의 병화로 소실, 국내 및 일본 등지에 남아 있는 영인본을 통해서 그 탁월한 창조적 내용을 알 수 있을 뿐이다.
3.재조(再雕) 대장경판 조성 (현존 해인사 고려대장경) •조성 시기 : 고려 1236년(고종23년) 때부터 1251년(고종38년)까지 16년간 걸쳐 완성 •판각 장소 : 강화도 선원사 장경도감 설치 •보관 보존 : 처음에는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봉안하였다가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 더욱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해서 서울 지천사(支天寺)를 거쳐 1398년에 해인사로 옮겨서 봉안
4.제작과정 : 1)산벚나무와 돌배나무 중 굵기가 40cm 이상인 나무를 골라 90cm 이상의 길이로 잘라 1~2년 동안 말려 두께가 5cm 이상인 판을 만든다. 2)소금물에 판을 넣고 삶아내 그늘에 말린다. 3)판을 대패질하여 면을 고르게 한다. 4)수기대사(守其大師)가 꼼꼼히 보고 새기고자 하는 글을 판 위에 붙인 후 글자를 새긴다. 5)좀이 나지 않고 뒤틀리지 않게 옻칠을 하고 대장경판에 먹을 묻혀 종이에 인쇄한다.
대장경은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하여 널리 알릴 목적으로 간행된 불교의 대경전이다. 대경전이라는 말은 '세 개의 광주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경(經),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도리를 담은 율(律),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연구해 놓은 론(論)인데, 이 세 가지의 큰 광주리를 합쳐 대장경이라 부른다.
팔만대장경 상징탑을 배경하여 고려천도공원 탐방을 기념한다.
앞에 천도문(遷都門)이 있으며, 천도문광장에 설명안내판들이 세워져 있다.
선원사는 고려 강도 시절 최우의 원찰(창건주가 자신의 소원을 빌거나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특별히 건립하는 절)로 1245년(고종 32년) 창건되었으며, 고려 팔만대장경을 판각했던 사찰이다. 조선 태조 7년 대장경판이 한양의 지천사로 옮겨진 후 선원사에 대한 별다른 기록이 전해지지 않았으나 1976년 동국대학교에 의해 조사가 시작되어 1996년에서 2000년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20여 채에 이르는 대·소형의 독립 건물이 확인되었다.
상정고금예문은 1109~1146년(인종), 최윤의 등 17명이 왕명으로 고금의 예의를 수집, 고증하여 50권으로 엮은 전례서이다. 현재는 남아 있지 않지만, 강화도 천도 후 최이의 주도 아래 금속활자로 「상정고금예문」 28부를 인쇄했다는 사실이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최이는 1234년 진양후로 책봉됐고 이규보는 1241년 숨졌기 때문에 아마도 최초의 금속활자본은 1234년에서 1241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직지심체요절」보다 130년이나 앞선 것이다. 이러한 것을 뒷받침 해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있다. 최이가 직접 쓴 글에 따르면, 강도 시대인 1239년(고종 26년) 당시 「상정고금예문」 외에 또 다른 책이 금속활자로 인쇄된 사실이 있는데, 책의 정확한 이름은 「남명천화상송증도가」다. 실제로 이 책은 보물 제758호로 지정되어 현재 목판본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당시 금속활자본을 다시 목판본으로 만들어 인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9년간 대내외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강도 시기(몽골의 침입으로 강화에 도읍을 옮긴 시기를 이르던 말)의 고려는 찬란한 문화를 남겼다. 특히 세계기록유산인 고려대장경판이 제작되어 당시의 불교문화가 세계적인 수준이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목판 인쇄의 단점을 보완하였다. 목판 및 금속활자 인쇄술과 함께 고려청자 등 공예미술문화의 발전 또한 획기적이라 할 만하다.
1.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 금속활자 인쇄는 금속활자를 배열하여 빠른 시간 안에 인쇄하는 신기술이다. 고려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한 것은 목판인쇄술과 청동 주조술의 발달에 기반한 것이었다. 강화천도 이전부터 금속활자술은 사용되었으며, 강화천도 직후인 1234년경 의례에 대한 내용물을 담은 「상정고금예문」을 인쇄하였으나 현재 이 책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금속활자 인쇄술은 원나라의 지배로 쇠퇴하였으나 지방 사찰에서는 지속적으로 금속활자를 이용하여 불교서적을 찍어낼 수 있었다.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찍어낸 「직지심체요절」은 세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다.
2.고려청자 : 고려청자는 12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하고 왕실, 귀족과 사찰을 중심으로 사용되었다. 강화의 고려왕릉에서 출토된 청자는 유색이 좋고 장식문양과 제작 수법이 세련되었다. 왕실 이외에도 무신정권기의 권력자였던 최항의 무덤에서 나온 것으로 전해지는 청사진사연화문표형주자는 왕실 자기에 비해서도 장식이 매우 화려하다. 강화중성 주변 건물지 발굴조사에서도 최상급의 청자류가 출토되어 왕실 못지않은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상을 보여준다.
강화천도는 고려 - 몽골 전쟁 때 장기간 항전하기 위해 고려 고종이 1232년(고종 19년) 도읍을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긴 일이다. 새로운 수도로 선정된 강화는 조석 간만의 차가 크고 조류가 빨라 공격이 쉽지 않은 반면, 수도인 개장과 가깝고 지방과의 연결 혹은 조운 등이 매우 편리한 곳이었다. 승천포는 개경에서 강화로 천도를 단행할 때에 고종이 처음 강화에 발을 디딘 곳이며, 이후 몽골과 교섭할 때 두 나라 사신들이 자주 드나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지금은 북한과 마주 보는 지역이라 긴 철망으로 가로막한 민간인 출입통제 구역으로서 주소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송해면 당산리 397번지, 399번지 일대이다.
고려천도공원의 안내도를 승천포 고려천도길이라 명명하였다.
천도문광장의 설명안내판을 살핀 뒤 돌아서서 천도문광장과 그 뒤 천도광장의 팔만대장경 상징탑를 살폈다.
왼쪽 앞에 전통연못과 그 뒤에 벽천폭포가 있으며, 그 오른쪽 나무계단을 오르면 전망대와 승천보(昇天堡)터가 있다.
고려천도공원의 천도문(遷都門)을 나오면 입구에 평화의길 종합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고려천도공원 천도문(遷都門)을 나와서 뒤돌아본다. 맨 왼쪽 뒤에 수변정자와 그 뒤 전망대, 천도문 입구에 강화군관광안내도, 민통선고려천도공원 안내도, 평화의길 종합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고려천도공원은 2019년 11월 19일 개장하였다고 한다.
송해면 당산리 들녘이 드넓다. 중앙 뒤에 고려산이 솟아 있고, 하늘에는 쇠기러기 떼들이 날아간다.
고려천도공원 주차장에서 바라보면 중앙 뒤 오른쪽에 문수산, 앞에는 소우돈대가 보인다. 평화의 길은 해안북로 자전거도로를 따라 다송천의 소우교로 이어간다. 1코스 종점은 중앙 맨 뒤 김포시 월곶면 문수산 아래 문수산성 남문이다.
소우돈대는 우뢰돈대라 불리기도 한다. 금곡천의 하류와 바다가 접하는 합수부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주위 평야 가운데에 우뚝 솟은 야산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 정상에 돈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현재는 군시설물에 의해 상태를 파악할 수 없다. - 강화돈대
조강(祖江) 너머 북녘 땅에서 들려오는 대남방송 때문에 고생하는 당산리 주민들이 호소문이 적힌 알림막이 펼쳐져 있다.
고려천도공원 주차장 입구에서 송해면(松海面) 당산리 들녘을 바라본다. 앞에는 당산리 주민의 호소문이 적힌 알림막이 펼쳐져 있고, 오른쪽에 당산리 박촌말, 그 왼쪽에 화문석마을이 있으며 중앙 뒤에 고려산이 솟아 있다.
조선시대 이래 송정포(松亭浦)의 이름을 따서 송정면(松亭面)으로 칭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송정면(松亭面)과 삼해면(三海面)을 병합하고 송정면에서 송(松)자와 삼해면에서 해(海)자를 따서 송해면이라 칭하였다. - 강화로닷컴
고려천도공원이 중앙 뒤에 조성되어 있고, 고려천도공원 문자조형물 뒤 구릉에 승천보(昇天堡)가 있었다고 한다.
해안북로에서 송해면 당산리 서쪽을 조망한다. 왼쪽에 박촌(朴村)말, 오른쪽에 승천보(昇天堡), 중앙 뒤에 봉천산이 보인다.
박촌(朴村)말은 안골말 동쪽 바닷가에 있는 마을이다. 도지촌, 양촌말이라고도 부르며 반남 박씨가 많이 살고 있어 박촌(朴村)말이라 부른다. - 인천광역시사
강화 승천포에서 건너편 승천부를 조망한다. 고려 고종 19년(1232년) 7월 6일 고종은 개경(開京)을 출발, 천도길에 올랐으며 개경과 강화도 간의 중요 통로였던 개풍군의 승천부(昇天府)와 강화군 송해면 당산리 승천포(昇天浦) 사이 뱃길을 통해 다음날인 7일 강화 땅에 당도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승천부(承天府)라고 표기하였는데 현재는 승천부(昇天府)로 바뀌었다.
다송천은 금곡천(金谷川) 또는 금곡수로라고도 불리며, 상류 부분은 목숙천으로 불린다고 한다. 중앙 뒤에 고려산이 보인다.
금곡천(金谷川)은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하점면 부근리 시루메산에서 발원하여 송해면 당산리 승천포 돈대 옆을 통해 한강에 유입하는 하천이다. 1696년에 편찬된 『강도지』에 "승천포의 근원은 봉두산에서 출발하여 북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간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승천포는 금곡천의 하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유역은 북쪽으로 봉천산·백마산·풍류산을 분수령으로 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고려산을 분수령으로 한다. 유로상에는 1980년 완공된 대산저수지가 소재한다. 유역 내에 국가지정문화재인 오층석탑(보물 10호), 석조여래입상(보물 615호)가 있고 사적 137호인 강화지석묘가 있다. -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다송천의 소우교를 건넌다. 중앙 뒤에 1코스 종점인 김포시 월곶면 문수산이 보인다.
중앙 맨 뒤 강화평화전망대를 출발하여 고려천도공원을 거쳐 다송천의 소우교로 이어왔다.
당산리에서 숭뢰리로 넘어와 서쪽 숭뢰리 들녘과 당산리 들녘을 조망한다. 오른쪽 뒤에 봉천산, 왼쪽 뒤에 고려산이 보인다.
송해면 숭뢰리와 당산리 간척농지가 드넓다. 왼쪽에 봉천산이 보인다.
숭뢰리(崇雷里)는 숭릉(崇陵)이 있었다 하며, 숭릉의 숭(崇)자와 우뢰(雨雷)마을의 뢰(雷)자를 따서 숭뢰리(崇雷里)라 부른다.
숭뢰리(崇雷里)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송해면에 있는 리(里)이다. 평지와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는 마을이다. 마을 서쪽으로 금곡천이 흐르고 있으며, 동쪽으로 서해와 인접해 있다. 자연마을은 금굴, 송정, 숭릉물 마을이 있다. 금굴 마을은 뒷산에서 금이 났다고 해서 금굴 마을이라 하며, 송정 마을은 소나무 정자가 있었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 숭릉물 마을은 송정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숭릉터 밑에 위치한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 두산백과
송해면 숭뢰리 지역을 지나고 있으며, 평화전망대 5.15km, 강화대교 8.7km 지점이다.
강화군 송해면 숭뢰리 우뢰촌마을을 어림한다. 뒤의 산은 금동산인 듯.
평화의 길 이정목 앞에 강화읍 7km, 월곶리 3km 지점의 도로표지판과 숭뢰리 수로의 수문, 중앙 뒤에 문수산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