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의 보루 강화
우리 역사의 축소판
“저기가 말로만 듣던 예성강이 흘러나오고, 또 저기 북한마을이 보이네요. 저 왼쪽 너머엔 연백평야가 있고, 오른편에는 개성, 그리고 송악산도….” (이우형씨) 2009년 5월 어느 날, 필자는 이우형 국방문화재연구원 조사팀장과 강화도 최북단 제적봉(制赤峰)에 섰다. 믿음직한 해병대가 지키고 있는 이곳엔 2008년 9월부터 전망대(평화전망대)가 조성돼 일반인도 출입할 수 있는 곳. 빨갱이(赤)를 제압(制)한다는 뜻의 증오 가득한 봉우리가 평화의 봉우리로 변한 것이다.
우리의 반쪽, 북한사람들의 속살을 볼 수 있는 곳
▲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조강(組江)과 북한 예성강 <이우형연구원>
한강과 임진강이 관미성(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합수한 뒤 흐르고 흘러 다시 예성강을 품에 안고 저기 서쪽 서해바다로 빠져나가는 곳. 우리는 이 한강·임진강을 품에 안고 예성강까지 보듬은 이 드넓은 강을 할아버지 강, 즉 조강(祖江)이라 부르지. 왠지 한반도라는 좁디좁은 땅에서 살던 필자의 속 좁은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다. 이 할아버지 강의 넉넉한 품을 사이에 둔 덕분에 남북은 아무런 시야의 간섭 없이 서로의 속살을 바라볼 수 있다. 북한까지의 거리가 2.3㎞. 얼핏 보아도 옹기종기 모여있는 북한의 뭇 마을들. 망원경으로 보니 북한주민들이 농사짓는 모습, 뛰노는 아이들의 천진스런 모습까지 손에 잡힐 듯 시야에 들어온다.
연미정이 담고 있는 사연
이우형씨가 다시 손을 잡아끈다. 연미정(燕尾亭)으로 가잔다. 예전엔 민통선 이북이었는데, 요즘은 통제선을 200m 북쪽으로 물린 덕분에 누구나 출입할 수 있는 곳이 됐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한 줄기는 서해로. 한줄기는 강화해협으로 흐르는 모양이 꼭 제비꼬리 같다하여 이름 붙은 곳. 과연 이름처럼 아름답다. 500년은 족히 넘었을 느티나무가 정자를 지키고 있다. 이 정자는 삼포왜란 당시 공을 세운 황형(黃衡·1459~1520년)장군에게 조정이 하사한 정자란다.
▲연미정. 제비꼬리 같은 곳에 위치한 정자 <이우형연구원>
그런데 이 절경의 정자에 뼈아픈 역사가 배어있을 줄이야. 북으로개풍, 동으로는 파주와 김포가 한눈에 들어오기에 그만큼 요충지였기에 그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한국전쟁 등 숱한 전쟁의 역사 속에서 붕괴됐다가 다시 서기를 여러 차례. 특히나 이곳은 정묘호란 때(1627년) 인조가 후금(청나라)와 굴욕적인 형제의 맹약을 맺은 치욕의 장소였다. 정자는 지금도, 뭇 은둔거사들이 세상의 모든 시름을 잊고 음풍농월로 세월을 보낼 으뜸의 장소로 꼽힐 법하다. 하지만 주변을 살펴보라. 현실은 해병대가 철통 같은 방어벽을 펼치고 있는 분단의 상징인 것을…. 갖가지 상념 속에 빠져있을 무렵, 이우형씨가 저편을 가리킨다.
송아지 한 마리가 되살린 통일의 씨앗
“저기가 유도(留島)입니다.” 유도? 조강 한복판에 홀연히 떠있는 저 섬, 유도. 1996년 집중호우로 그만 떠내려가던 두발배기 송아지 한 마리가 간신히 목숨을 건진 바로 그 곳이다. 비무장지대 안이라 누구도 손 쓸 수 없었던 상황. 송아지는 굶주림 속에 갈수록 여위어 갔고, 보다 못한 우리 군이 북한군과 극적인 협의를 벌인 끝에 이 섬에 들어가 송아지를 구출했다. 송아지는 1998년 제주도 출신 암소와 혼인, 7마리의 새끼를 낳았고 2006년 자연사 했단다. 이는 분단이라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평화의 불씨는 그대로 남아있음을 보여준 뜻깊은 사연이다. 이 연미정이 상징하듯 강화의 역사는 의미심장하다.
한반도 역사의 축소판
“강화 섬 전체가 거대한 문화유적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문화유적 밀집도는 경주가 부럽지 않습니다. 섬 전체가 가히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안덕수 강화군수) 그도 그럴 것이 지정문화재만 해도 105건(국가지정 29점, 시지정 76점)이며, 비지정(434건)을 합하면 539건에 이른다. 밀집도 뿐 아니라 강화의 역사를 찬찬히 뜯어보면 마치 한반도 역사의 축소판 같다. 우선 국조(國祖) 단군의 전설이 서린 곳이 바로 강화섬이지 않은가. <환단고기>와 <규원사화>, <고려사>, <신동국여지승람>등을 참고해보자. 이들 기록에 따르면 단군 왕검이 나라를 세운 뒤 마니산에 참성단을 쌓고 세 아들로 하여금 삼랑성(지금의 정족산성)을 축조했으며, 참성단에서 천제를 올렸다고 한다. 마니산(해발 469.4m)이 자리잡고 있는 화도면은 원래 강화도 본도에서 떨어진 섬(고가도·古加島)이었다. 강화섬 사람들은 1880년대 이래 엄청난 간척사업을 벌였고, 고가도 역시 강화본도가 되었다. 마니산은 민족의 영산(靈山)으로 추앙받았다. 사실 고조선의 영역을 지금의 다링허·랴오허 유역, 즉 발해연안을 포함한 만주 지역으로 치고 있는 사람들은 그곳에서 한참 떨어진 강화도 마니산이 무슨 제사터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강화도 자체도 넓게 봐서는 발해연안에 속해있지 않은가.
국조 단군의 숨결
▲참성단은 상고시대 단군이 쌓았다고 세전되어 온다 <강화군청 제공>
혹자는 몽고항쟁을 위해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왕조가 백성의 힘을 결집시키기 위해 지어낸 전설이라고 폄훼하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 민족의 관념 속에 이미 단군과 강화도가 믿음의 대상으로 뿌리 깊게 투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후대의 광개토대왕(고구려)이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마니산 참성단에서 제사를 지냈고, 을지문덕 장군도 해마다 3월16일 마니산에서 기도했으며, 조선조 태종도 제천행사를 이곳에서 지냈다지 않은가. 아닌 게 아니라 마니산은 영산의 이름을 얻을 만하다. 예컨대 마니산은 기가 폭포처럼 뿜어 나오는 전국 제일의 생기처(生氣處)로 알려져 있다. 기(氣)를 수련하는 이들은 새해를 맞아 마니산을 찾고 있다니 말이다. 이와 관련해서 주목되는 강화도가 청동기 시대, 즉 제정일치 시대의 지배자 무덤이라는 고인돌 왕국이라는 것이다. 강화섬에는 하점면 부근리에 있는 대표적인 탁자식 고인돌을 포함, 무려 150여 기의 웅장하고 잘 생긴 고인돌이 노출돼있다.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호국의 보루가 된 강화
이후 강화섬은 그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온갖 외세침탈의 수난을 홀로 견뎌내며 ‘호국(護國)의 보루’로 그 역할을 담당한다. 몽골군이 침략하자 고려조정은 1232년 2월 장기항전을 위해 강화도로 천도한다. 수도 개경을 모델로 궁월을 짓고, 내성과 중성, 외성을 축조했다. 몽골군이 수전(水戰)에 약했던 데다 유속이 빠른 강화해협, 그리고 4억4816㎡에 이르는 광활한 갯벌은 적의 상륙을 불허했다. 또한 한강·임진강·예성강을 한번에 통제할 수 있었던 데다 해상으로 호남·호서 지역의 풍부한 물자를 공급받을 수 있어 장기전을 치르는데 제격이었다. 강화도는 1270년 개경환도를 선언할 때까지 39년간 고려의 임시수도가 되었다. 지금도 고려궁지와 석릉(희종릉), 홍릉(고종릉) 등 고려왕릉이 남아있다. 또한 호국불교의 상징인 고려대장경을 보관했던 선원사터가 남아있다. 조선시대 때는 ‘보장처(保障處·전란 때 임금과 조정이 대피하는 곳)’ 역할을 했다. 병자호란의 교훈을 뼛속 깊이 새겼고, 북벌정책을 추진한 효종과, 그의 손자 숙종은 강화도에 5진(鎭)·7보(堡)·8포대(砲臺)·54돈대(墩臺)를 설치했다. 강화도는 그야말로 요새가 되었다. 이 뿐이 아니라 태조의 어진을 모시는 봉선전, 역대 왕의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 왕실의 족보를 모시는 선원보각, 왕실의 서책을 보관하는 외규장각 등을 마련, 왕실의 위엄과 운명을 유지토록 했다.
독립심 강하고 넉살좋은 강화사람
하지만 200년 간의 평화는 일본과 서양의 강화도 함포사격으로 여지없이 무너졌다. 1866년 병인양요, 1875년 운요호 사건, 1871년 신미양요 등 최신식 대포로 무장한 외세의 도발에 강화도는 쑥대밭이 되었다. 갑곶돈대와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등에는 지금도 처참한 전투의 흔적을 맛볼 수 있다. 그러나 일방적인 패배였을까? 그렇지는 않다.
강화해협을 지키는 요충지인 덕진진 <이기환기자>
병인양요 때 양헌수 장군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섬멸했고, 이 여파로 프랑스군은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외규장각 도서를 비롯, 각종 약탈물을 빼앗아 강화해협을 빠져나갔다. 나폴레옹 3세가 이 소식을 듣고 술잔을 집어던졌다니…. 또 신미양요 때는 어재연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은 광성보에서 백병전 끝에 패배했다. 하지만 미군은 훗날 이 전투를 두고 “승리했지만 자랑할 것 없는 승리”라고 한탄했다. 어재연 장군이 독전하면서 흔든 지휘 깃발인 ‘수(帥)자기’는 지난 2007년 136년 만에 귀향했다. 강화의 수난사를 반영하듯 강화사람들은 인내력이 강하고 독립심이 강했고, 특히 강화여인들은 시쳇말로 ‘넉살좋은 강화X’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언제 어느 곳에서도 살아남는 강한 생활력을 자랑했다고 한다. 피나는 노력을 섬과 섬을 잇는 간척사업을 벌여 경작지를 늘려온 것이 바로 강화사람들이다.
한반도 5000년 역사를 일별하려면
▲강화도 면전의 25%에 이르는 갯벌이 장관을 이룬다 <강화군청 제공>
수난의 한반도 역사를 막아낸 방파제 역할을 하느라 피곤한 삶을 살아서 그렇지 기(氣)가 넘치는 강화엔 먹을거리도 풍성했고 특산품도 다양했다. 수확되는 쌀은 강화사람들이 먹고도 남을 정도였다. 강화인삼은 말할 것도 없고 강화산 약쑥은 다른 곳보다 최고 100배나 효능이 뛰어나단다. 화문석과 순무는 말할 것도 없고…. 강화도 면적의 25%에 달하는 엄청난 강화갯벌은 저어새와 함께 천연기념물로 일괄 지정되었다. 한반도 5000년 수난의 역사가 농축된 강화섬. 사연 많고 한 많은 우리 역사를 일별하려면 다른 곳 갈 것 없이 바로 강화섬을 찾아가 보라.
강화 고인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고인돌의 나라’인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인돌(하점면 부근리)이다. 고창ㆍ화순 고인돌군과 함께 2000년 12월 2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이우형연구원 제공>
출처:(신택리지, 경향신문)
강화도 강화대교~김포 초지대교
‘살아있는 역사 박물관’으로 떠나는 자전거여행
주변여행지
• 갑곶돈대
북쪽으로는 갑곶나루가 위치하고 있어서 김포의 문수산성과 통할 수 있는 통로로서 활용되어 왔으나 현재는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갑곶돈대 내에는 강화역사관이 위치하고 있고, 국방교육장으로 활용 중이다. 갑곶돈대에는 조선시대의 대포가 전시되어 있다.
▲갑곶돈대
• 연미정
강화군 월곶리 바닷가에 위치한 정자.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그 해협의 모양이 제비꼬리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 삼포왜란 당시 공을 세운 황형 장군을 위해 왕이 하사한 아름다운 정자다.
• 동막해수욕장
강화도의 유일한 백사장인 동막해수욕장은 10m 폭의 모래사장에 불과하지만 뒤편의 송림과 넓게 펼쳐진 갯벌이 어우러져 많은 여행객들이 찾는 탓에 강화도에서 음식점, 펜션과 민박, 각종 편의시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이다.
▲동막해수욕장
• 강화평화전망대
강화도 최북단 제적봉에 위치한 평화전망대 바로 앞은 황해도 개풍군으로 바로 북한지역이다. 굳이 전망대에 설치된 망원경을 이용하지 않고 육안으로 북한 땅의 집과 예성강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로 남북분단의 현실을 새삼스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제적봉이란 이름은 공산당(赤)를 제압(制)한다는 뜻으로 지었는데, 이젠 통일을 기원하는 소망나무가 자라는 곳으로 변화하고 있다.
강화평화전망대
출처:(해양관광정보포털 바다여행)
평화문화진지[平和文化陣地]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 있는 문화·예술시설.
건립 경위
평화문화진지는 분단의 아픔이 서린 대전차방호시설을 문화예술 창작공간으로 바꿔보려는 시민들의 바람으로 건립되었다. 2004년 철거된 이후 오랫동안 흉물로 방치되던 대전차방호시설은 2014년 7월 민간과 행정의 협력을 통해 공간재생이 이루어졌고, 2016년 12월 서울특별시청, 도봉구청, 60 보병사단과 대전차방호시설 리모델링을 위한 협약이 체결되었다. 대전차방호시설의 흔적들을 그대로 보존한 채 평화문화진지는 문화예술의 공간으로 재탄생하였으며 2017년 10월 31일 개관하였다.
구성
평화문화진지는 연면적 1,902m²[576평], 지상 1층 5개동 규모로, 시민동, 창작동, 평화광장, 문화동, 예술동, 평화동, 전망대, 옥상산책로로 이루어져있다. 평화광장에는 외교부와 통일부의 협조를 얻어 독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장벽’ 세 점을 무상으로 기증받아 전시하고 있다. 아울러 기존 벙커는 군사시설로 존치하되 나머지 공간은 예술가와 주민을 위한 창작동, 문화동, 예술동 등으로 조성했다.
현황
평화문화진지는 시민들과 함께할 수 있는 공연, 워크숍, 체험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진행되며 세미나 또는 공연을 위한 대관신청 및 작가들의 기획전시 등을 진행하고 있다. 지하철 1, 7호선 도봉산역 서울 창포원 북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하고 월요일은 휴관한다.
참고문헌
「도봉구 대전차방호시설 평화문화진지 개관」(『아시아경제』, 2017. 10. 30.)
도봉구청(http://www.dobong.go.kr)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024-11-14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