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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약1:1)
성경 66권을 내용에 따라 분류한다면
두 가지로 나룰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것인가?”입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어떻게 의롭게 되느냐’ 하는
진리가 성경에 담겨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거듭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즉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이 땅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을까?’하는 내용입니다.
야고보서는 두 번째, 즉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날마다 동행하며 사는 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때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이라며
무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쳐 생각한 결과입니다. 믿음으로 인한
구원을 강조하다보니 그런 치우친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과 실천’의
균형을 강조합니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같이,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이 ‘믿음과 실천’은 함께 가야할 동반자입니다.
<저 자>
이 서신의 저자는 누구입니까?
1절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예, 야고보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야고보란 이름이 4명 나옵니다.
첫 번째는 누군가 하면 예수님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유다의 아버지 야고보입니다.
그런데 이 분의 이름이 성경에 등장하는 이유는
열두 제자 중에 가룟 유다와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눅 6:16절에 보면 열두 제자의 마지막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예, 예수님의
제자 중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이 바로 야고보의
아들 유다이고 다른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인 것입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야고보가 둘이었는데
한 사람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큰 야고보),
곧 요한의 형제가 되는 야고보입니다(막3:17).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형제가
두 쌍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또 요한과 그 형제 되는 야고보입니다.
그중에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삼인방 중에
하나로 예수님의 측근이었습니다.
변화산에도 같이 올라갔고 겟세마네
기도 동산에도 참석했습니다.
바로 이 야고보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주후 44년 열두 사도 가운데
가장 먼저 순교했습니다.
두 번째 야고보가 있는데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작은 아고보)가
바로 그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데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구분하기 위해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라고 불렸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야고보가 있습니다.
이 네 번째 야고보가 이 야고보서를
쓴 사람인데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아니에요.
그러면 누군가? 바로 예수님의 동생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의 가족은 이러합니다.
마13: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야고보는 바로 밑의 남동생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책을 읽기 전에 먼저
그 저자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저자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어야
그 책의 내용에 공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바로 아래 동생으로서 야고보가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인가를
한 번 상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보통 둘째는 성격이 강하고 약삭빠른 면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형과 싸워 이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야곱이 대표적인 경우).
특별히 형이 굉장히 탁월한 경우에 둘째는
많은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비교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의
그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요?
바른 생활을 하고 사랑을 독차지 하는
예수님에게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로 집을 나서기까지
무려 30년 가까이 함께 살았습니다.
우애도 깊었을 수 있지만 반면 비교도
많이 받아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입니다.
아마 마음으로 싫어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그의 형이 자신이 메시야라고
주장하기 시작하자 야고보가 어떻게
반응했을 것 같습니까? 궁금해 할 필요도
없습니다. 성경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마12:46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야고보는 그의 동생들을 다 데리고 가서
그의 형이 미쳤다 그러고 잡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야고보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내 보이신 사람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전15:4-8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독대하여 나타난 것은
야고보 혼자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야고보를 특별히 일대일로 만나주신 것입니다
(가족을 구원하기 위한 열망에서).
성경이 야고보의 회심이 자세히 기록되지 않아
우리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후 180도 완전히 변화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승천 이후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 있을 때 바로 그 현장에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오순절에 임하시는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후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의
제 1 대 감독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예루살렘 교회의 1대 감독은
바로 이 야고보였습니다.
훗날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을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어 할 그 때에 그를
인정해주고 감싸안은 사람이 바로 야고보였습니다.
야고보가 아니었다면 바울은 바울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합을 위협하는
아주 큰 분쟁이 생겼을 때에 야고보는
바울을 지지하여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복음을 최초로 확정했습니다.
고대 역사 유세비우스와 요세푸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야고보는 반대자들에게
주후 62년 어느 날 성전 꼭대기에 세워져
심문을 받습니다. 거기서 예수를 부인하라고
강요당합니다. 왜요? 예수님의 동생으로
알려진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일대 감독인 야고보만 예수님을 부인한다면
기독교는 끝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너무 평안한 마음으로,
인자한 얼굴로 “예수님이 바로
이 땅을 지으신 하나님이시요 독생자
메시야이심”을 강력하게 설교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반대자들이 그 성전에서
야고보를 밀어뜨려 떨어뜨려 죽였다고 합니다.
순교 한 것입니다.
그의 시신을 수습한 제자들은 낙타 무릎처럼 된
그의 무릎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무릎 끓어 기도했던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야고보에게
‘낙타의 무릎을 가진 사나이’라는 별명이
붙여 주었다고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여러분! 오늘 본문 1절에서 그가 예수님에 대해
뭐라고 고백하고 있는지 주목하여 보십시오.
1절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형인 예수님을 육신적으로 알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1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즉 형제이기 이. 전에 신앙의 대상으로
예수님을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메시아로 인정).
여러분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하나뿐입니다.
야고보는 주님이 누구신가를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머리로만 안 것이 아니라 진실로 성령에 의해
예수님을 마음의 주로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신앙의 있어서
연조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태 신앙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얼마나 오래 나와
어떤 지위와 직분에 있는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진실로 예수님을 만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단순히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만나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고백하고 있는 모습은 정말 인상적입니다.
야고보가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이라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인
나 야고보는”이라고 기록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게 더 권위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사회에서 저명한 인사나 혹은
권력이 있는 자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말합니다. 소위 말해서 힘 있는 자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자기 자신의 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학연, 지연, 혈연 등으로
인해 연결되어 있는 힘을 이용하는 만큼
세상에서 자기를 알아주고 대우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힘을 과시하고
내세우며 상대를 제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자기 자신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이용해
그 어떤 기득권을 누리기보다는 오직
주님을 높이는 데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서 우리는 야고보서의 저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야고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수신자>
그러면 야고보는 누구에게 편지를 쓴 것일까요?
1절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야고보는 각지에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도대체 이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야곱의 열두 아들의 이름을 따서
구약에 있는 열두 지파를 압니다.
그러면 열두 지파는 이스라엘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까? 꼭 그렇지 않습니다.
문자적으로 말하면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이 열두 지파는 은유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모든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초대교회 당시
신앙의 박해를 피해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른 신앙생활을
격려하기 위해 편지를 쓴 것입니다(회람용).
한편 여기에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흩어져 있다’고 했는데 그들이
자발적으로 흩어진 것이 아닙니다.
본래 예수님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복음을 들고 흩어지라는 말씀입니다
. 복음을 전하려면 흩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역사를 보면 성도들은
쉽게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만
사랑하고 교제하고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기를
원했습니다. 주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방 선교에 소극적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흩어놓으셨습니다.
행8:2절에 보면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다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고
했습니다. 이 와중에 스데반 집사도 순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니
사단에게 핍박할 구실을 준 것입니다.
분명 초대교회를 핍박한 것은 사단의 세력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초대교회를
흩어 놓으시려고 하나님께서 사단의 핍박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합니다.
결과적으로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서
성도들이 전 세계로 흩어지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복음도 전파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 우리에게 예기치 않게 닥쳐오는 고난도
우리의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믿음을 잃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반드시 주님의 선하신 뜻을 발견하는 날이 올 것이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기록 목적과 시기>
그러면 야고보가 편지를 쓴 때는 언제쯤일까요?
스데반의 순교 이후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야말로 핍박의 연속이었습니다.
첫째는 종교적 핍박이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로부터 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정치적인 핍박이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으로부터 오는 핍박입니다.
마지막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큰 흉년이
발생하여(AD 46) 바울이 부조여행을 위해서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사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행11:27-30).
요약하면 당시 수신자들은 내부적으로는
유대인들로부터 종교적인 박해에 직면해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정치적인 박해아래 있었으며,
그리고 기근으로 인한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수신자들에게
먼저는 위로와 그리고 도전의 메시지를 전함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성숙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썼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시기는 아마도 AD 46에서 그가
순교했던 AD 62년 사이였을 것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라기는 혈육의 관계를 넘어 예수님을
‘참 주님’으로 만났던 야고보처럼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예수님의 종’이라고 고백했던
야고보처럼 저와 여러분도 오직 주님의 종으로,
오직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야고보서를 강해하는 동안 야고보가
전하고자 했던 그 말씀을 생생히 깨닫고,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적용하여,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 말이 아닌 생활로
증명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