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창작 기법 -수필 창작에 따르는 몇 가지 助言
강범우(문학평론가) '수필이란, 가장 오래된 문학형식인 동시에 가장 새로운 문학형태요, 아직도 미래의 문학형태인 것이다. 원래 옛날에는 문학이라면 '귓글'과 '줄글'이 있었으니, 즉 詩와 文이 문학의 兩宗이다. 소설이 등장한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훨씬 후세에 있어서이다. 수필이란, 곧 文에서 발달해온 것이다. 그러나, '수필'의 활동은 과거의 모든 문학형태나 인습이나 구속에서 탈피하는데서 비롯되었다.'(윤오영 : '수필의 개념'에서)
'수필은 붓가는 대로 쓰는 글'이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과거의 모든 문학형태나 인습이나 구속에서 탈피된 문학형식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수필〉의 作風의 특색이 있다. 계절에 따라, 장소에 따라, 생각에 따라, 자기의 생각을 느낀 대로 쓰는 글이〈수필〉의 生命이다.
시가 정서를 승화시키는 기교 속에서 개성이 융합되는 글이라면, 소설·희곡은, 구성과 표현 뒤에 개성이 드러난다. 그런데 비하여,〈수필〉은 작자의 心的裸像이 그대로 표현되는 글이다. 개성이건, 취미건, 이상·지식… 그대로 나타나는 글이다.〈수필〉은 이 같이 작자 자신의 생활체험을 근간으로 해서 쓰여지는 글이다. 自照의 문학이라고 부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즉흥적 묘미에 수필의 특색이 있다면, 그 구성에 이론이 있을 리 없다. 그러기 때문에〈수필〉을 이론적으로 체계를 세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수필'은 다분히 동양적인 문학형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의 전래의 문학은 그 대부분이 〈수필〉의 형식(?)에 의하여 구성되어 있다. 가령; 자연을 그려도 노래처럼, 인물을 그려도 그림처럼, 시도 무상한 인생이 아니면, 허망한 세태다. 지나치게 덧없는 인생의 슬픔을 읊고 있다. 고대〈한글소설〉의 대부분이 기법상으로 볼 때 플롯도 없고, 대화도 별로 없고, 모노로그에 가까운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다시 말해서 '主觀의 움직임이 주'되는 분위기로 되어 있다. 이것을〈수필〉의 측면에서 본다면,〈수필〉의 세계와 별 다를 바가 없다.
〈수필〉은 확실히 무기교의 문학이다.〈수필〉이 단순하고 소박한 묘미가 상실되면 〈수필〉의 묘미도 소멸된다.〈수필〉의 묘미는 소설처럼 여러 가지 상황에 지배됨이 없이, 작자의 주관이 흐르는대로 적어내리는 글이다. 이런 점에서 소설과는 달리, 〈수필〉은 쓰기 쉽지만,〈수필〉의 참된 경지에 들어가면 갈수록 어려움이 생긴다.
〈현대수필〉에는 현저하게 소설풍을 짙게 풍기고 있다. 어떤 수필은 단편소설과 별로 다를 바 없다.〈수필〉이 소설과 비슷해졌다는 것은〈수필〉의 진화인지는 의문이지만, 근대수필에는 대화, 여러 가지 인물의 등장… 소설과 별 차이가 없다. 이것은 〈수필〉의 영역을 확대한 탓이 아닐까?
오늘의 수필은 그 이전의 수필에 비하면 대단한 복잡성을 가지고 있고, 내용에 있어서도 대단한 깊이를 가지고 있다. 몇 10년 전만해도 '나는 북간도 용정에서' '나의 조국은…' 식으로 되는 일인칭 소설이 많이 쓰여졌다. 서양의 단편소설의 작가들도 즐겨 이런 文體를 사용했다. '뜨르게네프' '막심·고리끼' '모파상' '아이제' '도오테' 등, 많은 작가들이 일인칭 소설을 썼다.
일인칭 소설은 자기의 심리를 그려내는 데는 아주 편리한 형식이다. 어떤 인간의, 어느 시점에서의 감정이라든가, 비극을 써내는데는 어떤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좋았기 때문에 애써 이런 手法을 썼다. '뜨르게네프' 같은 작가는 이런 수법을 발전시킨 사람이다. 자기와 자기 이외의 인간, 또는 사회― 일인칭 소설로서 충분히 그려냈다. 일인칭 소설이 작자의 입장에 너무 밀착하는데 반하여, 삼인칭 소설은 너무 객관적인데 두는 폐단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너무 作者의 입장에서 유리되어진다.
前者는, 同情의 폐단에 빠지기 쉽고, 後者는, 경망의 폐에 빠지기 쉽다. '도스토에프스키'의 『죄와 벌』은 일인칭 소설일 수 있는 것을 삼인칭으로 써냈고, '나눈치오'의 『죽음의 승리』도 그런 경향의 작품이다. 私小說은 멸망했으나, 사람들은〈나〉를 정복했을까? 사소설은 또 다른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 올 것이다. 그것이〈수필〉이다.
〈수필〉의 구성에는 까다로운 조건이나 제약이 없다. 조건도 제약도 없는데 수필의 이색적인 풍미가 있다. 그러기 때문에〈수필〉은 至難한 작업이다. 현대수필이 부진하고 저급하다는 評을 가끔 듣는다. 이것은 우리의 문학사가 수필에서 소설로 옮겨졌다는데도 깊은 관계가 있지만, 작가가 인생을 보는 깊이의 결여에서 오는 것이 더 큰 조건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수필문학 동지 여러분! 자신을 가지고 글을 쓰시오. 신념을 가지고 작품을 만드시오.
情은 어디까지나 개성적인 주관이다. 개성의 本體는 생명 그 자체다. 생명 자체의 '核'은 정이다. 대개 체험한 인생을, 내가 생각하는 감정은 어디까지나 나만의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영역이다. 문학으로서의 수필은 종교에 있어서의 禪과 같은 것이다. 너절한 신변잡담이나, 단순한 말에 의한 기법으로서는 쓰여질 수 없다. 작자의 인생을 보는 진지한 태도 없이는 불가능하다.
〈수필〉은 다른 문학보다, 더 개성적이며, 心境的이다. 美나 조화의 최종의 결정자는 주관이다. 진리는 개개인의 인간의 독백이다. 문학은 主情的 경험의 표현이다. 경험은 항상 주정적이다. 그런 점에서〈수필〉은 만인의 것이 아니면 안 된다.
마음이 想念으로 기울면 학술적·철학적 수필이 되고, 마음이 想像으로 기울면 문학적인 수필이 된다.〈수필〉은 이런 양면성을 갖는 자유로운 문학 장르(Genre)다.
그러나, 문학적인 것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그 존재성을 문학적인데 두어야 한다. 일본의 전위작가인 '지바·가메오(千葉龜雄)'는 그의〈문학론〉에서 '현대문학의 특징은 아나키한데 있다'고 했다. 문장의 형식은 다소 격에 맞지 않는다 해도, 우리가 인간으로 이 세상에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존재가치를 깨우쳐 줄 수 있는―그런 방향에서 고민하고, 몸부림에 더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은 오늘의 문학론이나, 예술론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989. 2 서울 킹덤 호텔, 제3회 한국수필작가회 세미나 발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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