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악동 시절/ Do not forsake me(하이 눈 주제가)를 듣고 싶다
이원우(소설가 ․ 수필가 ․ 대중가요 연구가)
셋째 주일 나는 어김없이 타임머신을 탄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지하철 부산 역에서 내려 화교 거리를 지나 시각 ,애 복지관까지 올라가는 10여 분 동안이다. 50년 전이 모두 내 눈과 발에 밟힌다.
58년 나는 천하 명문 부산 중학교 3학년이었다. 성적은 썩 좋았다. 적어도 몇 달까지는…….그러나 그해 7월 말부터, 나는 악동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학교에 발을 끊었고, 내가 하루 종일 보낸 곳은 부산 역 앞 ‘철도 문화관’ 등 3류 극장이었다. 남들이 보면 어쭙잖은 동기였다. 그러나 결과는 엄청났다. 마침내 눈 어두우신 엄마와, 한 쪽이 의안(義眼)이신 아버지께서 식음을 전폐하시는 데까지 이르렀고, 가출 직전 역에서 아슬아슬하게 붙잡혔다.
언제나 그런 기억을 떠올리며 시각 장애 복지관까지 걸어가기 때문에, 타임머신 운운 하는 것이다. 어느 날 가족들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모두들 실망의 표정을 짓고 나무랐다. 그들은 앞을 못 보지만, 근처를 쏘다니던 그 악동 모습을 상상은 했으리라. 그게 당신 두 분께 대한 동병상련의 정이다.
그들을 바라보노라니 한 방울 눈물이 떨어져 차가운 시멘트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그건 나 혼자만 볼 수 잇을 따름이었다. 그들 앞에서 나는 ‘한 오백년’을 뽑아 올렸다. 백사장 세(細) 모래밭에 칠성단을 세우고/우리 부모님 만수무강을 빌어나 볼까/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고/ 한 오백년 살자더니 웬 성화요……
오는데 악동 시절이 다시 오르는 게 아닌가? 얼핏 내 입가에 까닭 모를 미소가 흘렀다. 나는 철도 문화관이 자리 잡았었던 것 같은 광장 한편 의자에 앉았다. 환청이 내 귀를 뚫고 들어올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 싶었는지 모른다. 서부 활극의 총소리와 말발굽 소리 등등. 그러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하이 눈’의 Do not forsake me가 휘파람으로 뿜어져 나오는 게 아닌다? Do not forsake me, oh my darling/On this our wedding day/Do not forsake me, oh my darling/Wait, wait along/I do not know what fate awaits me/I only know I must be brave/And I must face a man who hates me……
예서 버릇처럼 그쳤다. Hate! 그 악센트는 내 휘파람 소리에서도 묻어났다. 50여 년 전 7월 중순 어느 날을 시작으로 일생을 통해 열 번도 넘게 본 ‘하이 눈’, 그 주제곡을 따라 부른 건 셀 수조차 없다. ‘싫어하다’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선 ‘hate’에서 나는 언제나 그렇게 전율을 느끼곤 하는 것이다.
5년 동안의 보안관 직을 무사히 마치고 아리따운 신부(그레이스 켈리)와 결혼식을 올린 날 12시, 자기 손으로 잡아넣었던 악당 프랭크 밀러가 돌아온다는 연락을 받는 케인 보안관(게리 쿠퍼). 마을 사람들은 그러나 외면한다. 거의 홀로 악당과 싸워 이기는 영화를 보고, 악동인 내가 보낸 것은? 박수와 환호였다. 참 가관이었다. 악동의 또 다른 뜻, 장난꾸러기와는 담을 쌓은 ‘몹쓸 녀석이 되어 선악을 분간하지 못할 나이에, 게리 쿠퍼에게 열광하고 있었으니…….그 음침한 공간에서 들은 hate 란 단어는 내 인생에 어떤 의미였을까?
노래에는 케인의 단호한, 결코 비겁하지 않게 싸우겠다는 의지가 드러난다. 주립 교도소에서부터 날아 온 협박, 그리고 자신의 죽음도 두렵지 않다. 그러나 아내가 떠나면 어쩌나? Or lie a coward, a craven coward/Or lie a coward in my grave//Oh, to be torn ‘twixt love and duty/S’posin' I love my fair-haired beauty/Look at that big hand move along/Nearin' high noon/He made a vow while in state prison/Vowed it would be my life for hisn'/I'm not afraid of death but oh/What shall I do if you leave me?
Do not forsake, me oh my darlin'/You made that promise as a bride/Do not forsake me, oh my darlin'/Although your grievin', don't think of leavin'/Now that I need you by my side/Wait along……
에이미는 퀘이커 교리대로 살인을 반대하기 때문에 끝내 남편을 두고 떠나려는데……. 그러나 악당 두목 프랭크 밀러가 도착하자 아내인 에이미도 총을 잡는 가운데. 결국 싸움에서 이기고. 마을엔 다시 평화가 찾아오게 된다.
부산 역 광장에서 제법 시간을 보냈다. 반복해서 휘파람으로 Do not forsake…와 매달려서 말이다. 그러면서 철도 문화관에서 ‘하이 눈’ 스크린에서 눈을 못 떼고 있던 그 날을 반추해 봤다. 하기야 그 시절 싫어한다, 미워한다, 증오한다, 등 서너 가지로 해석해야 할, 이 흔하다면 흔한 hate의 무게 중심이 ‘마지막’에 실린 만한 대상이 있었다. 나는 랭크 밀러이고 상대는 게리 쿠퍼 정도였다고나 하자. 판단의 오류이었는지 모르지만, 그 당시엔 내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의 나에 대한 정서는 hate는 첫 번째의 싫어한다는 정도였을지 모르는데, 나는 그걸 받아들일 능력도 없었던 것이다. 불쌍한 우리 엄마도 속수무책, 그렇게 울기만 하셨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그 몇 년에 한번은 그를 만난다. 그저 무덤덤하다. 다만 그는 나보다 무엇이든 우위(優位)에 있으니, 체온 차이 느끼긴 한다. 그럴수록 내가 가고 싶은 곳은 평화의 마을이나 시각 장애 복지관,노인학교다.
내 종교가 바뀌었다. 다행히도 그 후로 아직은 남을 미워한다와 증오한다고까지 여겨 본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하기야 내가 그 대상이 되어야지, 그 반대의 입장에 선다면 교만한 짓이다. 날 hate의 세 가지 범주 속에 넣고 저울질하는 사람이 왜 없을까?
이걸 신기해다 해야 하나,이상하다 해야 하나? 나 같은 보통 사람이라도 말이다. 한 가지에 오랫동안 빠지다 보면 피상적이긴 하나 반대급부가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Do not forsake me가 그 한 예이다. 이제 거의 내 것이 되었으니……. 옛날 구포에 살던 어느 고등학생, 그는 자기 이름을 겨우 쓴다던데, 팝송 하나는 기가 막히게 부르더라. 그와 오늘 도토리 키 재기를 한다고 할까?
그런데 그 목적이 이번엔 남 앞에서 부르는 데 있는 게 아니다. K 시인한테서 멋지게 들으려고 이러는 것이다. 언젠가 그는 ‘하이 눈’과 이 주제곡 앞에서 울었다더라. 그가 어디에 포커스를 맞추고 정확한 발음으로 노래를 소화시키는지 귀담아 들어 행복해지고 싶다. 그가 hate의 강도(强度)를 낮춘다 한들 어쩌랴. 내 ‘악동 시절’이 끝났으면 한다.
17.3장입니다.
첫댓글 댓글이 회원수필란에 올라 가 버렸네요. 이원우선생님 글 잘 읽었습니다. 추억이 새록새록.
고개마루 선생님, 졸고를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필 모임에서 당연히 불러 드려야지요. Anuthing that's part of you 등 두 곡에 영혼을 싣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