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 향기
삼복 뙤약볕 속에 손님을 초대하는 이가 있다. 겨우내 캄캄한 진흙 속에 숨어 있다가 봄볕에 조심스레 고개를 든다. 물속으로 삐죽이 뻗어 오르는 모가지엔 이름도 성도 찾을 수가 없다. 수면으로 고개를 내밀 땐 파문을 일으키며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쉰다. 큰 손바닥 활짝 펼치며 그들의 야단법석은 시작된다.
요즘 여기저기 연蓮 밭이 있고 축제도 많이 열린다. 가까운 곳에 관곡지가 있다. 조선 중기 강희맹이라는 농학자가 중국에 가서 연 씨를 구해 심었다고 하는 곳이다. 이곳을 시작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푸른 연밭이 갖가지의 표정으로 손짓을 한다. 종족에 따라 의상도 다르고 얼굴도 다르다. 그러나 한 가지 같은 품성을 가졌다. 따스하고 고귀한 미소에 수려하며 자애롭기까지 하다. 이런 연꽃은 보는 이에게 눈, 코, 입, 귀와 마음을 깨끗하게 해 주는 청정행을 베풀고 있다.
꽃줄기 속은 텅 빈 파이프와 같다. 그 구멍은 땅속의 뿌리와 통한다. 진흙 속 뿌리는 긴 줄기로 양분을 올려주어 이파리의 품위를 지켜준다. 넓은 잎은 동화 작용을 통해 뿌리의 안전한 성장을 도와준다. 서로 다독이며 아름다운 행을 쌓고 인가를 받으면 태양은 그들을 구품 연대로 안내한다.
연의 목줄은 잔가시가 돋아 나와 있다. 무엇을 거부하는 것일까? 방어하려는 것일까? 아니다. 상대를 보살피려는 것이 분명하다. 연꽃을 꺾으려 하는 무리한 욕심을 빨리 깨닫게 해 준다. 그 위를 지나는 바람도 그렇게 놓으라고 속삭일 때 무욕無慾의 경지로 어서 들어오라고 꽃은 손짓한다. 날개 펴고 비행하는 생명도, 물속에 헤엄치는 친구들도,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우리도 연꽃 법회에 초대받은 귀빈들이다.
그 꽃은 연못에만 피는 걸까. 하루는 가까운 친구가 나를 불러냈다. 무슨 하소연이 있지 싶어 들어줄 요량으로 가볍게 나섰다. 마주 앉아 찻잔을 반이나 비워도 말이 없다. 혹시 중병이라도? 하는 생각에 가슴이 덜컹했다. 잠시 후 그 친구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 남편과 두 아이를 설득시켜 놓고 나오는 길이야. 내가 죽기 전후에 꼭 '생명 나눔 실천본부'에 연락해서 내 뜻을 펼치고 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을 했어. 큰딸은 엄마를 두 번 죽게 할 수 없다고 펄펄 뛰었지만 잘 얘길 했어. 가족들한테 고맙다는 말을 했어. 내가 세상에 와서 특별히 남다르게 좋은 일 한 것도 없는데, 부모가 주신 내 몸뚱이라도 잘 관리하고 살다가, 꼭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가면 다행이지 않을까 싶어 등록을 했어.
친구의 목소리는 연잎에 굴러가는 이슬보다 맑고 잔잔하다. 얘기를 듣고 나니 가슴이 뭉클하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자신의 어려움을 푸념하는 것에 익숙해 있다. 남보다 내 걱정만 앞세우며 나이를 먹은 나에게, 친구의 선택은 새로운 향기로 연꽃처럼 다가왔다. 두리두리하고 멋을 낼 줄도 모르며 늘 평범해서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던 친구다. 언제나 모임에서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했다. 늘 너희들과 만난 것이 행운이라고 말하는 친구다. 그녀에게도 이 꽃처럼 보이지 않게 인내하며 내공을 쌓는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기다리다 때가 되면 가장 깨끗한 향을 퍼뜨리는 연꽃처럼….
아름다운 향을 내뿜는 연꽃이 더 사랑받는 이유는, 온몸을 고루고루 필요한 자에게 아낌없이 주는 데 있지 않을까. 연잎의 향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겐 연잎 차와 연엽주가 되어 준다. 연실의 맛을 취하는 자에겐 연자죽이 되어 주고, 연방의 미를 탐하는 꽃 디자이너에겐 그 목을 내어 준다. 내 몸을 다른 이에게 나누어 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있을까. 내 몸속의 부속들이 내 몸을 떠나 다른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죽어도 사는 법이 그것 아닐까.
연꽃 씨앗은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싹이 트는 강한 힘이 있다고 한다. 아낌없이 내 몸을 나눠 주는 일. 그리하여 더 오래 견딜 수 있는 기적의 힘이 생기는 것은 아닌지. 친구의 큰 결심은 연약한 그 모습에선 감 잡을 수가 없었다. 조용하면서도 우아한 이 꽃이 세상을 흔들어 깨우듯이 친구의 아름다운 결심도 연꽃의 향기처럼 은은하게 퍼져갈 것이다.
뙤약볕 아래 손 모자를 쓰고 연꽃 법회의 법문을 들으며 둑길을 걸어 본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닌 이유를 찾으라고 당부하며 그가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앉아있다. 오늘 향기로운 이 법석에 함께 한 우리도, 몸과 마음에 그 은은한 향이 스며들어 오래 머물렀으면 좋겠다.
이순금 yusu-lsg@hanmail.net
2009년 『문학산책』 수필 등단. 2014년 『아동문예』 동화부문 당선. 저서: 수필집 『그물』 『물을 토하는 화공』 외 공저 다수. 한밭아동문학상. 2020년 한국수필 올해의 작가상 수상. 제12회 한국수필 인산기행수필문학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가협회, 군포문협, 지송문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