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의 미학
김 양 희
영화 ‘원더풀 라이프’에는 <림보역>이 나온다. 사람이 죽어 영원한 망각 속으로 떠나기 전 일주일간 들러 간다는 곳이다. 이 역에서는 생전에 가장 아름답거나 행복한 순간 하나를 선택하고 그것을 영화 식으로 재연한다. 거기에 들른 영혼들은 그 재현된 기억 하나만을 가지고 사라진다. 만약에 그런 순간이 없거나 기억해 내지 못한 영혼은 언제까지나 림보역에 남아 심부름꾼으로 일하게 된다나.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세 가지 ‘금’은 지금, 소금, 황금 이라고 했다. 내게 만약 림보역의 장면을 선택하라면 나는 ‘지금’을 선택하고 싶다. 지금이라는 현재가 없다면 우리는 이미 하늘나라의 사람일 테니까.
모든 존재는 티끌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올곧게도 터득한 지금은 그저 주어진 대로 만족할 뿐 청춘의 투정도, 과욕의 허망도 사라지고 없으니 그 자체로 행복한 일이 아닌가.
나의 림보역의 화면을 지긋이 바라본다. 한 여인이 식탁에 앉아 아침 신문을 뒤적이고 있네. 오월 햇살은 금빛 빗살무늬를 그으며 거실 깊숙이까지 비치고 있다. 경제란까지 찬찬히 읽고 있는데 창가에서 직박구리 새의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잠시 뒷산이 내다보이는 창가로 고개를 돌린 여인은 한참이나 새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새소리와 친구 되는 조용한 일상이 나날이 반복되고 있네. 화면 가득히 작고 소박한 것들 속에서 행복이 넘쳐나고 있구나.
컴퓨터로 한나절이나 글을 쓰다가는 책을 보다가, 눈이 졸리면 잠시 낮잠을 즐기기도 하는군. 그도 저도 아니면 꽃들이 만발한 베란다에 나가 은죽(銀竹)을 바라보며 분사호스로 화초에 물을 주기도 하네. 지금 이 자리가 꽃자리, 모처럼만에 한유로운 정신세계를 누릴 수 있는 시간을 찾기까지 여인은 복잡한 시정에서 32년 세월을 에돌아 왔다네. 시간이 퇴적한 자리, 행복이란 무언지 모르고 살아온 나날들에 대한 미안함과 경외감마저 묻어나고 있다네.
그 어떤 역으로 향하든 생의 초침은 어느 한 순간에도 멈출 줄을 모른다.
늙음은 나이에다 살아온 만큼의 지혜가 더해지는 것이니 그리 나쁘다고 할 일만은 아닌 듯하다. 삶이란 아무리 초라한 것이라도 살아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귀한 것이 아닌가. 어머니는 예전에 칠순을 넘기고부터는 당신의 나이를 말할 때마다 늘상 ‘징그럽다’며 살아온 시간들에 새삼 놀라워하곤 했다. 의지력이나 정신의 현주소는 그대로인데 밥그릇 나이만 자꾸 얹혀 졌기 때문일 것이다.
머리에 흰 실밥이 얹히기 시작해도, 책을 보다 활자가 자꾸만 겹쳐져 와도, 삶이 옮아가는 과정이려니 여겨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아주 사소한 일상의 단어들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을 때는 스멀스멀 서글픔이 밀려오기도 했다. 이를테면 십여 년을 기르던 벤자민 나무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사흘 동안 제라늄만 읊어대던 그런 때 말이다. 어릴 적 어머니가 내 이름을 부를 때 왜 형제 대 여섯의 이름을 다 불러대야 했는지도 이해하게 됐다. 그게 요즘의 나이니까.
나이에 대한 편견 없이 노년을 적극적으로 사는 이에게 고령이란 이유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 일본의 ‘우타가와 도요쿠니’씨는 96세에 명문 사립 긴키대학에 입학해 일본 최고령 대학생이 되었다. 풍속화가인 그는 초등학교 졸업 후 줄곧 붓을 놓지 않았다. 팔십 년 가깝게 함께 살아온 부인을 간병하며 가사를 돌보고 야간대학 수업을 받고 있으니 1인4역을 거뜬히 해내는 셈이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그가 한 말은 ‘내 딴에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달았다고 여겼는데 팔십 줄에 들어서야 비로소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는 것이었다.
62년 미국 우주인으로서는 최초로 지구궤도를 선회한 ‘존 글렌’은 몇 년 전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를 타고 우주여행을 떠나면서 세계최고령 우주인이 됐다. 미 항공우주국의 큰 관심사인 골다공증이 뼈와 골수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 실험하기 위해 노년의 신체로 또 한 번 우주여행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그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다. 그는 ‘노년층이 더 이상 달력에만 매여 미리 의욕을 꺾지 말고 계속 야망과 꿈을 키워야한다.’며 세계 곳곳에 78세 노인의 지혜를 빌려주기에 바쁘다.
노인의 명예는 풍부한 경험이다. 무언가에 몰입할 수 있는 의지와 신념이 함께한다면 나이는 그야말로 숫자에 불과할 것이다.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정년 후의 당당한 노후를 위해 마음다짐도 새롭게 해야 할 일이다. 경제적인 자립을 위해 죽는 날까지 통장을 꽉 움켜쥐는 것은 필수이고 자식들이 조금 무심해도 화내지 않는 쿨 함도 겸비해야할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는 세련된 분위기의 카페에서도 계란 넣은 쌍화차가 나와야 한다. 실버세대들은 왜 젊고 발랄한 커피숍에서 슬슬 눈치 보며 경로석으로 밀려 나야 하는가. 오늘도 나는 스타벅스가 ‘실버벅스’가 되는 날을 꿈꾸어 본다.
첫댓글 좋은 수필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다시금 힘을 내 봅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