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후기> 변명
붉은 색들 후기를 고쳐 쓴다. 언제부턴가 내 시가 말이 많아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나는 반성하고 싶다. 아무리 산업시대와 정보화 시대라 하 여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아졌다지만 독자들은 시간이 많지 않다. 그리고 한가롭게 시를 읽으며 감상할 마음의 여유도 넉넉하게 갖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현대인들은 해야할 일 들이 너무 많다. 시간은 그들을 위해 다른 여지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 모든 시간은 바쁘게 돌아 가고 생각은 급히 결정해야 할 일들에 묻혀 느긋하게 뒤를 돌아다 볼 시선 을 마련해 두지 못한다.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무겁거나 길거나 독선적인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너절하게 이미지 들을 늘어 놓고 독자들에게 의미를 찾아내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 스스로 낯부끄러워진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짧은 시다. 독자들에게 아부하며 다가서고 싶다. 간단명료 한 언술, 핵심이 분명한 언어로 독자들에게 환심을 사고 싶은 이유가 될까. 솔직하게 말해 나부터도 말이 많고 의 미의 무게가 무겁고 두터운 시에는 쉽게 식상하고 부담스 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서서 한 손 172•강영환 시집 으로 펼치고 읽을만한 짧은 시와 그 의미들을 생각하지 않 을 수 없다. 시는 산문에 비해 짧은 편이다. 어떤 시집이 든지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읽을 수 있는 손쉬운 읽을 거 리다. 그런데도 긴 시는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어 읽고 느끼기에는 부담스럽다. 그래서 독자들이 들어 올 수 있는 여백을 남겨 완성된 작품으로 만들고 싶어졌다.
일곱 줄이면 몸에 밴 눈물도 죄다 빠진다
나머지는 껍데기다
그 이상은 주절주절 떠나기 싫어 괜히 다시는 입맛일 뿐
홍수 난 눈물에 빠져 죽기 싫다면
다섯줄에서 끝내는 뒤끝이 아름답다
피곤한 독자들도 가서 쉬어야 하므로
아쉽고 섭섭한 두 줄을 여백으로 세운다
서시 「일곱줄시」전문
시조 형식은 3행시에 해당된다. 시조는 나름대로의 형식 을 갖춰 하나의 장르로 구분되어 있다. 일본의 하이꾸도 짧은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하나의 세계를 드러내는데는 미흡하다. 한 때 강우식 시인이 4행시초라 하여 4행시를 줄기차게 시도하여 어느 정도는 많은 공감대를 갖기도 하 였다. 어떤 의미를 이미지로 구성해 내기 위해서는 최소 7 행은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고 7행 시를 제작하 서쪽•173 다보니 넘치거나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일곱행 안에는 시인이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할 수 있는 길이가 되고 있음을 발견해낸 것이다.
서구에는 짧은 시로 14행으로 된 소네트가 있다. 복잡한 운을 만들어 규제가 심한 형식이다. 14행의 반이면 하고 싶은 의미를 구축하는데 지장이 없다고 생각되었다. 형식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시다. 시는 형식의 구애를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써야 한다고 볼 때 7행에 갇히는 의 미의 세계가 안타깝기도 하겠지만 어떤 형식의 틀에 들어 감으로써 독자들이 느끼는 편안함 같은 것이 있다.
독자들이 바쁜 일상 속에서 편안하게 시를 감상할 수 있 는 심상을 담는다. 내가 생활속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삶 의 단면들을 보여주고 싶다. 그것이 곧 독자들의 삶과도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쪽은 많이 아프다
노을 품은 산이 아프다
동백꽃 지는 땅이 아프다
강물이 아프고 나뭇잎이 아프다
아픈 손들이 많아서 나는
서쪽으로 간다
나도 서쪽이다
「서쪽 산」전문
일곱줄 시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든가 새로운 세계를 보 여 주고 싶다든가 하는 어렵고 힘든 과제를 담고 있지 않 다. 어떤 작업이 아닌 옆자리에 앉아서 조곤조곤 일러 주 는 따뜻한 체온을 가진 이웃의 이야기이고 싶다. 이 시들 은 독자들이 흔히 만날 수 있는 일상 중의 하나이면서 쉬 운 생각으로 다가 설 수 있는 정신의 영역을 드러내고 싶 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사실들과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작은 생각들로 독자들이 무겁지 않고 가볍게 다가갈 수 있 는 일상의 생각들이다. 이 작은 생각의 엽편들을 읽고 독 자들이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나 또한 행복해 질 수 있 다.
먼 길 가지 않더라도 요란하다
작은 돌부리에도 투덜거리고
얕게 팬 웅덩이에도 짜증 섞인 몸짓이다
흔들리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에
쏟아내는 검은 돌투성이
빈 수레가 싣고가는 상처들
화살이 되어 내 어둠 속을 지나간다
「빈 수레」전문
지하철을 타고 가는 사람들 십중 팔 구는 스마트 폰 속 으로 시선을 보내고 있다. 친구와 함께 가더라도 친구와의 서쪽•175 대화보다 스마트 폰과의 교우를 더 선택한다. 사랑이 메마 른 시대, 이웃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랑도 잃 어버렸다. 사랑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사회를 구 성하고 있으므로 우리 사회는 차갑고 어둡다. 그들에게 지 하철을 타고 가는 시간동안 손에 책을 들어보라고 권유하 고 싶지 않다. 책보다 스마트 폰 세계는 훨씬 재미있고 다 양하다. 갈증과 욕구를 충족 시켜 주는 그것을 포기하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화두를 붙들고 앉은 스님이
출구 없는 문고리로 열려고 한다
화두는 삼만리는 더 달아나
도무지 가까이 오려하지 않는다
화두는 문고리가 아니다 화두는
손으로 붙들 수 있는 바람도 아니다
닫혀있는 문은 직선에 있지 않다
「화두를 닫다」전문
이 시집에 담긴 시들은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한 연가다. 단지 개인적인 소망에 그칠 뿐이더라도 궁핍한 이 시대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는다. 그것이 비록 공허한 외침에 머물지라도 어느 곳에 서있을지도 모르는 단 한 사 람의 가슴을 위해서 마련한 따스한 의자이고 싶다.
176•강영환 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