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고 삼국시대 이전부터 중국과 교류하였지만 탐라국이 다른 나라와 교섭력이 생겼던 시대는 삼국시대 이었다.
백제와의 교섭력은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476년 탐라국이 백제의 문주왕에게 방물을 바치니 왕이 기뻐하여 사자를 은솔로 삼았다. 498년에는 탐라가 조공을 하지 않아서 동성왕이 친정하여 무진주까지 이르자 탐라가 사신을 보내어 죄를 청하므로 그만 두었다.
고구려와의 교섭력은 위서와 삼국사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504년 고구려의 문자명왕이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고구려와 북위는 오래전부터 물품을 교환하였는데 백제가 섭라(탐라)를 병합해서 섭라에서 나는 옥을 가져 올 수 없었다고 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탐라는 5세기 후반 백제와 조공관계에 있었는데 그 이전 시기에는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당 시대의 중국은 위진 남북조 시대이었고 중국 남조의 왕조와 백제와 왜와 탐라가 연합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고구려는 해양국가인 탐라국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고구려가 탐라국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는 것은 고구려가 대륙 국가이었지만 해군력 또한 강하였다는 것이다.
고구려 문자명왕 때부터 탐라국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였으니 고구려가 탐라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시대는 문자명왕의 아버지인 장수왕이나 할아버지인 광개토대왕 시대이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은 해군세력을 동원하여 백제를 점령하였고 신라에 침입한 왜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5만 대군을 동원하여 왜군과 결탁한 금관가야(김해)를 몰락(400년) 시켰다. 장수왕(413~491)은 평양으로 천도하고 남하정책을 추진하여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신라 눌지왕(417~458)의 동생인 복호를 볼모로 잡고 있었다. 눌지왕의 또 다른 동생 미사흔은 왜(일본)에 볼모로 잡혀있었다. 5세기 초 왜(일본)는 백제와 가야세력과 연합하여 신라를 위협하였으나 광개토대왕이 남하하여 김해의 금관가야를 와해시켰다. 이 때 금관가야 세력은 몰락하고 근거지를 왜(일본)로 옮겼는데 왜는 여전히 신라에게 위협적이었고 신라 왕자를 볼모로 잡고 있었다.
당 시대 장수왕은 신라를 신속하고 있었고 중국 남조의 왕조와 백제와 왜가 결탁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해군력을 동원하여 탐라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으로 보여 진다. 또한 그 영향력이라는 것이 신속하고 있었던 신라 지역에 해군력을 주둔시켰다는 간접적인 영향력 행사가 아니라 탐라지역에 고구려 해군이 주둔하여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고구려가 해군력을 탐라에 직접적으로 주둔시켰다면 탐라의 고씨 왕조는 장수왕의 혈족이었을 가능성을 고려할 수도 있을 것이다.
5세기 후반부터는 탐라는 고구려 세력을 몰아내고 백제와 조공관계를 맺는다. 476년에 탐라는 조공 사절단을 백제에 파견하였다. 백제의 문주왕은 탐라 사자를 은솔로 삼았는데 백제의 은솔은 16관등중 3품에 해당하는 고관이다. 신라는 17관등이었고 신라의 진골이 5품까지 차지하였으니 이와 대비하면 백제의 은솔도 굉장히 높은 관직이다. 그런데 498년에는 탐라가 백제에 조공을 거부하는 행동을 하였고 백제가 무력행동을 하자 다시 탐라는 화해를 요청하였다.
이러한 현상들은 당 시대의 탐라는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에 있기도 하였으니 친 고구려파와 친 백제파의 주도권 다툼으로 나타난 현상으로 보여진다. 후대에까지 탐라는 하나로 통합하지 못 했기 때문에 당 시대의 탐라는 친고구려의 고씨왕조와 친백제의 양씨왕조가 제주도를 좌우로 구분하여 존재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고씨 왕조와 양씨 왕조의 주도권 다툼이 역사에 반영된 사건이 아닐까 고려해 본다. 백제가 망하고 수백년이 지난 후에도 탐라 성주 양호가 백제의 후예를 자처하였던 것을 보면 탐라의 양씨왕조는 친백제 왕조이었을 것이다.
백제가 멸망할 때 백제 왕자가 왜(일본)와 탐라를 거느리고 백강 전투에서 패한 후 당나라에 항복하였다. 660년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자 백제에 신속하던 탐라국주(耽羅國主) 도동음률이 662년 신라에 내항(來降)하였다. 도동음률은 신라에 내항할 때 백제의 제1관등인 좌평(佐平)의 관작을 가지고 있었다. 661년은 탐라국왕 유리도라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661년 탐라국왕 유리도라와 662년 탐라국주 도동음률은 탐라양씨와 탐라고씨의 다른 왕조이었을 것이다.
시조 을나(乙那)의 那(나)와 耽羅(탐라)의 羅(라)는 모두 나라(那羅)와 관련 있는 한자이고 新羅(신라), 任那(임나), 加羅(가라)등이 국명으로 나라(那羅)를 사용하였다. 고구려는 연나부, 비류나부, 관나부, 환나부, 제나부의 5개의 那部(나부)의 那(나)의 연맹왕국이었듯이 탐라는 양을나, 고을나, 부을나의 3개의 乙那(을나)의 那(나)의 연맹왕국이었다. 백제의 왕의 성은 부여씨이고 이름은 어라하라 하는데 탐라왕의 이름인 을라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어라’는 ‘대(大)’를 뜻하고 ‘하’는 부여·고구려에서 족장을 가리키는 ‘가(加)’와 관계 있으므로 어라하는 대족장(大族長)을 뜻한다.
탐라국은 부여계통의 북방문명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한다. 하지만 부여가 멸망하기 전에 제주도에 사람이 살고 있었고 중국과 교역한 자료와 사료들이 전해지기 때문에 고대의 부여 족속들이 오래 전부터 탐라로 이주해 왔고 이들이 성장하여 삼국시대의 탐라국을 형성하였을 것이라고 판단하다. 그러나 부여가 망하고 부여의 후예들이 새로운 가야연맹을 만들었듯이 부여의 초기 족속들이 탐라국을 형성한 것이 아니라 부여의 후예들에 의해서 탐라 연맹이 형성되었을 가능성도 고려해 보아야 한다.
우연한 일치이겠지만 북부여의 마지막 왕의 이름이 탐라국왕의 이름과 발음이 유사한 의라(依羅)이다. 북부여는 285년 모용 선비족이 침입하였을 때 의라(依羅)왕자는 옥저로 망명하였다. 왕이 된 의라(依羅)는 중국 진(晉)나라의 원조를 받고서 부여를 다시 수복하였다. 그리고 4세기 초반에는 상당수의 부여인들이 요하와 요서 유역에서 활동을 하였고 이들이 요서 라마동 지역에서 수준 높은 부여문화를 남겼다.
요서지역의 라마동 부여인이 남긴 유물은 김해 대성동 가야인이 남긴 유물과 가장 유사하고 형질인류학을 반영하여 라마동 부여인과 대성동 가야인은 동계혈족으로 판단하여 라마동 문명이 대성동으로 이주한 문명이라는 것이 지배적 견해이다.
부여는 4세기 중반 요서지역의 모용선비족이 성장하는 과정에 와해되었는데 이 때 부여의 후예들이 김해의 금관가야로 진입하여 가야연맹의 주도자가 되었던 것이다.
4세기 중반은 백제의 중흥 군주 근초고왕과 왜(일본)를 100년간 지배한 소가씨의 시조인 백제장군 목라근자가 활동한 시대이었다. 근초고왕은 왜(일본)의 용병을 지원받아서 목라근자를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정벌을 진행하였는데 목라근자는 신라를 복속하고 가라 7국을 평정하였으며 전라도 지역의 마한 잔여세력인 침미다례를 격파하였다. 근초고왕 때의 백제는 마한지역을 완전히 통합하였고 신라를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그런데 가라 7국을 평정하였던 시대는 요서지역의 라마동 부여인이 김해 대성동 가야인으로 이주한 시대와 겹친다. 또한 목라근자 세력이 일본의 지배층으로 성장한 시기는 광개토대왕에게 패한 가야인이 왜(일본)로 이주한 시기와도 겹친다. 이후 백제는 왜(일본)와 연합세력이었는데 탐라국도 합류한다. 그래서 탐라국의 형성도 이러한 역사 선상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를 고려해 본다.
라마동 부여인이 김해 대성동 가야로 이주하기 위해 육로를 이용하였다면 고구려와 한반도의 말갈 및 신라를 거쳐야 한다. 그래서 육로가 아닌 해로를 이용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광개토 대왕에게 패한 대성동 가야인이 배를 타고 왜(일본)로 이주하였듯이 요서지역의 라마동 부여인이 김해 대성동으로 배를 타고 이주하였다면 탐라로 이동하였을 가능성도 충분이 있을 것이다. 즉 탐라국은 상고시대 부여의 족속이 이주하여 제주도 내에서 자생적으로 국가를 형성하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김해 대성동의 금관가야처럼 라마동 부여인의 이주하여 가야 연맹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것처럼 탐라국의 양씨 왕조는 라마동 부여인의 이주 과정에 형성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탐라국의 양씨왕조와 부씨왕조는 요서지역에서 모용선비족이 성장하자 라마동 부여인이 탐라지역으로 이주하여 성장하였고 라마동 부여인이 왜의 인적 자원이 되었고 백제의 성장 동력이 되었기 때문에 백제와 탐라 그리고 가야와 왜(일본)가 연합세력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되어진다. 그리고 백제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던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이 등장하면서 전세가 역전이 되는데 그 때 금관가야 세력은 와해되고 일본으로 이주하였고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이나 손자인 문자명왕 시대에는 탐라국에도 고구려의 해군력이 주둔하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탐라국이 수 천년 전의 전설시대인 요순시대에 양을나 고을나 부을나가 순위를 다투며 형성되었던 것이 아니라 부여 후예의 이동과 고구려 세력의 남하 과정에 형성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진다. 그래서 탐라국의 양씨왕조는 라마동 부여인의 후예들이 형성한 범 백제계 연맹의 범주 속에 있었고 탐라국의 고씨왕조는 범 백제계 연맹을 와해하기 위해 고구려가 파견한 장수왕의 혈족이었기 때문에 탐라국의 양씨왕조와 탐라국의 고씨왕조가 반목하였던 것이 아닐까 생각되어진다.